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으로 우리 민족의 거족적이고 전국적인
저항을 경험한 일제는
1919년 8월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총독이 물러나고
사이토(齋藤實)가 조선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사이토는 일제의 식민 정책에서 일대 전환을 꾀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문화정치’(文化政治)였다.
이는 일제 조선 지배정책의 기본 방침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무력을 앞세운 강압적인 통치 방식이었던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철회하고,
보다 교묘하고 악랄한 민족 분열 정책을 시행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화정치’에 따라 헌병 경찰제가 보통 경찰제로 바뀌고,
관리와 교원의 제복이 사라졌으며,
조선 총독을 문관(文官) 중에서도 임명할 수 있도록 바꾸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인 것이었고,
일제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바로 조선인들을 회유하여
친일파(親日派)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제의 지배 정책 변화는
교회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사이토 총독이 구상했던 이른바
‘조선 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각종 종교 단체에서
친일파가 최고 지도자가 되게 하고
일본인을 고문으로 앉혀 어용화한다’고 쓰여있는 것을 통해
볼 때, 교회에 대해서도 일제에 협력하는
친일 세력을 육성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가 되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일제는 1919년 총독부에 종교과(宗敎課)를 설치하여
종교 행정과 선교사들과의 연락을 맡게 했고,
이듬해에는 이른바 ‘포교 규칙’(布敎規則)을 개정하여
교회 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었다.
포교 규칙은 1906년 ‘통감부령’(제45호)으로 제정,공포된 것으로,
1915년 8월과 1920년 4월에 각기 개정되었다.
이 규칙에 의하면 교회를 설립하거나 폐지할 때
총독에게 신고하도록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안녕 질서를 문란케 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할 때에는
총독이 교회를 폐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를 보면 일제가 교회와 민족 독립운동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이것은 기독교의 선교 활동을 간섭,통제,탄압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
이로 인해 교회의 모든 활동은
총독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아야 했다.
1933년 2월 일제는 종교인들을 친일 세력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른바 ‘경성 교화단체 연합회’를 발족시켰으며,
뒤이어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시켜
1935년 10월 ‘조선 교화단체 연합회’가 출범하였다.
그에 앞서 대구에서는 개신교를 비롯한
각종 종교 단체를 하나로 묶어
‘대구부 교화단체 연합회’가 만들어졌다.
이는 각종 강습회,강연회 및 시국 간담회를 개최하여
일제의 지배 이념과 정책을 종교계에 주입하기 위한
친일적 성격의 단체라고 할 수 있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키면서
이른바 ‘황민화 운동’과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추진하였고,
그에 저항하는 조선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과 회유 정책을 폈다.
특히 일제는 전쟁 수행을 위한 사상적 통일을 기하기 위해
각종 행사를 거행하였고,
나아가 신사 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였다.
신사(神社)는 일본의 이른바 ‘천조대신(天照大神)’과
‘
명치대황(明治大皇)’이라는 ‘가미(神)’와
어령대(御靈代)’라는 상징물을 숭배하도록 한 곳으로,
일본인들의 정신적 구심체로서의 기능을 했다.
지금까지도 일본에서는 ‘80만 신(神)’ 혹은 ‘8백만 신’이라 부를
만큼 많은 ‘가미’를 숭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인 거류민들을 중심으로 신사가 건립되기 시작하였고,
‘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 이후에는
조선 총독부의 보호 아래 ‘1면 1신사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전국 각 지역의 중심지에 신사를 세웠다.
그리하여 1938년 전국에 약 2,300여 개의 신사가 있었다.
송천교회의 인근 지역인
김천과 구미에도 각각 신사가 설립되었는데,
김천에는 현재의 김천 문화원 뒤 도서관 자리에,
구미에는 구미역 뒤의 금강사 자리에 신사가 있었다고 한다.
신사참배하는 한국 학생들
일제는 학교를 중심으로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는데,
당시 기독교계 학교들은 대부분 이에 참여하지 않았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기독교계 학교에 대해 사찰을 강화하고
탄압을 가하여 학교장을 파면하거나
심지어 강제 폐교되는 학교까지도 나타났다.
이에 대해 미국 북장로회는 1938년
‘신사 참배는 우상숭배로 신앙 양심에 위배되므로
절대로 응할 수 없다.
