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조상 제사에는 고조부·증조부·조부·부(父)까지의 4대조를 위한 기제(忌祭)를 비롯하여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차례(茶禮)·묘제(墓祭) 등이 있다. 이 중 불천위제사는 종가(宗家)의 위상과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 때문에 항간에는 불천위 조상을 모시고 있어야만 종가의 자격을 부여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안동 지역에서는 불천위를 모시고 있는 종가를 ‘불천위 종가’라고 별도로 칭함으로써 다른 종가와 가격(家格)을 차별화하기도 한다.
불천위제사는 부계 친족의 결속에도 기여하고 있다. 자신들의 세거지였던 마을을 떠나 전국 각지에 살고 있는 후손들은 조상의 불천위제사를 지내기 위해 버스를 전세 내면서까지 참사(參祀)를 하는데,
퇴계 이황(李滉)의 불천위제사에는 전국 각지에서 약 100명의 후손들이 모여들기도 한다. 후손들은 불천위제사를 통하여 자신들의 존재적 근원을 재확인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며, 서로 동질감을 느끼면서 공동체적 삶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본고는 먼저 불천위의 제도를 살피고, 부족한 점은 불천위제사가 행해지는 현장의, 종가의 불천위 관습을 통하여 해명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에 논의를 모으려한다. 다시 말하자면, 불천위 제도의 규정과 불천위의 종가에서 행한 불천위제사의 전승 사이에 얽힌 의문은 현장의 조사로 해명해야 하며, 그 결과는 안동 지역 제사문화의 또 다른 실제를 접근할 방편으로 삼게 할 것이다. 자료는 안동 지역에 알려진 47위의 불천위를 분석한 것이다.
불천위는 조선 유교문화의 역사와 변화를 잇는다. 불천위는 중국의 유학에서 조선의 독자적 유학으로 정립된 시기에 형성된 당시 인물의 생활과 사회의 상을 후세에 계속 비추기 위해 제도로 만든 모형이다. 불천위의 모형은 그 자손의 손에 맡기는 것이 값있게 보전되고 발전할 것이라는 것을 조상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전승의 방법은 조상의 삶이 매년 위안을 얻고 기념되며 추모받는 기제사로 정한 것이다. 왜냐하면 기제사는 갖춘 제사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조상은 4대동안 산 사람이 사는 집안에서 함께 할 수 있지만 불천위는 세대를 초월하여 더불어 살 수 있게 한 것이다.
한국인은 일생의 세월 속에서도 변함없이 적용할 수 있는 문서로 된 예서(禮書)를 고안했다. 그 예서는 한국인의 일생을 전승시키는 경전과 같은 것이다. 조선 유학자들은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작은 한반도에서 천자보다 질 좋고 사람다운 조선인의 삶을 이끌려는 몸부림에서 현실을 극복하는 일생을 산 지식층의 선비들이다. 그들은 그런 삶 속에서 한국의 풍토와 심성에 적절한, 중국식의 것이 아닌 조선식의 의례로 재편성한 것이다. 불천위의 인물뿐만 아니라 여러 학자들은 대체로 예설을 가볍고, 깊게 관심을 갖고 정리했다. 학자들의 저서에는 꼭 그런 의례의 부분이 들어 있다. 곧 지방을 초월하여 가문마다 전하는 의례의 문서가 예서인 셈이다.
그것은 오랜 세월의 경험을 토대로 많은 자료들을 참고하여 정립한 것이기 때문에 그 가문만의 특성이 있고, 그 지역만의 여건을 살린 내용이다. 여기에도 이념에 따른, 지역과 가문에 따른 예서를 모두 종합적으로 집대성한 예서가 있어서 큰 줄기는 이것에 의존했다. 그 구분은 주자의 의례를 중시하는 계통과 주자에만 매이지 않고 중국의 삼례를 포함한 계통이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통설로 구분 짓는 서인과 남인, 기호와 영남의 관계에도 흐르고 있다. 그래서 지방색이 한몫하고 있다. 그래도 그 대강은 같다.
예서는 개체의 변화가 심한 세세한 부분을 열거하지 않는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지 허용되고, 가능한 규정을 다루므로 오히려 세부사항은 각자에게 맡기고 있다. 거기에서 각 가문과 지역의 특성과 경제적 여건 및 취향이 나온다. 이런 요인은 세월 속에서 독특한 의례문화를 형성시킨다. 여기서 다룰 불천위제사는 그런 입장을 확인할 기회가 된다. 각 종가의 제사에서는 예서는 물론, 가문, 지역, 시기나 여건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1. 불천위의 현황과 동성 조직
1) 고을과 동성마을 단위로 구분한 불천위
안동 지역에서 북부권에 해당하는 고을은
예안면,
도산면,
녹전면 및
북후면의 방향이다. 이 고을은 예전의
예안현에 해당하는 곳이고, 이곳에 사는 마을 사람들은 매년 춘추(음 2월과 8월 중정일)에
예안향교에서 석전을 행한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예안면과
도산면 및 월곡면을 합하면 그 범위는 훨씬 방대하다.
안동댐에 잠긴 마을에는 현재 푸른 물만 고여 있지만, 수몰민들은 집단이나 개인으로 안동과 인근에 살고 있으며, 수몰 전의 정황을 나름대로 이주한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북부권의 생동감 있는 모습을 찾기 위해 소속된 구획대로 고을과 마을 단위를 살린다.
북부권의 불천위는 19위가 있는데
녹전면에 2위,
예안면에 5위가 있고,
도산면에 5위가 있다.
와룡면에는 6위를 모시고 있고,
예안현은 아니나 수몰된 월곡면의 1위도 이곳에 넣는다. 왜냐하면 같은 노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먼저, 보다 북쪽의
녹전면에는 원천리 외내에
간재 이덕홍(李德弘)과 이반초당의 불천위가 있다. 원촌리 외내에서 산 불천위의 자손들은
영천이씨와
진성이씨들이다.
