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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에 추증된 행 여주 목사(行驪州牧使) 이공 수록(李公綏祿)의 신도비명 병서
청음집 (청음 김상헌 선조 문집) 제26권 / 비명(碑銘) 6수(六首)
재주 없는 나 상헌(尙憲)은 어려서 여러 형들의 뒤를 따라 동고(東皐) 이공(李公)과 사귀게 되었는데, 늙을 때까지 더욱 사이좋게 지냈다. 공이 일찍부터 나를 알아주었기에, 나는 공의 지감(知鑑)을 저버려서 나를 알아준 사람의 밝음에 누를 끼치게 될까 스스로 두려워하였다. 공이 죽고 난 뒤에 묘비명을 새기려고 한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내가 재주가 없어 감히 담당할 수가 없는 탓에 사양하여 지금까지 거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실로 내가 공을 저버린 것이다. 아, 묘비명을 짓는 것을 그만두어서 되겠는가, 그만두어서는 안 되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수록(綏祿)이요, 자는 수지(綏之)이며, 자호는 동고이다. 계대(系代)가 선원(璿源)에서 나와 우리 세종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의 6대손으로 밀성군(密城君) 모(某)와 운산군(雲山君) 모 두 부자가 거듭하여 공을 세워서 공신으로 녹공(錄功)됨에 따라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세습하였다. 운산군은 광성정(匡城正) 모를 낳고, 광성정은 광원수(廣原守) 모를 낳고, 광원수는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휘 극강(克剛)을 낳았는데, 이분들이 공의 삼대(三代)이다. 뒤에 증손인 이경여(李敬輿)가 귀하게 되자 광원수는 광원군에 추봉(追封)되고, 첨정공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과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되고, 공은 여러 차례 추증되어 의정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부인들도 모두 합당한 품계를 얻었다.
공의 아버지인 찬성공은 일찍이 과거시험에서 명성을 떨쳐 명경과(明經科)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강직해 남과 잘 화합하지 못했으므로, 재주를 속에 품은 채 세상을 마쳤다. 온양 정씨(溫陽鄭氏) 아무개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갑자년(1564, 명종19)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예닐곱 살 때 다른 사람이 글 읽는 소리를 듣고는 문득 암기하니, 보는 자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조금 자라서는 문장력이 날로 왕성해져 명성이 더욱 크게 떨쳐져서 동년배들 중에 앞서는 자가 별로 없었다. 열다섯 살 때 초시(初試)에 입격하니 고관(考官)이 그 문장을 외우면서 서로 훌륭한 인재를 얻었다고 축하하였다.
을유년(1585, 선조18)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다음 해에 등과(登科)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선발되어 보임되었다. 공은 어린 나이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아름다운 광채가 환하게 빛났으므로, 여럿이 어울려 함께 출입할 적에도 사람들이 모두 주목하여 보았다. 부친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면서 예를 다하였다. 상을 마친 뒤에는 승문원에 제수되어 정자(正字), 저작(著作), 박사(博士)로 옮겨졌다. 사론(士論)에서는 공이 의당 좌우사(左右史)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공은 본디 요로(要路)에 발길을 대지 않아 뒤에서 밀거나 추천해 주는 자가 없었다.
계사년(1593)에 규례에 따라 옮겨져 병조 좌랑에 제수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가 곧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조정에서는 장차 대성(臺省)으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공은 돌아보지 않고 어버이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으로 나가 서산 군수(瑞山郡守)가 되었다. 이때 병란과 기근으로 인해 백성들이 열에 일고여덟은 죽어갔다. 공이 친히 어루만져 주면서 자리를 깔아주고 젖을 먹여주듯 하면서 편안히 살 수 있게 해 주자, 유랑하거나 도망갔던 백성들이 날로 모여들었다. 공은 창고의 곡식을 모두 풀어 구휼하였으며, 널리 둔전(屯田)을 개설하고 밭 갈고 씨뿌리기를 권장하였는데, 가을에 큰 풍년이 들어 공사 간에 모두 구제되었다. 얼마 뒤에 즐겁지 않은 일이 생겨 관직을 버리고 떠나가자 고을의 백성들이 공을 빙 둘러싼 채 공을 가로막고 길을 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에 공은 계교를 써서 밤에 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고을의 아전과 백성들이 추모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여 서로 더불어 송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얼마 뒤에 다시 곽산 군수(郭山郡守)로 나갔다. 성심을 미루어 너그러이 용서하니 백성들이 사랑하고 신임하여 명령을 내리면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곧바로 시행되었다. 다스림이 으뜸이라고 위에 아뢰자, 상께서 비단을 하사하고 미덕을 표창하였다. 고을에서 떠난 뒤에는 백성들이 사모하여 비석을 세운 것이 서산에서와 같았다. 다시 조정으로 들어가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어 지제교를 겸임하기를 전처럼 하였다.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거듭 옮겨졌다가 수찬과 부교리로 승진되었으며, 응교(應敎)에 이르렀다.