신사 참배를 강요할 경우 학교를 폐쇄하고
교육에서 인퇴(引退)할 수 밖에 없다’는 결정으로
많은 기독교계 학교들이 자진 폐교하였다.
일제는 나아가 교회에 대해서도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는데,
당시 일제의 논리는 ‘신사 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예배 행위가 아니고
조상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 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 교회에서는 교파에 따라 입장을 달리했는데,
장로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파에서는 일제에 굴복하여
일찍부터 신사 참배에 응했다.
당시 가장 치열하게 일제에 저항했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또한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에서
신사 참배를 가결한 상황에서
일제의 강압과 위협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제27회 총회에서 이를 결의하였다.
그후 총회 총대 일동은 평양 신사를 참배하였다.
당시 총회에서 신사 참배를 결정한 결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등(我等)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은 본의(本意)를 이해하고
신사 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하며
또 이에 신사 참배를 솔선 여행(勵行)하고
추(追)히 국민 정신 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에 참가하여
비상 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함’
[소화 13(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당시 경북노회에서 제27회 총회에 참석한
총대(목사,장로,선교사)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목 사 | 김봉도(대신교회․노회장), 이문주(남산교회․전 총회장), 김원휘(동산병원), 신후식(계성학교), 유재기(침산교회․서기) |
장 로 | 김정오(신정교회), 양찬언(칠성교회), 송원재(안심면 동호교회), 박낙현(신천교회) |
선교사 | 부해리, 라의온(William M.Lyon) |
한편 이보다 한 달 앞선
8월 경북노회 제36회 제2차 임시 노회에서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의 의식임을 확인하고
국민의 의무로 신사 참배’ 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신사 참배 결의에 대하여
일제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소화 10년(1935년) 이래 세인의 주목을 끌어왔던
야소교도의 신사 참배 문제는 완전한 해결을 고했고,
조선 기독교는 소위 일본적 종교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 라는 말은
이미 허구였음을 명확히 알 수 있고,
일제의 의도에 따라 한국 교회가
얼마나 철저하게 일제에 순응하여 갔는가를 또한 짐작할 수 있다.
이에 후속하는 조치로
일제는 1939년 1월 ‘종교단체법’을 공포하였는데,
이는 기독교를 일본 종교화 또는 신도화(神道化)하기
위한 법적 조치였다.
대구신사 입구의 모습
1937년 일제는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일으켜
대륙 침략을 자행했다.
이로 인해 일제의 통치는 군국주의 체제에 돌입했고,
전쟁이 점차 확대되어 감에 따라
조선은 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兵站基地)로 편입되어 갔다.
당시 식민 지배에 냉담한 태도로 일관하던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한 만행을 계획하였다.
다음의 자료는 일제의 당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전조선 59만에 달하는 예수교도들은
시국에 대하여 냉담한 태도를 견지하고,
신사(神社)에 있어서와 같은 국가적 행사에 참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계명에 어긋난다고 하여 참여하지 않으며 …
잘못된 평화관을 가지고 반전적(反戰的)인
언사를 논하는 경우 등의 사건이 여러 곳에서 발생하여
총후 국민정신의 결속을 문란케 하는 사례가 일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1938년 3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마련했는데,
그 내용 중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시국 인식을 철저히 하기 위하여
예수교 교역자 간담회를 개최하여 지도계몽에 노력하고 …
2) 교회당에는 될 수 있는 한 국기 게양탑을 세울 것.
3) 찬송가,기도,설교 중에서 그 내용이 불온한 것에 대하여는
출판물의 검열 및 임감(臨監 = 현장에 가서 감독함) 등에
의해서 엄중 취체할 것.
4) 국체(國體)에 적합한 야소교(耶蘇敎)의 신 건설 운동에
대하여는 … 목적이 순진하고 장래 성과가 예상되는 것에
대하여는 이때 적극적으로 원조하여 줄 것’
등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일제는 ‘국체에 적합한 야소교’를 만듦으로써
기독교의 변질을 강요하여
그들의 침략 정책 수행에 이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일제는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을 결성하여
이른바 ‘전시 체제 하에서 국민 정신을 강화하여
내선 일체(內鮮一體)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 하부 조직으로 각 지방 행정 단위마다 지방 연맹이 갖추어지고
직종별로 각종 연맹이 조직되었으며
그 아래에 애국반(愛國班)이 만들어졌다.
