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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청익실록은 95년 당시 사이버윙즈(그랑블루) 및 프로축구서포터 문화를 묘사한 글입니다.
타 축구 게시판에 서포터 초창기에 대해서 궁금하다고 했던분이 있어서 올렸던 글을
초창기 서포터 문화를 잘모르는 분들은 한번쯤 읽을만한 좋은글이라서 이곳 게시판에도
올립니다.
정말 길어서 앞에 부분 초기만 올려봅니다.
작자가 이글을 쓴 시점은 90년말~00년초로 사료됩니다.
오늘자 신문을 보니 KBL의 대표적인 선수들의 사진으로 KBL 신년 캘린더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간 NBA 등에 빼앗긴 스포츠 캐릭터의 시장을 조금씩 되찾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시작한 사업이라 한다.
그간 KBL의 활동을 보면 이웃나라 J리그 준비처럼 비교적(지금까지 국내 스포츠와는 달리) 체계적이고 어느정도 노력이 보여져 왔음이 보인다.
지금 경제적인 어려움과 여러 사회분위기 속에서 약간의 하강 추세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 인기가 조금씩 보편화 되고 있음을 느낄수 있다.
필자는 현재 녹색나라(?)에 살고 있다. 누군가는 우리나라 축구 사랑의 시초(?)는 바로 군대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계급이 낮을때의 축구란 한마디로 달리기 선수와 같다. 그야말로 죽어라 상대 공격수를 따라 다녀와 한다.
지칠줄 모르는 체력으로 끝까지 따라붙어 상대를 쓰러트려야만 한다.
100%맨투맨 수비에 투톱의 공격수 그리고 '뻥'축구.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
힘들게 뛰어다니기만 하고 자신에게 별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축구를 회피하고 있다.
거기에 맞물려 추운겨울 별로 할일 없는 주말오후의 프로농구 경기란 어쩔 수 없이 틀어보게 되는 TV프로다.
그러나 이제 하나 둘씩 어느팀이 이려가 하고 이야기 하기도 하고 지금까지의 프로스포츠중 그래도 좀 세련되어 보이는 분위기에 휩싸이고 만다.
하나둘씩 외박나가서 프로농구나 보고올까 하는 이야기도 한다.
나는 붉은 악마다. 올해(97) 중반부터 언론에 큰 이슈로 자리매김하였던 붉은악마.
이름이 붉은악마로 자리매김한 것이 얼마되지 않아서이지 사실 붉은악마의 전신은 95년부터였다.
당시 동대문 운동장에서 유공 코끼리를 응원하였던 하이텔 축구동.
그때당시 유공 코끼리를 응원하기로 한것은 니폼니쉬라는 명장이 있기도 했지만 단장님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그래도 어느정도 축구동 사람들의 마음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비록 황보관이란 스트라이커를 미덥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를 연호해 주었다. 바로 우리들의 꿈! 한국축구의 발전이자 유럽/선진 축구문화 조성이라는 바로 그점이었다.
그러나 곧 한게에 부딛치고 만다.
무엇보다 그러한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부족하였으며 축구동내의 몇십명(경기장에서 직접 응원하는)으로서는
2만 5천여석의 동대문 운동장의 분위기를 띄우기는 너무나 힘들었던 것이다.
지금은 '붉은악마'로 인하여 인식이 바뀌어졌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아르바이트생'으로 불리워졌다.
소주먹은 아저씨들이 '저리가~ 시끄럽잖아~' '야~ 얼마씩 받고하냐"등등의 말들은 당시의 열악한 조건을 말해준다.
그리고 발전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자 유공구단쪽에서도 조금씩 시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럴때 축구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재계의 거물 삼성이 프로축구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유럽식 축구클럽 운영' 이란점이 축구동사람들의 마음을 잡기 시작하였다.
95년 축구동 송년회 당시 수원구단의 리호승대리가 참석하여 수원구단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였다.
유럽식 클럽운영, 어린이가 아닌 성인층을 겨냥한 마케팅사업, 축구전용구장에 대한 구체적인 제시,
축구문화 조성을 위한 여러가지 뒷받침등은 그때까지 축구동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한 여러 사업들을 추진하는것.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였고 축구동의 다수의 사람들이 따른 것은 아니였다.
