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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40장 1절 ~ 6절
예루살렘과 유다로부터 바빌론으로 잡혀가는 모든 사람 가운데 예레미야도 사슬에 묶여 끌려가다가, 경호대장 느부살아단이 라마에서 예레미야를 풀어 준 후, 말씀이 주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였더라. 1)
The word that came to Jeremiah from the LORD, after that Nebuzar-adan the captain of the guard had let him go from Ramah, when he had taken him being bound in chains among all that were carried away captive of Jerusalem and Judah, which were carried away captive unto Babylon. 1)
말씀이 주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시드키야에게는 임하지 않고 예레미야에게 임하는 것인지도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지 선지자라는 직분때문이라면 하나냐도 선지자이지만 그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누군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전하여 들어야만 하는 처지게 놓인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시기는 구약시대입니다. 즉 제사장의 직분이 있고, 그의 역할이 정해져 있었던 시기입니다. 그 역할은 형식이 아니라 본질의 역할이라고 보여지며,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로 만인 제사장인 지금의 시대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가 주의 말씀을 들은 것처럼 우리는 구약시대의 예레미야와 같은 직분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예레미야와 같은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전해서 듣는 시드키야와 같다면 직분을 잃어버렸거나 유기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모두가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레미야가 되거나 하나냐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고 나누어야 하는 때입니다. 시드키야처럼 선지자를 의존해야만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교회 목사중심의 전해듣는 말씀으로 믿음을 여기고 있는 것은 하나냐가 가진 문제를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성도들은 각자가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일대 일의 관계로 반드시 듣고 순종하고 나누어야 합니다.
듣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인데 믿음이란 마치 양자역학의 관측처럼 관측 이전에는 확인될 수 없는 것입니다. 관측하는 순간에야 그것이 확인되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은 당연히 관측이전에 알 수 없고,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믿음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여야 합니다. 과정의 믿음이 관측되더라도 확정된 것이 아니라 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황은 상수요, 변수는 내 마음이니, 구원이라는 결과값은 변수인 내 마음에 달려있구나.
아무리 믿음 좋은 열매를 맺어나간다고 해도 마지막에 망가지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중간에 관측되는 믿음은 무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관측되고 그 결과로 확정되는 순간은 우리의 죽음이라고 보여집니다. 관측이 결과로 되는 때는 죽음 또는 죽음에 가까이 접근할때입니다.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대한 관측은 일회성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존재하지 않다가 마지막에 관측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관측하기 이전부터 믿음이 견고하게 다져져야만 관측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단순하게 주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생각과 상관없이 주의 약속을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이며, 우리의 인생에서 그것을 확인하는 때는 자주 있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어 있다가 어느 한순간에 확인되고 결정되어 버릴 것입니다.
한 순간에 관측되어 확인되는 믿음이지만 모든 순간이 준비되어야만 그러한 관측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으니, 준비하였던 처녀들만 그와 함께 혼인식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더라.
마태복음 25장 10절
백신접종에서도 많은 진실을 접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결과값 즉 접종은 Yes or No였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도 이와같을 것으로 느껴집니다. 주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의 결과가 중간은 없고, All or Nothing이 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당신에게 주의 말씀이 전달되고 있습니까? 아니라면 믿음이라는 관측을 하지 않아도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주께 기도로 매달려야만 할 것입니다.
너희가 악하다 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시더라.
누가복음 11장 13절
구하지 않아 얻지 못함음은 곧 거절이며. 구원을 잃어버림은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당신의 거절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경호대장이 예레미야를 데려다가 그에게 말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서 이 재앙을 이곳에 선포하셨느니라. 2)
And the captain of the guard took Jeremiah, and said unto him, The LORD thy God hath prounced this evil upon this place. 2)
경호대장인 느부살아단은 바빌론 사람으로 바빌론에 이쉬타르문이 있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의 에큐메니칼을 추종하는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볼 수 있니다. 즉 하나님을 자신이 섬기는 우상처럼 여기는 것일뿐 믿음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주께서는 그가 말씀하신 대로 실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주를 거역하여 죄를 지었고, 그의 음성에 복종하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 3)
Now the LORD hath brought it, and done according as he said: because ye have sinned against the LORD, and have not obeyed his voice, therefore this thing is come upon you. 3)
느부살아단이 예레미야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지식일뿐 믿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모습은 에큐메니칼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이러한 느부살아단과 같으며, 구원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됩니다. 느부살아단은 바빌론의 군인이며, 하나님을 알지만 우상과 같이 여기는 이교도 일뿐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구원이란 계약을 맺음입니다. 느부살아단은 이러한 계약에 참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마치 지금의 불교의 중이 성경을 논하는 것과 같음입니다. 중이 성경지식이 높아도 그것은 그의 구원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식보다 예레미야의 순종함을 닮아야 한다고 느껴집니다. 예레미야는 그의 순종때문에 권력자들에게 대항하는 상황으로 나아갑니다. 지금의 우리로 보면 백신을 거부하는 것이 삐딱한 사회에 불만있는 사람으로 여겨진 것과 같습니다.