상공(相公) 이원익(李元翼)이 서북면 체찰사(西北面體察使)로 갈 적에 공을 끌어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는데, 계획을 세우고 조처를 취함에 있어서 도움을 준 것이 아주 많았다. 공의 문족(門族) 중에 곤수(閫帥)로 있는 자가 있어 공에게 음식물을 보내어 위문하려고 하자, 공이 책망하면서 물리치니, 그 이후로는 감히 사사로운 선사품이 이르지 않았다. 체찰사 이 상공이 이를 듣고는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이군을 얻어 막부(幕府)가 존중을 받게 되었다.” 하였다. 어떤 일이 있음으로 인해 조정으로 되돌아왔다. 연일 이어지는 숙직으로 인해 병세가 위급해지자, 상께서 어의 두 사람을 보내 돌아가며 병세를 살펴보게 하는 동시에 궁궐 안에 있는 약재(藥材)를 나누어 내려 주었는데, 은혜가 대신(大臣)의 예와 같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임인년(1602, 선조35)에 바른 사람을 미워하여 헐뜯는 자가 다른 사람을 사주하여 투서를 하자, 여러 불순한 자들이 앞 다투어 일어나 상을 현혹해서 일시의 사류(士流)들이 모두 축출되었는데, 공 역시 대동도 찰방(大同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친지들이 번갈아 와서 위로하였으나, 공은 태연한 모습으로 조금도 괘념치 않고 직책을 받들기를 더욱더 부지런히 해서 역참(驛站)의 업무가 잘 거행되었다. 서로(西路)를 경유하여 통행하는 사신들이 모두 공이 법도대로 하면서 흔들림이 없는 것을 꺼려하였으므로, 역참이 드디어 크게 소생되었다. 얼마 뒤에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얼마 있다가 내자시 정(內資寺正)에 제수되었다가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로 옮겨졌으며, 외직으로 나가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다가 면직되어 돌아왔다. 또다시 봉산 군수(鳳山郡守)로 나갔다가 오래지 않아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었으며, 또다시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어 나갔다. 영남의 풍속은 본디 다스리기 어렵다고 불리는 데다가 또 고을마저 땅이 크고 송사(訟事)가 많아 관리가 된 자들이 골치를 앓고 있었다. 공은 한결같이 맑고 간략함으로써 번거로움을 다스렸다. 한가할 적에는 배움에 뜻을 둔 고을의 자제들을 데리고 와서 직접 면대하여 가르쳐 주면서 강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온 경내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으며, 식견이 있는 자들 치고 우러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오래지 않아 면직되어 돌아왔다.
상의원 정(尙衣院正)과 봉상시 정(奉常寺正)을 거치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으며, 천거되어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이 되어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대(兼帶)하다가 병으로 인해 면직되었다. 재차 판교(判校)와 응교로 있다가 종부시 정(宗簿寺正)으로 옮겨졌다. 영남의 안옥사(按獄使)로 내려갔다가 모친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우 근심이 되어 상소를 올려 휴가를 청한 다음, 회보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떠나간 일로 인해 파직되었다.
얼마 뒤에 다시 태복시 정(太僕寺正)에 제수되었다가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나갔으며, 조정으로 들어와 수찬(修撰)에 제수되었다. 그 뒤로 의정부, 옥당(玉堂), 괴원(槐院) 및 여러 시(寺)의 정(正)을 거치면서 서너 차례 옮겨지기까지 하였는데, 혹 숙배(肅拜)하지 않거나 혹 애써 나갔다가는 곧바로 떠나기도 하여, 일찍이 한 관직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편안히 있은 적이 없었다.
당시에 얼신(孼臣)이 권병(權柄)을 도둑질하여 조정의 정사가 날로 문란해졌다. 공은 세상의 도를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벼슬살이의 뜻을 끊고 언행을 미치광이처럼 하며 스스로를 숨겼다.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공은 가솔을 이끌고 양근(楊根)의 강가로 돌아가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과 수몽(守夢) 정엽(鄭曄) 등과 더불어 산수 간에서 서로 종유하면서 지냈다. 다시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기용되어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경신년(1620, 광해군12) 모월에 졸하니, 춘추가 57세였다. 모년 모월에 양근군(楊根郡) 백운봉(白雲峯) 아래에 있는 간좌(艮坐)의 산등성이에 자리를 잡아 장사 지냈다.
공은 사람됨이 밖으로는 화락하였으나 안으로는 곧고 방정하였다. 남과 더불어 처함에 있어서는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온통 마음이 쏠려 속마음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털어놓았으나, 탐욕스럽고 사악하며 간사스럽고 아첨하는 행실을 하는 자를 보면 비록 귀척(貴戚)의 신하이거나 요로(要路)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면전에서 배척하고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혹 부끄러워 허둥지둥 기어서 달아나는 자도 있었다.
공은 지극한 정성으로 어버이를 섬기어 모친을 곁에서 모시면서 특별한 일이 있지 않으면 일찍이 슬하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기쁜 얼굴을 하고 대하였는데, 만년에 이르러서도 어린아이처럼 사모하였다. 처음에 찬성공(贊成公)의 상을 당하여 거상(居喪)을 함에 있어서는 향리의 노인들이 이르기를, “이군(李君)과 같이 한 연후에야 어버이의 상을 잘 치른다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매번 기일(忌日)을 맞아서는 흰옷으로 갈아입고 거상 때의 음식을 들며 종일토록 눈물을 흘렸다.