녹전면과 이웃하면서 봉화와 영양에 인접한
도산면에는
진성이씨에 해당하는 5위의 불천위가 있다.
진성이씨 선조의 불천위는
온혜리에 노송정,
송재 이우(李堣),
온계 이해(李瀣)와, 토계리 상계에
퇴계 이황, 하계에
동암 이영도(李詠道)의 불천위가 있다. 예전의
예안현 부근에는
동부리 부용산 아래에
월천 조목(趙穆),
부포리에
성성재 금란수(琴蘭秀),
주진리에
삼산 류정원(柳正源)의 불천위를 모신 마을이 남아 있다. 그 성씨들은 횡성조씨, 봉화금씨,
임동 무실에서 갈린
전주류씨이다.
영천이씨의 불천위는 예안 분천리에 있었는데 그 마을은 대부분 수몰되고, 종택은 시내
옥정동에 옮겨가고, 사당은 운곡동에 서원과 사랑채
긍구당(肯構堂)을 함께 이건해 놓았다. 지금은 모두
도산면에 속해 있다. 아울러 월곡면은 예전에는 임하에 속해 있었으나 완전히 수몰되었다. 그 면의 도목촌은
흥해배씨의 일족이 세거했지만 수몰되면서
임연재 배삼익(裵三益)의 종택은 시내
송천동으로 이건해 갔다.
현재
와룡면의
오천리는 속칭 군자리로 유명한데 수몰 전에는 예안에 속하였다. 안동에서 외내로 알려진 곳에 산
광산김씨의 마을도 수몰되고,
계암 김령(金坽)의 종택은 시내
용상동으로 이전되었다. 안동 시내에 보다 가까운
와룡면에는 모두 6위의 불천위가 있다. 불천위의 자손은
지내에
백담 구봉령(具鳳齡)의,
이상리에
송소 권우(權宇)의, 가야리 늪실에 권등암의,
가구리에
유일재 김언기(金彦璣)의, 태리 말바우에 정죽헌의, 그리고 주하리 주촌에
이정의 사당을 지키고 있다. 각 불천위는
능성구씨,
안동권씨,
광산김씨,
청주정씨,
진성이씨를 관향과 성씨로 삼고 있다.
이제 동부권으로 간다. 영덕과 남쪽으로 의성과 인접한 곳으로
임하면과
임동면 및
길안면이 여기에 속한다. 모두 9위가 있는데
안동권씨 1위,
안동김씨 1위,
의성김씨 3위, 그리고
전주류씨가 4위이다.
임하면 천전리에
청계 김진(金璡)과 손자
운천 김용(金涌), 아랫대의
제산 김성탁(金聖鐸)의 불천위가 있으며, 이웃
임하리에
이우당 권환(權寏)의 불천위가 있다.
임동면에는 모두
전주류씨의 불천위인데, 박곡에
용와 류승현(柳升鉉),
고천리에
백졸암 류직(柳㮨), 수곡 한들에
정재 류치명(柳致明),
마령리에
호고와 류휘문(柳徽文)의 불천위를 모셨다. 이곳도
임하댐이 건설되어
류직을 제외한 3위는 이주하게 되었다.
류승현과
류휘문의 불천위는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일족과 더불어 이주해 가고, 마을의 일부를 남긴 채
류치명의 불천위는 종손이 시내에서 모시고 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곧
일직면과
남후면이 나온다.
풍천면은 일부는 서쪽으로 접하나 편의상 이 3면을 남부권으로 잡는다. 이 고을들은 의성과 영천과 접해진다. 불천위는
일직면에 4위,
풍천면에 6위가 있다. 남부권에는 불천위가 모두 10위에 해당한다.
일직면의
구미리에
의성김씨의
귀와,
송리에
진성이씨의
후산 이종수(李宗洙), 망호리 소호리에 생전에 당내에 속한
한산이씨의
수은 이홍조(李弘祚)와
대산 이상정(李象靖)의 종택이 있다.
예전에는
풍산읍과
풍천면이 풍산현에 소속되어 있었다. 여기서 지리적 위치를 따라 남서로 나눈다.
풍천면에는 예전의 풍산현에서 벗어나는 곳,
가곡리 가일에
안동권씨 집성촌이 있는데
병곡 권구(權榘)의 종택이 있다. 거기서 남쪽으로
하회리와
광덕리가 놓여 있다. 모두
풍산류씨의 일문으로 5위를 불천위로 삼고 있다.
하회리에
귀촌 류경심(柳景深),
입암 류중영(柳仲郢),
겸암 류운룡(柳雲龍),
서애 류성룡(柳成龍)이 살다간 곳을 알리는 종택이 있고, 이웃의
광덕리에 족친인
파산 류중엄(柳仲淹)의 종택이 있다.
마지막으로 서부권에는
서후면과
풍산읍이 들어간다. 예천과, 일부는 영주와 접한 위치에 있다.
풍산읍에는 4위를 불천위로 삼고 있다. 오미리 미동에
풍산김씨 일문에서 4위의 불천위가 한 마을에 모셔져 있다. 곧
죽봉 김간(金侃),
유연당 김대현(金大賢),
허백당 김양진(金楊震)의 불천위가,
난졸재 이산두(李山斗)의 불천위는 풍산읍 하리 우렁골에 있다.
서후면에는 4위가 있다. 모두 이웃한 동성마을인데,
경당 장흥효(張興孝)의 종택은
성곡리에,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종택은 검제의 본마에,
간재 변중일(邊中一)의 종택은 금고에 있다. 이 3위가 있는
금계리에서 하천을 건너
교리에
단계 하위지(河緯地)의 종택이 있다. 서부권은 불천위가 8위인 셈이다.
