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425
12월2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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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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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XsJLcM8oN_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전병권 보나벤투라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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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천국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는 예수님의 육화강생을 통해 온 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습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는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을 통해 명확히 밝혀졌습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는 그 누구도 천상잔치에 소외되거나 차별대우 받지 않는 공평한 곳입니다. 하느님의 풍요로운 자비와 축복이 폭포수처럼 흘러넘치는 곳입니다. 더 이상 고통도 슬픔도, 눈물도 울부짖음도 없는 기쁨의 장소입니다.
언젠가 한 수녀원 본원 부활 성야 미사에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참으로 잘 준비된 전례였습니다. 모든 성가는 장중한 그레고리안 성가였습니다. 빛의 예식에 이어, 말씀의 전례가 시작되었는데, 일곱 개 독서를 모두 봉독했고, 독서 끝에는 어김없이 아름다운 성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사제석에 앉아 있는데, 제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하느님 나라는 이런 곳이겠지. 성삼위께서 중심에 자리하시고, 성모님을 비롯한 천상의 성인성녀들과 천사들이 둘러 계시고, 거룩한 무리에 든 사람들과 함께 끝도 없이 말씀이 선포되고, 찬가가 울려 퍼지고..
그러니 지상에서 거룩한 전례에 익숙해지지 않은 사람들, 그저 세상 좋은 것들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거룩한 천상잔치 그 자체가 별 의미가 없겠구나, 정말 지루하겠구나, 거기 있는 그 자체가 지옥이겠구나. 그러니 지상에 있을 때부터 거룩한 전례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해야겠구나...
오늘 이사야 예언자 역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살짝 설명해주십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야 예언서 11장 6~8절)
보십시오. 혼자만, 자기 가족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그 어떤 편법을 써서라도 목숨 걸고 돈을 모으는 사람들, 독식(獨食)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천국에 없을 것입니다. 틈만 나면 분노하고 무력을 일삼으며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그곳에 없을 것입니다.
천국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 침묵 속에 헌신하는 사랑의 봉사자들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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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9EZGlzDp8l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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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기쁨을 누리는 법: 네비게이션을 보지 말고 아버지 손을 잡아라>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는 어린 시절, 세상과 단절된 채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녀의 가정교사 앤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에게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이 손바닥에 글씨를 썼습니다. 인형을 주며 'D-O-L-L'이라고 썼지만, 헬렌에게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손가락장난일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답답함에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졌습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을 데리고 펌프가로 갔습니다. 선생님은 펌프질을 하여 시원한 물줄기가 헬렌의 한 손에 쏟아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차가운 물의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다른 한 손바닥에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썼습니다.
'W-A-T-E-R' (물) 바로 그 순간, 헬렌의 영혼에 번개 같은 전율이 일었습니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생생한 단어가 내 영혼을 깨웠다. 그것은 빛과 희망과 기쁨을 주었고, 나를 자유롭게 했다." 헬렌이 언어를 깨우친 것은 머리로 고민하며 땅을 팔 때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의 인도하심(손)과 위에서 쏟아지는 물(은총)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때, 지혜가 선물처럼 주어진 것입니다. 참된 앎은 내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빛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루카 10,21)라고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공부'해서 얻는 지식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논리로 증명되는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체험되는 분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는 무신론적 지식인 형 이반과 신심 깊은 동생 알료샤가 등장합니다. 이반은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을 논리정연하게 나열하며 하느님을 부정합니다. 그의 논리는 너무나 완벽해서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악마이거나 무능한 거야." 이 차가운 지성의 공격 앞에서 동생 알료샤는 말문이 막힙니다. 그는 논쟁으로 형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알료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형에게 다가가 입을 맞춥니다. 그 단순한 사랑의 행위, 논리가 아닌 온기(입맞춤)가 닿는 순간, 이반의 견고했던 무신론의 성벽은 무너져 내립니다. 하느님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논쟁이 아니라 입맞춤으로 만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내비게이션을 켜고 내가 운전대를 잡는 것이 아닙니다. 내비게이션을 끄고, 조수석에 앉아 아버지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광야 시절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하느님은 그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농사는 내 땀과 노력으로 땅을 파서 소출을 얻는 행위입니다. 대신 하느님은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지면에 하얗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허리를 굽혀 그것을 '줍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안해서(내비게이션) 몰래 많이 거두어 저장하려 했지만, 그것은 다 썩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내 힘으로 인생을 개척하는 '농부'가 아니라, 매일매일 하느님의 은총을 줍는 '거룩한 거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파는 것을 멈출 때, 하늘의 양식이 보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참 지식의 기쁨은 겸손하게 부여받는 것이지, 굴을 파듯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 영적 진리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성가 헨리 나우웬은 『서커스 곡예사』 이야기에서 공중그네의 비밀을 말합니다. 공중그네에는 공중으로 몸을 날리는 '플라이어(Flyer)'와 그를 잡아주는 '캐처(Catcher)'가 있습니다. 곡예사는 말합니다. "플라이어의 비결은 딱 하나입니다. 공중에서 제가 맞은편 봉이나 캐처를 잡으려고 팔을 뻗어 발버둥 치면, 둘 다 손목이 부러져 떨어져 죽습니다. 제 할 일은 그저 팔을 뻗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강력한 캐처가 내 손목을 정확히 낚아챕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공중그네에서 내가 행복을, 내가 구원을 잡으려고(Digging) 아등바등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공중에서 힘을 빼고, 위대하신 캐처(하느님)가 나를 잡아주실 때까지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잡으려 하면 추락하고, 잡히기를 원하면 비상합니다. 이 모습이 철부지 어린이처럼 되는 것이고 진리 안에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기 위한 모습입니다.