모친께서 병이 나면 탕약(湯藥) 등을 몸소 다루면서 자제들이 대신 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모친께서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여 친척 중에 살림살이가 몹시 구차한 자에게 집에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고 다 털어 주었다. 이에 자제들이 혹 계속해서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 것을 근심하면, 공은 말하기를, “우리가 마땅히 힘을 다하여 받들어 모셔야지,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야 되겠느냐.” 하였다.
공이 영화와 벼슬을 구하지 않으면서도 몸을 굽혀 주현(州縣)의 수령으로 나가 수십 년 동안 부지런히 힘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은 모두가 모친의 뜻과 음식물을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공은 형제지간에는 비록 몹시 화락하게 지냈으나 또한 절차탁마하여 보익함이 있었다. 궁한 친척을 돌보아 주고 고아들을 가르침에 이르러서는, 그들로 하여금 모두 성취하게 하고 귀의할 곳이 있도록 해 주었다. 공의 안에서의 행실이 순수하게 갖추어짐이 대개 이와 같았다.
공은 관직을 맡음에 있어서는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마음먹었으며, 경연(經筵)에 있을 적에는 옛일을 상고해서 현재의 일을 증명하면서 계발해 주고 이끌어 주어 강관(講官)의 체모를 얻었다. 간관(諫官)의 자리에 있을 적에는 지론이 충직하고 꿋꿋하였으며 다른 사람에게 아첨을 하기 위해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다. 삼도(三道)의 곤수(閫帥)를 잘못 뽑은 탓에 민력을 가볍게 여기고 뇌물을 중히 여기는 자가 있었는데, 직급이 높은 벼슬아치가 뒤를 돌보아 주는 탓에 사람들이 감히 논핵하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공은 이들을 싸잡아 탄핵하여 거꾸로 매달린 듯한 백성들의 고통을 풀어 주었다. 또 재물을 탐하면서 외람되이 전부(銓部)의 낭관(郞官)으로 있는 자가 있었는데, 언관들이 그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공은 개탄하면서 이르기를, “이는 좋은 술잔에 개똥을 담은 격이다.” 하고는 곧바로 탄핵하여 제거하니,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또 백성들을 해치는 탐욕스러운 관리가 있어 공이 탄핵하려고 하니, 동료들 가운데 어떤 자가 말하기를, “그대는 이 사람이 아무 재상의 가까운 친척임을 모르는가?” 하였다. 그러자 공은 정색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임금의 이목(耳目)으로 있으면서 재상의 심복이 되려고 하는가?” 하니,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면서 감히 다시는 말을 하지 못했다.
서쪽 지방의 역참(驛站)을 맡고 있을 적에는 어떤 대관(大官)이 말을 바치고는 값을 배로 달라고 요구하자, 공이 이를 거절하고 서신을 보내어 책망하기를, “재상께서는 백성들과 더불어 이익을 다투시니, 이것이 어찌 옛사람이 밭에 심은 아욱을 뽑은 뜻이겠습니까.” 하니, 요구한 자가 몹시 한스럽게 여겼는데, 그 뒤에 그 재상은 마침내 재화를 탐하다가 패망하였다. 공은 여섯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홀아비와 과부는 불쌍히 여기고 부호와 강자는 억제하였으며, 묵은 폐해를 없애고 오로지 백성들의 편익에만 힘썼으므로, 교활한 아전들이 움츠러들어 감히 농간을 부리지 못하였다. 또한 복잡한 업무를 처리하는 데 더욱 뛰어나 하나도 적체시키지 않았으므로 고을 안이 맑고 조용하였다.
공은 평생토록 즐기거나 좋아하는 놀이가 없어서 성색(聲色)이나 재화(財貨)나 완식(玩飾)이나 분화(紛華)에 관계되는 일은 전혀 행하지 않았다. 관직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처자식이 살림의 곤궁을 면치 못하였다. 집에 거처할 때에는 누추한 곳에 처하고 담박한 음식을 먹었으며, 출타할 때에는 파리한 말과 해진 안장에 포의(布衣) 차림을 바꾸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고통을 참지 못하였으나, 공은 맛좋은 음식을 먹는 것처럼 달갑게 여겼다.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공의 종매부(從妹夫)였는데, 매양 달콤한 말로 공을 유혹했으나 공은 일체 응하지 않았다. 하루는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술 마시는 것을 절제하고 추기(樞機)를 삼가서 머리를 돌려 찾아오라.”는 등의 말을 하였는데, 겉으로는 규계해 주는 듯하였으나 실은 꾀는 말이었다. 이에 공은 회답하기를, “천종(千鍾)의 봉록도 한 잔의 술만 못하며, 눈곱만도 못한 복으로 세상을 넘치는 재앙을 어찌 당하려 하는가. 공은 나를 염려치 마시오. 내가 공을 염려하리다. 각기 좋아하는 바를 따르면 되는 것으로, 아마도 내가 머리를 돌려 찾아갈 날은 없을 것이오.” 하였다. 이에 이이첨이 비록 감히 공을 해치지는 못하였지만, 앙심을 품은 채 풀지 않고 있었다.
