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5가(鐘路五街)
신동엽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少年)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東大門)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群像)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적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 땅 어촌(漁村)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娼女)가 양지 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 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勞動者)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半島)의 하늘 높이서 태양(太陽)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 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李朝)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北間島)라도 갔지
기껏해야 버스길 삼백 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肥料廣告)만 뿌리는 거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우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동서춘추』, 1967.6)
[어휘풀이]
-서시오판 : ‘서시오’를 나타내는 교통신호판
[작품해설]
이 시는 시적 화자가 종로5가 신호등 앞에서 동대문을 묻는 한 소년과의 만남을 계기로 당대 민중들의 운명을 서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시는, 산업화 근대화를 부르짖던 1960년대 사회적 상황속에서 도시의 노동자나 창녀로 변해 가는 농민과 민족의 모습을 역사적 시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농민의 희생과 농촌의 붕괴를 담보로 해서 이루어진 산업화 정책으로 인해 농민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피폐된 농촌을 떠나 어쩔 수 없이 도시의 노동자나 창녀로 전락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노동자 계급의 화자의 눈에 비친 현실은 ‘이슬비 오는 날’ 로 시작하여 ‘비에 젖고 있었다’로 끝나는 작품의 어두운 분위기만큼 침울하고 고통스럽다.
전 9연의 이 시는 내용상 크게 5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단락(1⸱2연)은 한 소년과의 만남이 제시된 부분이다. ‘이슬비 내리는 날’과 ‘통금에 쫓기는 밤 열한 시 반’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자아내는 절박한 상황은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대비됨으로써 더욱 고조된다. 한편 ‘서시오판’은 신호등을 뜻하는 것으로 소년의 운명의 갈림길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단락(3⸱4연)은 소년의 모습과 그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소년의 운명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에서 때 묻지 않은 동심을 엿볼 수 있으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는 / 먼 길 떠나온 고구마’는 따스한 온정을 지닌 존재임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 그에게서 어린 노동자로서 그가 헤쳐 나가야 할 비극적 운명이 상징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셋째 단락(5⸱6연)은 언젠가 보았던 창녀와 막노동자의 모습을 회상하는 부분으로, 화자는 그들을 소년의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다. 화자는, ‘양지 쪽 기대 앉아 / 속내의 바람으로 때 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는 ‘부은 한쪽 눈의 창녀’와 ‘고층 건물 공사장’에서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는 ‘등짐하던 노동자’가 겪는 개인적 비극을 세 개의 외세 - ‘대륙’ ⸱ ‘섬나라’ ⸱ ‘새로운 은행국’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반도라는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민족의 고난을 ‘대륙’과 ‘섬나라’로 나타내고 있으며, 미국 자본에 의존하여 수출 주도형 산업화 정책을 펼치고 있는 1960년대 경제 정책을 ‘새로운 은행국’으로 제시한다. 이와 같은 시인의 투철한 현실 인식은 결국 화자로 하여금 현실은 ‘이조 오백 년’과 다를 것이 없으며, 8연의 ‘북간도’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일제 시대에 비해 나을 것이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넷째 단락(7⸱8연)은 농촌의 황폐한 현실과, 그로 인한 농민들의 이농(離農) 현상을 요약적으로 보여 주는 부분이다. ‘남은 것은 없었다’,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로 이어지는 화자의 애환 어린 탄식과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라는 자조 섞인 독백에서 당시 농촌 현실의 궁핍화를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다.
다섯째 단락(9연)은 1연의 시상을 변형 반복하는 부분으로, 화자의 신분을 ‘노동으로 지친 나’라는 구체적 표현으로 알려 준다. ‘낯선 소년’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지식인의 시각이 아니라, 같은 노동자의 입장에서 그의 고통을 바라보는 화자의 동정심은 마침내 ‘나의 가슴에선 돗락 보가기가 / 비에 젖고 있었다’라는 끝 구절로 용해됨으로써 전편에서 서술된 내용에 대한 신빙성을 한층 더 강화시키고 있다.
[작가소개]
신동엽(申東曄)
1930년 충청남도 부여 출생
단국대학교 사학과 및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당선되어 등단
1967년 장편 서사시 「금강」 발표
1969년 사망
1980년 유고시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발간
시집 : 『아사녀(阿斯女)』(1963), 『금강』(1967), 『신동엽전집』(1975),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1980), 『꽃같이 그대 쓰러지면』(1989), 『젊은 시인의 사람』(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