작아집시다. 그러면 잡아주실 것입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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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식사할 때입니다. 대부분의 식당은 직원이 주문받지 않고 식탁에 설치된 모니터를 이용해서 주문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웠는데 몇 번 하니까 익숙해졌습니다. 메뉴에 들어가면 음식, 음료, 주류가 있었습니다. 밑반찬도 있어서 주문하면 추가 비용 없이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문산에 있는 식당에서는 로봇이 음식을 갖다주었습니다. 정확하게 주문한 식탁으로 음식을 갖다주었고, 음식을 꺼낸 후에 노란색 버튼을 누르면 주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새삼 느꼈습니다. 인공지능은 검색을 통하지 않고 우리의 궁금증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메일을 정리해 주고, 일정을 조정해 주고, 원하는 물건을 주문해 주기도 합니다. 인공지능이 로봇을 만나면서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세상이 시작될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완전 자율 주행 자동차가 거리를 달리고 있습니다.
기술의 진보가 눈부신 세상에서 문득 한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지난 겨울입니다. 눈 내리는 거리에서 젊은이들이 불렀던 ‘다시 만난 세계’라는 노래입니다.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눈앞에 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줘.” 이 노래는 단순한 사랑의 노래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노래였습니다. 우리 세대가 불렀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정의와 자유를 향한 열망의 노래였다면, 오늘의 세대는 “다시 만난 세계”를 통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간의 가능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유대 랍비 시드니 그린버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을 믿고 신뢰할 줄 안다면 당신은 청년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한다면 당신은 노인이다. 미래에 대한 꿈을 품고 행복을 갈망한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과거만을 회상하며 머무른다면 이미 노인이다. 남을 사랑할 줄 안다면 당신은 청년이다. 그러나 사랑받기만 원한다면 당신은 노인이다.” 청년과 노인의 기준을 나이로만 생각했는데 랍비는 청년과 노인의 기준을 생각과 인식의 차이로 구분하였습니다. 저도 이제 60이 넘으면서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늙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인식을 바꾸면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었어도, 아마에 주름이 깊이 패었어도, 근력이 예전 같지 않아도 청년입니다. 꿈이 있다면, 신뢰가 있다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오늘 주어진 일에 감사할 수 있다면, 꿈을 위해서 거친 들판을 걸어갈 수 있다면 청년입니다.
생각하니 대림 시기는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 2000년 전에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이가 청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꿈, 예수님의 나눔, 예수님의 헌신,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청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다시 오시는 청년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대림 시기에 우리는 이사야 예언서를 묵상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임마누엘,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는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손을 잡고 다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사막에 샘이 넘치는 꿈을 꾸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청년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황금, 유향, 몰약을 준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청년입니다. 평생 성전에서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렸던 시메온과 한나는 비록 나이가 80이 넘었어도 청년입니다.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했던 마리아는 나이 때문에 청년이 아닙니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시는 하느님을 찬미했기에 청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던 요셉은 나이가 많았어도 청년입니다.