한찬남(韓纘男)이라는 자는 이이첨의 일당으로 공에게는 연척(聯戚)이 되었는데, 공은 그를 미워하여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남의 집 혼인잔치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공이 술을 마신 뒤에 갓을 삐딱하게 쓰고 있는 것을 보고는 한찬남이 공의 자(字)를 부르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갓이 떨어지겠다.” 하자,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는 아재의 머리가 심히 위태로우니 더욱 조심하셔야겠습니다.” 하니, 한찬남이 깜짝 놀라면서 응수하지 못하였다. 그 뒤에 마침내 공의 말과 같이 되었다.
처음에 공과 함께 교유하던 자들이 공이 기탄없이 말을 하는 것을 보고는 모두들 공이 위태롭겠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끝내 재앙의 기미를 멀리할 수 있었던 것은 공이 술에 의탁하여 스스로 감추고 드러내지 않기를 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야 공이 지난날에 행한 소행이 진정 미쳐서 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으니, 공이 미치광이 짓을 한 것은 다른 사람이 가히 미칠 수 없는 것이었다.
공은 문장에 있어서 천부적으로 얻은 것이 많았다. 평소에 글을 짓는 데 유념하지는 않았으나, 뜻을 얻어 붓을 휘두르면 큰물이 흘러넘치듯 하여 격률(格律)이 창연(蒼然)하였다. 선묘조(宣廟朝) 때는 인재가 왕성하게 길러져서 뛰어난 인재가 많다고 불렸는데, 매번 사원(詞苑)에서 인재를 논할 적마다 공의 이름이 반드시 그 속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시절이 어렵고 걱정스러운 즈음이라 문사(文事)에 힘쓸 겨를이 없었으며,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많았으므로 자리를 비워두고서 공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공 역시 문장 짓는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않으면서 그 여력을 정사에 미치도록 해 끝내는 어진 수령으로 이름을 드러냈다. 그러나 공에 대해서 잘 아는 자는 모두들 애석하게 여겼다. 지은 시문(詩文)이 집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가환(家患)을 만나 집안사람들이 거두지 못하여 전하는 것이 없게 되었다.
공은 본디 술을 좋아하였는데, 늘그막에 들어서는 더욱 좋아했다. 만난 때가 좋은 시절이 아님을 스스로 슬퍼하여 술 마시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술주정뱅이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홀로 있을 적에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았고, 혹 홀로 훌쩍 떠나가서는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출사표(出師表)〉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담암(澹庵)의 상소문(上疏文) 등을 써서 벽에 걸어놓고는 매일 일어나 소리 내어 읽었으며, 읽기를 마치고는 오열하고 강개하여 슬픔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다. 자제들이 틈을 타서 넌지시 말하면, 공은 말하기를, “너희들의 말도 옳다. 그러나 고인 가운데에는 회사(懷沙)를 짓고 강물에 투신한 사람도 있었으니, 이는 참으로 종국(宗國)이 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었어도 현자(賢者)가 그르다고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내가 술을 마셔 근심을 잊는 것쯤이겠는가.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이다. 그러니 탁하고 더러운 세상에서 훌쩍 벗어나 황천에 가서 선인(先人)을 따른다면, 나는 아무런 유감이 없겠다.” 하였다.
인하여 여러 달 동안 식음을 폐하였으며, 병환이 깊어도 약을 들려고 하지 않았다. 하루는 큰아들의 손을 잡고 영결을 고하면서 말하기를, “바른 도리를 얻어 죽게 되었으니 나는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뒷날 망국의 대부(大夫)가 됨을 면치 못할 것인데, 구차히 살아남아서 선조를 욕되게 함은 마땅하지 못하니라.” 하고는, 드디어 다시는 말하지 못하였다.
공은 약관의 나이에 관적(官籍)에 이름이 올려졌으며, 함께 친하게 지낸 사람들은 모두 한때에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10년이 지난 뒤에는 함께 출사했던 사람들이 모두 공경(公卿)이 되었는데, 공만은 홀로 침체하여 승진하지 못했다. 재주를 품고 있으면서 쓰이지 못하였는데도 끝내 얼굴과 말에 나타내지 않았으니, 어찌 평소에 닦은 바가 없다면 그럴 수 있었겠는가. 아, 공으로 하여금 큰일을 시행치 못하게 하여 지위는 만족스럽지 못하였고 봉록은 충분치 못하였으며, 수명 또한 길지 못하였다. 이것이 어찌 하늘이 일정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덕을 심은 데 대한 보답이 있어서 아름다운 후계자가 경사스러움을 이어 나라를 위해 임금을 보좌해 크게 구제할 명망을 받고 있다. 군자는 여기에서 하늘이 일정함이 있다는 것을 안다.
