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락과 손가락은 구조적인 면에서거의 일치 합니다. 한개의 뼈가 내려 와서 두 개로 갈라지고 다시 손목과 발목에 와서 세개로 나누어 지고 이것이 네개로 갈라지고 마지막에는 다섯개로 갈라져 있읍니다. 이는 힘이나 하중. 체중을 분산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지요. 또한 손바닥과 발바닥에는 털이 없지요. 지문이 있을 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손바닥과 발바닥은 입술이나 성기보다 더 감각이 뛰어난 신경계를 가지고 있읍니다. 잘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입술이나 성기에만 의존해서 만족을 느끼지 못했던 분들 발에서 한번 느낌을 개발 해 보세요. ㅋㅋ
재미있는 것은 손에는 필요에 따라서 추우면 장갑을 끼고 김장을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설걷이를 할때는 비닐장갑이나 일회용 장갑을 끼게 됩니다. 그런데 발에는 의무적으로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게 되어 있읍니다. 발도 손만큼 자유롭고 싶은데 꽉 조인 신발에 구겨 넣어 숨조차 제데로 쉬지 못하게 하고 뒷굽을 8~9센티나 높게하여 골반이 전만이 되고 체중이 발가락쪽으로 쏠리게 하여 티눈이 생기고 발톱이 시커멓게 죽어 가고 발가락이 뒤틀어져서 통증을 유발하게 합니다.
어떤이는 발톱이 살을 파고 들고 무좀균이 득실거리고 무지외반증이라는 이상한 증상까지 만들어 주는 고마운 것이 바로 신발입니다. 돈 많은 메이커들이 많은 돈을 투자해서 만들었다는 그것도 인체공학적으로....?? 그러면 그 신발을 신으면 무릎통증도 허리디스크도 줄어 들어야만 하는데 그런 환자는 늘어만 가는 기이한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신발을 신지 않고 살 수 있게 설계가 되었다. 원숭이를 보라. 사자를 보라.
인디언이나 아마존. 아프리카 사람들을 보라. 신발 없이도 잘 적응하고 밀림에서도 맨발로 생할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세계 마라톤에서 가장 유명한 보스톤마라톤을 보라 상위 20명에서 18명은 아프리카인들이다.
그들이 유명한 코치나 감독이 있어서 그런지 신발이 좋아서 그런지 환경이 좋아서 연습을 많이 해서 그런지.... 단지 그들은 신발을 신지 않아서 종아리근육과 아킬레스건이 줄어들지 않았기에 한걸음에 1미리씩만 덕을 봐도 42.195키로미터를 뛰는 동안 수백미터의 차이를 만드는데는 어렵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신발은 뽀데(?)를 내는 도구로 변해 버렸다. 각선미를 나게 하기 위해서 뒷굽을 높혀 놓았고 게다가 멋있게 이쁘게.... 디자인에 공을 들였고 소비자는 그에 현혹되어 기능이나 편리함은 제쳐두고 오직 디자인에 홀딱 반해서 속고 있었다.
그에따라 발은 조금씩 조금씩 혹사를 당하고 모양이 변형되고 통증이 시작되어도 조금도 탓하지 않고 그냥그냥 버티어 왔다. 족저근막염이 어떻고 아킬레스건염이 어떻고 지간신경통....?? 이제 그 영향이 무릎에. 허리에. 척추에까지 서서히 미치기 시작한다. 그래도 아직도 주범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어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넉두리를 늘어 놓아 본다. 혹여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보통 사람들은 좋은 메이커일수록 인체공학적이고 내 발에 좋은 신발일 것으로 생각한다. 바보스런 생각이다.
자동차를 생각해 보자 자동차는 무엇을 본따서 만들었을까?? 바로 인간이다. 눈이 두개요 헤드라이트도 두개다. 밥을 먹는 입이 있고 연료 주입구가 있고 소화기관이 있고 연료를 태우는 연소기관이 있고 배출하는 항문이 있고 매연을 배출하는 머플러가 있다. 신경계가 있듯이 전기배선이 있고 발에서 쿠션을 담당하는 족궁이 있듯이 자동차에는 쇼바가 있다.
족궁은 설계에서부터 완벽하게 하중이나 운동량을 계산해서 만들어 졌다. 자동차의 쇼바도 5명이 타도 문제가 없도록 적합한 정도의 압력과 충격을 계산해서 설계 되었다.
그런데 자동차의 쇼바는 한사람도 업그레이드 시키거나 더 좋은 사양으로 교체하지 않으면서 발바닥의 쿠션. 아치. 족궁은 믿지를 못하고 더 좋은 재질의 쿠션 좋은 신발을 구입해서 신는다. 더 비싼 메이커를 선호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특수 기능성 신발을 30만원씩 주고 효도 선물을 하고 족문을 찍고 문제가 있다면서 깔창을 권유하면 얼씨구나 좋아라 하고 신고 다닌다.
결국 내 몸의 최고의 쿠션은 그때부터 기능을 서서히 상실하고 마지막에는 축 늘어져 버리고 더 이상 일을 할 생각이 없다. 누군가가 내 일을 대신 해 주었기에 내 자리를 빼앗겨 벼린 것이다.
아... 슬프다. 나의 족궁이여.....
오호 통재라.... 나의 발아치여....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