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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함께 여는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천둥산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3-02
"우표에서 얻은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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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04 - 미국의 동화작가, 만화가 닥터 수스(Dr. Seuss) 출생
닥터 수스 [Dr. Seuss][Geisel, Theodor (Seuss), 1904.3.2~1991.9.24]
[어제의 오늘]1904년 동화작가 닥터 수스 출생
- 미국 어린이들에게 가장 사랑받아
워싱턴포스트의 2008년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초등학교 1학년생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은 <해리 포터>가 아니었다. 초등학생들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1위에 오른 책은 1960년 출간된 동화 <초록 달걀과 햄>이었다. <해리 포터>를 제친 이 책의 저자는 ‘20세기의 안데르센’이라 불리는 동화작가 테오도어 수스 가이젤(필명 ‘닥터 수스’)이다. 미국의 웬만한 서점과 도서관에 닥터 수스의 책만 진열한 서가가 따로 있을 정도로 미국 어린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동화작가 중 하나다.
닥터 수스는 1904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을 중퇴하고 27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라이프’ ‘베니티 페어’ 같은 잡지에 만화를 그리는 일부터 시작했다. 대공황 시기에는 제너럴 일렉트릭, NBC방송 등의 광고 작업에 참여해 생계를 해결했고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후엔 좌파 성향의 일간지 ‘뉴욕시티’에 만평을 기고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본격적으로 동화를 썼다. 57년 그의 첫번째 인기작이 된 <모자 속의 고양이>를 비롯해 <그린치는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훔쳤을까> <버터 전쟁 책> 등이 출간되는 대로 족족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 반열에 올랐다. 그의 동화는 후일 <그린치> <호튼> 등 할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됐다.
닥터 수스는 운율과 리듬감이 살아 있는 문장으로 어린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정치적 주제를 동화 소재로 채택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84년 출간한 <버터 전쟁 책>은 핵전쟁의 위협 속에 사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구 소련과 군비 경쟁에 열을 올리던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행정부를 풍자한 책이다. 앞서 71년 펴낸 <로랙스>에서는 환경문제를 다뤘고 <그린치는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훔쳤을까>에선 파시즘과 권위주의를 비판했다.
닥터 수스는 91년 9월 24일 세상을 뜨기 전까지 48권의 책을 펴냈다. 이는 15개국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적으로
2억권 이상이 팔렸다. 그는 어린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 공로를 인정받아 84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최희진 기자 daisy@kyunghyang.com 경향 뉴스 2010-03-01 17:35:1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3011735165&code=100100&area=nnb2
2) 1855 -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1세(Nikolai I) 사망
니콜라이1세 [Nikolai I, 1796.7.6~1855.3.2]
1825년 12월 즉위하자마자 수도에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 일어나, 그의 치세는 혁명세력의 진압과 함께 시작되었고, 유럽의 헌병으로서 보수주의 입장을 관철하였다. 1830∼1831년 폴란드의 반란을, 1848∼1849년 헝가리의 혁명을 진압하고, 오스트리아와 동맹하여 중유럽 ·동유럽에 반혁명군을 파견해서 러시아의 세력을 중앙아시아 등지로 확장시켰다. 국내에서는 그리스 정교 ·전제 ·민족성의 3원칙하에 철저한 반혁명의 입장을 고집하여 A.S.푸슈킨, M.Y.레르몬토프,
벨린스키, A.I.게르첸 등을 추방 또는 박해하였다. 크림전쟁(1853∼1856)을 일으켰으나 패색이 짙은 가운데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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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00 - 독일 출생의 미국 작곡가 바일(Weill, Kurt) 출생
바일 [Weill, Kurt, 1900.3.2~1950.4.3]
데사우 출생. 베를린국립음악학교에서 공부하고, 1921∼1924년 F.부조니에게 사사하였다. 처음에는 추상적인 기악곡을 작곡하였으나, 1926년 오페라 《투사(鬪士)》를 통해 오페라 작곡가로 주목을 끌었다. 1928년에는 B.브레히트의
협력을 얻어 영국의 《거지오페라》를 번안(飜案)한 《서푼짜리 오페라》를 작곡, 성공을 거두었다.