나아가 일제는 1939년 9월 신의주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8회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을 결성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따라 총회는 그 결성식을 갖고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고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정신을
세계에 선양함은 황국부동(皇國不動)의 국시(國是)이다.
아등(我等)은 이에 더욱 더 단결을 공고히 하여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 일체(內鮮一體)의
전 능력을 발휘해서
국책 수행에 협력하고 또 복음 선전 사업을 통하여
장기 건설의 목적을 관철할 것을 기함’
그 아래에는 지역별 노회 연맹이 결성되었고,
각 교회에는 애국반이 조직되었는데
이로 인해 교회의 모든 조직이 이른바
‘국민정신총동원 운동의 추진’을 위한 조직으로
탈바꿈하였던 것이다.
이후 1940년대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이 조직을 재편성하여
‘국민총력 조선연맹’으로 바뀌었다.
1940년 3월 ‘국민총력 경북노회 연맹’에서
각 교회에 내려진 지시를 보면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⑴ 매월 초 1일에 신사 참배할 것
⑵ 매월 첫 주일은 애국 예배로 지킬 것
⑶ 국가적 행사의 여행(勵行)
⑷ 특별 집회에는 반드시 국가 의식을 행할 것 …
⑺ 시국 표어 ’황도 실천(皇道實踐),
전도 보국(傳道報國)‘를 예배당 정면에 붙일 것’
당시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애국주일을 정하여
주일헌금을 전쟁 수행에 필요한 위문대를 제작하기 위해
노회로 올렸다.
송천교회에서는 1940년 10월 애국주일 때
김천 황금동 교회와 함께 2원의 헌금을 납입하였음을
<노회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교회를 통한 공출(供出)도 이루어졌는데,
이는 전쟁 수행을 위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각 가정에 있는 놋그릇[鍮器]을 교회에 헌납하도록 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더 나아가 각 교회에서 예배시간을 알리기 위해 사용하는
교회 종까지도 빼앗아 가기 시작했다.
송천교회 종각(1956.9.3)
1942년 5월 경북 노회에서 각 교회에 보낸 공문을 보면,
‘오노회(吾老會)에서는 관내 수백여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종(鐘) 및 철제 종각, 기타 철물을 일제히 헌납하기로 결의’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각 교회는 일제에 교회 종을 모두 빼앗겼다.
송천교회에서도 교회 종을 일제에 빼앗겼는데,
이때 빼앗긴 종을 광복 후
1956년경에 다시 되찾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일제는 한국의 기독교를 이른바
‘순 일본적 기독교’로 바꾸기 위하여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해산하고
1943년 5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을 출범시켰다.
이에 따라 경북노회에서는 경동,경안노회 등을 합쳐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경북교구회’를 창립하였다.
이에 따라 송천교회에서도 1943년 6월 당회를 폐지하고
일본 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의 규칙에 따라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송천교회 장로회’로 개편되었다.
당시 당회장은 김원휘(金原輝) 목사,
당회원은 김정수,유병도 장로였다.
이후 <당회록>을 보면 당회장과 당회원들의 성명이
모두 일본식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는데,
김원휘 목사가 김택효직(金澤孝直)으로,
김정수,유병도 장로는 각각 청목정수(靑木正秀),
옥천병도(玉川秉道)로 나타나 있다.
이는 한국이 아닌 일본의 기독교단에 속하게 되어
일본의 지시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교회를 지키기 위한 부득이한 개명(改名)이었다고 생각된다.
일제 말엽인 1940년대에는 이른바
‘대동아 전쟁(大東亞戰爭)’의 발발로
탄압이 더욱 극심해져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를 때
<믿는 사람들은 군병같으니>(389장),
<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371장),
<십자가 군병들아>(390장),
<만왕의 왕 내 주께서>(138장) 등은
일절 부르지 못하게 하였고,
어떤 찬송가는 일부 구절을 부르지 못하게
먹으로 지우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사도신경>의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 라는
구절이 이른바 일제 신도(神道)의 창조 설화에 위배되고,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구절도
일본 왕의 영존 사상과 위배된다는 이유로 금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예배 시작 5분 전에는
일본 왕의 사진에 절하
‘동방 요배(東方遙拜)’를 하도록 강요했으며,
‘전몰 용사를 위한 묵념과 출전 장병들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의식을 갖도록 하였다고 한다.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일제 하의 교회는
강압적인 식민 지배 정책에 따라
그들의 지배 이념과 정책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전락하여 갔다.