이렇게 모두 안동 시내에서 변두리에 불천위의 종택과 그 선대에서 이어온 동성마을이 집성해 있다. 그런데
고성이씨의 청옹 종택은
안동댐 입구인
법흥동에 위치해 있다. 전통 사회에서 이곳은
안동부에서 약간 외진 곳이나 세월이 흘러 시내에 속하게 되었다.
불천위의 지리적 영역별 구분
성씨별 불천위
2) 성씨별 불천위
먼저 불천위를 성씨별로 구분한다. 이것은 안동에 세거한 주요한 씨족들을 이해하는 데 큰 보탬이 된다. 이들 선조의 세거지와 각 씨족들의 동성마을을 이해하는 것에도 정확한 단서를 만든다. 무엇보다 역사적 시기와 사회적 관계는 한결 가볍게 접근할 수 있다. 불천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정 기간 안동 지역에서 주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각 씨족 간에 1위가 있는 성씨는 모두 11씨족인데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능성구씨:
백담 구봉령, 봉화금씨:
성성재 금란수,
안동김씨: 보백당
김계행,
흥해배씨:
임연재 배삼익,
원주변씨:
간재 변중일,
전의이씨:
난졸재 이산두,
고성이씨: 청옹 이후영,
안동장씨:
경당 장흥효,
청주정씨: 죽간 정두, 횡성조씨:
월천 조목,
진주하씨:
단계 하위지.
2위가 있는 씨족은 3성씨로
광산김씨와
영천이씨 및
한산이씨이다.
광산김씨는 군자리의 일대에 사는 예안파가 주류를 이루는데
계암 김령이 여기에 속하고, 풍천의 담암파와
김언기가 파조가 된 유일재파가 있다.
김언기와
김령은 방계의 족친간인 셈이다. 그리고
영천이씨의 불천위로 예안에서 서로 마을은 다른 곳이나
간재 이덕홍은
농암 이현보(李賢輔)의 증손이다. 소호리에 세거한
대산 이상정은
수은 이홍조의 현손이다.
풍산 오미리에 가세를 편
풍산김씨에는 불천위가 3위이다. 즉,
김간,
김대현,
김양진이다.
김양진의 증손이
김대현이고,
김간의 고조부가
김대현이다. 안동 지역에서 씨족이 가장 번창한
안동권씨는 모두 고려 개국공신
권행(權幸)의 자손인데 15파로 나뉜다. 4위의 불천위는 부정공파의 권등암과
권우 및 임하지파에 속하는
권환과 복야공파의
권구로 구분된다.
한 씨족에서 5위인 성씨는 3족속인데,
풍산류씨와
전주류씨 및
의성김씨이다.
풍산류씨는 5위가 모두 당내에 들어간다.
류경심은
류중영의 종동생이고,
류운룡과
류성룡은 형제간으로서
류중영의 자제이며,
류중엄은
류운룡과
류성룡의 종숙부이면서
류중영과 종동생이다. 그러므로
류중영과
류경심 및
류중엄은 종형제간으로서
류중영이 맏형인 셈이다.
전주류씨는 모두
임동면 수곡리 무실에서 터전을 마련한
기봉 류복기(柳復起)의 후손이다.
류직은 5인물 가운데 앞 시대의 사람이고 안동의 무실류씨를 일군
류복기의 손자이다.
류정원은 화산오룡비의 한 사람으로서 그 손자가
류휘문이다.
류치명은 증숙조인
동암 류장원(柳長源)에게 학문을 익혔다.
류장원은 조선 후기에 안동의 예서를 집대성한
『상변통고(常變通攷)』의 저자이다.
류승현은 류봉시(柳奉侍)의 아들이다.
그리고
의성김씨는 3위가 3대에 걸친 조손간(祖孫間)이다.
김진의 4자가
김성일이고,
김진의 손자가
김용인 셈이다.
김성탁은
김진의 증손인
표은 김시온(金是榲)의 증손이다.
김시온은 병자호란 후,
임하댐의 건설로 이미 수몰된
길안면 용계리의
도연폭포가 있는 곳에서 은거하면서 와룡초당을 짓고 제자를 양성하였는데, 그 선비의 군자다움을 일러 후세에 ‘숭정처사(崇禎處士)’라 불렸다. 하지만 김구와는 위의 4위와 함께 모두 원사공파의 후손이나,
오우당 김근(金近)의 후손이다.
마지막으로
진성이씨 내에는 8위의 불천위가 있다. 이들을 가장 쉽게 구분하면
이황의 선조와 후손과 방계친으로 나누어진다.
진성이씨 선조 중에서 가장 상대에 속하는
이정과
이정의 3자 이노송정,
이정의 손자이자
이황의 숙부인
이우,
이황의 중형
이해, 이노송정의 손자이자
이정의 증손인
이황,
이황의 손자
이영도,
이우의 5세손인 이반초당이다. 이반초당은
고성이씨 이후영이 외조부가 된다. 그리고
이종수는
학천 이봉춘(李奉春)의 후손이고 이덕삼(李德三)의 아들이다.
특정한 씨족 가운데 여러 불천위를 모신 경우는 각 위 간에 부자와 손자, 증손의 관계뿐만 아니라 당내간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대부분이 한 선조의 후손으로 세대 몇 세대를 비켜서 다시 가문의 문호를 열기도 한다.
3) 불천위의 배위
불천위의 배위는 혼인으로 연결 짓는 처가와 외가 및 매가(妹家)의 관계를 파악하려 하는 것이다. 안동 지역의 각 가문에서는 세대의 수를 올라가면 조상의 외가를 알고 그들과 관계하는 것을 예절로 삼고 있다. 특히 4대조 상의 외가를 구분하면 여성과 관계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친정은 나의 ‘외가’이고, 할머니의 친정은 아버지의 외가로서 나의 ‘진외가’이고, 증조모의 친정은 아버지의 진외가이며, 나의 ‘증외가’이고, 고조모의 친정은 나의 ‘선외가’가 된다. 그 다음으로서 숫자의 세대로 구분하여 5대조, 6대조, 10대조, 15대조 외가로 올라간다.
