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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기도
주님...
내 영이 날마다 새로이 소생하기를 원합니다.
세포 하나, 피 한 방울이라도 주님을 아프게 하는 죄악으로 나아가지 않기를 원하나 육신의 연약함이 주님을 아프게 하나이다.
이 종을 주의 은혜로 사로잡아 장악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긍휼하심이 나를 온전히 둘러싸 내가 그 안에서 노닐게 하소서.
주의 공의의 심판이 모래 위에 지은 집을 완전히 무너트려 주시고 주님의 반석 위에 견고한 집을 짓게 하소서.
오늘 이 시간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부끄러울지 모르나 거룩한 불구자로 서서 주님 앞에서 자랑스런 주의 종 되게 하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덮어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호 4:11-19
제목 : 벧엘을 벧아웬으로 변질시킨 자를 고발합니다.
11.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12.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13. 그들이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14. 너희 딸들이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15. 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
16.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그들을 먹이시겠느냐?
17.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19. 그들이 마시기를 다 하고는 이어서 음행하였으며 그들은 부끄러운 일을 좋아하느니라.
19. 바람이 그 날개로 그를 쌌나니 그들이 그 제물로 말미암아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
* 나의 묵상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망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지식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날마다 하나님과 교제와 사귐을 갖는 영생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것은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들이나 일반 백성들이 모두가 동일하였다.
(9)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동일함이라. 내가 그들의 행실대로 벌하며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리라.
제사장들이나 일반 백성들의 가장 큰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 10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두 가지의 악행을 말한다.
첫째는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음행하여도 수효가 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 백성들이 우상에게 속죄제물을 드릴 때 제사장들이 그 속죄제물을 가져다 먹지만 결코 그것으로 배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육신적 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고 그 우상에게 복을 구하여도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의 영적 만족을 누리지 못함을 의미한다.
특히 제사장들의 경우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영적 만족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지도자들인 제사장들이 이런 영적 음행을 저지르는데 일반 백성들이야 두 말 해 무엇하겠는가?
또한 음행하여도 수효가 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는 제사장들이 다산을 위하여 아세라 신상 앞에서 신전 창기들과 성적 관계를 관습적으로 행하였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공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하여 그들이 목적하는 다산을 이룰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추악한 그들의 죄악상만 드러낼 뿐이다.
이와 같이 일반 백성들만 아니라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들까지 이런 음란에 빠져 영적 육적 간음을 하는 음행과 함께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를 진탕 마시면서 육체적 쾌락과 방탕으로 그들의 마음을 다 거기에 빠앗기는 추태를 자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6절, 8절, 12절에서 내 백성 즉 ‘암미’라고 표현하신다.
암미라는 표현에서 하나님의 아쉬운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들을 부르시는 안타까움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따르지 않는다.
그러면서 정작 그들이 따르고 묻는 것은 나무로 지칭하는 참나무나 버드나무 그리고 상수리나무에게 묻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하기 이전부터 가나안 원주민들이 가나안 땅에서 행하던 주술적 행위였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이교적 주술 행위를 본받아 영적 간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2절에서 그런 그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신다.
(12)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이들은 산꼭대기에서 제사하고 작은 산 위에서 그들의 우상에게 분향을 하는데 곧 참나무와 버드나무 그리고 상수리나무의 그늘에서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교적 주술 행위나 우상에게 제사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또한 나무 그늘을 좋아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좋아하는 곳은 바로 나무 그늘과 같은 어두침침한 곳으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음행을 저지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딸들이 음행하고 며느리들이 간음을 행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하며 신전 창기와 함께 바알이나 아세라 또는 아스다롯과 같은 신전 앞에서 희생제사를 드린다는 미명하에 성적인 간음을 자행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사실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딸들이나 며느리들도 음행을 하는 죄를 범하였음에도 그들을 벌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언가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을 벌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아예 그들을 하나님의 관심에서 끊어버리겠다는 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인 것이다.
물론 남자들의 죄가 더 악한 자로 표현되나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나 작은 죄나 동일한 죄이다.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죄를 범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주셨지만 그들이 그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죄에 머물뿐 아니라 오히려 그 죄에 더욱 가까이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아예 유기하신다.
그래서 14절 하반절에서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6절, 8절, 1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컬어 내 백성 곧 ‘암미’라고 말씀하시는데, 패역하여 더 이상 하나님께로 돌아올 소망이 없는 그들을 향하여 이제는 ‘암미’가 아니라 ‘암’, 즉 백성으로 표현하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남겨두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이처럼 영적 육신적 음행을 저지르며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제는 유다에게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하시며 또한 이스라엘의 악행을 물들지 못하게 하신다.
그래서 유다를 향하여 명령하시기를 길갈로도 가지 말고 벧아웬으로도 가지 말며 또한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길갈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진을 친 곳이다.
바로 그곳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의 출애굽 2세대들에게 할례를 행하므로 그곳 이름을 길갈이라 명명하였고, 그 이름은 ‘수치를 굴러가게 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수 5:8-9)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또한 이곳 길갈은 훗날 선지 생도를 교육시키던 곳이기도 하였다.
(왕하 4:38)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제자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었던 그 길갈이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면서 우상숭배의 전초기지로 변해갔다는 것이다.
(암 5: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아웬)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또한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하신다.