또한 일제는 교회라는 조직을 이용하여
침략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효과적으로 수탈하는 방편으로 삼기도 하였다.
나아가 예배에 앞서 각종 국가 의식을 강요함으로써
그들의 황민화 정책을 심화시키는 도구로 이용하였다.
일제 식민치하에서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활동도 제약을 많이 받았는데,
미국 북장로회는 신사 참배에 반대함으로써
교회나 한국 교인들에 대한 교육 활동이 금지되었다.
당시 일제는 선교기지 안에 있는 작은 신사(神社)를 옮겼다는
이유로 선교사를 투옥하기도 하였고
기도회의 프로그램과 기도 제목들을 이유로
선교사를 체포, 구류형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제의 위협으로
선교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판단 아래
선교부는 1941년 11월 선교사들에게
휴가 명목으로 한국을 떠나도록 지시했다.
또한 1943년에는 대구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안두화 목사와 별리추 부부가 자택에 연금되었다.
이로 인해 1943년 12월 선교사들에 의한
모든 선교사업이 중단되었다.
송천교회의 설립자 부해리 선교사도
1941년 9월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한국을 떠났는데,
이로 인해 1899년 10월 한국에 처음 발을 내디딘 이래
32년 동안 한국에서의 선교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4회 전조선주일학교 대회 기간 중
주마정벌군 출범식장(1933.10.8)
일제는 1945년 7월 한국 내 모든 기독교회 교파를 통합하여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을 출범시켰다.
이는 당시 한국 내 기독교회의 장로교,감리교,구세군 등의
각 교파를 통합한 것으로,
초대 통리(統理)에 김관식(金觀植) 목사가 취임하였다.
당시 송천교회에서는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는 1944년부터는
일본 기독교 조선 장로교단의 지시에 의하여
주일학교와 주일 저녁,수요 저녁 예배를 폐지당하였다.
이것은 당시 모든 교회에 공통된 상황이었다.
송천교회에서 주일학교가 재개된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월부터였다.
또한 대구 지역의 경우에는
교회가 일제의 육군 병원으로 징발되기도 하였고,
농촌 지역에서는 주일에도
국민개로 산업확충운동(國民皆勞産業擴充運動)에 동원되어
예배 시간이 제한되기도 하였다.
일제 하의 한국 교회는
도입 초기에 청교도적 신앙을 가진 선교사들이
술과 담배를 엄격히 금지하였기 때문에,
한국민들로부터 ‘술과 담배를 금하는’ 종교로 인식되었고
이는 한국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한국민들 사이에서는
술,담배,아편,공창(公娼) 등이 크게 만연하였는데,
이는 일제가 한국의 민족문화와 정신을 파괴하려는 의도에서
일본식 퇴폐 문화를 한국에 이식한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한국 교회가
이를 금지하는 절제(節制) 운동을 편 것은
단순한 신앙운동의 차원을 넘어
민족운동의 성격을 엿보게 해 주는 것이었다.
이는 금주(禁酒) 운동을
‘조선을 살리는 운동’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데서 잘 나타난다.
이것이 당시의 교회 성장에 큰 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전통이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음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일제 하의 송천교회는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큰 성장을 했다.
1920년 송천교회와 황금동 교회 등
여섯 교회에서 김익두(金益斗, 1874~1950) 목사를 강사로
부흥회를 개최한 것이 당시 교회 성장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김익두 목사는 이용도(李龍道),길선주(吉善宙) 목사 등과 함께
192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부흥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의 부흥회는 특출한 개인에 의해 인도되는 경향이 강했는데,
김익두 목사는 신유와 기적을 수반한 부흥 운동으로
큰 인기를 모았다.
이는 3,1운동 이후 만연된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적 분위기를 타고
보수적 교회들의 계급 상승과 수적,물적 확대를 위해 확산되었다.
