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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이순신 장군의 자살설은 진짜인가?
많은 역사가들과 이순신에 관한 책을 한번이라도 살펴보면 노량해전 에서 그는 안타깝게도 적의 총탄을 맞고 순직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라는 자체가 너무나도 많은 의문투성이가 있어 짧은 지식과 소견으로 다음과 같이 글을 남기고자 합니다. 물론 이글은 제가 대학때 리포트로 논문을 비롯한 각종 책자에서 발췌한 내용을 축소시켜 올린 것입니다.. 참고로 약 1개월 정도 조사를 했다는..ㅡㅡ;;;
얼마전에 네이버에 한 카페에 올렸던 글인데 여기저기 카페 및 블로그에 올려져 있던데.. 필자는 바로 저인데 마치 자기가 쓴 모양인듯.... ㅡㅡ;;
암튼 인터넷이 편하고도...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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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나서도 이겼다. 조선전쟁의 7년간에.... 참으로 이순신 한 사람을 자랑삼지 않을수 없다 일본 수군의 장수들은 이순신이 살아있을때 기를 펴지 못하였다.
그는 실제로 조선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을 통틀어 최고의 영웅이었다.
일본학자가 쓴 [근세일본사]에 나오는 노량해전과 이순신에 대한 글입니다.
이순신의 자살설
이순신이 자살했다면 놀라는 사람은 적지 않을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전사한 직후부터 그의 자살설이 제기되었지만 이순신의 부하였으며 후에 삼도수군 통제사가 된 유형에 따르면 이 순신은 평소 "자고로 대장이 자기의 공로를 인정받으려 한다면 생명을 보전하기 어렵다. 따라서 나는 적이 퇴각하는 날에 죽어 유감될 일을 없어겠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은 이순신을 추모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추억하건대 평시에 사람을 대해 이르되 "나라를 욕되게 한 사람이라 오직 한번 죽는것만 남았노라" 하시더니 강토를 이미 찾았고 큰 원수마저 갚았거늘 무엇 때문에 평소의 맹세를 실천해야 하시던고.
또한 숙종때 대제학을 역임한 이민서는 이렇게 장군의 최후를 적고 있습니다.
....의병장 김덕령이 옥사하자 제장과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보전할수 없다고 생각했다. 곽재우는 드디어 군직을 떠나 생식을 하며 단행을 피하였고, 순신은 싸움이 한창일 때 스스로 갑옷과 투구를 벗고 적탄에 맞아 죽었다
이 기록대로 라면 이순신은 스스로 죽음을 향하여 걸어갔던 것을 알수 잇습니다. 이른바 장군의 자살설이 뒷바침 돼는 것인데 갑옷만 제대로 챙겨입었다면 장군은 죽지 않을수 있었습니다. 굳이 판옥선의 노출된 뱃전에서 스스로 북을 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뱃전에서 지휘를 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장군은 갑옷을 벗고 삼도수군통제사의 붉은 융복을 입고 적탄에 맞았음을 알수가 잇지요...
또한 전에도 이순신은 연전연승을 하고도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반역죄의 누명죄를 쓰고 처형당할 뻔한 쓰라린 경험을 했지요.. 또한 그당시 의병장 김덕령은 혁혁한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역모에 몰려 옥사를 하였으며 홍의장군이라고 잘 알려져 있는 곽재우도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의병을 해산하고 산으로 들어가벼렸습니다.
또한 장군의 유력한 후원자라 할수 있는 유성룡도 영의정에서 파직된 마당에 전쟁이 끝난후 전쟁의 신인 이순신을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이순신을 어떻게 처리하였을까요?
과연 전쟁의 영웅으로 모실것인지, 아니면 역모의 핑계를 붙여 자신과 더불어 삼족과 친지들을 몰살시키지는 않았을런지??
또한 숙종때 영의정을 지낸 이여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음을 참조하세요.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순신은 얼마든지 죽음을 면할수 있었으나 스스로 큰 공이 용납되기를 어려움을 알고 드디어 싸움터에 이르러서 그 몸을 죽였다고 했다. 장군의 죽음은 미리 결정된 것이다. 그가 처한 상황은 역시 이런말에 가까다. 오호 슬프도다..