이 땅에서 참된 평화와 자유를 꿈꿀 수 있다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함께 할 수 있다면 고난과 시련을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디딤돌’로 여길 수 있다면 우리는 청년 예수의 제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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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아버지를 찬미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시는 친교 안에서 기쁨에 가득 차 계십니다. 우리는 대체로 기뻐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리는 데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기쁨이, 성령 안의 기쁨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며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시는 까닭은 당신의 진리를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기]”(루카 10,21) 때문입니다. 여기서 “철부지들”로 옮겨진 말은 그리스 말로 ‘아기들’을 뜻하며 흔히 ‘작은 이들’로 옮겨집니다. 이 표현은 겸손하고 단순하며 신뢰에 찬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진리와 계시는 바로 이 작은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작은 이의 길은 늘 겸손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작은 이는 자기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삶과 생각의 중심에 자신을 두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자 선택하신 이들은 바로 이 ‘작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10,23)
대림 시기는 구유에 누운 아기로 오시는 하느님을 알아보는 마음의 눈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그 하느님을 마음 안에 온전히 모셔 들일 때,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햇순이(이사 11,1 참조) 주는 기쁨과 평화는, 구세주께서 가져오실 가슴 벅찬 기쁨과 평화의 예언은, 먼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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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21-24: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치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전도 활동의 성과를 들으시고, 성령 안에서 기뻐하시며 아버지께 찬미를 드리신다. 그 기도의 핵심은 이것이다. “아버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21절)
하느님은 세상의 지혜로운 이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드러나신다. 성 이레네오는 이를 “하느님의 영광은 인간 안에서 드러나는 생명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Adversus Haereses IV,20,7)이라고 표현했다. 곧 하느님은 인간의 교만한 눈에는 감추어지지만,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에는 드러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셨다.”는 말씀을 주석하며, “철부지들이란 단순히 배우지 못한 자들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겸손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그들의 순수함이 계시의 문을 연다.”(Homilia 38,3) 말했다.
예수님은 이어서 “아버지와 아들만이 서로를 안다.”(22절 참조) 말씀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설명하며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지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랑으로 인한 친밀한 일치이다. 그리고 그 친교 안에 성령께서 사랑의 끈으로 계신다.”(De Trinitate, I,4,7)라고 풀이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버지를 아는 길은 오직 아들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 안에서만 열린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들이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다.”(23-24절 참조) 선언하신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옛 계약의 예언자들은 오실 분을 희망 속에서만 보았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으니 복된 자들이다.”( 63,2)라고 강조했다. 교회는 이 구절을 해석하며, 구약의 모든 예언과 기다림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계시 헌장도 “예언자들과 율법은 모두 그리스도를 지향하며, 그분 안에서 완성된다.”(15항)라고 가르친다.
대림 시기를 사는 우리에게 이 복음은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첫째, 겸손과 단순함의 태도를 회복하라는 초대이다. 하느님은 학문적 논리보다 겸손한 마음에 당신을 드러내신다. 성 아타나시우스가 말했듯, “하느님을 알기 위한 가장 큰 지혜는 겸손히 무릎 꿇는 것이다.”(De Incarnatione Verbi Dei, 56) 둘째, 은총의 행복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사와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실제로 보고 듣는 은총을 받았다. 이는 과거 제자들의 특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우리의 눈은 복되고, 우리의 귀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씀과 성사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아들,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으로 그분을 받아들이고, 받은 은총을 삶의 제물로 드리는 일이다.(로마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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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철부지의 기도>
루카 10,21-24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철부지의 기도>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주님
저는
열렸으니
제게
오소서
주님
저는
모르오니
저를
깨우치소서
주님
저는
해맑으니
제게
스미소서
주님
저는
새하야니
저를
물들이소서
주님
저는
없사오니
제가
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제가
당신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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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탄절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만 ‘기쁜 날’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1-24)
1) ‘철부지들’은, 인간 세상에서는 ‘낮은’ 위치에 있지만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는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는 소외되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는 것을 감사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탄생 때 하늘에 울려 퍼진 ‘천사들의 찬미’가 연상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철부지들’과 천사들이 말한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사실상 ‘같은 사람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뜻을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다는 말씀은, ‘철부지들에게만’ 드러내 보이셨다는 뜻이 아니라, ‘철부지들만’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모든 사람’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고, 구원받기를 희망하는 사람들만 믿고 받아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자들, 현세의 삶에만 만족하는 자들은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2)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부와 권력을 자랑하면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기득권층 사람들과 영혼 구원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뜻을 그자들에게는 감추셨다는 말씀은, 그자들을 구원에서 배제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은 지혜롭다고 자처하면서 잘난 체 하는 자들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구원’이란 원래, 구원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원하지 않고, 또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못 받습니다.>