부인은 진천 송씨(鎭川宋氏)로,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병조 참의에 추증된 송제신(宋濟臣)의 따님이다. 나면서부터 정숙한 자질이 있었으며, 어려서 아녀자를 가르치는 여러 책을 배워 대의에 통하였고 사리를 알았다. 규수로 있을 적에는 훌륭하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며느리가 되어서는 시부모를 섬기기를 한결같이 고례(古禮)대로 하니 시부모가 매우 사랑하였다. 의정공(議政公)의 형제자매가 8명이며, 생질의 남녀 및 거느리는 노복이 많아 수십 명이나 되었는데, 부인은 이들 사이에서 모든 일을 주선하면서 각각 그 도를 다하여 대하였다. 이에 집안에는 종시토록 이간하는 말이 없었으므로 문중에서는 여범(女範)이라고 추대하였다. 자녀들에게 허물이 있거나 혹 조금이라도 해이하고 나태함이 있으면 가차없이 책망하여 경계하였다.
공의 집안은 본디 살림살이가 풍요로웠으나 의정공이 재물을 다스리는 데 엉성하여 세업(世業)이 쇠락해졌다. 이에 부인은 몸소 근검하게 생활하면서 여자가 할 일인 길쌈 등을 직접 하여 살림살이가 궁핍하지 않게 하였다. 빈객에게 술과 음식을 받드는 것과 안팎으로 급한 비용을 대는 데에 이르러서는 대부인과 의정공이 뜻하는 바에 따라 있는 힘을 다해 받들면서도 마련하기가 쉽지 않음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재차 변란을 당해 큰아들이 임금을 호종(扈從)하게 되었는데,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할 즈음 머뭇거리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그러자 부인이 권면하여 말하기를, “너는 이미 벼슬길에 나가 주상을 섬기고 있으니, 난리에 임하여 임금을 뒤로하는 것은 의가 아니다. 빨리 떠나고 나를 염려하지 마라.” 하였다.
뒤에 큰아들이 호서(湖西) 지방의 관찰사가 되어 갈 적에 부인은 앞서 이미 호서에서 우거(寓居)하고 있었는데, 서로 볼 때마다 반드시 경계하여 말하기를, “너는 너의 아버지께서 관직에 계실 때 되도록 검약하게 하기를 힘썼던 것을 잊지 말 것이며, 나 때문에 한 지방의 원망을 불러오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그 뒤에 봉양할 수 있게 해 주기를 요청하여 청주(淸州)로 부임해 갔을 적에는 음식물을 갖추어 공양하니, 부인이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백성들은 힘이 다하여 필시 어버이를 봉양함에 있어 거친 음식조차도 계속해서 봉양하지 못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만 홀로 무슨 마음으로 이것을 누리겠느냐. 봉록을 나누어 주어 은혜를 미루어 나간다면 내 마음이 얼마간은 편안하겠구나.” 하니, 듣는 자들이 탄복하였다. 전후로 은사(恩賜)를 받은 것과 친척과 수령들이 바친 물품을 문득 궁핍한 친족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아까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임종할 때 큰아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덕이 네 선친에 미치지 못하는데 녹봉과 지위는 지나치니 내가 항상 걱정이 된다. 더욱 삼가고 조심하여 낳아준 분을 욕보이지 말고, 충효(忠孝)와 인후(仁厚)로써 스스로 힘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하였다. 나이 75세에 죽었는데, 곧 모년 모월이었다. 이해 모월에 의정공 묘소의 오른쪽에 합부(合祔)하였다.
공은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경여(敬輿)로 의정부 우의정을 지냈는데, 3대를 추증한 것은 모두 그 은혜를 미룬 것이다. 차남은 정여(正輿)로, 재주와 행실이 있었고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했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다. 장녀는 요절하였고, 차녀는 현감 한무(韓楙)에게 시집갔다.
우의정은 처음에 영의정 윤승훈(尹承勳)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소생이 없고, 다시 감역(監役) 임경신(任景莘)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민장(敏章)과 민적(敏迪)이고, 그 밑은 어리다. 측실에게서 2남을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사위인 현감 한무는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한오상(韓五相)이고, 차남은 한오취(韓五就)이고, 딸은 신훤(辛暄)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민장은 2남을 두었고 한오상은 1남을 두었다. 공의 차남인 생원이 아들이 없어 민적(敏迪)으로 뒤를 잇게 했다. 이어서 사(辭)를 지었는데, 그 사는 다음과 같다.
