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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임을 깨닫고 나와야 합니다.
참고말씀: 마9:1,9; 눅5:8,27,32; 요8:32; 롬3:10,23; 13:14; 고전13:6; 엡4:22-24
읽을말씀: 막2:1-27
주제말씀: 막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첫째, 절망적인 문제도 예수님께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2:3-5)
예수님이 본 동네 가버나움의 집에 계실 때,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1절) /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마9:1) 사람들이 누구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까? 한 중풍병자입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3절)
그런데 어떤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습니까? 많은 사람이 문전성시를 이루어서 도무지 문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2절 상) /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4절 상)
결국 그들은 어찌 했습니까? 단념하고 돌아섰습니까? 아닙니다. 그 계신 집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달아 내렸습니다.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4절 하) 이는 끝까지 무엇을 잃지 않은 것입니까? 믿음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 어찌 해야 합니까? 원컨대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5절 상)
한편,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기 전에 무엇부터 해결해주셨습니까? 그의 죄 문제입니다. 즉 육신의 문제에 앞서서 영적인 문제부터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5절 하)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예수님은 보이는 문제들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인 문제들도 고쳐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점입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8,9절) 참고로, 이 중풍병자의 경우는 죄 문제 때문에 육신의 질병까지 찾아온 것 같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도 깨닫게 됩니까? 그분은 우리의 죄도 능히 사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10절 상) /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7절 하)
둘째,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7)
예수님은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던 누구를 부르셨습니까? 레위라고 하는 마태입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14절) /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9:9) /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눅5:27)
우연히 지나가시다가 그리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일부러 세관으로 가셨으며 그곳에서 세관 일을 보고 있던 레위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부르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결코 우연(偶然)이 있을 수 없고 오히려 우연을 가장한 필연(必然)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시되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시는 것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그의 부르심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15절)
한편, 예수님이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 교제 하시는 것을 보고 누가 힐난했습니까?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입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절)
이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당신은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를 부르러 오셨으며,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1:17)
그런데 이 세상에 의인(건강한 자)가 있습니까? 한 명도 없습니다. 성경이 증언한 바와 같이,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허면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자는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즉 자신이 영적으로 병든 자임을 인정하고 고침 받기를 원하는 자를 고쳐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점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자신이 의인인양, 건강한 사람 인양 착각하면서 도무지 예수님께 나아와 고침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원컨대 우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께로 나아와 고침 받기를 원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셋째, 율법적인 태도를 버리고 복음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생베 조작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막2:21,22)
18절 이하는 여러 가지 율법적인 태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주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금식 논쟁에 대해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18절) 무엇을 말씀해주셨습니까?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금식할 수 없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19절)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여서는 안 되며, “생베 조작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21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22절)
더 이상 율법적인 형식에 얽매여서는 안 되고, 오히려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또 그 안에서 자유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13:6 하)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옷을 입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13:14 상) /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복음의 새 부대를 마련하고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안식일 논쟁에 대해서는 무슨 말씀을 해주셨습니까? 예수님이 곧 안식일의 주인이시 요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이므로,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8절) 안식일을 만드신 그분의 뜻을 충분히 헤아려서 적용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단정하셨습니까?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오히려 안식일이 사람의 유일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27절) 그러니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안식일(주일) 준수 문제도 율법적인 태도나 생각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복음의 새로운 관점에 입각하여 접근하고 적용도 해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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