또한 서양학자인 헐버트는 이순신이 자신의 죽음을 원통해 하지 않았다고 서술했습니다. 헐버트는 이순신은 노량전투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는데 그는 이렇게 된것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순신은 이미 침략자들이 쫒겨가는 것을 보았고 또한 조정에 있는 적들이 설령 그가 전쟁에서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그를 역모의 죄 등을 뒤집어 씌워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지요...
또한 유성룡의 [징비록]을 참조하면
'순신은 친히 시석을 무릎쓰고 힘써 싸울때 탄환이 가슴을 뚫고 등뒤로 나왔다...."
장군이 적의 저격수 앞에 일부로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한 조총의 탄환이 가슴을 관통할수 없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조총의 살해거리 60~70미터의 조총의 탄환이 가슴을 관통하기 위하여서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피격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요...
종합적 결론 : 당시 조정의 세태를 보면 이순신이 전쟁중에 조정에서 어떠한 처우를 했는지... 즉 백의종군을 비롯한 일본첩자 요시라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온갖 누명을 다 듸집어 씌운채 있었던 시대를 한번 돌아보고, 이순신이 자살을 할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역사적 배경을 관심있게 한번만 되돌이 켜본다면 이순신의 자살설은 결국 맞을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반론은 대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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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자살설을 뒷바침 해주는 이순신의 행적표와 왕의 교지[첨가]
인종 원년 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서울 건천동에서 덕수 이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다.
명종 20년 1565년 보성군수 방진의 딸과 결혼을 하다.
명종 22년 1567년 이순신의 아들 회가 태어나다.
선조 4년 1571년 둘째 아들 울이가 태어나다.
선조 5년 1572년 훈련원 별과시험에 응시중 말 위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다.
선조 9년 1576년 2월 무과에 합격하다. 12월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종9품)이 되다.
선조 10년 1577년 셋째 아들 면이 태어나다.
선조 12년 1579년 훈련원 봉사 종 8품이 되다. 10월 충청 병사의 군관이 되다.
선조 13년 1580년 발포의 수군 만호가 되다.
선조 15년 1582년 1월 발포만호에서 파직되다. 하지만 5월 다시 복직되어 훈련원 봉사가 돼다.
선조 16년 1583년 함경도 남병사의 군관이 되다. 건원보의 군관이 돼다. 11월 훈련원 참관으로 승진돼다.
선조 19년 1586년 사복시의 주부(종6품)이 되다, 16일후 다시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전근가다.
선조 20년 1587년 8월 독둔도의 군전관을 겸하다. 여진족의 기슴을 물리쳤으나 병사 이일의 무고로 파직되어 백의종군하다.
선조 21년 1588년 집으로 돌아오다.
선조 22년 1589년 2월 전라 순찰의 군관이 돼다. 12월 정읍현감이 돼다.
선조 23년 7월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로 발령되다.
선조 24년 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임명되다.
선조 25년 1592년 임진왜란 일어나다. 5월 옥포,함포 및 적진포 해전에서 승리하다. 사천,당포,당황포 및 율포해전에서 승리하다. 왼쪽어깨에 적의 총탄을 맞았으나 치유되다.
7월 한산도 앞바다 해전에서 승리하다. 9월 부산해전에서 승리하다.
선조 26년 1593년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기다. 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다.
선조 27년 1594년 10월 장문포의 왜군을 수륙으로 협공하다.
선조 30년 1597년 3월 원균의 모함과 당쟁의 희생이 되어 서울로 끌려가서 감옥에 갖히다.
4월 도원수 권율밑에서 백의종군하다.
8월 3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다.
9월 명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다.
선조 31년 1598년
2월 수군 진영을 고금도로 옮기다.
11월 19일 양력 12월 16일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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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이순신의 행적표고...........
그리고 다음과 같은 글을 제시할때니 곰곰히 생각해 보시길...........
선조임금이 이순신을 다시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할때 이순신에게 내린 교지의 내용입니다.
장군은 그당시 백의종군을 할때 진주인근의 운곡에 위치한 손경례의 집 마당에 거적을 깔고 네번 절하고 교지를 받았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짐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어허.. 나라가 의지하여 보장을 삼는것은 오직 수구 뿐인데 하늘이 아직도 하늘을 거두지 않아.... (중간부문생략) 3도 수군이 한번 싸움에 모두 없어지니 근해의 성읍을 누가 지키며, 한산진을 이미 잃었으니 적이 무엇을 꺼릴 것이랴?