벧아웬은 ‘허무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위에서 아모스 선지자가 벧엘을 향하여 예언한 것을 보면 벧엘로 올라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벧엘은 비참(허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모스 선지자는 ‘비참하다, 허무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웬’이라는 히브리어를 사용하였다.
이를 보건대 호세아가 말하는 벧아웬은 다름 아니라 곧 벧엘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벧엘은 사실 길갈보다 더 성스러운 장소로 여겨진다.
벧엘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와서 처음 제단을 쌓았던 곳이며, 또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후에 돌베개로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던 곳이며, 20년 후에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세겜에서 거하다가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재난을 당한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다시금 벧엘로 올라갔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곳 벧엘이 이스라엘의 범죄에 찌들어 허무와 재난으로 인하여 비참하게 된 것을 바라보면서 조롱하는 의미로 ‘벧아웬’으로 표현하고 있는 곳이다.
또한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중요한 일을 맹세할 때 당신 스스로 그 이름으로 맹세하셨다.
그런데 이제는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길갈과 벧엘의 성스러움을 가증한 곳으로 변질시켜버린 이스라엘이 또한 하나님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는 것을 오용 또는 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고 영적 육적으로 음행을 하는 가운데서도 무언가 맹세할 일이 있으면 바로 여호와의 이름과 사심을 두고 맹세하였던 것이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 백성들을 향해서는 그런 우를 범하는 이스라엘과 같이 행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이다.
나는 목사로써 오늘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정말 비참함을 느낀다.
온 몸에 힘이 빠지고 도무지 목사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허무함이 나를 휘감는다.
내가 바로 비참함과 허무함인 ‘아웬’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집이요 성전인 벧엘과 같은 성도들을 기만하며 가증한 자로 만들었고, 또한 하나님을 속이고 만홀히 여기는 가장 가증한 자이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영적 육적으로 음행을 저지른 것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그런 음행에서 자유하지 못한 자이다.
얼마나 크고 많은 맘몬을 신으로 섬기면서 살아왔는지 모른다.
이런 나는 죽어 마땅한 자요,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나는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서는 아직도 그런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을 심지어 유기하시겠다고 까지 말씀하시는데, 오늘 나는 극한 두려움으로 이 말씀을 받는다.
요즘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목사들의 이런 영적 육적 음행의 기사가 세상의 핫이슈가 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제는 그런 기사가 놀랄 일도 아닌 것처럼 너무나 쉽게 접하는 가십거리가 되어버렸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심판이 임하지 않는 것은 혹시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져 유기당한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는다.
19절의 말씀처럼 주 앞에서 순간순간 넘어지는 악행으로 인하여 나의 영이 음란의 영에 사로잡혀 비참한 종말을 고할 것 같은 두려움에 치를 떨기도 한다.
(19) 바람(영)이 그 날개로 그를 샀나니 그들이 그 제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 일을 당하리라.
이런 나는 공의의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공의의 심판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모래 위에 집을 지어놓고도 그것이 무너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가?
이게 도대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행위란 말인가?
이제는 내가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무너지도록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며, 그런 하나님의 심판을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이다.
(시 97:8) 여호와여 시온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의를 세우신다.
하나님과 죄로 인하여 분리되었던 나를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으로 인하여 다시금 연합될 수 있도록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의를 세우는 것이다.
(시 94:15) 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
하나님을 속이고 만홀히 여기던 나이지만, 이제는 세상의 음행과 쾌락을 즐기던 죄의 자리에서 돌이켜 공의의 심판이 있는 그 무덤에 거한다.
나에게 임한 무덤이 지금 현재 분명히 있음에도 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부정하였다.
그것이 무덤이 아닐 것이라고.....
그러나 이제 주의 말씀이 성령의 검이 되어 나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심판하신다.
내가 무엇으로 그것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그 안에서 주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며 말씀으로 교제와 사귐을 갖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살 길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머릿속에서만 머물러 있으므로 망할 수밖에 없던 나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시고 이제는 더 깊은 묵상의 자리로 이끌어 주시며 주님이 먼저 오셔서 나를 품어주신다.
내 심령이 고통 속에서 오열하며 주님께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지만, 그 안에서 나도 알지 못하는 평강을 주시며 주님의 마음을 담게 하신다.
오늘 그 주님께 다시 한 번 찬양드린다.
죽어 마땅한 자이지만, 그런 나를 다시 한 번 살려주신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오늘도 주의 영광의 빛이 내 안에 잠잠히 비치며 주의 영광 가운데 거하게 하심을 감사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였던 벧엘을 벧아웬으로 변질시켜 버린 장본인이 바로 여기에 있나이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곳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주님...
오늘 그 말씀이 나를 향하신 주님의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죄의 소굴에 머무르며 그 죄를 즐기고 먹고 마셨던 이 종을 주님께 고발하나이다.
이 종을 불쌍히 여기사 주의 은혜를 베푸소서.
주님은 얼마전 나에게 그에 합당한 공의의 심판을 내리셨음에도 나는 그 심판을 거부하였나이다.
그토록 나는 패역한 이스라엘임을 자인하나이다.
이제 내 죄를 내가 알기에 주님 앞에서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재와 티끌가운데 앉아 주의 심판을 받아들이나이다.
그것이 나를 향하신 주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시오니 오늘도 겸비하여 주의 말씀 앞에 엎드리나이다.
오직 존재이신 말씀 앞에서 나를 찔러 쪼개어 의가 세워지게 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종의 회개를 받으시고 돌이켜 주께로 온전히 돌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