특히 불천위가 있는 종가의 경우, 배위는 중요한 매개가 된다. 종가의 자손은 불천위로 삼은 할머니의 친정으로서, 그 자손과 외척의 연비 관계를 유지한다. 그래서 ‘15대조 외가’, “불천위인 00할매의 외가에서 왔다”고 이야기한다. 본인과 아버지의 처가이고 자신과 자식의 외가의 경우를 통틀어 ‘연사가’라고 한다. 이런 관계로 맺은 친척을 ‘연비일가’라 한다.
불천위가 있는 종가에서는 대체로 배위의 자손과 아직도 내왕을 한다. 평소보다는 주로 집안의 대사가 있을 경우인데, 그것은 초상, 길사, 불천위와 관련되는 일이 생겼을 경우에 연락을 닿게 한다. 또한 불천위제사가 있는 날에 참례하기도 한다. 이들이 오면 가장 큰손님으로 접대한다. 불천위의 배위는 자손을 번성시키고 한 가문을 지속시킨 귀감이 되는 사람이고, 배위의 본가에서는 할머니로서 난 자식이 자신의 가문의 영예를 더하였기 때문이다.
불천위의 외가는 아마도 누대로 내려오면서 서로 주고받은 관계에 의한 관습에서 지금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갑자기 몇 대만에 이어진 경우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간혹 그 관계를 추적하지 못하는 종가의 경우도 더러 생긴다. 게다가 불천위의 경우, 지금도 그 외가의 외손봉사를 하고 있는 종가도 있다.
그 배위는 전체를 분류만 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안동권씨가 12명(관향이
화산, 영가인 경우도 포함됨),
영양남씨가 5명, 봉화금씨가 3명이다. 함창김씨, 재령이씨,
전주류씨,
문소김씨,
동래정씨,
영천이씨, 무안박씨,
진성이씨는 각각 2명씩이다. 그 외 1명씩인 경우는 다음과 같다.
안동김씨, 황성조씨,
전의이씨, 이천서씨, 의령남씨, 벽진이씨, 전주이씨, 양천허씨, 여흥민씨, 선성이씨, 영해신씨, 신천강씨, 영양김씨, 고창오씨, 장수황씨, 월성이씨, 연안김씨, 김해허씨,
선성김씨로 모두 34명이다.
그 외 축문의 경우에 관향을 열거하지 않고 00김씨(4명), 00신씨, 00이씨(3명)로 성만 읽는 경우가 있다. 거의 본관을 쓰지 않는다. 실제로 모르는 경우도 있으나 삼가는 것 같다. 47위 가운데 부인이 3명인 경우가 1명, 2위인 경우가 11명, 1위인 경우가 35명이다. 모두 59명에 해당한다.
2. 불천위 인물의 활동 시기
47위의 불천위를 시기를 나누어서 구분해 보았다. 시기는 편의상 임의로 50년 단위로 했다. 간혹 5년 내외의 차이로 인하여 오히려 한 시기로 보아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특정한 사건을 중심으로 한 것은 아니므로 그러할 경우에는 다른 설명의 도구를 쓸 것이다.
각기 도표는 출생과 사망을 기준으로 삼았다. 출생은 가장 먼저 사망한 사람과 맨 나중에 출생한 인물을 구분하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조선조에서 어느 시점의 사람에서부터 불천위를 받았는가를 확인하려는 것이고, 최근 출생의 인물은 언제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불천위가 가능했는가를 확인하려는 점이다. 또한 출생한 시기는 대체로, 각 인물이 활약한 전성기를 예측하게 한다.
사망을 기준으로 한 것은, 사람은 출생한 것도 중요하지만 죽음은 순서가 없으므로 어느 시기의 인물들이 가장 많이 불천위로 배향 받게 되는가를 살피려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사망한 사람은 언제 어떻게 불천위로 가능했는가를 확인하는데 의문의 여지를 남길 것으로 본다. 사망과 출생은 모두 중복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보다 확실한 검증임을 해명할 것이고, 특정한 시기에 인물들은 왜 그렇게 불천위로 받을 만했는가 하는 단서를 마련할 것으로 본다.
사망을 기준한 불천위의 시기별 인물
안동 지역에서 불천위는 15세기 후기에 죽은 인물로 비롯된다. 물론 최연장의 인물이다. 그 첫 인물은 이정공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 분은 정확한 생졸을
진성이씨의 후손들도 아직 모르고 있다. 단지 이노송정으로 인하여 최근이라도 1400년쯤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음으로
하위지(1412~1456), 권등암(세종 8~세조 13), 및 이노송정(세종 6~성종 19)의 순이다.
16세기 전기는
김계행,
김양진,
이우와
이해로 모두 4명이다. 16세기 후기에 이르러 13명이나 된다. 이때
이황을 비롯한 공의 급문제자,
이황과 함께 하면서 앞서 유학의 길을 터놓은
김진, 정죽헌,
김언기, 보다 연령이 많은
이현보와
류중영,
류경심 등이 나온다.
17세기 전기에 여전히
이황의 급문제자와 퇴도제자의 제자들의 인물들이 보인다. 곧 16세기 후기에서 17세기 전기가 무려 안동 지역 불천위 수효의 거의 반을 차지한다. 그러면서 17세기 후기로 가면서 다시 반으로 줄고, 19세기에 와서는 한두 명씩 나온다. 가장 후에 사망한 인물은 김귀와(1739~1816),
류휘문(1773~1827),
류치명(1777~1861)이다.
다시 출생한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불천위의 인물은 언제부터이고, 어느 시기가 가장 많으며, 어느 시기까지 이어지는지 알아본다.
