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에서
오늘은 오일장이 서는 날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근처에는 전통재래시장이 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정수리를 내리찾는 정오에 시골 장바닥을 어슬렁거린다. 장날마다 천천히 발품 팔아 시장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길 가던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하는 것이 장터의 마력이라면 먹거리와 볼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시장에 나온 물건도 천차만별이지만 다양한 삶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오일장에 가면 정겨운 사람 냄새가 오롯이 묻어난다. 단출한 두 식구에 물건을 얼마나 사들일까. 장날마다 필요한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하루를 여는 시장 사람들의 모습이 갓 잡은 활어처럼 활기차 보여 열정적인 그들 삶을 닮고 싶어서다.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나듯, 시들어가는 내 삶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시장에 나왔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시골 장터는 언제나 소란스럽고 분주하다. 타지에서 온 장돌뱅이들은 물건 하나라도 더 팔려고 새벽부터 짐을 부려놓고 꿈에 부풀고.장 구경 나온 사람들은 실하고 값싼 물건 고르느라 눈과 귀가 바빠진다. 먹는 즐거움은 또 어떤가. 정오쯤이 되면 순대국밥 집에서 구수한 냄새가 솔솔 풍겨 나오기 시작한다. 이때 나그네들은 허기를 달래려 그곳으로 향한다. 나도 옛 추억의 맛에 이끌려 발걸음을 재촉한다. 후욱. 익숙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드니 혀가 먼저 마중나와 입안이 침이 고인다. 순대국밥 두 그릇을 주문했다. 식당주인은 천장에 플라스틱 통을 고무줄로 매달아 놓고 정신없이 돈을 쓸어 담으며 잇몸이 드러나도록 말갛게 웃고 있다. 그녀 웃음매가 박꽃처럼 순박하다. 도시에서 보기 드분 시골 오일장에서나 불 수 있는 정겨운 풍경이다. 그풍경속으로 잠자고 있던 내 어린 시절이 살포시 고개를 든다.
그날은 고향 마을 장날이었다. 할머니는 오일장이 열릴 때마다 나를 데리고 다녔다. 보자기를 내 허리춤에 묶고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가면 장터는 언제나 신기루였다. 그곳은 물건을 팔고 사는 이들로 북적였고 장바닥은 온갖 물건들로 쌓인 만물창고였기에 내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 했다. 할머니와 장터 서너 바퀴 돌고 나면 빈 보자기는 만삭이 되었다.이때쯤이면 다리가 아프고 입이 굽굽해졌다. 떼쓰지 않아도 으레 할머니는 달달한 국화빵. 강정 등 주전부리를 사서 손에 들려주었다. 그러다 출출 해지면 할머니는 허름한 천막 순대국밥 집에 들르곤 했다. 뜨끈한 순대국밥 한 숟가락 후루룩 떠먹으면 그 맛이 얼마나 구수했던지 입 안에 착착 감겼다. 게 눈 감추듯 한 그릇 비우고 나면 포만감으로 온몸에 생기가 도는 듯했다. 순대국밥은 그때 그 기억 때문인지 지금도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어쩌면 그 시절 순대국밥의 따뜻한 기억이 나를 재래시장으로 발길을 돌리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골목길을 빠져나와 기린처럼 목을 길게 빼고 걸었다. 어디선가 상인의 외침이 들려온다. 파라솔 아래 좌판을 벌인 생선장수가 "팔딱팔딱 뛰는 생선이 오늘 하루 반값이유!" 라며 목청껏 소리친다. 재빠르게 다가가니 좌판에 간고등어가 얼음을 베게 삼아 끌어안고 짭조름한 사랑을 나누고 있다. 넌지시 손짓을 하자 그는 익살스럽게 크고 금실 좋은 놈으로 골랐다며 도마에 올려놓고 단번에 두 동강이를 낸다. 삶이 고될지라도 자기 몫을 다하는 사람들. 가족들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의 희망일 터, 그는 또 장터를 떠돌며 비릿한 삶을 끌어안고 살아갈 것이다.
시장 한복판을 지나 한걸음 떼려는데 백발노인이 내 옷자락을 슬그머니 끌어당긴다. 초라한 행색의 노인은 무공해로 농사지은 것이라며 시뻘건 고추자루를 펼쳐놓고 팔아달라고 간청한다. 돈이 궁해서 가지고 나왔다는 할머니 말처럼 굽은 등과 흙빛 닮은 거뭇거뭇하고 거친 손등에서 그의 고된 삶을 읽을 수 있었다. 밭고랑 같은 주름진 노인의 얼굴을 보니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랐다. 평생 한과 씨름하며 살아왔을 노인의 모습이 애처로워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값을 지불하자 그는 고추 한소쿠리를 덤으로 얹어주었다. 할머니가 흘린 땀방울에 비하면 대가가 시원찮겠지만, 해거름에 노인은 마치 공돈이라도 생긴 양 서둘러 푸근한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노인은 이 순간 자기 몫의 물건을 팔고 횡재했다는 기쁨으로 또 장터로 나올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인생살이도 장터를 닮은 것 같다. 산다는 것은 나 자신을 시장에 내놓고 부가 가치를 올리는 일이 아닐까. 우리 삶도 장날 아침에 물건을 펴놓고 주어진 몫을 최선을 다해 팔아 저녁이면 거뒤들이고 돌아가는 장돌뱅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오늘 장터를 누비며 발품 팔아 좋은 물건 값싸게 샀으니 내 몫은 제대로 보상받은 듯싶다. 그렇다면 내 좌판에는 무엇을 팔아야 할까? 이득을 챙기기보다 훈훈한 정을 담아 좋은 물건을 값싸고 넉넉하게 드리고 싶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에게 덤을 얹어주고 싶다. 인심이 후해 지나는 사람들 발길을 멈추게 한다면 그것만으로 족하지 않은가.
나는 사람들 북적거리는 시골 장터가 좋다. 세상이 좋아져 주변에 편리한 대형마트가 널려 있어도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사는 한, 나는 시골 장터를 찾을 것이다. 굳이 오일장을 고집하는 이유는 그곳에서만 맡을 수 있는 사람 냄새와 진솔한 삶의 정서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의 따뜻한 내 부모님이고 이웃들이다. 장이 허름해질 무렵 장터를 들아 나오는데 내 눈길은 연신 백발노인한테 쏠린다. 노인의 구부정한 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비록 연로하지만 자기 몫에 최선을 다하는 진솔한 모습이 나를 사로잡아기 때문이리라. 삶이 시들해지고 사람이 그리운 날엔 사람들로 왁자한 오일장에 들러 후한 인심에 젖어보고 싶다. 다음 장날이 또 기다려진다.
안희자
r충청타임즈J 생의 한가운데' 집필 제6회 우리숲이야기 공모전 수필 금상 수상(문학의집서울 주관), 제13회 백교문학상 공모전 수필 대상 수상(강릉문화재단 주관) shukk82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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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이웃 동네로 이사하고 정리하느라 아직도 어수선하게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