1933년 좌경성(左傾性)과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스에 의하여 추방되어 런던 ·파리를 거쳐 1935년 이후 미국에
정주하였다. 그곳에서 재즈의 발랄한 리듬과 경음악의 효과를 가미한 새로운 타입의 오페라를 작곡하고,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에서 극음악 ·영화음악도 작곡하였다. 작품으로 오페라 《마호가니》 《산골짜기로》 《암흑부인》 등이 있다.
2) 1960 - 부산 국제고무공장 불, 62명 사망
1960년 오늘 아침, 부산 범일동에 있는 국제고무공장에서 불이 났다.
한 여직원이 무심코 켰던 성냥불이 작업대 밑에 있던 휘발유통에 떨어지면서 불이 붙었다.
작업장에는 신발 밑창을 접착하는 데 쓰는 본드 등 인화물질이 많았다. 불은 삽시간에 공장 전체로 번졌다.
당시 공장은 부산진 시장 안에 있었는데 길이 좁고 사람들이 많아 소방차가 진입하기 어려웠다.
이 불로 62명이 숨지고 수십명이 부상했다. 대부분이 젊은 여직원들이었다.
작업장 관리인이 불을 꺼야 한다며 직원들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 사상자가 많아졌다.
3) 1972 - 미국의 목성 탐사 우주선 파이어니어 10호 발사
1972년 3월 2일 우주탐사선 파이어니어 10호가 최초로 소행성대 탐사를 위해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발사되었다.
1970년대 당시 행성간 탐사는 미국이 주도했다. 무인 우주선 매리너 10호가 최초로 수성에 도달했으며,
파이어니어 10호는 소행성대를 무사히 통과해 1973년 12월 최초로 목성을 근접 비행했다. 인간이 만든 물체로서
우주 공간 속으로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 파이어니어 10호는 1983년 6월 13일 태양계를 벗어났다. 파이어니어 10호에는 혹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외계인들에게 인류문명을 설명하기 위해 칼 세이건 박사가 고안한 명판이 들어 있었다.
파이어니어 10호가 발사된 이후 파이어니어 11호, 보이저호, 율리시즈호, 카시니호 등이 계속해서 우주탐사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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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1 - 국악 FM방송 개국- 국립국악원 개원 40주년
국악FM 개국
옛날에는 교육과 정치가 이풍역속(移風易俗)의 기능을 하였지만 지금은 방송이 가장 큰 이풍역속의 기능을 갖는다. 국악은 우리음악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국악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KBS가 꾸준히 TV와 라디오로 국악프로그램을 내보내고 특히 KBS라디오의 FM방송이 국악프로그램을 방송한 것이 국악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MBC도 한 때 TV와 라디오로 국악을 방송한 적이 있고, SBS TV에서도 국악을 짧게나마 방송한 적이 있다. 이러한 기회가 일반인들이 국악과 만날 수 있는 기회여서 국악보급과 저변확대에 큰 역할을 했었다. 그러면서도 국악전문방송이 있어야 한다는 요구는 국악계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런데 2001년 국악전문방송인 국악FM이 개국하게 된 것이다.
국립국악원 박물관 건물에 둥지를 틀고 법인으로 출발한 국악FM은 3월 2일부터 서울, 경기 일원에서
99.1㎒로 1일 21시간 방송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6월 1일부터는 국립민속국악원이 있는 전북 남원 일원에 99.5㎒로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9월부터는 1일 22시간 방송을 내보내고 있는데 방송내용은 국악전문방송답게 우리소리와 우리문화에 관련된 내용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일반인들을 위한 국악감상프로그램, 전문인들이나 고급 매니아들을 위한 고급감상프로그램, 교사와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일반인들이 직접 배울 수 있는 배우는 프로그램, 문화계 인사를 초청하여 다양한 문화관련 이야기를 들어보는 대담프로그램 그리고 연주회의 실황을 직접 중계하는 프로그램 등 하루종일 국악을 들을 수 있도록 진행하고 있다. 아직 초창기이기 때문에 계속 청취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으면서 더 좋은 국악방송으로 가꾸어 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용량을 늘리고 전국방송이 되게 하는 일과 TV방송으로까지 육성하는 것이 풀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국악방송은 국악인프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어서 국악계 모두가 국악방송
출범을 크게 환영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http://www.kcaf.or.kr/yearbook/2002/kukak/3-01.html
2) 1909 - 안중근(安重根) 의사, 단지동맹 결성
안의사 단지동맹을 통해 동의단지회를 조직하다
3월 5일경(음력 2월7일경), 안중근은 연추 하리에서 11명의 동지와 함께 모여 왼손 무명지를 끊어
그 피로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며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조국의 독립회복과 동양평화유지를 위해 헌신하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하다. 안의사가 회장에 선임, 회무를 주관하다.