출생 시기에 따른 불천위의 분포
출생을 기준으로 삼으니 사망의 기준보다 한 시기가 당겨진다. 인물 간에도 어느 정도 이동이 생긴다. 그리고 18세기 후기에 태어난 인물들로 마무리된다. 15세기 전기에 태생한 인물들이 5명인데 4명은 이미 설명했고, 나머지는
김계행(1431~1517)이다.
김계행은 불천위가 되는 과정을 아래의 장에서 설명할 것이다. 다음으로 15세기 후반기는
이현보(1467~1555)인데
김계행과 함께 80세 이상을 장수했다.
김진은
이황보다 1년 빨리 출생했지만 11년을 오래 살았다. 이 경우는 시기의 구분이 좀 모호할 수 있다. 모두 5명이다.
사망 연도에서 16세기 후반기에 다수가 나왔는데 출생에서는 16세기 전반기에 14명이란 다수가 나오고, 16세기 후반기에도 버금가는 9명의 수효가 집계되어 전체의 반 정도를 차지한다. 곧, 16세기에 출생한 인물이 주류를 이루고 그들이 활약한 정도는 17세기 전반기까지 지속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출생과 사망을 통하여 보면 각 인물간의 큰 변동이 없는 것으로 보아 거의 모두 그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 전성기의 인물은 사라지고 그 이후의 인물은 15세기처럼 17~18세기 전기까지 인원으로 완전히 1/2~1/3로 줄어든다. 이들이
퇴계의 급문제자들에게 배운 제자들이거나 그 다음의 제자로 안동의 유교, 도학을 지속시킨 인물들이다. 18세기의 인물은 18세기를 이어가고, 후기에 출생한 인물들이 조선조 끝자락, 19세기를 살아간다.
불천위로 보았을 때 16세기에 안동에서 귀감이 된 인물은 우후죽순으로 등장했는데 앞에서 다룬 여러 성씨들이 거의 모두 이 시기의 인물들이고, 조선시대의 안동의 학문과 문화가 꽃피던 시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곧 유학의 집성기이며 유교문화의 체계가 다져진 시기일 것으로 본다. 아울러 조선 말기에 안동을 이끈 지식층은
전주류씨의 인물들이다. 불천위의 17세기에 시작되어 18세기에 주를 이루고 조선 말기를 이끌어간다. 거기에는 사망을 기준으로 볼 때, 다른 씨족의 김귀와,
이종수,
이상정,
이산두,
김성탁, 이후영,
김간,
권구 등의 인물로 거슬러 올라가 모두 함께 한 것이다.
3. 불천위 인물의 사회적 활동과 대인관계
1) 과거 급제자의 동향
과거급제자의 구분
불천위의 인물들은 지식의 세계를 어떻게 이루어 갔는가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당시의 과거는 사대부의 신분에 이르는 길이요, 관리가 되어 정치를 하면서 소신의 뜻을 펴는 길이며, 생계를 잇는 수단이 되었다. 대부분 서인에 이르기까지 집안에서 공부하거나, 선생을 찾아 수학하면서 학문을 뜻을 펼쳐나간다. 국가 기관으로서는 각 고을의 향교와 중앙의 성균관이 있다. 고을에서 주관하는 향시, 예조와 도별로 주제하는 소과, 성균관과 한성부에서 주관하는 문무과가 있다. 여기서는 문관의 대소과만을 구분했다. 불천위에서는 거의가 문과 중심의 과거를 본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소과에는 응시하여 선비로서 자질을 갖추고 사회적 인정을 얻는다. 거기서 성균관에 가거나 계별로 공부하여 대과에 급제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소과를 거치지 않고 바로 문과에 응시하여 관료가 되는 사람들도 있다. 대다수가 대소과를 거친 사람들이다. 그것을 수치로 내어본다.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한 선비는 25/47명인데 글자의 굵기를 달리 한 것에서처럼, 이 중에서 8/47명은 대과에 응하지 않았다. 대과에 급제한 사람은 29/47명이며, 소과와 대과를 합격한 자는 17/47명이다. 진하게 칠한 명단대로, 곧 11/47명은 대과에 바로 응시한 것이다. 대과를 2회나 응시한 사람도 1명이 보인다. 과거에 응시한 자는 소과와 대과를 합하면, 모두 36/47명이 된다. 11/47명은 과거를 단념한 사람들이다.
안동의 사람들은 선비의 길을 중시하였고, 관료로 가는 과거의 응시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8명은 소박한 관리의 뜻을 펴는 소과만으로 만족하고 향촌에 머물러 부모의 봉양과 위기지학(爲己之學)의 포부를 펴면서 만년에 후학 양성에 힘썼다. 한편 선조가 관료가 되는 문과에 응시하지 않도록 유계(遺戒)로 남긴 경우도 있다. 그 경우는 조정의 관료가 선정을 하지 않는 폐단을 우려한 뜻이 담겨 있다. 평생을 고향에서 처사적 삶을 살아간 것이다.
한편, 중년이나 만년에 과거에 응시하는 경우는 변란이 생겨 역적으로 몰려 응시권을 박탈당하고, 가난한 가사(家事)에 젊은 시절을 바쳐 공부하여 응시한다. 그러나 이들뿐만 아니라 대, 소과에 통과한 대부분은 평생 관리의 길을 가기도 하지만, 사화와 분란이 있을 때마다 관료의 뜻이 허물어진 것을 알고 사직을 하고 향촌에 머문다. 계속 관리의 임명을 요구해도 나아가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황과
조목이다.
보다 놀라운 것은 평생을 개인이나 선생을 찾아가 공부하여 순수 처사로서 학문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다. 위의 11명의 대부분은 후학을 양성하고 저술 활동을 한 이들이다. 그래서 서민으로서 지식인의 삶을 살면서 고을과 세상을 빛낸다.
2) 문인과 수학
그러면 대, 소과에 합격하거나, 개인적으로 선생을 찾아서 공부한 인물들은 어떤 자들을 스승으로 삼고 있는지 살펴본다.