공을 일러 미치광이 같다 한다면 / 謂公爲狂者
봉황 노래 부른 무리 아니겠는가 / 非歌鳳之儔耶
공을 일러 때 슬퍼한 자라 한다면 / 謂公哀時者
좌도와도 같은 유가 아니겠는가 / 非左徒之流耶
어려서는 부모님을 사모하였고 / 幼而慕父母
늙어서도 그런 마음 안 쇠했으니 / 老而不衰
노래자의 행실 따라 한 것이라네 / 庶幾老萊之循行耶
숨기어서 자신 자취 흐리게 했다 / 晦而混其跡
격앙되어 자신의 뜻 밝히었으니 / 激而明其志
동방삭의 꿋꿋함과 비슷하였네 / 仿像東方之倜儻耶
자식 교육 절의 중함 앞세웠으며 / 敎兒則先節義之重
집안 바로잡아 순정한 덕 빛냈네 / 刑家則彰順正之德
경연에선 계옥함에 정성 다했고 / 處講筵而竭啓沃
대각에선 바른말을 올리었다네 / 秉臺憲而殫謇諤
비옥한 군 맡아서는 청렴 지켰고 / 居沃郡不易廉操
산골 고을 맡아선 어진 수령 되었네 / 典巖邑尤稱良牧
나는 공의 덕 제대로 형용 못 하나 / 吾不能名公之德
선인 군자로서 불행한 때를 만나 / 而其善人君子之遭世不幸
올바름을 잃지 않은 자일 것이네 / 而不失其正者歟
나의 이 말 아첨해서 한 말 아니니 / 余言匪諛
이 빗돌이 증거되기 충분할걸세 / 石以爲證
청음집 제26권 / 비명(碑銘) 6수(六首)
[주-D001] 옛사람이……뜻 : 관원으로 있으면서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않는다는 뜻이다. 옛사람은 노(魯)나라 사람인 공의휴(公儀休)를 가리킨다. 공의휴는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않기 위하여 자기 밭에 심은 아욱이 맛이 좋으니 아욱을 뽑아버렸으며, 자기 집에서 짠 베가 질이 좋은 것을 보고는 베 짜는 여자를 내보내고 베틀을 불살랐다. 《史記 卷119 循吏列傳》
[주-D002] 담암(澹庵) : 송나라 호전(胡銓)으로, 자는 방형(邦衡)이고 다른 호는 담재노인(澹齋老人)이다. 상주문(上奏文)을 짓는 데 아주 뛰어났는데, 특히 거란(契丹)과의 화친에 반대하는 상소를 많이 올렸다. 저서로는 《담암집(澹庵集)》이 있다.
[주-D003] 회사(懷沙)를……사람 : 춘추 전국 시대 초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회사는 초사(楚辭) 가운데의 편명(篇名)으로, 굴원이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기 직전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주-D004] 바른……되었으니 : 구차하게 살지 않았다는 뜻이다. 증자(曾子)가 임종할 때 계손씨(季孫氏)가 보내준 대부용 삿자리를 바꾸어 깔도록〔易簀〕 자손에게 명하면서 “나는 바른 도리를 얻어 죽으면 그뿐이다.” 하였다. 《禮記 檀弓上》
[주-D005] 봉황 노래 부른 무리 : 성인의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탄식하여 거짓으로 미친 척하여 세상을 피한 무리를 말한다. 춘추 시대 초나라의 은자인 접여(接輿)가 초나라로 가려고 하는 공자의 수레 앞을 지나면서 노래하기를, “봉이여 봉이여, 어찌 그리도 덕이 쇠했는고.〔鳳兮鳳兮 何德之衰〕” 하였는데, 이는 공자를 봉새에 비유하여 태평 시대도 아닌데 숨지 않고 세상에 나온 것을 기롱한 말이다. 《論語 微子》
[주-D006] 좌도(左徒) : 전국 시대 초나라에서 좌도 벼슬을 지낸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굴원은 초나라의 귀족으로서 회왕(懷王)을 섬겨 벼슬이 좌도에 이르고 큰 신임을 받았으나, 대부(大夫)들의 시기를 받아 쫓겨나 있던 중 장사(長沙)의 멱라수(汨羅水)에 투신자살하였다.
[주-D007] 노래자(老萊子) : 옛날 초나라의 유명한 효자로, 나이가 일흔 살이 되어서도 두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하여 어린애처럼 색동저고리를 입고서 새 새끼를 가지고 장난을 치며 놀았다. 《小學 卷4 稽古》
