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運命)을 바꾸는 길
시방동취회(十方同聚會)하야
개개학무위(箇箇學無爲)하니
차시선불장(次試選佛場)이라
심공급제귀(心空及第歸)로다
시방에서 함께 모여들어
낱낱이 무위법을 배우나니
이곳은 부처를 가리는 장소라.
마음이 공 해져서 급제해 돌아가리라
- 고봉 화상 <선요(禪要)> 중 방 거사의 오도송(悟道頌) -
어떤 젊은이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서 길을 가던 중 한 스님을 만났습니다.
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디를 가는 길인가?”
젊은이가 대답했습니다.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길입니다.”
“무엇 때문에 과거시험을 보는가?”
“예, 국가의 관리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글쎄, 국가의 관리가 되는 것도 좋겠지만, 부처가 되는 것만큼이야 하겠는가?”
“네-에?”
젊은이는 그 길로 발길을 돌려 수행도량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도량(道場)은 바로 부처를 가리는 장소[選佛場]입니다. 부처를 뽑는 것입니다.
‘국회의원이 되거나 국가공무원이 되어서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도 좋겠지만,
부처나 조사가 되는 것만이야 하겠는가?’라는 이야기입니다.
공(空) 하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채울 수 있다.
여러분,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입니까? 왜 태어났습니까?
첫째,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까닭은 체험학습을 하러 온 것입니다.
몸은 중요한 체험학습 자료입니다.
몸이 있어야 먹는 것도, 노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실감이 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몸으로 부딪쳐 살면서 배우고 체험하기 위해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둘째, 체험학습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법륜(法輪)을 굴리기 위해서입니다.
매일 학습만 해서는 안 됩니다.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선생님이 없어요.
대한민국 불교에도 공부한 선생님들이 많이 나와, 어서어서 법륜을 굴려야 합니다.
그래서 저의 소망은 여러분들을 모두 선생님으로 만들어 법륜을 굴리게 하는 것입니다.
‘법륜을 굴리겠습니다.’라는 원을 세우고 자기 주변부터 법륜을 굴림으로써, 이 세계가 밝아지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밝아지고 세상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륜의 핵심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이 법륜의 핵심입니다.
‘어떻게 하면 부처로 뽑힐 수 있느냐?’
앞에 소개한 게송에서 말하는 바는 무위법(無爲法)을 공부해서
마음이 공 해져야 부처를 뽑는 시험에 급제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무위법이란 함이 없는 공부입니다.
다시 말해서 ‘놓는 공부’입니다. 우리가 학교와 사회에서 하는 공부는 ‘쌓는 공부’입니다.
지식과 권세, 재산, 애착 등을 쌓아가는 유위법의 공부입니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참다운 공부는 무위법의 공부입니다.
놓아가는 법을 배우는 공부인 것입니다.
분별심을 놓고 애착을 쉬고 탐․진․치 삼독을 쉬어가는 공부, 이것이 놓아가는 공부인 무위법입니다.
진정한 공부입니다.
공(空)이라는 것은 ‘텅 비어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텅 비어있음,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비어있기 때문에 채울 수 있다는 데 근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 법당이 비어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모두 들어와 법회를 볼 수 있죠?
만약 이곳에 다른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여러분들이 들어와 법회를 볼 수 없습니다.
공(空)이란 것도 마찬가지로 비어있음으로 인해서 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공(眞空)은 묘유(妙有)다’라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텅 비어있다’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고정된 실체로서의 몸과 마음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찰나 생멸하는 몸과 마음은 있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어제의 내 몸과 오늘의 내 몸이 같지 않으며, 오늘의 이 몸과 10년 후의 그 몸은 다릅니다.
이것이 바로 유위(有爲)면서 무위(無爲)이고, 무위이면서 유위(有爲)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공이고 중도입니다.
“공하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채울 수 있으며, 무아이기 때문에 어떠한 나도 만들어 갈 수 있다.”