당시 송천교회에서의 부흥회는 상당한 결실을 거두었는데,
제7회와 8회(1920년) <경북노회록>을 보면
‘이미 믿는 자는 믿음에 다시 깨어 풍성한 은혜를 받았고,
믿지 않는 자들은 죄를 자복하고 주께로 돌아온 이가 많사오며’,
또한 ‘예배당 새로 짓기 위하여 많은 연보를 하였사옵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당시 부흥회가 상당히 성황을 이루었고,
믿음의 결실로 교회에 새로운 희망이 넘쳐났음을 잘 알 수 있다.
당시 송천교회에서의 부흥회 상황은 잘 알 수 없지만,
같은 해 6월 평양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 광경을
묘사한 내용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그 당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대정(大正) 9년(1920년) 하(夏, 여름)라.
사람들은 새벽기도회에 모히면 회개하여 울고 슬퍼 울엇나니
울고 울어 눈물의 집회엿고 낫공부에
모히면 두려운 기운에 잠기엿고 저녁에 모히면 웃고 또 울엇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이 모힌 때문에 다수의 회중은
김 목사의 말을 잘 듯지도 못하면서
김 목사의 모양만 보고 웃고 또 울엇다’
金麟瑞, < 金益斗 牧師 小傳(四)>《信仰生活》1941.2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한국기독교의 역사》2,
기독교문사.(p.187) 재인용]
특히 부흥회 때 드린 헌금을 바탕으로 이듬해인
1921년 송천교회에서는 약 800여 원의 경비를 들여
예배당을 이전의 초가에서 기와[瓦家]로 재건축을 하였다.
1901년 설립 당시에 이사윤의 사랑방에서 시작한
송천교회는 이듬해 하송에 초가 3칸을 13원에 사들여
임시 예배당으로 활용하였다. 그 뒤 1903년 교인 수가 증가하여 가
을에 예배당을 150원의 비용으로 건축하여 사용하였다.
그로부터 18년 후에 기와집의 교회당을 건축하였음은
그 동안 교회가 내,외적으로 성장과 발전을 크게 이루어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송천교회 <당회록>에는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인
1920년부터 1922년까지의 부분이 찢겨져 있기 때문에
전혀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없어 안타깝다.
송천교회 당회록
또한 1925년에는 ‘송병희 여사가 60원을 헌금하여
교회 종 1개를 연보하였다’는 기록을
제18회 경북노회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송병희는 앞에서 언급하였던 대로 1920년에는
양성학교의 운영 기금으로 50원을 헌금하였는데,
이를 볼 때 송천교회의 성장에
물질적으로 헌신하는데 앞장섰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을 수 있다.
송병희는 1857년 4월 10일생으로
1912년 3월 9일 세례를 받았으며,
차대성,차대선 등의 모친(母親)으로 전한다.
또한 1931년에는 전도실(傳道室)을 건축하였는데,
이는 임야(林野)를 판매한 대금 100원과 토지 3두락을 판매한
109원 등의 대금을 기반으로 건축한 것이었다.
예배당을 기와로 개축한지 10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1937년에는 150원으로 예배당에 마루를 놓았다는 기록이
제36회 경북노회록에서 나타난다.
또한 제38회 경북노회에서 보고된 내용을 보면
이듬해인 1938년에는 풍금(風琴) 1대를 90여 원으로 사들였다.
그 풍금은 1994년 교육관을 개축하면서 불태워졌는데, 당시 보존
의 가치를 깨닫지 못해 소실된 것이 매우 안타깝다.
이처럼 송천교회는 외형적으로 큰 성장을 이룬 것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 믿음의 성장을 크게 이루었다.
1937년의 경북노회 제36회 회록을 보면,
당시 김정수 장로는 아포 지방 네 곳의 교회를 담당하였으며,
이듬해에도 세 곳의 교회를 담당하여 이 지역 모교회로서의 위상을
재확인하였다.
또한 송천교회에서는
1939년 1월 대구 칠성교회의 양찬언 장로를 초청하여
1주일 간에 걸쳐 사경회(査經會)를 개최한 것이
믿음 성장에 큰 힘이 되었다.
이 사경회의 마지막 날인
1월 29일 십일조회(十一租會)가 조직되었는데,
임원은 [회장김정수, 서기송동헌, 회계유병도,김병석]이었으며
회원은 모두 50명에 이르렀다.
이 사경회는 1947년 1월에도 한 차례 더 열렸다.
