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1회 다양한 민화·2회 달력 기획 거쳐 3회전서 ‘디지털과 전통의 융합’ 결실
ㅣ국립중앙박물관 원화 관찰부터 미디어아트·레이어 설치미술까지 지평 확장
ㅣ도암 지성기 서문 “차가운 디지털에 생명 불어넣은 현대적 예술 실천”
25년간 한지와 붓으로 전통 민화의 길을 걸어온 지은순 작가가 세 번째 개인전 ‘디지털로 피어나는 초충도’를 통해 관람객과 만난다.
1회 전시에서 민화 지도자이자 작가로서 다채로운 저력을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전통 민화를 선보이고, 2회 전시에서 가족의 안녕과 사랑을 담은 12달 달력 민화를 소개했던 지 작가는 이번 3회전에서 전통 민화에 디지털 기술을 결합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 보인다.
■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된 고민, ‘보는 법’을 바꾸다
지 작가가 디지털 기기를 접한 것은 축제 굿즈로 사용할 엽서를 그리기 위해 아이패드를 들면서부터였다. 하지만 편리함을 경험할수록 “이렇게 편리한 도구로도 붓으로 직접 그린 특유의 손맛과 느낌을 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뒤따랐다. 한지에 붓으로 그릴 때 손의 힘과 속도, 먹이 스며드는 예상치 못한 효과를 디지털에서 구현하기 위해 지 작가는 자신만의 실험 대상으로 ‘초충도’를 택했다.
처음에는 전통 원화를 디지털로 모사하는 작업에 대해 “단순 모사가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고민도 깊었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연구용으로 제공하는 고화질 원화를 대형 화면으로 확대해 연구하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선의 흐름과 색의 조화, 작은 곤충과 식물의 배치를 세밀하게 들여다보게 되면서 옛 그림을 이전보다 훨씬 정교하고 자세하게 관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 작가는 “초충도는 풀과 벌레를 그려 작고 쉬워 보이지만, 한국적 회화 특유의 살포시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붓이 아닌 디지털로 구현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작업이었다”며 “옛 여인들이 혼수 자수본으로 주로 그리던 전통 초충도를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도구로 관찰하고 재해석하는 일종의 학습 과정이었다”고 회상했다.
■ 25년 전통 내공과 디지털 레이어의 자유로운 실험
디지털 작업의 가장 큰 무기는 원본을 훼손하지 않고 다채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밑그림에 레이어를 적용해 풀 한 포기의 위치를 옮기거나 곤충의 크기를 조절하고, 색을 바꾸어 보며 끊임없이 시험했다. 이 과정에서 25년간 축적된 전통 민화의 내공이 빛을 발했다. 디지털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일일이 색상 번호를 찾아서 조율하는 것과 달리, 지 작가는 오랫동안 몸에 익은 감각으로 원하는 빛깔을 직관적으로 찍어낼 수 있었다. 또한 유화처럼 두껍게 칠하는 대신 연한 색을 여러 번 중첩하는 전통 담채 기법을 디지털 레이어로 재현해 특유의 투명하고 맑은 색감을 살려냈다.
작품의 구도 요소인 낙관 역시 직접 배운 캘리그라피를 접목해 글씨체와 위치를 변형하며 완성도를 높였다. 이러한 과정은 디지털이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도구를 넘어, 민화를 관찰하고 연구하며 수강생들을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적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지 작가는 “작업을 이어가며 디지털이 전통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 회화를 더 깊이 이해하고 설계하게 돕는 도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강조했다.
■ 디지털의 숨결로 피어난 ‘소리 없는 시’… 도암 지성기의 서문
이번 전시에는 서예·한학의 깊이를 더해온 도암 지성기 선생의 전시 서문이 더해져 전시의 예술적 깊이를 한층 높였다.
도암 선생은 서문에서 조선 후기 학자들이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가리켜 “마치 소리 없는 시를 그려 낸 듯하다”고 탄탄했던 기명(記銘)을 언급하며, 지은순 작가의 디지털 초충도를 ‘디지털의 숨결로 다시 피어난 소리 없는 시’로 평했다.