바로 이것입니다. 공하다는 것은 비어있기 때문에 채울 수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고,
고정된 내가 없는 무아이기 때문에 어떠한 나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창조합니다. 지금, 이 모습도 나의 작품일 뿐.” 바로 이것입니다.
불교는 자기 창조설입니다. 나는 누구 작품입니까? 바로 내 작품입니다.
내 작품이기에 누가 고칠 수 있죠? 바로 내가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작품이라면 부처님이 고칠 수 있고 신의 작품이라면 신이 고칠 수 있는데,
내 작품이기 때문에 내가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쁘건 밉건, 잘났건 못났건 모두 여러분의 작품, 바로 내 작품입니다.
“부처도 될 수 있고, 신도 될 수 있다. 인간도 될 수 있고, 축생도 될 수 있다. 내가 선택한다.”
바로 이것이 공과 무아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운명은 지금 내가 만들어 간다.
보통 사람들은 부처님을 향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가족이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
‘시험에 합격하게 해 주십시오.’
‘병고에서 낫게 해 주십시오.’
‘부자 되게 해 주십시오.’ 등 ‘~하게 해 주시오’ 하는 구걸형 기도를 합니다.
예를 들어 ‘세계가 평화롭게 해 주십시오.’라고 아무리 큰 뜻을 품고 기도하더라도 그것은 구걸형 기도입니다.
‘세계가 평화롭게 하는 데 제가 일조를 하겠습니다.’
‘제 마음부터 평화롭게 갖겠습니다.’
‘제 주변 사람부터 평화롭게 만들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바로 발원 형 기도인 것입니다.
구걸형 기도를 하지 말고 발원형 기도를 하십시오.
불교는 자기 창조설인데 왜 구걸을 합니까?
구걸형 기도는 ‘이 모든 것은 신의 작품이다.’라고 믿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의 작품이니까, 신만이 고칠 수 있으니 구걸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나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당히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나라고 믿는 사람들은 더 이상 구걸을 할 필요가 없어요.
발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다만 지켜봐 주시고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인연법에 입각해서 내 마음이 ‘인’이고,
불보살님의 가피가 ‘연’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우리의 스폰서이고 후원자이십니다.
나는 안 하면서 만날 부처님께 해 달라고만 하면 부처님도 도리가 없어요.
그러나 내가 먼저 스스로 노력하고 해나가면서 부처님께 ‘지켜봐 주시고 도와주십시오.’ 한다면,
부처님도 흐뭇해하시며 ‘그게 바로 내 뜻이다.’ 하시며 도와주실 것입니다. 부처님도 연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나 신이 계신다고 해서 우리가 할 일을 대신 해줄 수는 없습니다.
대신 밥 먹어 줄 수도, 아파줄 수도, 돈 벌어 줄 수도, 죽어줄 수도 없습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아무도 그 무엇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고 하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왜 구걸을 합니까? 발원해야 합니다. 발원하되,
‘옆에서 지켜봐 주시고 도와주십시오.’ 이것은 부처님 뜻에도 합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내 모습은 전생에 내가 지은 대로 받는 것이고,
미래의 모습은 지금 내가 짓는 대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진리는 단순 명쾌합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이것이 바로 연기법입니다. 불교는 숙명론이 아닙니다. 운명은 고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고칠 수 있습니다.
미래에 콩을 거두고 싶으면 지금 콩을 심으면 되고
팥을 거두고 싶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팥을 심으면 되는 것입니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요즘 함부로 살인을 하거나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모두 생사관이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죽으면 그만이 아닙니다. 계속 이 번뇌 업장은 끌고 가야 합니다.
죽으면 그만인 사람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연기법을 가르칩니다.
그것이야말로 참다운 공사상이고 중도 사상입니다.
앞에 설명한 진공묘유와 무아에서 보듯, 그 어느 것도 결정되어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떠한 나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데 초점을 두고, 보다 나은 나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과거의 인이 현재의 연이며, 또한 내가 지금 짓는 인이 미래의 연입니다.
여러분은 부처도 될 수 있고, 신도 될 수 있습니다.
인간도 될 수 있고, 축생도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 월호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