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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용의 '신체 드로잉'부터 사르키스의 '접촉'까지 재현을 넘어 작가의 행위와 감각을 조형언어로 번역한 현대미술 |
송미리내 작가
[글.송미리내]붓이나 망치 대신 작가의 '몸' 자체가 작업의 도구가 된다. 600파운드의 초콜릿을 입으로 갉아먹거나, 화면을 등진 채 팔을 휘둘러 선을 긋는다.
현대미술에서 몸은 더 이상 캔버스 위에 재현되는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이건용, 자닌 안토니, 사르키스 등 현대미술의 거장들은 몸에 축적된 감각과 경험을 조형언어로 번역해 냈다. 중요한 것은 몸의 형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몸이 경험한 움직임과 행위, 접촉을 어떻게 선과 물질, 흔적으로 탈바꿈시키느냐에 있다.
이건용, 움직임을 선으로 번역하다
한국 현대미술가 이건용은 몸과 회화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은 대표적인 작가다. 그의 대표작인 '신체 드로잉' 연작은 화면을 바라보며 대상을 눈으로 좇아 손으로 재현하는 전통적인 방식과 궤를 달리한다.
1976년 제작된 '신체 드로잉 76-1(뒤에서)', '신체 드로잉 76-2(화면을 뒤에 놓고)' 등에서 작가는 캔버스와 자신의 신체 사이에 특정한 조건을 설정하고 그 움직임을 선으로 남겼다. 무엇을 그렸는가보다 어떻게 그렸는가가 핵심이다. 작가의 팔과 몸이 움직인 경로가 곧 화면의 선이 되며, 몸의 움직임 자체가 회화의 생성 조건으로 작용한다.
이건용의 회화에서 선은 단순한 조형 요소가 아니라 몸이 움직인 결과이자 화면과 만난 흔적이다. 몸의 움직임이 선으로 번역되는 순간, 행위는 곧 회화가 된다.
2010, 이건용, 신체드로잉,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 이건용 페이지 발췌
자닌 안토니, 행위를 물질로 번역하다
바하마 출신 미국 작가 자닌 안토니는 몸을 작품의 대상을 넘어 작품을 만드는 직접적인 도구로 사용한다.
그의 1992년 대표작 'Gnaw'는 무려 600파운드에 달하는 초콜릿과 라드 덩어리를 직접 입으로 갉아내어 완성한 작품이다. 떼어낸 초콜릿은 하트 모양의 포장으로, 라드는 색소와 밀랍을 섞어 립스틱으로 재탄생시켰다. 작가는 망치와 끌 대신 자신의 입을 조각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또한 1993년 작 'Lick and Lather'에서는 자신의 몸을 본떠 만든 초콜릿과 비누 조각을 직접 핥고 씻어내며 형태를 변화시켰다. 미국 국립미술관은 이 작품에 대해 "일상적인 먹기와 씻기라는 행위를 조각의 제작 과정으로 바꾼 작업"이라고 평가한다.
안토니의 작업에서 입으로 갉고 혀로 핥는 사적인 신체 행위는 조각의 제작 방식으로 치환된다. 몸의 행위가 물질의 형태를 바꾸고, 그 물질이 다시 몸의 흔적을 간직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자닌 안토니, 갉아먹는 작품, 1992, 자닌 안토니 공식홈페이지 발췌
사르키스, 접촉을 흔적으로 번역하다
프랑스·터키계 작가 사르키스는 몸과 조형언어의 관계를 '접촉'이라는 차원으로 한 단계 더 확장한다.
2025년 한국현상학회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사르키스의 예술에서 손의 접촉과 흔적은 중요한 창작 매체로 작동한다. 특히 역사적 장소와 고전 미술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손의 접촉이 어떻게 예술적 언어로 변환되는지가 핵심 질문으로 다뤄진다.
사르키스에게 손은 단순히 작품을 만드는 신체 기관이 아니다. 손으로 만지고 흔적을 남기는 과정 자체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흔적은 몸이 세계와 만났다는 증거가 되며, 보았다는 것보다 '만졌다'는 사실이 작품의 출발점이 된다.
사르키스, Ici la nuit verte est immese(미국의 밤 verte est immese), 팔레 라모, 릴, 2004년, 공식홈페이지 발췌
몸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몸의 경험을 번역하는 것
세 작가의 작업은 각기 다른 형태를 띠지만, 몸의 경험을 번역한다는 공통된 지향점을 보여준다. 이건용은 움직임을 선으로, 자닌 안토니는 행위를 물질의 변화로, 사르키스는 접촉을 흔적으로 번역해 냈다.
이러한 번역회화의 관점에서 회화와 조각은 외부 대상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작가가 세계를 경험한 방식, 재료와 접촉한 방식 자체가 작품의 형식이 된다. 보이지 않는 감각과 움직임을 선과 물질, 흔적으로 바꾸는 과정이 하나의 창작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시간을 반복과 축적을 통해 물질로 옮겼던 지난 연재에 이어, 이번 편에서는 몸의 경험이 어떻게 작품의 언어가 되는지를 살펴보았다. 다음 시리즈에서는 몸에 남은 경험을 넘어, 사라져가는 기억과 흔적이 어떻게 작품으로 남을 수 있을지 탐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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