이황은 숙부인
이우로부터
이해 형님과 더불어 학문의 길로 접어들었다. 예상대로
이황에게서 공부한 사람들이 가장 많다. 대부분 급문제자들이며 11명이나 된다. 게다가 급문제자들에서 수학한 사람은 소수나마 다시 불천위로 배향받은 인물의 스승이 되었다. 이를테면
정구,
김성일,
류성룡과 같은 사람들이다.
성혼과
서거정과 같은 학자들은
풍산김씨 불천위 인물의 스승이 되었다. 이때는 아직
풍산 오미동에 겨우 세거할 시기일 것이다.
김대현에 의하여 ‘
오미동’의 지명을
인조로부터 하사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불천위 인물로서도
퇴계의 학맥이 19세기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즉,
이황→급문제자·
류성룡,
김성일→
장흥효(
김용),
갈암 이현일(李玄逸)→
밀암 이재(李栽),
권구,
김성탁→
이상정→ 김귀와,
이종수,
류치명(
류장원은
이상정의 제자),
류휘문으로 이어진다.
이현일은 현재 안동은 아니지만, 넓은 영역에서 안동권에 속했으며,
장흥효를 외조부로 삼았고,
이현일의 부친이
장흥효의 문하에 있었으며,
이현일도 불천위의 인물이다. 그 외, 모두 안동을 주름잡은 인물들을 스승으로 삼았다. 그런데 20여 명은 사제 관계를 확인하지 않았으므로 상세한 해명을 한 후에야 정확히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문인과 제자 관계
3) 서원과 사우 배향
서원과 사우에 배향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들의 삶 자체가 추존(追尊)을 받을 만할 뿐더러 후세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존경의 인물로 삼아도 된다는 것을 뜻한다. 지면상 각 서원과 사우는 전거를 들어가면서 언급할 수 없으나, 약 2/3의 인물은 향촌이나 문중, 사림, 나아가 온 백성들에게 공경을 받고 있다. 그 인물은 다음과 같다.
구봉령,
권구,
금란수,
김간,
김계행,
김언기,
김성일,
김양진,
김대현,
김령,
김용,
김진,
류성룡,
류운룡,
류중엄,
배삼익,
변중일. 이노송정,
이산두,
이상정,
이우,
이해,
이영도,
이홍조,
이황,
장흥효,
조목,
하위지,
이덕홍(이상 29명).
18명은 유림이나 문중의 묘우가 없는 경우라고 보나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경우도 많다. 더욱이 18~19세기를 살아간 불천위는 미처 묘우에 봉안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서원과 사우의 남설로 훼철령이 내려졌으니 기존의 묘우를 존속시키는 일이 더욱 다급했다. 조선 말기에 경상도가 전국의 1/3을 차지했으므로 안동으로서는 남설일 수도 있었다.
이황의 경우는 성균관 문묘에 배향된 조선 5현에 들어가고,
도산서원을 비롯한 40여 곳에 배향되어 있다.
조목은
도산서원과 또 봉화 창해서원 2군데에
이황과 더불어 종향(從享)으로 모셔져 있다.
도산서원과,
류성룡을 주벽으로 한
병산서원은 훼철에서 제외된 곳이다. 훼철 후에 다시 복설되어 향사를 하는 서원도 여러 곳이 있고, 흔적만 남고 서원이나 사우가 없어졌거나 건물만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것은 사림과 문중의 열정에 달려 있다.
불천위가 아닌 경우에도 서원에 배향되어 각 사림의 존숭(尊崇)을 받는 경우도 많다. 여러 서원에서 사림들의 추모의 대상이 되는 것은 불천위만큼이나 중요한 사표가 될 현인이다. 그러나 불천위의 인물이 미처 배향을 받지 않은 것은 사림 세력을 확보할 정도의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사림에서 보았을 때 불천위는 각 문중과 가문에서 올라온 추천 인물 가운데 유림의 공론을 거쳐 묻힌 현인을 발굴하는 결과를 낳는다. 불천위는 일부 세력이 아닌 온 유림의 존중을 받는 데 의의가 있다.
서원이나 사우에서 배향된 인물이 주로 학통을 잇는 것과 학문을 통한 군자의 정상에 이른 경우라면, 불천위는 서원과 같은 경우도 있지만, 그 공적은 민초에 이르기까지 사표가 되는 일이어야 한다. 즉, 크게 3가지로 요약된다. 즉, 국가에 큰 공을 이루어 국가를 보존한 인물[功存社稷], 한 사람이 이룬 학문과 업적이 한 계통과 이론을 형성하여 후세를 빛낸 공로자[敎在斯文], 평생의 업적이 가문의 후손에게 영예와 귀감으로 남는 경우[業垂後裔]이다. 그래서 서원과 사우에 배향 받지 않은 인물들도 가능할 수 있다. 곧 국가와 사림과 향촌의 서민들이 존경하는 인물이다. 서민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존숭할 인물이 된다.
4) 저술관계
앞 절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한 사람이 선비가 되어 한 지역과 국가의 사표로 삼을 만한 인물이 되는 데는 그 사람의 사회화가 중요하다. 안동 지역에서는 거의가 과거를 통한 선비의 삶을 살고, 그렇지 않더라도 학문하는 선비의 자세로 일생을 보냈다.
특히, 안동 선비들은 향촌에 머물면서 곳곳에서 서민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안빈낙도로 보낸 처사의 생활을 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선비들은 자신의 인격을 학문으로 통달하고, 닦은 도리를 다시 제자들에게 돌려주고, 백성들의 교화에 힘쓴 것이다. 그들의 생활 속에서 묻어난 학문은 대대로 사제간의 학맥으로 지속되고, 제자로 인하여 그 학문을 더욱 집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동 지역의 학문을 발전시키고, 향촌의 골골에서 선비가 끊어지지 않으며, 서민의 고초를 감싸 안으려 한 것이다. 그리하여 후에 그 공적은 다시 관료의 길을 열었다.