축구동 내에서 '수원삼성 블루윙즈(이하수원)'에 대한 기대를 갖고 하나둘씩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당시 축구동의 거물급 인재들이 방향을수원쪽으로 잡고 겨우내내 준비에 나섰다.
6년 초봄. 드디어 아디다스컵이 시작되었다.
추운 날씨임에도 수원구단은 관중의 경기 관람을 위해 저녁 7시 야간경기를 내세웠다.
그때 처음으로 모였던 인원으 초라했다.
10명도 되지 않은 인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지만 몇명 되지도 않으면서 유럽식을 추구한다며 썰렁하고
경기가 잘 보이지 않았던 수원구장의 c석(골대뒷부분)을 들어가서 두루마리 휴지를 던지다가
경찰과 시비가 붙어서 싸울뻔한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하지만 바람이 많이부는 경기장의 한쪽에 만들어온 FC SUWON이라는 커다른 플래카드는 이후
수원의 발전을 이야기해 주는듯 했다. 경찰과 시비가 붙으면서도 꿋꿋하게 던졌던
두루마리 휴지와 바람을 타고 계속 날아다니는 종이 꽃가루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엔 충분하다.
하지만 추운날씨속에 10여명의 인원들은 당시 최고의 몸값인 바데아를 보며기뻐했고
조금씩 자라나는 푸른 잔디를 보면서 95년 브라질 초청경기시의 멋진 수원의 잔디를 꿈꿔온 것이다.
96년 초봄. 아디다스컵이 한창 중반으로 들어갈 무렵 '윙즈-수원삼성 블루윙즈 팬클럽'이라는 이름하에 모인 인원이
20명가까이로 늘어가기 시작했고C석에서의 응원은 무리라 판단 B석으로 옮겨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당시 구단과 가장 활발한 접촉을 벌이던 홍범준은 서서히 그 결과를 보이기시작 하였다.
무엇보다 가시적인것은 대형깃발이었다.
지금이야 여기저기 어느구단 서포터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유럽식 응원문화를향한 출발과 같은 것이었다.
단순했지만 지금도 기본이 되는 삼색깃발과 가운데 써있는 '수원'-이것은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지금까지는 삼성,LG,현대가 주가 되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지역을 우선으로 하는 우리 윙즈의 마음이 담긴 것이었다.-
그리고 수원의 삼각무늬가 잔뜩 그려있는 깃발.(용비늘) 지금이야 위험해서 사용하지는 않지만 피리빵과
각종 화약을 이용하면서 목이 터져라 외치던 그날 밤들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당시 유니폼이 아직 나오지가 않아서 모두 제각각의 옥을 입고 삼삼오오 모여서 초코파이와 생수를 먹어가면서
응원할 때 나름대로의 기쁨과 희망이 있던 하루하루였다. 그렇지만 역시나 순탄하기만한 길은 아니었다.
수원구단쪽에서도 약간의 의구심을 갖고 있는듯 하였다.
과연 치어걸과 치어리더를 포기하면서 선택한 자율응원이지만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것인가 하는 의심을 하는 눈치였다.
한두차례 나오던 전속 치어리더들도 아디다스컵 중반에 들어서면서 없어지고
경기장에는 20명이 안되는 이상한(?)사람들이 소리지르는 분위기로 이어져 나갔다.
1996년 5월. 드디어 신화가 시작된다.
윙즈, 센슈얼 아베(수원여고), 청익(유신고)의 50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모여서
라피도컵 정규리그 개막전 수원응원을 위해 경기장 밖 등나무 벤치에 모였다.
큰북 3개, 대형깃발 3개, 두루마리휴지 2푸대, 종이 꽃가루 수십봉지로 무장한 서포터들은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 임무들도 하나둘씩 체계적으로 잡혀서 '흥분이','북잡이','깃발맨'등으로 나뉘어졌다
북의 강약과 박자에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언제나 소형 삼색기를 흔들며 앞에서 날뛰었고,
뛰어난 외모와(^^;) 특유의 분위기로 어떤이는 많은 여고생들에게 호감을 샀었다
첫 라피도컵 개막전은 전북과의 한판이었다.