짐승의 표가 강제될 즈음에 우리도 세상에 대항하여 나서는 위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계약은 하나님과 맺은 것으로 느부살아단과 에큐메니칼 신학자들은 맺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계약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항하는 위치에 서지 못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일어날 일로 정해진 상수입니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것이 관측되는 것은 세상과 대결하는 자리로 나서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확인될 것입니다.
그때 관측됨에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는 짐승의 표가 나타남이 아니라 우리가 인내로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가에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과 구원의 계약이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한 믿음이 관측될 것이며, 그것으로 구원의 결과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란 결국은 결과값에 의하여 관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정적인 순간에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 믿음이며, 간절한 믿음과 같은 말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곧 능력으로 표현되는 것이지 간절함 따위의 말은 사람의 감정의 영역일 뿐입니다.
나도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요 내 수하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 하면 가고, 또 저 사람더러 '오라.' 하면 오나이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그렇게 하나이다." 라고 하니,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놀라워하시며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스라엘 중에서 이처럼 큰 믿음을 본 적이 없나니, 결코 없도다.
마태복음 8장 9절 10절
믿음은 결국 관측되는 결과값으로만 알 수 있고, 그 이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이 큰 믿음으로 여겨짐을 받은 것은 그의 믿음이 크게 관측이 된 것이며, 결과값입니다.
이는 백신에서도 백신이 나타나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대해서 어느정도인지 관측이 되지 않았지만 백신 접종이 강제되면서 그 믿음이 관측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백신에서 나타난 이러한 관측은 중간값으로 구원의 결과값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보라, 내가 오늘 네 손에 있는 사슬에서 너를 풀어 주노라. 만일 나와 함께 바빌론으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거든 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잘 돌보아 주리라. 그러나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바빌론으로 가는 것을 나쁘게 여기거든 그만두라. 보라, 온 땅이 네 앞에 있나니 어디로 가든지 네가 좋게 여기고 편리하게 여기는 대로 가라." 하더라. 4)
And now, behold, I loose thee this day from the chains which were upon thine hand. If it seem good unto thee to come with me into Babylon, come; and I will look well unto thee: but if it seem ill unto thee to come with me into Babylon, forbear: behold, all the land is before thee: whither it seemeth good and convenient for thee to go, thither go. 4)
그때 예레미야가 아직 돌아가지 아니하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너는 바빌론 왕이 유다 성읍들을 다스릴 총독으로 삼으신 사판의 손자요, 아히캄의 아들인 그달랴에게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백성 가운데 거하거나 어디든지 네가 가기에 편하다고 여기는 곳으로 가라." 하고 그 경호대장이 식량과 선물을 그에게 주며 보내더라. 5)
Now while he was not yet gone back, he said, Go back also to Gedaliah the son of Ahikam the son of Shaphan, whom the king of Babylon hath made governer over the cities of Judah, and dwell with him among the people: or go wheresoever it seemeth convenient unto thee to go. So the captain of the guard gave him victuals and a reward, and let him go. 5)
예레미야가 미스파에 아히캄의 아들 그달랴에게로 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들 가운데서 그와 함께 거하니라. 6)
Then went Jeremiah unto Gedaliah the son of Ahikam to Mizpah; and dwelt with him among the people that were left in the land. 6)
라반이 말하기를 "이 무더기가 오늘 나와 너 사이에 증거니라." 했으니, 그러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더라.
또 미스파라 하였으니, 이는 그가 말하기를 "우리가 서로 헤어져 있을 때, 주께서 나와 너 사이를 감시하시느니라.
창세기 31장 48절 49절
예레미야가 풀려나서 미스파의 백성에게로 돌아갑니다. 미스파는 예루살렘의 북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예레미야가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포로속에서 풀려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미스파라는 뜻은 곧 위의 글에서 언급한 관측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느껴집니다. 이 마지막때에 관측됨을 준비하며 관측이전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확인할 수는 없는 우리의 믿음을 확신할 수 있는 주의 약속으로 확정하는 것이 믿음이며, 그것은 어떠한 사건으로 확인될 때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을 그날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으로 그 날이 오늘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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