단지혈맹동지 12명
안응칠(31세), 김기룡(30세), 강순기(40세), 정원주(30세), 박봉석(32세), 유치홍(40세), 조응순(25세), 황병길(25세),
백규삼(27세), 김백춘(25세), 김천화(26세), 강창두(27세) 안중근 의사 기념관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였다. 즉,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에서 함께 의병활동을 하던 김기룡·황병길·강기순·유치현·박봉석·백낙규·강두찬·김백춘·김춘화·정원식 등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그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한다고 맹세했다. 차석찬의 역사창고 mtcha.com.ne.kr/koreaman
3) 1982 - 미국의 과학소설(SF) 작가 필립 K. 딕(Dick, Philip K.) 사망
딕 [Dick, Philip K(indred), 1928.12.16~1982.3.2]
필립 K. 딕(Philip Kindred Dick, 1928년 12월 16일 ~ 1982년 3월 2일)은 미국 출신의 과학 소설(SF) 작가이다. 시카고에서 태어났으나 캘리포니아에서 살았다. 버클리 대학에서 잠시 공부하기도 했다. 44편의 장편소설과 121편의 중단편을 출간했으며 초현실적이고 편집증적인 분위기와 병적일 정도로 풍부한 상상력으로 유명하다. 생전에는 SF 문단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얻는데 그쳤지만, 인식론적인 색채가 짙은 1960년대 작품들이 슬라보예 지젝, 장 보드리야르, 프레드릭 제임슨 등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평가들 및 사이버펑크 작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영화와 문학을 위시한 20세기 후반의 대중문화 전반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대표 장편으로는《화성의 타임슬립》(Martian Time-Slip)(1964),《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The Three Stigmata of Palmer Eldritch)(1965),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1968),《유빅》(Ubik)(1969), 《죽음의 미로》(A Maze of Death)(1970),《발리스》(VALIS)(1981) 등이 있으며, 대체 역사 소설인《높은 성의 사내》(The Man in the High Castle)(1962)로 1963년 휴고상을, 《흘러라 내 눈물, 하고 경관은 말했다》(Flow My Tears, the Policeman Said)(1974)로 1975년 존 W. 캠벨
기념상을, 《스캐너 다클리》(Scanner Darkly)(1977)로 1978년 영국 SF 협회상을 받았다. 작고한 이듬해인 1983년에는 필립 K. 딕상이 제정되었다. 이는 미국에서 처음부터 페이퍼백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뛰어난 SF 장편을 선정해서
매년 수여되는 상이며, 휴고상과 네뷸러상과 더불어 SF계의 3대 문학상으로 간주된다.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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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7 - 카다피식 사회주의 ‘자마히리야’ 30주년
리비아 ‘개방물결’ 속 정치개혁 요구
무아마르 카다피의 38년 철권통치가 이어지고 있는 리비아에 개방 물결이 일고 있다.
2003년 대량살상무기(WMD) 포기 선언 뒤 경제제재가 풀리면서 외국계 석유회사들이 약 350억배럴의 석유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리비아로 향하고 있다고 <비즈니스위크> 최신호가 보도했다. 리비아에서는 영어를 배우는 것도 금지돼 왔지만, 3년 전부터 수도 트리폴리에서는 영어와 컴퓨터 등을 가르치는 사설 기관도 탄생했다.
