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山)에 언덕에
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찿을 수 없어도
하ㅗ사한 그의 꽃
산(山)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行人)d,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人情)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시집 『아사녀(阿斯女)』, 1963)
[작품해설]
일반적으로 신동엽의 작품 경향은 간결하면서도 단순한 시어와 고백적인 어투로써 한(恨)으로 대표되는 민족 정서를 진솔하게 표현한 점이 주조를 이룬다. 이 시는 시가 씌어진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4.19 혁명의 영령들을 기리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 시의 형식 구조는 3⸱4음수율을 바탕으로 한 4음보의 반복적 형태로서, 4음보의 율격은 균형잡힌 틀 속에 교술적 내용을 장중하게 읊조려 음송(吟誦)에 적합하다. 이 4음보는 2음보끼리 대구를 이루며 1.3음보에서 강하게 낭독하게 되므로 안정감을 주는 효과가 있다. 음보란 소리의 마디로서 관습적인 체계로 형성되는데, 우리 시에서는 행을 이루는 음보수는 고정적임에 비해 음절수는 가변적이다. 이 시도 각 연의 음보수는 4음보로 고저적이나 음보를 이루어 음절수는 2~6음절의 가변성을 나타낸다.
또한 1⸱2연과 4⸱5연의 중간에 의치하여 대칭적 균형미를 조성하고 있는 3연은 전통적 율조인 7⸱5조 리듬에 ‘행인아’라는 호칭을 도치시킴으로써 강렬하면서도 간절한 호소력을 자아낸다.1⸱2⸱5연은 음수율⸱행⸱어조 등이 동일한 반복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4연은 2⸱4⸱2⸱4의 음수율로 대구와 반복 병치의 구조로서 3연에서 고조되기 시작한 감정이 절정을 이루게 되낟. 이 4연은 호흡도 빠를 뿐 아니라, ‘눈’ ⤑ ‘바람’ ⤑ ‘인정’으로 이미지가 교차되면서 점층적 효과를 주게 된다. 한편 3⸱4연을 합하면 전체의 시 형태는 매연 3행의 기⸱승⸱전⸱결의 전통적 형식이 되는데, 이것은 기⸱승⸱전⸱결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한 시인의 의도적인 시각적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는 죽음으로 인해 단절된 ‘그’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특히 부정형의 서술어를 빈번히 사용하여 상실과 사라짐의 비극적 상황을 더욱 절실하게 나타내며, 전통적 율격을 바탕으로 한 여성적 어조는 정중한 여운을 주는 의고형 어미 ‘-지어이’와 어울려 작품의 분위기를 애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모습과 숨결은 화사한 꽃으로 피어나 자연 속에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화자만의 그리움의 대상에 머물지 않고 민족 정서의 대상으로 존재함으로써 민족의 생명력으로 승화된다. 그러나 순환 반복하는 영원한 자연 속에서, 화자는 ‘그’의 숨결을 느끼면서도 실체로서 ‘그’를 인식할 수 없다는 데에 비극이 있다. 따라서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으며 그의 환생을 소망하는 화자는 바로 민족의 보편적 정서인 한(恨)의의 대상화(對象化)라 할 수 있다.
신동엽은 자연적인 이미지를 통해 인간과의 조화를 시도한다. 이러한 시인의 상상력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원초적 생명과 민족의 순수성에 대한 믿음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자연을 포용하는 대지의 이미지는 인간이 가장 순수하게 뿌리내리고 이념의 갈등이나 현실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생명력의 공간으로 ‘산’ ⸱ ‘언덕’ ⸱ ‘숲’ ⸱ ‘눈’ ⸱ ‘바람’ 등의 자연 현상으로 표상된다. 즉 ‘산’은 수직적 상승 지향성으로 고통과 혼돈의 현실 세계를 초극하는 신성한 공간이며 ‘들’과 ‘숲’은 푸르른 생명력을 , ‘바람’은 붙잡을 수 없는 무형의 형체로 시공을 초월하는 정신적 영혼을 나타내는 한편, ‘눈’은 순결이나 숭고함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대지의 이미지는 ‘그’의 영혼과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인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작가소개]
신동엽(申東曄)
1930년 충청남도 부여 출생
단국대학교 사학과 및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당선되어 등단
1967년 장편 서사시 「금강」 발표
1969년 사망
1980년 유고시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발간
시집 : 『아사녀(阿斯女)』(1963), 『금강』(1967), 『신동엽전집』(1975),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1980), 『꽃같이 그대 쓰러지면』(1989), 『젊은 시인의 사람』(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