성탄절은 모든 사람을 위한 날이고,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날인데도, 예수님을 안 믿고,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는 성탄절은 기쁜 날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그냥 ‘남의 잔치’일 뿐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라는 말씀에서 ‘마리아의 노래’가 연상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마리아의 노래’는 ‘비천한 이들, 굶주린 이들’이 구원받게 된 것을 찬양하는 찬미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만한 자들도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면 구원받을 수 있고, 통치자들도 불의한 권력을 내려놓고 올바르게 살면, 또 부유한 자들도 혼자만의 부유함을 버리고 진심으로 자선을 실행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3)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인간 구원’의 ‘전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선언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5) 예수님께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시니,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올바르게 믿고 섬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들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요한 8,42) <하느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안 믿은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제대로 믿고 섬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요즘에도 하느님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을 안 믿는 일부 이단이나 사이비 종파들이 있는데, 그들도 역시 하느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닌 자들입니다.>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길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다른 길이나 다른 진리나 다른 생명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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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보는 눈, 들을 수 있는 귀>
세상에는 볼 것도 많고 들어야 할 말도 많다. 그렇지만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도 없고,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취향에 따라,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말을 듣게 된다. 같이 보거나 들어도 자기 시선으로 보고, 듣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을 낳게 마련이다. 기왕이면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말을 꼭 듣게 되기를 바란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마음의 눈과 귀가 소중하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들이 먼저 알아보고 듣게 된다(루카 10,22)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왜 그랬을까? 자기가 이미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철부지들은 계산하지 않고 셈을 하고 따지지 않으며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셈이 빠른 사람들은 누가 무슨 얘기를 하면 그 안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온갖 추측과 추정, 상상을 다 한다. 철저히 자기중심이다. 그러나 철부지는 잔머리를 굴리며 셈을 할 줄 모른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이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제자들에게만 따로 얘기하셨는데 제자들은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24)고 하셨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예수님 당신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너희가 듣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한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과연 지금 앞에 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또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을까? 혹 마음은 콩밭에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예수님의 육신만을 보고 예수님의 육성만 들었다면 참으로 불행하다. 사실 제자들도 자리다툼을 한 적이 있다.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확인된다. 우리는 세상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에는 분주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데는 인색하다.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감실을 찾고 주님을 모실 수 있는 미사참례는 소홀히 하면서도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모순 속에 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겠다. 귀를 쫑긋 세워 말씀을 들어야 한다. 볼 것을 보지 않는데, 눈이 좋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귀가 밝으면 뭐하나?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는데… 제발 주님께 집중할 은총을 갈망한다.
요즘 세상의 현실을 보자.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는데 여전히 자기주장만 하고 자기가 최고라고 고집을 피우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이들이 제발 백성을 위한다는 소리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믿는 이들만이라도 하느님 앞에 철부지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성령의 도움을 청한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사로잡아야 삶이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공덕이 없는 저희를 너그러이 보호하시며 도와 주소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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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오랫동안 특수 사목을 하던 신부가 정말 오랜만에 본당 사목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회사원처럼 사무 업무만 하다가 드디어 사목자가 된 것 같다며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본당의 사무적인 일들은 전문가처럼 처리할 수 있었지만, 강론하는 것이 너무 힘든 것입니다. 거의 20년 가까이 강론을 하지 않았었기에 신자들이 원하는 강론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 힘들었습니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강론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전혀 반응 없는 아이들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했고, 또 원하는 강론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늘 미안했습니다.
지금 이 신부는 어떨까요? 누구보다 기쁘게 본당 신부로 살고 있습니다. 자기 문제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으니 이를 고치려고 노력하게 되고, 따라서 더 나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남의 문제점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에게는 전혀 문제없고 상대방에게만 문제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발전할 수 없습니다. 불평불만 등의 부정적 마음으로 후퇴하는 자기를 만들게 될 뿐입니다.
