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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 왕을 참하라 (48편) *
* 청(淸)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 60만 * 조일전쟁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는 수만 명 정도 였는데,
병자호란때 심양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는 60만명을 헤아린다.
지금도 만주의 선양에는 많은 조선족이 살고 있는데, 이중에는 일제 때 건너간 사람 말고 병자호란때 끌려간 조선 포로의 후예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청(淸)은 포로들의 속환금을 받을 생각과 함께 적은 만주의 인구를 늘리려는 목적으로 이렇게 엄청난 수의 포로를 잡아갔다
'뒷날 심양에서 속환(贖還)을 바치고 돌아온 사람이 60만 명 이나 되는데 몽골군사에게 붙들린 사람은 숫자에 들지 않는다.' 의 기록이다.
이 숫자에 대한 기록은 최명길의
과나만갑의 그리고 정약용의 와 작가미상의 등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좀 보탰다고 해도 엄청난 숫자이다 조선의 인구가 1천만 명을 넘어선 것은 1511년 (중종 6년)이다.
조일전쟁 때 700~800만 정도로 줄었다가, 1642년(인조 20년)에 다시 1천만 명을 회복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병자호란 때 전 인구의 5~6퍼센트가 잡혀간 것이다
포로들은 수백명씩 조를 이루어 갔으며 청군이 뒤에서 호송했다.
가다가 볼일을 보고 싶으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아무 데서나 옷을 내리고 볼일을 보았다.
가다가 병이 들거나 하면 가차없이 버리고 가거나 죽여 버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호송 도중에 죽었는지 모른다
도망친 사람도 많았는데,
도망치다가 잡히면 그때부터는 귀에 구멍을 뚫고 한데 묶어 끌고 갔다
미국에 잡혀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연상하면 쉽게 감을 잡을 수 있다
끌려간 포로 중에는 양반집 가족들도 많았다
돈 많은 양반들이나 벼슬아치들은 자기네 가족을 속환(贖還)하는 데 거금을 아끼지 않았다
그 바람에 가난한 사람들은 가져간 돈으로는 가족을 데려올 수 없어 서로 끌어안고 울음바다를 이루는 경우가 지천이었다
대표적인 반정공신이자 영의정인 김류(金瑬)는 전쟁중에 도체찰사 였다.
그는 첩의 딸이 포로로 끌려간 것을 알고 역관 정명수에게 딸의 속환금으로 은 1천냥을 내겠으니 돌아오도록 주선해 달라고 하였다
이 네가지 없는 인간 때문에 포로값이 올라 숱한 포로가 돌아오지 못했다. (이룬..뜨그랄~) 당시 은 1천냥이면 막대한 돈이었다.
농군의 하루 품삯이 한냥이었고, 쌀 한석이 닷냥 이었으니 쌀 200석에 상당하는 돈이었던 것이다
자신이야 반정공신 에다 영의정이니 그간 해먹은 돈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김류(金瑬)에겐 1천냥이 별것 아닌 돈이었겠으나,
이 바람에 50~60냥에 지나지 않던 포로값이 두당 수백 냥으로 올라 가난한 사람들은 그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가족을 데려올 수 없었던 것이다.
(오나가나 돈 없는 사람들만 죽어나는 드러운 세~상! 퉤퉷..)
1637년부터 청황제의 명으로 포로의 공개매매가 심양에서 있었는데 조선에서 온 가족들과 포로들이 서로 만나 울고불고 흥정을 하고 시끌벅적했다.
노비가 된 포로를 사러 오는 사람은 먼저 여자든 남자든 건강상태부터 본다.
노비들의 옷을 모두 벗긴 다음 앞뒤를 잘 살피고 피부를 본다
그런 다음 벌거벗은 채로 앉았다 일어섰다를 몇 번 시켜본 다음 걸음을 걸려 관절을 본다.
다음으로 발바닥과 치아를 살핀다 여자를 사서 첩으로 삼으려는 사람은 여자의 가슴, 성기, 체모 등을 상세히 살펴보고 흥정에 들어간다
말하자면 시장이 온통 나체쇼장이 되는 것이다.
(아놔~차라리 혀 깨물고 죽고 말꼬야!)
조선 여자 가운데 이러한 수모를 참을 길 없어 옷 벗기를 거절한 여자들 중 채찍을 맞고 죽은 여자도 부지기수였다
조선 조정에서도 은을 내어 포로를 사오긴 했다.
그런데 이 🐕같은 것들이, 저희들이 등신같이 굴어 포로가 생긴 것인데... 돌아온 포로는 공노비가 되어야 했다.