1932년 제30회 경북노회록을 살펴 보면,
‘야외 예배에 대한 주의’ 라는 제목의
의미있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매우 큰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주일날 야외 예배 시에
남녀 학생으로써 경기를 시켜 잘하는 자에게
물품으로 상을 주는 일을 금할 것.
2) 정식(定食) 이외에 떡이나 고기를 많이 장만하여
주일 예배 경건한 정신을 잃고
연락(宴樂)만 취하는 일을 금할 것.
3) 야외 예배 장소를 멀리 정하여
남녀 어린이와 연로한 노인으로
육신 피곤을 너무 끼치게 하는 일을 금할 것.
등이 그것이다.
야외예배 어린이놀이(1957.5.20)
일제 하의 한국 교회는 양적,질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으며,
그것을 기념하는 행사로서 1934년의
‘한국 교회 50주년 희년(禧年) 기념행사’가 있다.
1934년은 한국 교회가 세워진지 50주년이 되는 ‘희년’으로 장로교와 감리교에서는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가졌다.
장로교에서는 1884년 9월 20일
의료 선교사 알렌(H.N.Allen)이
입국한 것을 선교의 원년으로 삼아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의 희년 기념행사는 전체 장로교회의 행사가
되지는 못하고, 북장로회 선교부와 총회가
각기 별도의 행사를 가졌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장로교회가 처했던 복잡한 갈등과
분규 요인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풍성한 잔치가 되어야 할 희년 행사가
반쪽 행사에 그치고 말았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1945년 8월 15일! 35년 동안의 기나긴 압제 속에서
한국은 해방(解放)을 맞았다. 이는 실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요,
한국 교회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러나 그 해방은 또 하나의 민족적 고통을 잉태한 것이었는데,
그후 한국 민족과 교회는 전쟁의 비극을 겪으면서
분단의 고착화로 인한 여러 희생에 직면하게 되었다.
해방을 맞은 한국 교회는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통합된 이른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조선교단’으로 명칭을 바꾸고,
9월 8일
새문안 교회에서 ‘남부대회’를 소집하였다.
이는 해방과 동시에 남북이 분단됨으로써
북한의 교단 세력이 참여하지 못한 채 이루어진
‘남한만의 교단 대회’ 라는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대회에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대표자들만 참가하였고,
각 교파의 주요 인사들은 원래의 교파로 환원하자는
의견이 강해 대회는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후에도 교단 유지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
그해 11월 정동제일교회에서 ‘조선기독교 남부대회’가 열렸다.
또한 이듬해인 1946년 4월에는 제2회 대회가 열렸고,
이에 따라 사실상 기존의 분열되었던
교단이해체되었다.
그후 한국 교회에서는 일제 치하에서 신사 참배를 받아들이고
교회 지도자의 자리에 있었던 세력과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일제에 투옥되었다가 해방을 맞아 출옥한
성도들간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장로교는 1946년 6월 해방으로 복구된
전국 12개 노회 대표들이 모여 38선 이남 장로회를 합하여
‘남부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듬해 4월 총회에서는 ‘남부총회’를
1942년 일제 하 장로회 최후의 총회였던
제31회 총회를 계승한 제32회 장로회 총회로
인정하기로 결정하였다.
8,15해방을 맞은 송천교회에서는 다시 당회가 조직되었는데,
당시 당회원은 김정수,유병도,전우태 장로 등이었다.
그해 12월 아포면 제석동의 제석교회를 복구하여
전우태 장로로 하여금 예배를 인도하게 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하여 전우태 장로는 송천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한편 1947년 경 김병호(?~1972) 목사가 부임하였다.
그는 송천동이 고향으로 대구 계성학교를 3회로 졸업한 후
1920년 평양신학교를 제13회로 졸업하였다.
그후 경북 지역의 여러 교회를 시무한 후 고향 친지들을
구원하기 위해 부임하여 전도에 온 힘을 기울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듬해 경산 부적 교회로 이임하였다.
그 후임으로 사위인 오봉서 전도사가 부임하였다.
1950년도는 한국 역사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가 큰 시련을 맞았던 시기였다.
해방 이후 한국 교회에서는 이미 분열이 싹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 시작은 1946년 한상동,주남선,박윤선 등이
총회의 허가없이 고려신학교(高麗神學校)를 설립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1948년 9월의 경남노회에서는
고려신학교의 인가 취소를 결정하였고,
1949년 4월의 제35회 총회 또한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결의를 하였다.