서방에 우호적인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 알이슬람은 미국 하버드대 마이클 포터 교수 등과 친분을 맺고 경제건설에 대한 서방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잡지는 전했다. 또 정부 조직을 개혁하고자 조만간 공공부문 일자리 12만개를 감축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이러한 변화는 35%에 이르는 실업률과 낙후된 사회기반 시설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이라고
잡지는 분석했다. 이 지역 관료들은 그러나 제재기간 동안 제대로 교육 받은 인재가 부족한 것이 리비아 발전의 큰 장애물이라고 말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또 리비아인들은 모두가 가난하지만 기대가 적은 지금의 상황이 바뀌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신문은 분석했다. 현지 극작가인 나세레딘 알리는 “오늘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리비아가 개방화 속에서 비교적 안정된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2일로 선포 30년을 맞은 이른바 ‘자마히리야’(Jamahiriya : 인민권력) 제도가 한 몫을 하고 있다. 카다피는 1969년 부정부패가 심했던 왕정을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집권에 성공한 뒤 이 제도를 통해 집권 기반을 구축했다. 자마히리야는 사회주의와 이슬람식 정치를 혼합한 직접민주주의 제도로, 각 지역별 인민회의에서 뽑힌 대표들이 총인민회의를 구성해 교육·보건·재정 등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이 체제에 대한 비판론자들은 독재를 합리화하는 도구이며 경제를 황폐화시킨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박현정 기자 한겨레 2007-03-02
2) 1995 - 미국 우주왕복선 엔데버호(Endeavour) 발사
미국이 개발한 유인우주왕복선(스페이스 셔틀) 제5호(OV-105) 엔데버(Endeavour)는 무게 약 92t으로, 챌린저(Challenger) 우주왕복선과 대체하기 위해 1987∼1992년 4월까지 제작한 최신형 우주왕복선이다. 1회에 최고 16일까지 비행할 수 있으며, 30회까지 발사할 수 있도록 설계 제작되었다. 1992년 5월 7일 첫 발사되어, 지난 1990년 3월 발사되었으나 2단 로켓의 고장으로 370km의 지구궤도에 표류하고 있던 통신위성 인텔샛위성 6호를 수리하여 지구 정지궤도로
재발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3) 1919 -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창립대회
1919년 3월 2일부터 6일까지 5일동안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30여개국 51명의 대표가 모여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 약칭 코민테른 Comintern, 혹은 제3인터내셔널)의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대회는 `자본주의가 내부로부터 해체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당면강령으로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가능한 모든 양보를 쟁취할 것`을 결의하고 최고강령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것`을 다짐했다.제2인터내셔널은 1차대전 전부터 반전결의를 반복했지만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대부분의 참전국 사회주의 정당들은 자국의 전쟁에 협력했다. 여기에 절망한 레닌은 후진국
러시아의 혁명은 선진공업국의 혁명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 새로운 국제적 혁명조직 설립을 추진해 왔다.
2007 - 타임지 선정 세기의 범죄 25건
미국의 시사주간 타임은 1932년 미국의 국민영웅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의 20개월 된 아들이 유괴된 뒤 처참히 숨진채
발견돼 미국민을 경악케 한 린드버그 유괴사건 75주년을 맞아 세기의 범죄 25건을 선정했다.
2일 타임에 따르면 정치적 암살이나 자살, 대량 학살 등을 제외하고 선정된 세기의 범죄 25건에는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던 유명인 관련 범죄, 연쇄 살인마, 유명한 도난 사건 등이 포함됐다. 1927년 세계 최초로 대서양 횡단 단독비행에 성공, 미국의 국민 영웅이 됐던 찰스 린드버그의 아들 '이글렛'이 1932년 3월 실종된 2개월여만에 처참히 숨진채 발견됐다. 2년 6개월 뒤 범인으로 독일 태생의 목수 브루노 하우프트가 체포됐고 그는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어린이 유괴범에게 최고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린드버그법이 만들어졌다.