나랏돈으로 샀으니 당연히 나라의 노비가 되어야 한다는 짱구였다.
이러니 차라리 청나라에서 살다 죽겠다는 포로도 많았다.
* 조선이 버린 여인들, 화냥년 *
화냥년은 환향녀(還鄕女, 고향으로 귀향한 여인)에서 유래되었다.
1637년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은 거의 60만 명의 포로를 청으로 끌고 갔는데, 그 중 젊은 여인이 거의 20만 명에 달했다
청(淸)이 이들을 끌고 간 이유는 그들의 부모에게서 몸값을 받고 풀어 주려고 한 것이었고,
물론 몸값을 받을 때까지는 당연 데리고 잤다
그러나 여자 포로 대부분이 가난한 집의 딸들이라 돈을 주고 풀려난 경우는 별로 많지 않았다
이렇게 노예로 살다가 목숨을 걸고 청에서 탈출하여 고국땅을 밟은 여인들은 "몸을 더렵혔다"며 손가락질 하는 가문과 남편들의 냉대와 멸시를 견디지 못해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목을 매어 자살하는 일이 빈번했다
(뭣이 중헌디? ㅉㅉ..)
환향녀(還鄕女)들이 자살하는 사례가 급증하자 조선 조정은 홍제동(弘濟洞, 널리 구제하는 동네)
개울에서 더렵혀진 몸을 씻는 것으로 일체의 과거사를 묻지 못하게 했으나, 이는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칭기스칸은 몽골을 통일하기 전 세력이 미약했을 때,
적대관계인 메르키트 부족의 침입을 받고 아내인 보르테를 놓아두고 도망친 일이 있었다
당시 상황이, 둘이 같이 도망치면 둘 다 잡혀서 죽을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르테가 자청해서 남아 칭기스칸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 주었다
보르테는 잡혀서 메르키트의 부족장 집안의 사내 에게 주어져 살다보니 임신을 하게 되었다.
(흐미..우짤스까요~😭) ( 칭기스칸과 보르테) 칭기스칸이 의형제인 자무카의 도움을 받아 메르키트 부족을 격파하고 아내를 되찾을 때 그녀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 있었고, 보르테는 칭기스칸을 보자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그녀를 감싸안으며 칭기스칸이 말했다 "그 아이가 누구의 자식이든 내 첫째 아들이 될 것이다."
칭기스칸이 세계 최대의 제국을 만든 이유를 여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끄러운 줄 알자!
기백도 없고 기대도 없는 조선 사내들아! 이런 네가지 없는 짓은 조일전쟁 때도 있었다.
조정이 일본군에게 몸을 뺏겨 임신한 여인들과의 이혼을 금하자 남편들은 그녀들을 내치고 후처를 구하러 바삐 다녔다
수많은 임신한 여인들이 길에 나앉게 되자 조정에서는 임신한 여인들을 한데 모아 집단으로 거주하게 하고 보살펴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이태원 (異胎圓)'이다.
이태원의 '이'자는 '다를 이'자이고 '태'자는 신생아의 태를 말한다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 경기도 일대는 청군에 의하여 쑥밭이 되었다
청군의 눈에 띈 아녀자들은 모조리 강간을 당했다.
전쟁중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 문제는 양반집에서 실절 (失節)한 여인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어떻게 더러운 몸을 가지고 종묘제사를 지내고 후손을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들아~
그런 줄 알면 칼이라도 들고 나와 청군을 가로막지...
나라의 법도 🐕법인 것이,
과거에 응시하려면 친가 3대와 외가 2대의 인적사항을 적어야 하는데
실절(失節)한 여자의 자식은 서얼(庶孼)의 자손처럼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다.
이러니 절개를 잃은 여자는 천상 어디 가서 죽던가 신분을 감추고 행방불명이 되어야 자식이 사니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많은 여자들이 목을 맸고, 많은 여자들이 거지가 되었다
청에 잡혀가는 포로끼리도 신분이 탄로날까봐 신분이나 이름을 묻는것은 금기여서 참나무댁, 미루나무댁 등으로 서로 불렀다
잡혀가는 여자 중에는 기생도 있었고, 백정의 아내와 딸들도 있었다
하여간 청에 포로로 잡혀가서 팔자 핀 사람들은 기생들이나 백정 같은 천민들 이었다.
조선시대 기생이란 대개 관비 (官婢)를 이르는 말이었고, 관비는 수령이나 고관, 사신 등 갖가지 사람들의 수청(守廳)을 들어야 했다
그러다가 자식이라도 낳으면 그 자식도 천민이 되는 기구한 팔자였다.