이렇듯, 불천위에는 세기를 이어가는 학통과 학설, 성리학의 특정 분야의 발달, 사료로서 가치가 높은 자료, 병술책, 천문 관련의 궤도, 지도, 시문, 역사서, 세기를 잇는 수많은 예서의 저술 등이 포함되어 있다. 저술활동을 한 인물은 7명을 제외한 모두 40명인데 3~4명은 의문이 가므로 확인을 요한다. 그 활동은 문집과 여러 유의 저서 및 아직 초고로 된 유고(遺稿)를 모두 포함한 것이다.
불천위로 배향받은 인물은 고 장철수 선생께서 분석한 안동 인물 44명의 예서 저술자 가운데 10명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이현보,
이황,
김성일,
류운룡,
이덕홍,
류성룡,
권구,
이상정,
이종수,
류치명 등이다. 아마도 문집과 저술 자료를 확인하면 더 밝혀질 듯하다. 이러한 예학의 자료는 정치적 이념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생활문화나 의례문화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안동은 예학의 전통과 명맥을 지난 몇 십 년 전만 해도 확인하는 경우가 가능했고, 지금도 간혹 그런 경향을 조금은 찾을 수 있다.
1. 불천위 제도와 유림의 특권
이제 불천위가 성립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안동 지역에서 알려진 47위의 불천위는 국가와 유림의 공인을 받은 불천위와, 후대에 천거를 받아 공론으로 세워진 것으로 구분되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필자는 이미 불천위의 과정을 3가지로 나누어 구분하였다. 그것은 국불천위, 유림불천위, 문중불천위로 나뉘어진다.
이것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3가지의 불천위는 모두 현인으로 여긴다는 점, 그 인물의 기일 제사로 행한다는 점, 그리고 4대봉사와 달리 그 세대가 초과되어도 신주를 조매(祧埋)하지 않는다는 것, 참례자가 그 조상의 당내만이 아니라는 것 등에서 같다. 참례자는 그 현조의 세대수에 상관없이 참례할 필요가 있고, 연비일가, 학맥의 후손, 존숭하는 사람 등도 찾아온다.
3가지의 불천위는 모두 국가, 유림, 문중의 공론을 얻었다는 점에서 지역이나 전국에 드러날 권위가 있는 현군(賢君)이다. 그런데 수십의 인물이 모두 국가의 승인을 얻었는가는 여전히 의문이고, 그 경로가 이해되지 않는 점도 있으며, 또 문중에서는 이렇게 드러난 분 외에도 자손들끼리 불천위라고 내세우는 경우가 있다. 아직도 그런 불천위가 세워지고 있는가? 그 조상의 일을 판결하지 않는 지역 사회에서 사사로운 메아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그런데 불천위의 배정은 유림 사회의 공의가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안동과 같이 유교의 문화가 지금도 살아 있고, 불과 30~40년 전까지도 그런 전통을 잇고 있었다는 점에서 사림, 안동유림의 권위는 그만큼 책임을 이행하고 있었다고 본다. 불천위는 그런 측면에서 확인할 때 20세기 중반까지도 논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국가불천위의 경우라도 조선조 예조의 봉상시(奉常侍)와 이조(吏曹)의 법으로 예우하는 점에서 그 자손의 집은 임금의 하사에 받들어야 하지만, 그 가문만은 물론 지역의 유림도 영광스런 일이다. 그러나 묻힌 현자를 국가에서 다 알 리 없다. 특히 영남의 사림들은 향리에 묻혀 있었으므로 그런 법조를 꿰지 않고, 군자로서 처신은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 자랑하지 않는 위기(爲己)의 소신을 행하고 있었다. 이때 서원 단위의 사림과, 문중 단위의 자손, 외척의 선비들로 유림 전체의 공론을 안건으로 낸다.
그것은 특정한 서원에서 맡을 수도 있지만, 지역의 유림 전체 대표가 결의하고 심의한다. 그런 점에서 각 지역의 사림처럼 안동유림도 주요한 선비를 수장으로 세우고 대표단을 만들어 소를 청한다. 물론 같은 향내에서 대대로 산 사림들은 당연히 그 사정을 꿰고 있다. 그래도 실적과 자료를 검증하고 첨부한다. 올린 상소에 대한 조정의 답변을 들어서 자료를 다시 천거한다. 그러면 당연히 국가에서는 그에 합당한 답변과 더불어 교지를 내린다.
이런 점에서 안동의 불천위는 다수가 유림의 공의로 얻어낸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아직 이르지만, 조선조가 국법의 효력을 상실한 이후에 일어난 사안의 문제에서 빚어지는 경우도 많을 것으로 본다. 곧 유림이 공의를 모아 해결해 가는 도중에 수포로 돌아간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20세기 중반에도 진행되었을 추정을 한다. 그런 측면에서 유림불천위에도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문중(사)불천위의 경우가 발생하도록 한 점이다.
2. 불천위 인물의 관직 실태와 불천위의 공인
여기서는 그런 사례로 47위 불천위의 실제 관직을 검토하여 실태를 알아보기로 한다. 관직은 실직(實職)과 수직(壽職)과 증직(贈職)으로 나눈다. 실직은 행직(行職)과 수직(守職)이 있는데 그 사람이 실지로 역임하고 받은 직책이다. 수직은 80세 이상의 노성(老成)에게 내린 직책으로 기로사에서 담당했다. 실직자에게는 한 품계를 더한다. 그리고 증직이 있다. 증직은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 등에게 죽은 뒤에 품계, 관직을 추증(追贈)하여 영예를 누리게 하던 일이다.
