무거운 삶에 가벼운 언어로 스며들기
- 김영자 시인의 시 세계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사람들은 가벼운 것을 좋아한다. 예로부터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신선이 되는 것을 두고 말하는 우화羽化라는 표현이 이를 말해준다. 모든 생의 짐을 덜어내고 깃털처럼 가벼운 존재가 되기를 사람들은 소망했던 것이다. 이렇게 가벼움을 선호하는 것은 우리가 삶의 무게에 짓눌러 있기 때문이다. 가난과 병마와 같은 삶의 고통은 물론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다양한 사회조직과 인간관계에서 오는 무거움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벼운 쾌락에 쉽게 몸을 던진다. 가벼움을 느끼기 위해 금방 돌아와 자기의 무거운 짐을 부려야 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여행을 떠나고, 소비를 통해 자유로운 욕망 충족을 구가한다.
하지만 완벽한 가벼움에 도달한 삶을 상상하기 힘들다. 우화등선하는 신선이 되지 않는 한 삶의 무게를 우리는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자유로운 욕망에 가볍게 몸을 맡기더라도 더 커진 욕망의 결핍만이 더 큰 억압으로 우리를 옥죄어 올 것이다. 또한, 모두가 가벼움만 추구하는 사회는 만인의 욕망이 서로에게 폭력이 되는 지옥으로 변하게 될 것이 자명한 일이다.
좀 더 현명한 다른 방식이 있다. 그것은 우리 앞에 놓인 삶의 무게를 상상 속에서 다른 것으로 바꾸는 방식이다. 어쩌면 예술이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인생의 무게와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다른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상상 속에서나마 가벼워지는 자유를 경험하게 허락해 준다.
김영자 시인의 시를 읽으면 바로 그런 생각이 든다. 그의 시에는 가벼움에 대한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몸이 춤의 창고임을 알았을 때 *꼿발을 들었더니 꽃발이 되었다 두 팔을 펴고 날았다 새처럼 날았다 날다가 다시 걸으면서 그대에게 안부를 묻고 있는 동안 둥그러진 허리를 보고 씩 웃었다 순간 균형이 무너지고 흔들거렸다 …(중략)…온몸에 흐르는 떨림의 속도로 자귀나무 꽃숭어리는 분홍빛을 감아올리고 내 몸은 창고가 되어 가는 중 음악은 쌓여 가고 있었다
- 「음악의 창고」 부분
시인은 춤을 추며 음악을 듣고 있다. 그러면서 몸이 음악과 춤의 창고임을 생각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항상 무겁지만, 가벼운 춤과 음악으로 가득 찬 몸은 가벼워질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꼿발(까지발) 들었더니 꽃발이 되었다”라고 표현한다. 음악과 춤으로 가벼워져 새처럼 날고 싶은 소망이 그런 몸짓과 표현을 만들었으리라.
다음 시의 향기도 이런 가벼움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살 안에서 살 밖으로 살 밖에서 살 안으로 드나들 수 있으니 묶인 것들을 적시고 적신 것들을 다시 풀어 햇살에 내어 놓으니 아침이 솜털처럼 웃는다 향낭이다
- 「가벼운 것이 좋다」 부분
시인은 행복감의 가벼운 느낌을 향기를 품어내는 “향낭”으로 비유하고 있다. 향기는 가볍기에 공기 중에 퍼지고, 우리의 감각에 저항 없이 파고들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묶인 것들을 적시고 적신 것들을 다시 풀어” 자유를 선사한다. 우리는 모두 무엇엔가에 묶이고 적신 채 무겁게 살아간다. 시인은 이런 삶의 한 편에서도 가벼운 순간을 포착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가벼움의 경지를 맛보라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무거운 삶의 현실을 견뎌보라는 것이다. 시인은 이렇게 향기, 음악, 춤 등 가벼운 것들의 이미지들을 보여줌으로써 무거움을 잠시 잊고 지친 삶의 고통과 그것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해 준다.