1978년 자신의 하숙집에 투숙한 여성들을 수면제로 정신을 잃게 하고 살해한 뒤 시신과 함께 잠을 자는 등 엽기적인 행각을 벌인 테드 번디 사건, 1977년 뉴욕 여성들을 잇따라 살해해 공포에 몰아넣은 데이비드 버코위츠 사건 등 연쇄살인
사건도 다수 포함됐다. 잘 생긴 외모와 달변으로 '연쇄살인의 귀공자'라고까지 불린 테드 번디는 30명 이상의 여성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1989년 처형됐다. 버코위츠의 경우는 '샘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경찰과 언론에 자신의
범죄를 자랑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994년 전처와 그의 애인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미국의 미식축구 스타 O.J. 심슨사건, 1997년 세계적 패션디자이너 지아니 베르사체가 미국 마이애미 비치의 저택에서 동성애자의 총에 맞아 숨진 사건, 1974년 언론 재벌 윌리엄 허스트의 손녀 패티가 좌익 과격파 집단에게 납치됐던 사건 등 유명인 관련 범죄도 다수가 선정됐다. O.J. 심슨 사건은 심슨의 살인 여부를 둘러싼 진위 논란은 물론 인종문제에 관한 논란으로까지 이어지며 미국 전역을 시끄럽게 했으나 심슨은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와 함께 1911년 발생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도난사건, 2004년 노르웨이 뭉크 미술관의 유명작 '절규' 도난사건 등 유명 작품의 도난 사건과 함께 1963년 15명의 떼강도가 우편 열차를 세우고 15분만에 360만 파운드를 강탈한 영국 열차강도 사건도 대상에 올랐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작 모나리자 도난 사건은 프랑스 당국이 국경을 폐쇄하고 범인 검거에 나섰으나 체포된 범인은 모나리자를 이탈리아로 되돌아오게 하려는 의도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 수개월만에 풀려났다.이밖에 타임은 1995년 한 딜러의 투자실패로 인해 발생한 영국 베어링은행 파산사건, 1912년 오랑우탄 턱뼈와 현대인의 두개골을 조합한 뒤 초기 인류라고 발표한 영국 인류학자 찰스 도슨의 가짜 영장류 화석 사건, 1999년 학생 2명이 급우 12명과 교사 1명을 총으로 살해한 미국 컬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 등도 세기의 범죄로 꼽았다.
김현준 특파원 june@yna.co.kr (뉴욕=연합뉴스) 한겨레 2007-03-03 오전 02:01:29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globaltopic/193987.html
1983 - 중·고생 복장자율화 시작
[어제의 오늘]1983년 중·고생 복장자율화 시작ㆍ“일제 잔재” 교복 제도 폐지
새하얀 칼라, 플레어스커트, 허리에 벨트를 한 감색 상하의’의 예쁜 여학생을 등굣길 버스 안에서 훔쳐보는
‘스탠드칼라를 단 검정 상의와 바지’를 입은 까까머리 소년의 첫사랑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다.
1970년대 대부분 학교는 이런 색상과 디자인의 교복을 입었다.이 시절엔 칼라의 호크 하나를 풀어 놓는 것만으로도 불량한 복장으로 간주될 정도로 규율이 엄격했다. 억압에 대한 반발로 졸업식장에서 교복과 교모에 밀가루를 뿌려 칼로 찢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었다.이러한 엄격한 교복 착용과 두발 제한이 학생 개성을 신장시키는 데 방해가 되며, 일제의 잔재라는 각계 의견이 빗발치면서 83년 3월2일부터 교복자율화가 실시되었다. 제한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예전 같은 강제성은 사라졌고, 사실상 대부분의 학교는 교복 제도를 폐지한다.