이듬해 6.25전쟁 발발 두달 전 대구에서 열린 제36회 총회에서는
고려신학교파(고신파) 문제로 총회가 소동 속에서
경찰의 개입으로 유회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는 한국 교회 70년 사상 처음보는 치욕스러운 사건이었다.
그 사건 직후 한국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자
민족사 최대의 희생을 치른 6.25전쟁을 맞았는데,
당시 한국 교회 일부에서는 이러한 ‘국가의 대동란이
교회 분열의 죄 때문’이라는 인식을 바탕으
로 회개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날은 주일(主日)이었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 최대의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그로 인한 인적,물적,정신적 피해는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다.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일제히 침략을 개시한
북한군에 의해 3일 만인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7월 20일 대전(大田)까지 점령당하였다.
이에 정부는 6월 27일 대전으로 수도를 옮겼고,
7월 8일에야 전국에 비상 계엄령이 선포하였다.
정부는 7월 16일
대전에서 다시 대구(大邱)로 임시 수도를 이동하게 되었다.
7월 1일을 기해 유엔군이 편성되어 참전했지만
북한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후 8월과 9월 사이에 경주,영천,대구,창녕,마산을 연결하는
경상남,북도의 일부만을 남긴 채
전 국토가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6.25전쟁을 맞은 한국 교회에서는 6월 26일 서울에서
‘국군 원호회’를 결성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짐으로써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후 7월 3일 대전 제일교회에서 ‘대한 기독교 구국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한경직(韓景職, 1902~2000) 목사를
선출하였으나,
국군의 후퇴에 따라 대구로 그 본부를 옮겨
대구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피난
교인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지 5년만에 맞은 비극적인
6.25전쟁으로 인해 한국 교회는 인적,물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북한 공산군에 맞서 항거하던
손양원(孫良源, 1902~1950) 목사가 순교한 것을 비롯해
수많은 목사,장로,평신도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또한 남궁혁,양주삼,송창근 등
많은 목사와 신학자들이 피랍되어
이후 생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나아가 교회는 경상남,북도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의 교회가 북한군 치하에 들어가 유린당하였다.
파손,소실된 교회 수는 장로교만 152개 교회였으며,
그외 감리교 84개, 성결교 27개 교회였다.
당시폐허가 된 서울 종로거리
송천교회가 속한 김천 일대도 6.25전쟁의 영향으로
7월 31일 소개령이 내려졌다.
이미 7월 초부터 김천 일대는 밀려드는 피난민들이
하루에 10여만 명에 이를 정도로 큰 혼란상이 빚어졌다.
김천에서 북한군과의 첫 전투가 벌어진 곳은 지례(知禮)였다.
이곳에 북한군 선봉대가 나타났다는 정보에 따라
경기도 이천 경찰대와 증산 지서원 등
200여 명의 병력이 출동하여
북한군 11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이후 북한군의 공세는 날이 갈수록 더해져
김천 지역도 점령당하였고,
또한 8월 1일 왜관의 경부선 철교와 인도교가 폭파되고
북한군이 피난민의 남하를 저지함으로써
피난민들은 피난 도중 낙동강을 건너지 못해
집으로 되돌아오거나 성주,선산 등
후미진 골짜기를 찾아 피난 생활을 해야만 했다.
당시 김천 지역은
북한군이 대구를 점령하기 위한 중요한 거점이자 전진기지였다.
이는 김일성(金日成)이 8월 초순 극비리에 김천에 와서
전쟁을 독려했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유엔군에서는 김일성이 김천에 머문다는 정보를 탐지하고,
8월 31일과 9월 2일 김천 지역에 대해
대대적인 폭격을 가함으로써
김천의 중심 시가지는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이러한 전쟁의 와중에서 송천교회는
교인들의 피난과 북한군의 남하로 8월 첫 주일(3일)부터 교회를
폐문하였다. 당시 송천교회에는
오봉서(吳鳳瑞, 1928.2.11生) 전도사가 시무하였다.
오봉서 전도사는 1948년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를 제7회로
졸업한 후 그해 말 송천교회로 부임하였다.
당시에는 미환교회와 겸임하여 시무하였는데,
그 이듬해 미환교회를 사임하고 송천교회만을 담임하였다.