도암 선생은 “주역(周易) 계사전에서 ‘날마다 새로움이 성대한 덕이며, 낳고 또 낳음이 역이다’라고 하였듯, 지 작가의 작업은 옛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본을 잃지 않은 채 새롭게 드러내는 일”이라고 짚었다. 이어 “붓끝에서 시작된 생명력이 스크린 위 화소(픽셀) 위에서 다시 숨을 쉬며, 차가운 디지털 환경 속에 자연의 따스함과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의 현대적 예술 실천”이라고 극찬했다.
■ 전통의 상징성과 현대적 감각이 깃든 ‘초충도’ 11점
전시장에는 조선 초기 신사임당의 화풍을 바탕으로 옛 원화의 상징성에 작가의 현대적 편집 감각을 더한 11점의 초충도가 전시되었다.
▲ ‘봉선화와 잠자리’는 붉은 봉선화와 주변을 나는 잠자리를 조화롭게 구성해 가을날의 정겨운 운치를 완성했다.
▲ ‘수박과 들쥐’는 탐스럽게 익은 수박의 수많은 씨앗과 들쥐의 번식력을 통해 가문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했다.
▲ ‘꽈리와 잠자리’는 붉은 꽈리 열매와 잠자리를 그려 자손 만대의 안녕과 집안의 번창을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 ‘가지와 방아깨비’는 아들을 낳는다는 의미의 ‘가자(加子)’와 음이 같은 가지에 다산을 뜻하는 방아깨비를 결합해 가족의 경사를 염원했다.
▲ ‘수박풀과 잠자리’는 자연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세밀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수작으로, 풀벌레와 들꽃이라는 소박한 생명체들을 통해 자연의 조화와 평화로움을 잔잔하게 담아내고 있다.
▲ ‘오이와 개구리’는 덩굴째 뻗어나가는 오이와 개구리의 모습을 통해 사업과 가문의 끊임없는 번영을 축원한다.
▲ ‘양귀비와 도마뱀’은 화려한 양귀비꽃과 도마뱀을 배치해 액운을 물리치고 평안을 염원하는 상징을 담았다.
▲ ‘어숭이와 개구리’는 시원한 물가 풍경 속 개구리의 생동감을 통해 자연과 어우러지는 정취를 표현했다.
▲ ‘맨드라미와 쇠똥구리’는 벼슬을 상징하는 맨드라미로 입신양명을, 부지런한 쇠똥구리로 성실한 결실을 상징했다.
▲ ‘여치와 사마귀’는 풀숲 속 곤충들의 세밀한 움직임을 포착해 자식 교육의 소중함과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겸손함을 표현했다.
▲ ‘원추리와 개구리’는 근심을 잊게 해준다는 원추리(망우초)와 개구리를 배치해 가정의 화목을 염원했다.
■ 액자를 넘어 공간으로 피어난 미디어아트와 설치미술
지 작가는 11점의 액자 전시를 넘어 디지털 회화를 실제 공간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독창적인 연출을 선보였다.
전시장 한편에서는 AI 도구를 활용해 미디어아트를 제작, 빔프로젝터를 통해 병풍 속 정지해 있던 풀과 곤충들이 영상 안에서 생동감 있게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또한 디지털의 핵심 개념인 ‘레이어’를 공간에 구현하기 위해 투명한 필름에 민화를 인쇄하고 3장을 레이어로 겹쳐 허공에 띄운 뒤, 조명을 이용해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지도록 하는 설치 미술을 시도했다.
지 작가는 “이번 전시의 제목인 ‘피어난다’는 단지 초충도를 디지털로 다시 그렸다는 뜻에 그치지 않고, 옛 초충도를 세밀히 관찰하는 것에서 출발해 디지털이라는 도구로 실험하고, 나아가 오늘의 전시와 교육 영역으로 민화를 확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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