이러한 팔자의 기생들은 차라리 청군에게 잡혀가면 조선에서 보다 훨씬 더 사람 같은 대접을 받았다
백정(白丁) 출신의 포로도 마찬가지였다 여진족들은 수렵과 채집이 생업이어서 조선에 와서도 소, 돼지, 닭 등의 가축을 도살해서 주식처럼 먹었다
그러나 그들이 짐승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요리법은 대단히 거칠었다
고기를 그대로 삶아서 둘러앉아 칼로 한 토막씩 베어 먹는 식이었다
이를 보던 조선 백정이 짐승을 다루는 법과 요리법 몇가지를 일러주자 다음부터 짐승을 도살할 일이 생기면 조선 백정만 찾게 되었다.
백정은 여진족들에게는 소중한 기능인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짐승이 청에 포로로 붙들려가더니 사람이 된 것이다
조선에서 백정(白丁)은 사람이 아니었다. 조선에서 백정이 할 수 있는 일은 짐승을 도살하거나 버들고리를 짜는 일 사형수의 목을 베는 망나니 일,
양반집 잔치에 불려가서 일을 해주고 겨우 밥이나 얻어먹는 일이 전부였다
그들은 일반 양민들과 함께 한동네에서 살지 못하고, 외진 곳에 따로 모여 살아야 했다
어린 평민에게도 말을 할 땐 '소인'이라고 해야 했으며, 그들 앞에서는 술, 담배도 못했다
옷도 중치막이나 명주를 입지 못하게 했고, 모자도 패랭이만 쓰도록 했으며, 가죽신도 신을 수 없었다 (패랭이)
당연히 그들의 자식들도 과거를 볼 수 없어 똑똑한 자식을 가진 백정들은 자식들이 안타까워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야 했다.
그런데 여진족들은 양반, 상놈이 없고 백정을 기능인으로 대우하니,
백정 입장에서는 포로된 것이 차라리 팔자가 핀 것이었다
조선사를 쓰다 보면 참으로 불쌍한 백성들의 모습 때문에 마음이 아리다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조선 이 왜 더 이상 존재해야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다.
가장 좋은 가정은, 조일전쟁 이전에 조선이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서는 것이었다 라고생각해본다~
*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49편) *
* 봉림대군의 귀향과 효종 등극 * 봉림대군 이호가 소현세자와 함께 8년간의 볼모에서 풀려나 조선에 돌아왔을 때 많은 백성들이 연도(沿道)에서 그를 맞았다.
연도에 나갔던 백성들은 봉림대군을 보고 두 가지 면에서 깜짝 놀랐다.
첫째는 봉림대군의 준수한 외모였고,
두 번째는 너무나도 검소한 행장 이었다
거의 9년을 외국에서 생활한 왕자가 돌아오는데 짐바리는 겨우 3개였고, 사서(史書)에 실릴만큼 봉림대군(鳳林大君)은 미남 이었다.
외모로 따지면 아마 조선 왕들 중 봉림대군이 가장 미남인 듯 싶다.
장비의 큰 형같이 생긴 정조 (正祖)와 딱 반대인 것이다.
당시 조선이 매년 청(淸)에 보내는 공물이 500바리 정도였으니 봉림대군
의 짐이 얼마나 간소 했던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인조의 미움을 받은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와 1645년 갑자기 변사(變死)하자,
세자에 책봉되어 1649년 31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었으니 그가 바로 북벌하면 떠 오르는 봉림대군, 즉 효종이다
봉림대군은 청(淸)에 볼모로 있을 때, 청의 명나라 정벌 전쟁에 동원되어 수차례 전투에도 참전했었다
그의 이러한 경험은 소현세자와 달리
청 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를 갈게 만들었고, 동시에 청의 군사력을 알고 지리를 익히게 하여 청(淸)에 대한 두려움을 반감 시켰다
봉림대군은 오랑캐가 중원 의 문물을 받아들이면 한족화 되어 자연히 진취적인 기상과 전투력이 떨어질 것이므로 준비하고 있다가 때가 되어 청(淸)을 치면, 명나라 유민들과 청에 끌려가 살고 있는 조선인들의 호응으로정청복명 (征淸復明)을 할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요대목에서 정청복명 이란?*
정청복명(政淸腹明)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정치가 맑아야 백성의 배 속이 명확(안정)해진다 는 뜻
주로 위정자나 공직자의 청렴함이 백성들의 민생과 직결됨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표현
정청(政淸): 정치가 깨끗하고 투명하며, 부정부패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복명(腹明): 백성들의 '배 속이 밝다'
목민관(오늘날의 지방자치단체장)의 가장 큰 덕목인 청렴이 결국 백성을 풍요롭게 하는 근본임
그러나 당시 청나라는 조선에 선진 문물을 전해 줄 뿐만 아니라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그런데 조선은 북벌론이라는 명분에 얽매여 이런 창구를 스스로 닫아버림으로써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자체가 차단되어 후진의 길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뭐가 중헌디?)