다음 시는 우리 앞에 놓인 삶의 무게를 어떻게 언어를 통해 가볍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귀가 웃을 때는 빵이 될 수 있었다
빵의 살을 쪼개며
어느 날은 빵이 되고 싶었다
빵 속에 숨어 계시는 님을 만나면
뜨거워서 꽃이 핀다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빵이 있어
무더기무더기 뜨거운 꽃이 핀다고
늙은 귀로 기록하였다
모든 촉감을 열고
사이와 사이에서 오는 즐거움으로
살과 뼈 사이의 간격을
꽃과 꽃의 사이를 기록하였다
빵으로 웃을 때 귀가 웃었다
이명이 아니었다
내가 빵으로 다시 웃을 때
모든 간격은 사라지고
빵의 박동 소리가 들렸다
님이 따뜻한 빵으로 오시는 중이었다
- 「내가 빵으로 웃을 때」 전문
참 재미있는 작품이다. 위 시에서 빵은 참 많은 것을 지칭한다. 먹는 빵이기도 하고, 감옥의 속칭이기도 하고 또한 웃음을 표현하는 의태어이기도 하다. 음식으로서의 빵은 우리의 삶의 무게를 상징한다. 우리는 모두 이 빵을 얻기 위해 신산한 삶을 감내하며 살고 있다. 빵은 생존의 필수요소이고 삶의 무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감방 같은 억압을 만들고 서로 간의 단절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웃음으로 승화할 때 그것은 아주 밝게 웃는 경쾌한 모습을 표현하는 ‘빵 터짐’의 “빵”이 된다. 그리고 이런 “빵으로 다시 웃을 때” 세상의 다른 존재들은 “따뜻한 빵”과 같은 행복한 존재로 돌아온다. 언어의 힘, 시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 언어를 가볍게 부풀려진 빵으로 만들어 우리 앞에 제공해 주는 김영자 시인의 감각이 특별하다.
그런데 가벼워지다 보면 결국 사라지고 없어진다. 다음 시는 그 점을 염려하고 있다.
사라짐이 아닌
오직 감추어진
사실도 진실도 휘발된다는 말은
슬픔, 무거운 슬픔의 발자국이어서
흰 눈썹을 가진 황금새처럼
푸른 눈썹을 올리고
때 지난 내 영수증 한쪽 한쪽
쪼아볼까
가장 깊숙한 곳을 콕콕 찍어볼까
휘발된 것은 없는지 살아있는 것은 있는지
스스로 죽어가는 만물은 다시 태어나는 자리를 품는다 영락없이
- 「휘발」 부분
사물이 가장 가벼워질 때는 그것은 휘발되어 날아갈 때이다. 시인은 모든 것이 휘발되어 날아가고 나서도 남아있는 진실의 무게를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휘발이라는 말이 “슬픔의 발자국”이 된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것들은 휘발되어 사라졌지만, 그것이 남긴 삶의 무게까지 완전히 지울 수 없다는 진실을 시인은 깨닫고 있다. 시인의 언어는 아무리 세상의 억압과 고통을 지우고 가벼운 비상을 꿈꿀지라도 그 아래 감춰진 삶의 무게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스며들어 다시 번지는
햇살과 바람의 길목에서
소전리 벌랏마을 한지韓紙 마을에서
오래된 풀무를 돌리는 그가
스며드는 일은
세상에 내어주는 꽃이라며 웃는데
나는 누구에게 스며들었는가
한 번이라도 내려놓고 젖은 일이 있는가
그의 풀무 소리를 응시한다
풀꽃 동산 푸른 눈물에서나 젖을 수 있을까
- 「갈색 두건을 쓴 화가」 부분
시인은 한지 마을에서 만난 화가의 작업에서 스며드는 것의 아름다움을 만난다. 스며든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내어주는 일이다. 자기 몸을 내려놓고 다른 것에 젖어 드는 일이다. 자신을 낮추어 나 아닌 다른 존재에 다가가 함께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꽃이 되어 다시 피어나듯 새로운 것으로 재창조되는 일이다. 시인은 시인의 언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또한 믿는다. 세상의 무게를 벗어버리고 가볍고 유연한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에 스며드는 그런 언어를 시인은 찾고자 한다.
김영자 시인의 시는 가볍다. 그러나 결코 경박하거나 허무주의로 경도되지 않는다. 가벼움 속에 진지함이 들어있고, 그 진지함이 가벼운 향기와 음악처럼 우리의 정서에 젖어 든다. 언어를 통해 이런 경지를 얻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