그러나 가계 부담 증가로 교복에 대한 학부모의 요구가 높아지고, 교육계에서도 그 필요성을 실감함에 따라 86년 2학기부터는 학교장 재량으로 교복 착용 여부 및 교복의 형태가 결정되도록 방향이 수정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복 착용은 대세가 되었고 현재에 이른다.우리나라 교복의 역사는 개화기부터 시작된다. 1886년, 이화학당을 창설한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은 소녀들에게 붉은 무명천으로 치마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우리나라 최초의 교복이었는데,
사람들은 이 교복을 입은 이화학당 학생들을 ‘홍둥이’라고 불렀다. 이후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로 바뀌었다. 남학생의 교복은 그보다 2년 뒤에 등장한다. 미국인 선교사 H G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서 당복(堂服)을 학생들에게 입혔는데, 이 당복은 당시 일본의 학생복과 비슷한 형태였다고 한다.최근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새 학기부터 중·고교생의 두발·복장을 자율화하겠다는 의향을 밝혀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곽 교육감은 두발·신발·양말 등의 규제는 없애되 교복은 그대로 입도록 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교복자율화가 되면 학생 간 빈부격차가 옷차림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입학 시즌인 3월, 예전 중·고교 입학생들은 다들 자신의 몸보다 몇 치수는 큰 교복을 입고 갔다. 한창 클 나이를 고려한 부모님이 교복을 맞출 때 강력하게 주장한 탓이었다. 외모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은 학생주임 선생님의 눈을 피해 교복을 몸에 꼭 맞게 수선해 입기도 하고, 치마를 무릎 위로 접어 올려 멋을 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리운 것이 교복이다. 졸업 후 교복을 보며 추억에 빠지는 이유는 순수하고 풋풋했던 학창시절을 대표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심은령 기자 rainda@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3-01 21:21:3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3012121315&code=100100
1969 - 콩코드기 첫 시험비행에 성공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개발한 초음속 여객기(SST) 콩코드기(Concorde)의 시험비행이 1969년 3월 2일 처음 실시돼
성공했다.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 있는 아에로스파시알사 활주로를 이륙한 콩코드 001기는 29분간 프랑스 상공을 날았다. 콩코드가 초음속비행에 성공한 것은 시험비행 45번째 만인 1969년 10월 1일이었다. 마하2(시속 2천1백55km)를 기록한 것은 1970년 11월4일 1백2번째 시험비행에서였다.1976년 1월 21일 상업운행을 개시함으로써 콩코드기는 민간 항공여행의 초음속 시대를 열었다. 25년간 가장 빠르고 안전한 여객기로 평가받아온 콩코드기가 2000년 7월 25일 파리 북부지역에 추락,1백13명의 목숨을 앗아가자 콩코드기의 안정성에 논란이 일었고, 결국 2003년 5월 30일 뉴욕-파리간
비행을 마지막으로 그 막을 내렸다.
[콩코드기 연혁]
1969.03.02 - 콩코드기 첫 시험비행 성공 (프랑스)
1969.10.01 - 초음속 비행에 성공
1970.11.04 - 102번째 시험비행에서 마하 2(시속 2천 1백55 km)의 굉속을 기록
1976.01.21 - 상업운항을 개시
1979 - 콩코드기 생산 중단
2000.07.25 - 파리 북부지역에 추락 사고 (113명 사망)
2003.05.31 - 프랑스 콩코드, 마지막 운항(뉴욕-파리)
2003.06.14 - 파리 에어쇼 개막-콩코드기 고별비행
2003.10.23 - 마지막 상업비행 (런던-뉴욕)
2003.10.24 - 마지막 상업비행(귀항)(뉴욕-런던)
2003.11.26 - 콩코드기 마지막 퇴역비행 (히드로공항-필턴비행장)
1967 - 서독 뤼프케 대통령, 유럽의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우리 나라 방문
서독 대통령 뤼프케(Lubke, heinrich, 1894~1972)는 1949∼1950년과 1953∼1959년 연방의회 의원, 1953년 10월 제2차 K.아데나워 내각의 농업장관을 지냈다. 1959년 7월 대통령에 취임하고, 1964년 6월 재선, 1969년 3월 사임하였다.
농업문제에 힘을 기울여, 황폐한 전후(戰後) 독일에 푸르름을 가져온 ‘녹화계획’의 창도자이며,
1967년 3월 한국을 방문하였다.