생각하건데 그대는 일찍이 수사 책임을 맡던 그날 이름이 났고 또 임진년 승첩이 있는 뒤부터 크게 떨쳐 변방 군사들이 만리장성처럼 든든히 믿었는데 지난 번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하도록 했던것은 역시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오늘 이와 같이 패전의 욕됨을 당하게 되니 무슨 할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말이 있으리오....
이제 특별이 그대를 상복 입은 그대로 기용하는 것이며 또한 그대의 백의에서 뽑아 내어 다시 옛날같이 전라좌수사 겸 충청,전라 경상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노니....(생략)
윗의 글을 곰곰히 되씹어 보면 자살설이 왜 일어났는지 알것입니다.
첫댓글 음^^ 전 다른 서적(도서관에서 읽었는데...서적명은 기억이 죄송^^;)에서 이순신장군이 일부러 전사한 것으로 꾸몄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도 많이 수긍하구요. 선조는 자기 아들도 못믿을만큼(광해군조차도...권좌를 노린다고 여겼으니...)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민중은 백성들과 도읍을 버리고 버리고 도망간 이씨 임금을 손가락질하는 반면 다른 이씨, 즉 이순신은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고 칭송을 마다치않으니... 귀얇은 선조가 전후의 정세를 얼마나 불안해했겠습니까...?^^ 그래서 이순신에게 (사실상)자살하도록 권했고 그래서 자살을 택했다는 설도 있지만,
저두 그런 류의 서적 여러권 읽어서 그런가 자살이었을거라고 혼자 생각하구 살아요;;;
몇몇 학자들은 이순신의 묘 이장시기에 많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즉 노량해전으로 전쟁이 끝난 후 약 20여년 정도가 차이가 난다고 하더군요.(정확한 기억이 안나서 얼머무립니다^^;;) 그래서 떠오른 설이 전사위장설입니다. 전후에 어차피 선조가 죽일 것이 확실하니... 일부러 전사한 것처럼 꾸미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선조가 알고 있었는가..모르고 있었는가... 알고 있었다면 뒤를 봐주었는가 아닌가의 여부는 여전히 분분하구요... 아무튼 묘지의 시기 차이로 이순신이 전후에도 20년을 더 살아 70세 이상을 살고 죽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다 설설설~~~ ㅎ
또 하나 죽지 않았다는 근거는... 당시 조총은 윗 글대로 사정거리에 따라 위력차이가 심하고, 더군다나 조선장수가 철갑옷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가슴을 관통하는 치명상은 아무래도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은 뭔가 아닌거 같다 이거죠.^^
역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여러가지 설이 있네요..^^;; 이순신장군의 전사설, 이순신 장군의 은둔설, 이순신 장군의 자살설.. 등등.. 그만큼, 위대한 인물이었기에.. 아마 대한민국에서 그런 사람을 찾으려면 몇백년.. 아니 몇천년을 기다려야 할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어떤 소설, 어떤 기록 찾아보더라도 명량대첩 전후는 정말 대감동이죠. ^^ 명량대첩에 대해서 그 기적같은 전쟁기록도 그렇지만 저는 민중들이 전투를 벌이는 명량의 인근 산에 올라 이를 지켜보았고, 마침내 승리하였을 때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하면서 감격했다는 실제 기록을 보고 가슴이 찡했다는 ...ㅜㅡ (나라도 그 자리에서라면 감격해서 울었을 듯...)
지피지기님의 하신 말씀 하나하나가 저에게는 너무나 큰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역시 제가 쓴 보람이 있는 것 같네요.. 자세하게 읽어주시고, 또한 감평까지 해주신 지피지기 님의 감사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__) ~ 꾸벅 ~
어이구;;아닙니다. 두서없는 제 댓글을 높이 평가하시다니... 과찬이십니다. (__)
^^ 나중에 한번 제대로 읽어볼게요. 오늘은 진지모드가 안되네요.
네 감사합니다.(--)(__) 꾸뻑~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