당시 송천교회에서는 중등 과정의 야학(夜學)을 운영하였는데
여기에는 전우태 장로의 아들인 전대웅(田大雄)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오봉서 전도사는 1950년 봄 김천 시온중학교 교목으로 부임한
이후에도 송천교회를 계속 담임하였는데, 6.25전쟁이 일어나
교회가 폐문되자 송천교회를 떠나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후 1957년 제대하여 대구 영신중,고등학교
교목으로 시무하였다.
1971년 서울로 옮겨 구로구 개봉동의 성은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하다가, 1997년 4월 은퇴하여
현재 인천시 서구 당하동에 거주하고 있다.
김병호 목사의 딸인 김은혜(金恩惠) 사모와의 슬하에 2녀를 두었다.
전쟁을 맞아 대부분의 교인들은 전쟁을 피해
양식과 생활도구를 소달구지나 소 등에 싣고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왜관의 낙동강 철교가 폭파됨으로써 낙동강을 건널 수 없어
곧바로 되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그후 아포 지역이 북한군에게 점령된 상황에서 교인들은
낮에는 유엔군(UN軍)의 폭격을 피해 개천으로 대피하였고,
밤에는 등화 관제(燈火管制)로 인해 등불조차 켜지 못하는
암흑 속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당시 유엔군의 북한군에 대한 폭격은
당시 한국민들에게도 매우 큰 위협이 되었다.
실제 송천교회 인근의 숭산,샛터 등대부분의 마을에는
유엔군의 폭격이 가해졌고,
숭산 마을의 경우 폭격으로 인해
주민 2명이 생명을 잃기도 하였다.
김경식 장로의 회고담에 따르면
‘당시 집에서 소를 키웠는데, 낮에는 소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산에 들어가 있다가, 저녁에는 집의 지하실에서
폭격을 피해 살았다’고 한다.
이를 보면 당시의 생활이 어떠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들과는 달리 신귀순 권사의 가정은 당시 남편이 철도 노동자로 종사하였기 때문에 다른 교인들에 비해 일찍이 기차편을 이용해 피난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먼저 경북 청도(淸道)에 머물면서 배급으로 연명하다가 다시 부산의 수용소로 옮겨갔고, 그후 10월 초순경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송재근 목사의 가정도 부친인 송사헌 영수가 철도국에 근무하였기 때문에, 청도를 거쳐 부산으로 피난하여 그곳의 수용소에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당시 북한군에 의해 점령된 송천교회 교회당은 북한군의 점령지 통치를 위한 지역 사무소로 한때 사용되었고, 교인들은 성경과 찬송가를 모두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 북한군의 탄압을 피하였다. 그 때문에 북한군에 의해 희생된 교인은 한 명도 없었던 것은 큰 다행이었다. 북한군은 이 지역에 1개월 동안 머물다가 유엔군에 의해 밀려났다.
6.25당시 피난민의 행렬
한편 송천교회 교인 중에는 6.25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한 이들도 있었는데, 김정수 장로의 3남 김재식[金在植, 1930.1.20生 / 1930.11. 29 세례]은 군인으로 참전하였다가 행방불명되었는데, 휴전 이후에야 전사(戰死)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는 1947년 주일학교 교사로 임명되어 1950년까지 봉사하였으며, 1948년 12월 성찬을 받을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지금까지도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또한 유득열 장로의 동생 유종열 또한 경찰관으로 재직하던 중 무장 공비 토벌에 참여하였다가 행방불명 후 전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주일학교 교사로서 활동하는 등 교회에 충실히 봉사하였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인한 교회의 슬픔은 무척 컸다.
6.25전쟁은 1950년 9월 15일 맥아더(D.MacArthur, 1880 ~1964)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어, 28일
국군과 유엔군이 수도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넘어 북진하였다.
이에 따라 송천교회는 그해 11월 교회당 문을 다시 열어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당시에는 교회 종을 일제에 빼앗겨 되찾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6.25전쟁 직후에는 무쇠로 만든 포탄 껍질을 종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후 그 종은 없어지고 말았다.
6.25전쟁을 계기로 한국 교회의 교세는 더욱 성장하였는데,
이는 북한 기독교인들이
대거 월남(越南)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쟁 속에서 숱한 고난과 생명의 위협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심령의 위안과 세속적 축복을 얻기 위해
교회를 찾아온 결과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