남보다 나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의 문제점은 남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나의 문제 해결을 위해 나의 안테나를 세워야 합니다. 겸손해야 자기 문제점을 알고 또 해결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원하실까요? 많은 능력과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일까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이 선교 여행에서 돌아와 마귀들이 복종하는 것을 보고 기뻐한 직후에 이어지는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0,21)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당대의 율법학자, 바리사이, 그리고 스스로 하느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지식과 교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철부지들은 사회적으로 비천하고 배움이 짧은 사람입니다. 제자들이 그렇지요. 하지만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겸손한 이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기도 내용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능력 있고 재주 많은 사람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이루려는 사람을 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 내용이 되려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가 되려는 마음보다는 철부지들처럼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주님의 기도 내용이 될 만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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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10,23)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온 존재를 바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헤로데의 반대에 부딪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큰 성과를 거두고 돌아와 보고하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10,21)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10,21)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으뜸가는 이유는 주님께서 철부지들인ㅠ부족하고 무식하며 미약한 제자들에게 아버지가 누구이신지 드러내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10,22).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고,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28)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방법은 우리와는 전혀 다릅니다. 따라서 신앙인의 삶은 거꾸로 가는 인생이요 쉽지 않은 길입니다. 이와 달리 세상살이에서는 해박하고 탁월한 지식으로 남보다 앞서는 사람이 되어 출세하려고 피 튀기는 경쟁을 합니다. 그래서 잘 나고 힘 있는 사람, 부유한 사람들이 힘을 발휘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거꾸로 어리석은 것, 약한 것, 비천하고 천대받는 이들을 통하여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드러내 보여 주신다는 것은 곧, 생명과 선, 자비와 정의가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 가운데서 드러나려면 내가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힘을 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를 낮추어 진정 가난한 사람이 되고, 내 중심적인 애착들을 비워내어 영의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주님을 뵙지 못하겠지요. 이렇게 우리는 영적인 철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세상의 잡다한 지식과 남을 이기는 법, 나만 잘 사는 법,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사랑과 윤리가 결여된 지식과 힘에 의존하지 말아야겠지요.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10,21)라고 기도하십니다. 미천하고 율법에 무식한 제자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그들을 통해 이루어주신 하느님의 선에 대해서 감사드리는 것이지요. '아버지’의 한없는 은총으로 제자들이 전한 복음을 사람들이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미소하고 보잘것없고, 어리석고, 천한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도 쳇바퀴 돌 듯 되풀이되고 평범한 나날처럼 보이고, 비참한 처지에서 절망적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만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심을 믿고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겠습니다.
한 순간도 빠짐없이 우리에게 행복과 사랑의 선물을 주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보고 믿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자신을 낮추고 비워, 철부지 제자들에게 당신을 보여주시고 선을 이루신 주님을 바라보는 지혜 가운데 머물 수 있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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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초등부와 중고등부 아이들의 미사를 하다보면 아이들의 세대별 특징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일단 초등부 아이들은 성가를 엄청 크게 부릅니다.
주의는 매우 산만하고 그래서 다소 시끄럽기도 하지만 반주에 맞춰 크게 노래를 부르고 사제가 입,퇴장을 할 때에 혹은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에는 손을 뻗어 하이 파이브를 해달라고 난리입니다. 저는 초등부 강론을 인형극으로 하는데, 이 인형극의 주인공은 야고보입니다. 강론대에 서서, “얘들아 그럼 오늘도 야고보를 불러볼까?” 물어보면 아이들은 목청이 찢어져라 야고보의 이름을 외칩니다.
반면 중고등부 아이들은 성가를 부르지 않습니다. 매우 조용하고 주의력도 있는 것 같은데 반주가 나와도 크게 노래를 부르지 않고 제가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함께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찾기 힘듭니다. 인형극을 할 엄두는 내지도 못합니다. 어떻게든 아이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눈높이에 맞춰서 강론을 하려 애쓰지만 반응이 없어서 퍽 난감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눈에는, 초등부 아이들 못지않게 중고등부 아이들 역시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차차 마음을 열어가는 모습을 보면 뛸 뜻이 기쁜 것도 사실입니다.