1959 - 한국과 노르웨이 국교수립
노르웨이는 1959년 3월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북한과도 수교하고 있다. 6·25전쟁 중에는 한국에 병원선(病院船)을 파견하여 의료지원을 하였으며, 수교 이전인 1956년 3월 양국간 협정에 의해 노르웨이는 서울에 메디컬센터(현재 중앙의료원)를 건립·운영하다가 한국에 시설 전체를 이양하였고, 1969년 10월 사증면제협정(査證免除協定) 등 4개의 주요협정을 체결하였다. 1976년 6월에는 한국경제사절단이 노르웨이를 방문하여 조선(造船) 부문의 양국간 합작투자에 합의하였고, 1978년 10월에는 노르웨이 공업성(工業省) 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50명의 산업사절단의 방한(訪韓)을 계기로 한국·노르웨이 간 경제협력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993년 11월 한국과 노르웨이는 섬유협정을 1995년까지 연장하기로
합의하였다. 1999년에는 경제·기술·산업협력협정 개정의정서에 서명하였다.
1956 - 프랑스령 모로코 독립
1912년 이후 프랑스와 스페인령으로 나뉘어 식민통치를 받아온 모로코.
1956년 오늘 프랑스령 땅이 해방됐다.
수도 라바트(Rabat)는 온통 축제의 물결에 휩싸였다.
1944년부터 독립운동을 벌이다 1953년 추방됐던 무하마드 5세도 돌아왔다.
그는 국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왕궁으로 돌아가 이슬람 전제군주 '술탄'으로 복귀했다.
모로코는 한달 뒤인 1956년 4월 스페인이 통치하던 모로코 북부 지역의 주권도 되찾아 완전한 독립국이 된다.
1945 - 캐나다의 여성 화가, 작가 카(Carr, Emily) 사망
카 [Carr, Emily, 1871.12.13~1945.3.2]
캐나다의 화가·문필가.
서해안의 인디언과 풍경을 다룬 작품으로 유명하다. 카는 브리티시컬럼비아의 밴쿠버에서 미술을 가르치면서 종종 인디언 마을로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작품으로 경제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작업을 중단해야 했다. 건강이 나빠지면서 여행을 할 수 없게 되자 저술로 방향을 바꾸어 풍자적인 인물 연구로 활기에 넘치는
6권의 자서전적인 책을 저술했다. 인디언을 다룬 〈Klee Wyck〉(1941)과 하숙집 주인과 개 사육사로서 겪은 빅토리아에서의 경험을 담은 〈모든 것을 갖춘 집 The House of All Sorts〉(1944), 자서전인 〈커지는 고통 Growing Pains〉(1946), 영국 요양소에서의 생활을 그린 〈휴식 : 스케치북 Pause : A Sketch Book〉(1953) 등이 바로 그것이다.
1931 - 러시아 초대 대통령 고르바초프(Gorbachyov, Mikhail) 출생
고르바초프 [Gorbachyov, Mikhail Sergeyevich, 1931.3.2~ ]
고르바초프는 공산당 서기장과 대통령을 지낸 소련의 정치가이다. 1985년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된 이후 무능력한 당간부들을 패기에 찬 신진관료들로 교체하는 등 집권 초기부터 자신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주력했다. 1990년 2월 공산당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공산당 독재 폐기를 결의하고 최고 회의에서 대통령제를 채택함으로써 1990년 3월 소련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내세운 경제적·정치적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국내뿐만 아니라, 동유럽의 민주화 개혁 등 세계 질서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90년 세계 평화에 기여한
업적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91년 8월 공산당 내 보수파가 일으킨 쿠데타에 이어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가연합이 탄생하자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 발터 브루흐 특인 (허진 님 자료제공)
1908 - 독일의 전기공학자 발터 브루흐(Bruch, Walter) 출생
브루흐 [Bruch, Walter, 1908.3.2~1990.5.5]
1895 - 프랑스의 화가 베르트 모리조(Morisot, Berthe) 사망
모리조 [Morisot, Berthe, 1841.1.14~1895.3.2]
프랑스의 화가·판화가.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작품을 전시했으며, 친구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상파 화가들의 투쟁에 계속 참여했다. 정부 고위관리의 딸(그리고 중요한 로코코 화가인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손녀)로 태어난 모리조는 일찍부터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진지하게 미술에 몰두했다. 1862~68년에 그는 코로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을 그렸다.
