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내 / 김수열
광복의 날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최씨 할아버지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전쟁통에 아내와 생이별하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남쪽을 선택하고는
의당 죽었으려니 하면서도 신청을 해본 것이
이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아내가
스물다섯에 생이별한 그 아내가
오십 년 전 그날처럼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다
오십 줄을 훌쩍 넘긴 오누이 자식들과 함께
남쪽의 지아비 만날 날을 기다리며
오매불망 살아 있다는 것이다
최씨 할아버지는 오십 년을 함께 살아온
남쪽의 아내와 감자를 다듬으며
가서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말문이 막히는 것이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지아비를 보면서 남쪽의 아내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
- 가서 만나면 맨 먼저 무슨 말을 하실라우?
- 글쎄. 뭐. 할말 없지 뭐. 그냥. 고맙다고 자식들. 키워줘서. 고맙다고 뭐.
- 고맙다고만 하면 다야? 미안하다고도 해야지. 고생했다고도 해야지.
- 글쎄. 그렇지. 그렇게 해야지.
- 거기 마누라도 고생했지만, 나도 고생했어요 영감도 그건 알죠?
- 알지. 알고 말고. 잘 알지. 잘 알고 말고.
남편이 북으로 떠나기 전날 밤
남쪽의 아내는 없는 살림에 어디서 구해 왔는지
북쪽에 보낼 선물 한 꾸러미를 들고 와서는
날이 새면 북쪽으로 떠날 영감과 마주앉아 밤을 지새우는 것이다
- 이건 시계예요. 만나면 영감이 직접 채워주시구랴. 미안하다고 하면서.
- 알았어. 그러지. 고마워.
- 이건 쌍가락지야. 금 여섯 돈짜리. 그쪽 마누라에게 당신이 직접 끼워줘. 알았지요?
- 아유. 뭘 이런 걸 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 그리고 이건 속옷인데, 그쪽 사이즈를 알아야지. 그냥 내 사이즈에 맞춰서 샀어요.
크나 적으면 딸애한테 입으라고 하세요. 남쪽 마누라가 사서 보내더라고
꼭 얘기해요. 알았어요?
- 속옷까지? 허허. 허허.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 그리고 이건.
- 또 있어? 허허. 허허. 고마워요. 허허. 허허.
두 노인은 땀인지 눈물인지 연신 닦아내고 닦아주며 밤을 지새우는 것이다
- 김수열 시집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