[주-D008] 동방삭(東方朔) :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사람으로, 해학과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주-D009] 계옥(啓沃) : 온 정성을 다하여 임금을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열명 상(說命上)〉에 이르기를, “너의 마음을 열어서 짐의 마음을 적셔다오.〔啓乃心 沃朕心〕” 한 데서 온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7
贈領議政行驪州牧使李公神道碑銘 幷序
不佞憲少從諸兄後。得交於東皐李公。至老益相善。公嘗知我。而不佞自懼負公知鑑。以累知己之明。公旣歿。墓刻久有待。而不佞不才讓不敢當。以至于今無擧也。不佞實負公哉。嗚呼。其可已耶。其將不可已耶。謹按公諱綏祿。字綏之。自號東皐。系出璿源。我莊憲大王六代孫密城君某,雲山君某仍父子有功。琮璜鍾鼎。世襲厥美。雲山生匡城正某。匡城生廣原守某。廣原生奉常寺僉正諱克剛。寔公之三代也。後以曾孫貴。廣原追封君。僉正公議政府左贊成兩館大提學。累贈公議政府領議政。夫人皆視秩焉。贊成公蚤有公車聲。用明經登第。性剛忤物。含用終世。娶溫陽鄭某女。嘉靖甲子生公。幼敏異凡兒。七八歲聞人讀書。輒能暗記。見者奇之。稍長文辭日富。聲名益大振。曹偶鮮有以顏行進者。十五擧發解。考官誦其文。相賀得人。乙酉中司馬。明年登第。選補承文院權知副正字。公妙齡巍科。丰彩瑩發。出入映帶數人。人咸目屬之。丁外憂。廬墓盡禮。服除由本院轉正字著作博士。士論謂公宜居左右史。而公素無要路跡。以是無尉薦者。癸巳例遷拜兵曹佐郞。帶三字銜。尋陞正郞。朝廷將以臺省處之。公不顧。爲養出爲瑞山郡守。兵亂饑荒。民死亡十七八。公親自撫摩。袵席而乳哺之。流逋日集。公悉發倉粟賑之。廣設屯田。勸其耕種。及秋大熟。公私俱濟。亡何有所不樂。棄官去。邑民環守遮公。道爲之枳。公以計夜出。歸臥不起。吏民追思不已。相與刻石頌其德。久之復出爲郭山郡守。推誠寬恕。民愛而信之。凡有號令。不煩就辦。政最上聞。賜帛褒美。去後民思碑之如瑞山。入拜司諫院正言。帶三字如故。累改侍講院文學弘文館副修撰。陞修撰副校理至應敎。李相公元翼體察西北面。引公爲從事。擘畫贊籌。裨益弘多。閫帥有與公門族者修餽問。公責而却之。是後亡敢以私款至。體相聞之。喜謂人曰。吾得李君。幕府尊矣。以事還朝。儤直病急。上遣御醫二人迭視。分賜內劑藥物。恩數如大臣禮。時以爲榮。壬寅醜正者嗾人投匭。群不逞爭起熒惑。盡逐一時士流。公亦貶大同道馬官。親故交唁。公夷然不以爲意。奉職愈謹。郵務整擧。冠蓋由西路行者。皆憚公法以無撓。驛遂大蘇。亡何棄歸。尋拜內資寺正。改通禮院相禮。出爲廣州牧使。免歸。又出爲鳳山郡守。亡何坐罷。又出爲尙州牧使。嶺俗素號難政。州又地大繁訟。爲吏者病之。公一以淸簡制煩。以其暇引邑子弟向學者。面加提誨。講讀不輟。一境大悅。有識莫不歸仰。亡何免歸。歷尙衣奉常二寺正。司憲府掌令。薦授議政府舍人。兼帶春秋館編修官。病免。再踐判校應敎。移正宗簿。使嶺南按獄。聞大夫人病篤。公憂甚。陳疏請暇。不待報而行。坐罷。尋拜太僕正。出牧原州。入拜修撰。自後於中書,玉堂,槐院諸寺正。至有三四遷。或不拜或勉就卽去。未嘗久安於位。時孼臣盜秉。朝政日紊。公知世道不可回。絶意仕宦。淸狂自晦。及廢母論作。公挈家歸楊根江上。與完平李相,守夢鄭公曄。相從山水間。起拜驪州牧使。進階堂上。病辭。至庚申某月卒。春秋五十有七。用某年某月。卜葬楊根郡白雲峯下坐艮之原。公爲人。外和易而內直方。與人處。好之者傾倒輸寫無贏餘。見有貪邪側媚之行者。雖貴臣要人。面斥之不容。或有赧恨匍匐而走者。至誠事親。侍大夫人側。非有故。未嘗去膝下。愉愉如也。至其晩年。有嬰兒慕。始居贊成公喪。鄕里耆老語曰。如李君然後方可謂之執親喪。每遇忌日。變服喪食。涕泣終日。大夫人有疾。湯劑之類。躬自爲之。不聽子弟代行。大夫人喜施與。親戚之貧窶者。毋論家有無。擧以與之。子弟或憂難繼者。公曰吾輩當竭力供奉。親志其可傷乎。公之不求榮宦。屈身州縣。勤勞數十年不倦者。皆爲大夫人志物之養也。兄弟之間。湛樂雖至。亦有切磋之益。至於卹窮族訓孤兒。使不失成就歸依之地。公之內行純備蓋如此。當官守職。報國爲心。在經幄。稽古證今。開發導迪。得講官體。