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僧侶)의 죄과(罪科)는 많고,
파계(破戒)의 승(僧)보다도
지계(持戒)의 법사(法師)의
죄과(罪科)는 무거우며,
지계(持戒)의 승(僧)보다도
지자(智者)의 죄과(罪科)는
무거우리라.
이것들은
나병(癩病) 중(中)의
백라병(白癩病)·
백라병(白癩病) 중의
대백라병(大白癩病)이니라.
말대(末代)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은
어떠한 대의(大醫)
어떠한 양약(良藥)으로써
고쳐야 하느냐 하고 생각해 보건대,
(중략)
이러한 말법(末法)의 때를 위하여
교주석존(敎主釋尊)·다보여래(多寶如來)·시방분신(十方分身)의 제불(諸佛)을 모이게 하시어,
하나의 선약(仙藥)을 남겨놓으셨으니
소위(所謂)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다섯 문자(文字)이니라.
이 문자(文字)를
법혜(法慧)·공덕림(功德林)·금강살타(金剛薩埵)·
보현(普賢)·문수(文殊)·약왕(藥王)·관음(觀音) 등(等)에게도
부촉(付囑)하지 않으셨는데,
하물며 가섭(迦葉)·사리불(舍利弗) 등(等)에 있어서랴.
상행보살(上行菩薩) 등(等)이라고 하여
사인(四人)의
대보살(大菩薩)이 계시는데,
이 보살(菩薩)은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오백진점겁(五百塵點劫)부터
지금까지 제자(弟子)가 되시어서
일념(一念)도 부처를 잊어 버리지 않고 계시는
대보살(大菩薩)을
불러 내셔서 수여(授與)하시었다.
그러므로 이 양약(良藥)을 갖는 여인(女人)들을,
이 사인(四人)의 대보살(大菩薩)이
전후좌우(前後左右)에 붙어서서
이 여인(女人)이 일어서시면
이 대보살(大菩薩)도 일어서시고,
내지(乃至) 이 여인(女人)이 길을 갈 때는
이 보살(菩薩)도 길을 가시는데,
비유하면
그림자와 몸, 물과 물고기, 소리와 울림, 달과 빛과 같으니라.
이 사대보살(四大菩薩)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여인(女人)에게서 떨어진다면,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분신(十方分身)의 제불(諸佛)의 감죄(勘罪)를
이 보살(菩薩)의 몸에 받게 되시느니라.
제바(提婆)보다도 죄(罪)가 깊고,
구가리(瞿伽利)보다도 대망어(大妄語)의 자(者)가 된다고 생각하시라.
아, 기쁘도다·아, 기쁘도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日蓮花押
묘법만다라공양사(妙法曼陀羅供養事)
어서 1306쪽
젊은날의 일기
1955년 11월 9일 (수) 쾌청 –27세-
오늘도 아침에 늦잠을 자고 말았다.
선생님, 건강한 모습으로 먼저 와 계셨다.
창피하다.
학회에 대한 보도가 끝이 없다. 중상, 곡해, 몰인식 ― .
이번 일로 퇴전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한심한 사람이다. 연에 분동되어, 누군가 확신을 갖고 자신을 구제해 주리라 생각하는 것일까. ―
비판하는 잡지나 신문, 평론가가 그 구제에 대한 결론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리석구나. 어리석구나.
저녁 무렵, 직원들과 함께 뉴스 영화를 관람. 자계반역(自界叛逆)의 세상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귀가 길에 모두 스키야키를 먹었다. 참으로 맛있었다.
일찍 귀가. 《대백련화》의 원고를 썼다.
법화경에 이르길
「세상은 모두 견고하지 않아 불길이 물거품처럼 타 오른다」
또 말하길
「이하령중생(以何令衆生) 득입무상도(得入無上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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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1월 9일 (토) 맑음 –29세-
청천(靑天).
강인하게 살고 싶다, 내 인생.
오후 1시 30분, 도쿄 역발 급행으로 선생님과 함께 후지 다이세키사로.
세계 최고 지도자와 함께 살고 함께 이야기하며 함께 생애를 보내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 바로 나.
열차에서 T씨를 만났다. 선생님, “소개해 주게.”라고,
선생님께서는 “당신은 도로 박사라는데, 일본만의 도로로는 아직 부족하다. 동양이 있다. 한국, 중국, 인도로 향하는 도로를 하나로 연결해야 하네.”라고 태연하신 모습으로 주장하셨다.
T씨는 “형이상학적인 것은 선생님께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형이하학적인 것은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선생님, “그러나 형이하학적인 것도 형이상학적인 것에 기초해야 비로소 이룩된다.”라고 말씀.
총본산에서 질문회 ··· 기운이 전혀 나지 않는다. 감기, 분쿄, 쓰키지, 오사카, 사카이 지부 회합에 참석.
범부의 한계를 절실히 느낀다. 선생님의 헤아릴 수 없이 넓고도 깊은 생명력에는 그저 탄복할 뿐.
취침 ··· 리교보. 12시에 잠자리로. 축인 근행은 불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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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1월 9일 (일) 흐린 뒤 맑음 –30세-
제19회 총회. 고라쿠엔경륜장.
도다 선생님이 최후의 사자후 하신 곳이다.
정오 개시. 회원 7만 명 결집.
지부장이 대표로 포부를 발표할 무렵부터 비가 내렸다. 추억에 남을 또 하나의 총회.
지부 ··· 10개 지부 탄생. 아모모리, 후쿠시마, 가와사키, 시즈오카, 도요하시, 다카마쓰, 나가사키, 구마모토, 미야자키, 가고시마 등.
지부 확대도 좋다. 그러나 선생님의 정신을 확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요사이, 오늘만큼 피곤한 날도 없었다.
총회가 끝나고 조자이사에서 남녀 청년부 간부 합동 회의.
도다 선생님에게 직결하는 제자들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알아듣는 사람도 있었고 못 알아듣는 사람도 있었다.
청년부 수뇌들과 회식. 돌아오는 길 내내 비가 내렸다. 앞날이 순탄치 않음을 느낀다.
선생님 유족 분들과 이사실에 대해 생각하면서 귀가.
첫댓글 감사합니다 노고많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