상대팀은 당시 인기가 적었던 하위권팀.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달리 차별화 시킨 홍보전략등과 신생팀에 대한 기대.
그리고 2002월드컵 수원유치등과 맞물려서 이날의 분위기는 어느 국가대표 경기 못지 않은 분위기였다.
이달 경기를 보러 서울에서 내려온 축구동의 신모 선생님의 증언에 따르면 암표가 20000원에 팔리고 매진이된 상태라 전해진다.
암표상이 너무나 활개를 친 덕분인지 철저하게 규정석만 판매한 덕분인지 매진이 되었다고 하지만 C,D석은 빈자리가 곳곳에 보였다.
그러나 지금껏 프로축구 경기에서 이러한 분위기가 연출된 것은 몇차례없었을 것이다.
윙즈 전사들은 B석에 자리잡고 구단에게 넘겨준 '한자 로스톡'과 'SONGs for FANS'노래에 맞춰서 응원을 시작했다.
물론 당시의 응원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않은 초보적인 수준이었지만 분명 기존의 치어리더식과는 차별화를 두었으며
프로구단들에게 있어 분명 '청량제'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지금의
붉은악마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분명 이런 좋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살리지 못하고 결국 국가대표라는 카드를 꺼내고서야 지금처럼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언론과 프로구단에 책임이 있다 하겠다.
여기서 분명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관중은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지 오라오라 해서 오는것이 아니다'
프로축구가 구걸하는 행려병자들인가?
어쩌다 TV에 중계라도 하면 '아~ 관중이 없는 것이 아쉽군요~' 하면서 '자리를 메꾸어주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들도많이 와 주십시요 그래야 월드컵...어쩌구...' 낮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로축구는 거지가 아니다.
푸릇푸릇하게 돋아난 푸른잔디.
그간 얼마 자라지는 못했지만 일자무늬로 깎아서 그전까지는 외국의 경기장에서나 볼 수 있는 잔디의 무늬가 나타나있었다.
아직 잔디가 상한곳이 많이 있어서 모래와 톱밥으로 메꾸고저 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전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윙즈의 전사들은 하나둘씩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킥오프!~ 경기가 시작되었다. 수십개의 두루마리 휴지뭉치가 하늘을 가르고종이 꽃가루가 하늘을 휘저으며 날아다녔다.
사람들은 이런 새로운 현상을 바라보며 한가지 생각을 하는듯 했다.
'이거 누가 다 치우지?..--;'100만불의 사나이 바데아를 주축으로 박건하와 이기근 투톱으로 이루어진 공격라인이 경기를 풀어나갔다.
'우리들의 연호와 성원에 손을 들고 손짓하면서 답해주는 매너들도 그전과는 다른 점이었다.
박모선수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워지자 슬그머니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는 것들은
지금까지의 프로축구 문화를 보여주는 듯 했다(하지만 지금의 박모선수 또한 우리 팬들과 친해지려고 무척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팬들과의 만남에서 개다리춤을춘다던가...^^; 고마운 일이다.)
자신을 프로로 만들지 못하고 한 기업의 선수인양 뛰는 세미프로 선수들 지금까지의 10여년의 역사가 무의미한 프로축구였다.
필자가 지금 몸담고 있는 곳의 특성상 그날의 자세한 경기내용과 스코어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니 전북과의 경기는 아디다스컵 개막전인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울산현대와의 경기였던것 같은데 하여간 이날 경기는 비겼단 것으로 기억된다
첫댓글 좋은글이네요,휴지응원 때문에 경찰과 시비가 붙었다는 점은 처음 들었어요^^ 2탄 기대 하겠습니다!!
아 너무 길어 언제 다읽어 ㅋㅋ 암튼 지금 일고 있어요~
여기서 분명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관중은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지 오라오라 해서 오는것이 아니다'
프로축구가 구걸하는 행려병자들인가?
어쩌다 TV에 중계라도 하면 '아~ 관중이 없는 것이 아쉽군요~' 하면서 '자리를 메꾸어주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들도많이 와 주십시요 그래야 월드컵...어쩌구...' 낮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로축구는 거지가 아니다.
K-리그는 거지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