在臺席。持論謇謇。不隨人骫骳。三道臬司不得人。輕民力而重貨賄。峻秩奧援。人莫敢論。公竝擧劾之。民解倒懸。有趨羶冒郞銓部者。言路畏勢。掉頭咋舌。公歎曰。此盌盛狗矢也。卽彈去。人快之。又有墨吏爲民害者。公將劾之。同僚或云君不知此人爲某相近屬耶。公正色曰。子欲以人主耳目。爲執政私人乎。其人慙沮。不敢復言。在西郵。一大官求納馬倍直。公却之。以書責謂宰相與民爭利。豈古人拔園葵之意也。求者甚恨。後竟以貨敗。公所歷六政。哀鰥寡抑豪強。洗滌宿蠹。專務便民。猾吏斂戢。不敢上下其手。尤長於剸劇。一無留滯。郡中淸靜。平生無嗜好。凡聲色貨財玩飾紛華之事。皆不用也。罷官歸家。妻子不免內困。居則處陋食淡。出則羸驂破鞍。布衣不易。人不堪其苦。而公甘之若飴。賊臣爾瞻公之從姊夫。每以美言啖公。公一不應。一日抵公書。以節杯觴愼樞機回頭來等語。陽爲規戒而實餂之也。公復書曰。千鍾之祿。未敵一杯酒。不盈眦之福。寧當溢世禍。公無我憂。我爲公憂。各從所好。恐回頭無日耳。爾瞻雖不敢害公。銜之不置。韓纘男者。爾瞻之黨。而於公爲聯戚。公醜之不相往來。偶於人家婚姻會。見公酒後欹帽。字呼公曰。君帽危矣。公嘻笑曰。吾觀叔之頭甚危。尤可愼也。纘男愕然無以應。卒如其言。始與公游者。見公放言無忌。皆爲公危之。然終遠於禍機者。以公托於麴糱。善自韜晦也。其後乃知公向所爲者非眞狂。而其狂爲不可及也。公之文章天得爲多。居常不刻意鉛槧。而得意放筆。汪洋泛博。格律蒼然。穆廟盛毓人材。當時號爲濟濟。而每詞苑論才。公名必在其中。艱虞之際。文事未暇。翹材之盛。不能虛席待公。公亦不屑屑於文字。用其餘以及於政事。終以良牧顯。知公者無不惜之。所著詩文藏于家。會有家患。家人失收。以是無傳焉。公素喜酒。晩節尤酷愛。自傷遭時不辰。以飮爲事。世目爲酒人。然獨居多閉門流涕。或獨往不返。手書武侯表,陶辭,澹菴疏。揭壁上。日起諷讀。讀訖嗚咽慷慨。悲不自勝。子弟乘間開譬。公曰爾言亦是也。然古人有懷沙投水者。誠不忍見宗國之亡也。汨羅之死。賢者不以爲非。況我飮酒忘憂耶。死生命也。蟬蛻濁穢。從先人於九原。吾無憾矣。因廢食累月。病𠫷不肯近藥。一日執長子手訣曰。得正而斃。吾目瞑矣。但爾他日不免爲亡國大夫。不宜苟免以辱先。遂不更言。公弱冠通籍。所與善皆一時聞人。十年之後。等輩皆已公卿。而公獨陸沈不前。負才不售。而終不見於色辭。豈無所養而然也。嗚呼。使公不得大有所施。位不滿祿不充。年又不永。豈天之未定也耶。種德食報。佳嗣胤慶。爲國毗輔。望屬弘濟。君子於是知天之有定也。夫人鎭川宋氏。宣傳官贈兵曹參議濟臣之女。生有淑質。幼受女訓諸書。通大義識事理。在室有令聞。及爲婦。事舅姑一遵古禮。舅姑甚重之。議政公兄弟姊妹八人。甥姪男女及諸侍御婢使且累數十人。夫人周旋其間。待之各盡其道。一家之內終始無間言。門中推爲女範。于女有過。或少懈惰。警責不假借。夫人家素饒。以議政公疏於財。世業旁落。夫人身自勤儉。手執女紅。毋乏經紀。至於賓客酒食之奉。內外賙急之費。惟視大夫人及議政公所意。而竭力承奉。亦不使知其不易也。再遇變亂。長子扈從。辭拜之際。彷徨不忍去。夫人勉之曰。汝旣出身事主。臨亂後君不義。亟去。毋以我爲念。後長子按節湖西。夫人前已寓居本道。相見必戒之曰。汝勿忘汝父居官時務循省約。毋以我故招怨一方。後乞恩赴淸州。備物供養。夫人不悅曰。民力竭矣。必有奉親而菽水不繼者。我獨何心享此。輟俸推惠。吾心少安。聞者歎服。前後恩賜及親戚宰邑者饋獻。輒分窮族。無所靳焉。臨終謂長子曰。汝德不及先人。而祿位過之。吾常憂之。益加謹飭。毋忝所生。以忠孝仁厚自勉。以報國恩。卒壽七十五。卽某年某月也。以是年某月。祔葬議政公墓右。公生二男二女。長曰敬輿。議政府右議政。追榮三代。皆其所推恩也。次曰正輿。有才行。中司馬。先公歿。長女夭。次適韓楙縣監。議政初娶領議政尹承勳女。不育。再娶監役任景莘女。生四男二女。敏章,敏迪。其下幼。側室二男幼。縣監三男三女。長五相次五就。女辛暄。餘幼。敏章二男。五相一男。生員無子。以敏迪爲後。系之辭曰。
謂公爲狂者。非歌鳳之儔耶。謂公哀時者。非左徒之流耶。幼而慕父母。老而不衰。庶幾老萊之循行耶。晦而混其跡。激而明其志。仿像東方之倜儻耶。敎兒則先節義之重。刑家則彰順正之德。處講筵而竭啓沃。秉臺憲而殫謇諤。居沃郡不易廉操。典巖邑尤稱良牧。吾不能名公之德。而其善人君子之遭世不幸。而不失其正者歟。余言匪諛。石以爲證。
청음집 제26권 / 비명(碑銘) 6수(六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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