농담을 하며 이리저리 건드려보면, 참다참다 “옛다” 하는 식으로 웃어보이곤 하는데 그 미소가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초등부와 중고등부 아이들을 비교해 보면 이 나이대의 특성이 드러납니다. 초등부 아이들은 본인이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아직 배울 것이 많고 어른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마음의 중심에는 부모님과 같은 어른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반면 중고등부 학생들, 특히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은 주관이 뚜렷하며 자신이 독립적으로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어른들보다 자신과 친구들을 더욱 믿는 편이고 결국 이 아이들의 중심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예수님께서 “즐거워하셨다”라는 표현이 제게는 매우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사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즐거워하셨다는 표현은 쉽게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때로는 인간적 결함을 갖고 실수도 하지만, 성실히 예수님을 따르며 철부지처럼 당신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노력하는 제자들이 실로 사랑스러워 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결코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불리는 사람들의 마음의 중심에는 자기 스스로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의 이끄심은 느껴지지 않고 그저 자신이 주축이 되어 욕심대로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은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서 작고 어린 존재이며 철부지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마음의 중심에는 언제나 아버지이며 스승이신 주님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러할 때에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이끄심을 따라 행동하게 되고 우리는 서서히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실 우리의 몸에도 매우 자연히 체득되어 있습니다. 성인들 역시 흔히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스스로를 내세우는 사람들보다는 겸손한 사람, 자신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사람을 좋아하고 선호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며,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못해 안절부절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부족함을 숨기려 애쓰게 되고, 남들 앞에서 더 나아보이고자 스스로를 학대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사람의 지혜와 슬기는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어른들은 자기를 내세우지만, 어린아이들은 어른들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자신에게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고 그렇기에 어른들의 가르침에 스스로를 내맡기고 따릅니다. 이렇게 어린이와 같이 주님을 겸손되이 따를 때 더 큰 지혜와 슬기를 우리는 습득할 수 있습니다. 오늘 미사 중에 우리의 부족한 부분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부분들을 하느님께 겸손되이 고백하며, 당신만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풍성히 내려주시길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바로 그러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실로 ‘즐거워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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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대림시기를 시작하면서 복음은 예수님의 감사와 기쁨을 노래합니다. 이는 우리가 대림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지내야 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파견한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도를 드리십니다. 마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47)하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그러니 기도는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체 무엇에 감사하고 즐거워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20,21)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음에 드리는 찬미와 감사기도입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대림시기에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 뜻 안에서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그렇습니다. 오로지 아드님이신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아시며,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이들이 알게 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통해 드러 내주시기에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해서 모두가 알게 되거나 모두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라야 알아듣고, 또한 받아들이는 만큼만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뜻'의 이루어짐이 제자들에 대한 행복선언으로 드러납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과 계시를 받은 복된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보고자 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을 그들에게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로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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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선하신 뜻을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당신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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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루카 10,21ㄱ)
<우리도 철부지들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 10,21-24)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감사기도'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아들 예수님에게 드러났다는 '계시(드러남)'와 제자들에게 하신 '행복 선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감사기도'를 바치십니다. 예수님의 이 감사기도는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라는 일흔두 제자의 보고를 받고 '하느님 아버지께 드린 감사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당시 하느님의 법인 율법에 능통했던 사람들,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철부지들'은 그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로부터 율법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 자체가, 예수님을 따르는 그 자체가 곧 율법이요 계명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자칭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철부지들인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계시되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두고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바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나아가 삶으로 재육화시키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감사기도를 바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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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가장 맑고
참된 지혜는
철부지의
마음에
깃듭니다.
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문입니다.
아는 것이 많다고
길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닙니다.
배운 것이 깊다고
하늘 나라를
더 빨리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순한 이들과
겸손한
이들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 모든 것은
전적인 은총의
선물입니다.
철부지의 마음은
욕망과 계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더 큽니다.
꾸미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억지로
부여잡지도
않습니다.
이 대림 시기는
세속적 지혜를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하느님 앞에
숨김없이 드러낸
철부지 같은
정직함이
깨어 있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낮추고
단순해지면
감사와
은총의 길이
열립니다.
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은총은
교만과 지식의
많음이 아니라,
우리의
낮고 비워진
마음 속에서
비로소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는
오늘의 삶이
바로 참된
신앙입니다.
신비는
지식이나
계산이 아닌,
마음의
순수함 속에서
드러나는
가장 좋은
은총입니다.
+++++++++++++++++++
<(2)"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 21)
우리의 가난함도 우리의 부족함도 선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신비입니다. 가난함도 부족함도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삶이 됩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을 깨닫는 삶 또한 우리의 가난함과 부족함입니다.
가난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참된 기쁨의 삶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감추시는 신비의 맑은 눈높이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부족한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으며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모든 것을 아드님에게 넘겨주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의 신비로 아버지 하느님을 사랑의 실천으로 예수님을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행복입니다. 행복이란 보게 되고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받아들임의 기쁨입니다.
무엇을 받아들여할지를 잘 보여주십니다. 사랑과 나눔의 인격을 보는 기쁨 또한 관계로부터 주어지는 관계의 신비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보려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 해도들을 수 없는 관계의 아픔입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가난함과 부족함을 통해서 하신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우리의 가난함과 부족함 안에 행복이 탄생하길 기도드립니다. 행복은 사랑의 탄생인 가난함과 부족함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을 향하는 행복입니다. 막을 수 없는 신비를 거스를 수 없는 참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이 이루어지는 대림시기의 기쁜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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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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