1868년에 만난 마네는 그의 작품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마네는 모리조의 초상화, 예를 들면 〈휴식 Repose〉(1870경,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 하로비던스 로드아일랜드 미술관 소장) 등 여러 점을 그렸다. 마네는 모리조의 작품을 과거의 관습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고, 모리조는 마네에게 야외에서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모리조의 작품은 마네와 같이 구도를 강조했으며, 동료 인상파 화가들처럼 광학적 색채실험에만 몰두하지는 않았다.
모리조의 그림에는 그의 가족들이 자주 등장했는데, 특히 여동생 에드마는 〈풀밭에 앉아 있는 화가의 여동생 퐁티용 부인 The Artist's Sister, Mme Pontillon, Seated on the Grass〉(1873,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 소장)·〈화가의 여동생 에드마와 어머니 The Artist's Sister Edma and Their Mother〉(1870, 미국 워싱턴 D. C. 국립미술관 소장)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섬세하고 미묘하며 아름다운 색채(그는 차분한 에메랄드 빛이 섞인 빨강색을 자주 사용했음)로 모리조는 동료 인상파 화가들의 존경을 받았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모리조의 작품도 많은 평론가들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풍부한 교양과 매력을 갖춘 여성인 모리조는 말라르메와 드가, 르누아르 및 모네와도 친하게 지냈다.
그는 에두아르 마네의 동생 외젠과 결혼했다.
1876 - 로마 교황 비오 12세(Pius XII) 출생
비오 12세 [Pius XII, 1876.3.2~1958.10.9]
이탈리아 로마 출생.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바이에른에 파견된 교황사절로서 평화 실현을 위하여 활약하였고, 1929년 로마로 돌아가 국무장관에 취임함과 동시에 추기경이 되었다. 독일·오스트리아·유고슬라비아·바덴과의 종교화의(宗敎和議) 체결을 비롯하여 국무장관으로서의 명성을 높였고, 1939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평화회복을
위하여 진력, 전쟁 종결을 위한 열국간의 조정에 힘썼는데, 〈세계의 평화〉(1939), 〈평화안(平和案)〉(1947) 등의
회칙(回勅)으로 그의 정신을 보였다.
- 가부라기 기요카타[鏑木淸方] 작 '이치요 초상'
1872 - 일본의 여류작가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 출생
히구치 이치요 [桶口一葉, 1872.3.2~1896.11.23]
도쿄 출생. 본명 나쓰[奈津]. 나카지마 우타코[中島歌子]에게 와카[和歌]를 배웠고,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의 지도로 소설 《매목(埋木)》을 발표하여 인정을 받았으며, 그후 바바 고초[馬場孤蝶] 등 《문학계》 동인들과 교유하연서 《문학계》에도 기고하였다.대표작 《키 대보기》 《흐린 강(江)》 《섣달 그믐날》 등을 남기고 요절하였다.
1887년부터 말년에 걸친 방대한 일기(日記)는 높이 평가된다.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ひぐち いちよう, 1872년 5월 2일 - 1896년 11월 23일)는 일본의 유명한 여류 소설가이다.
24세의 나이로 타계했지만, 많은 작품을 남긴다. 주요 작품은 <키재기>, <섣달 그믐날>등이 있다.2004년엔 새
5000엔권 지폐에 일본의 제국대학 총장을 지냈던 니토베 이나조를 대신해서 등장, 일본인에게 더 유명해진다.
1844 - 네덜란드의 정치가, 저술가 헤르만 스하프만(Schaepman, Herman) 출생
1829 - 독일 태생 미국의 정치가 슈르츠(Schurz, Carl) 출생
1824 - 체코슬로바키아 작곡가 스메타나(Smetana, Bedrich) 출생
1817 - 헝가리의 서사시인 오로니(Arany, Janos) 출생
1793 - 미국의 법률가, 정치가 휴스턴(Houston, Sam) 출생
1791 - 영국의 종교개혁자, 신학자 웨슬리(Wesley, John) 사망
1760 - 프랑스 혁명기의 산악파 언론인, 정치가 데물랭(Desmoulins, Camille) 출생
1716 - 일본의 화가 이토 자쿠추[伊藤若沖]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