* 노론(老論)의 대부 송시열 *
당시 효종의 북벌에 대한 이론적 지주는 효종의 스승이었던 송시열 이었다
송시열은 북벌을 추진할 의사는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추종하는 성리학의 명분때문에 북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가 북벌론에 대한 이론적 뒷받침을 함으로써 그 이론은 조선 후기 사상계를 지배했고,
그 결과 조선은 더욱 낙후되고 고립되었다. (이룬 덴쟝~송시열 미워할꼬야!)
지나치게 고집이 세고 방편과 술수와 음모를 겸비한 삼류 인물 송시열 조선 쇠퇴의 가장 큰 원죄를 지닌 인물 중 하나인 노론의 대부 송시열은 조일전쟁이 끝난 뒤인 선조40년(1607) 충청도 옥천군 에서 태어났다(송시열)
집안이 가난했던 송시열은 학문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던 아버지 송갑조로 부터 주자(朱子),이이 (李珥),조광조 (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송시열은 8세 때부터 친척이자 역시 노론의 거두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 (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인조3년, 18세가 된 송시열은 대유 김장생(金長生)의 문하로 들어가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 문하 에서 학업을 마쳤다.
김장생(金長生)은 송익필 (宋翼弼)을 사사(師事)한 조선 예학의 큰 산맥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이들은 후에 서인 기호학파를 이루게 된다 .
송시열 은 27세 되던 인조11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이 알려져 봉림대군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약 1년 간의 사부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 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인조는 송시열 과 송준길에게 조정에 나와줄 것을 여러 번 요청했으나 이 둘은 인조의 청을 단호히 거절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요기까지는 잘했어요~~)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송시열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 의 관직이 내려지자 벼슬에 나아간 송시열은 기축봉사 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내세웠다
즉, 존주대의 (尊周大義, 명나라를 중화(中華)로, 청나라를 오랑캐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
를 역설하여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송시열의 문집인 이나 등을 보아도 송시열이 북벌(北伐) 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준비에 대해 기술한 것이나 조정에 건의한 사례를 단 한 건도 찾아볼 수는 없다.
그는 단지 북벌(北伐)의 대의만 주장했을 뿐이다.
당시 서인(西人)의 영수인 송시열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실제로 북벌할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불러들인 전쟁인 병자호란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그래서 위정자 들의 책임회피는 나라가 망하는 지름길이 되는것이여! 이런..뜨그랄~)
1659년 5월 효종(孝宗)이 급서한 뒤, 송시열은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고,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해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 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송시열은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송시열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송시열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 이었으니 그의 권세를 가히 짐작 하고도 남을만 하다
송시열 은 숙종15년(1689) 숙의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데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사사되었다🗣
얼마전 '군주(君主) 라는 역사 드라마 재방송을 돌려보기 하면서 악역으로 나오는 대목 (허준호 분)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비천함으로 소중한 모든것들을 잃어야 했던 대목은 세상에 대해 독을 품어 정상의 자리에 올라 앙갚음을 하며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
수많은 백성을 괴롭히고 왕까지 쥐락펴락하는 대목은 주인공인 세자(유승호 분)가 자신과 맞서 싸워 "대목과 편수회가 사라진 조선에서 꽃을 피우고 싶다 편수회를 무너뜨리고 새나라를 건설하고 싶다."라는 말에 그리 물었다
그대에게 있어 조선이란 무엇이냐? 나에게 조선이란 나라는 가난한 나라이다.
소수의 풍요로운 양반만이 잘사는 나라가 조선이다
백성은 굶주리고 헐벗은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
그러니 궁핍한 백성이 얼마나 살아남겠느냐?
대목은 이러한 말로 자기와 손잡고 새나라를 건설하자고 세자 이선을 설득한다.
얼마나 백성들의 삶이 피폐했으면 일개 힘없는 백성이 그리 악독함을 품었으랴!대의와 명분이 그리 소중한 것인지? 위정자의 몫이 무엇인지..
우리의 시대를 후손들은 어찌 평가할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