먼저, 증직의 제도가 어떻게 되어왔는가를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행해졌다. 한 예로 고구려
동천왕 때 위나라 장수 관구검(貫丘儉)이 내침하였을 때에 큰 공을 세우고 순국한
유유(紐由)에게 구사자(九使者)를 추증하였으며, 신라
눌지왕 때에
박제상이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왕제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여 보내고 죽으니 왕이 대아찬을 추증한 일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증직이 제도로서 확립된 것은 고려에 들어와서부터였다. 아들 또는 남편이 높은 관직에 올랐을 때에 그 부모와 아내를 봉작함을 추은봉증(推恩封贈)이라 하는데, 이 제도는 988년(성종 7)에 문무상참관(文武常參官) 이상의 부조(父祖)를 봉작케 함에서 비롯하였다. 그리고 1391년(공양왕 3)에 도평의사사의 상언(上言)으로 2품 이상은 3대, 3품 이상은 2대, 4품~6품은 부모까지를 증직하는 제도를 세움으로써 사대부 부조추증(父祖追贈)의 제도가 이때에 확립되었다.
조선에서는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고 이를 점점 더 광범위하게 적용하여 증직의 대상이 점차 넓어졌다. 즉 고려 이래의 추은봉증 이외에 명유(名儒), 절신(節臣),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 효행이 뛰어난 사람 등에게도 상당한 품계와 관직을 추증하였는데 이밖에도 증직한 경우가 많았다. 추증은 추영(追榮), 이증(貤贈)이라고도 한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의하면 증직받는 사람과 그 관직이 분명한 경우를 들면 다음 표와 같다. 여기서는 문관을 중심으로 증직받는 사람과 증직되는 관직을 구분해 보면,
종친 및 2품 이상의 문무관의 3대: 1대를 오를 때마다 1품계씩 감계(減階)
종친 및 2품 이상의 문무관의 처 : 남편의 관직
대군(大君)의 처의 아버지 : 정1품
왕자군의 처의 아버지 : 종1품
자신이 공신인 사람 : 정2품
1등 공신의 아버지 :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2등 공신의 아버지 :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3등 공신의 아버지 :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임금의 사친(私親)의 아버지 : 영의정
임금의 사친의 조부 : 좌찬성
임금의 사친의 증조부 : 판서
대원군의 사친의 아버지 : 우의정
왕세자의 사친의 아버지 : 좌찬성
왕비의 아버지 : 영의정
왕세자의 빈의 아버지 : : 좌의정
대군의 처의 아버지 : 우의정
왕자군의 처의 아버지 : 좌찬성
왕세손 빈의 아버지 : 우의정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 : 영의정
불천위의 관직 구분
불천위의 인물에서 실직을 그 관직으로 삼은 자는 모두 18명이다. 그 중에서 진사와 수직은 여기서 제외했는데 진사가 2명이고, 수직도 2명이다. 모두 합하면 22명이다. 이러한 자료는 그 신주에 명명된 것을 참고로 했다. 실지로 신주는 가장 정확하고 그 가문에서 조상에 대해 중요시하는 것을 간략하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논의될 증직과 시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처사로 지낸 분은 2명이다.
하지만 증직을 받은 사람은 25명인데 정2품 이상의 고관이 17명이다. 고관은 정3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자를 당상관이라고 한다. 정2품 이상의 관직자는 실직자와 증직자를 모두 포함한 집계이다. 곧 실직에서 사후에 그 공적을 다시 인정받아 추증된 경우이다.
그러면 뒷부분 부록편, 제47위의 표에서 행적을 살펴보면 이해하겠지만, 이들은 어떻게 하여 증직이 되고, 또 정2품의 관직에 오를 수 있었을까. 각 인물의 세세한 사항은 설명할 수 없어도 주요 사항만 열거해 보기로 한다.
이미 위에서 불천위자들이 생존한 시기를 기술했듯이, 15세기의 인물들이 약 반수를 차지했고, 16~17세기에 사망한 인물 또한 생존자의 인물과 거의 중복되었다. 실제로 조선조 대부분의 시기가 그러했듯이 외란과 내란의 연속의 시기였다. 외란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작은 북벌의 침입, 왜란의 여지가 있었다. 내란은 계속 이어지는 사화와 그것에 맞물린 집권층의 세력 유지에 대한 쟁론이 잦았다. 큰 사건은 거의 16~17세기와 연결되었고, 난세의 인물은 대부분이 이 시기에 활동한 인물들이다.
그 집계를 보면 외란의 공적자가 14명, 내란의 공적자가 13명, 또 불사이군의 충정을 지킨 선비 2명, 모두 합하면 29명에 이른다. 이런 집계는 일부분 중복될 수도 있다. 그래서 영남의 선비들은, 물론 전국의 선비들도 관직에서 물러나 산림처사로, 평생 순수처사로 향촌에서 머물며 새 세계와 삶을 실천하고 고안했다. 이러한 유풍은
퇴계를 전후하여 활동한 학자들에서 볼 때, 안동을 조선 유학의 집성지로 삼게 했고, 불천위자에서 퇴계문인은 11명이나 있었으며,
퇴계의 유학을 종사한 학자 또한 7명이나 되었다. 또
퇴계 학문에 발판을 놓아준 불천위자도
이우,
김언기,
김진, 정죽헌 등과 직간접적으로 영향받은 인물도 많다.
그 외 순직 1명, 효행 2명, 기로소 등적 2명, 목민과 청백리 2명, 자제의 교육으로 훌륭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상을 받은 증직자 4명 등이 있다. 그리고 앞에서 학문을 집대성하여 저서와 문집을 남기고 학설을 만든 자, 가장 중요한 모든 백성이 거울삼는 고결한 인품을 수양한 자 등도 해당한다.
정2품의 불천위자들은 5명을 제외하고 모두 시호(諡號)를 받았다. 시호도 증직과 같은 경우의 제도인데 관직자에게 주어지는 조선조 최상의 영예이다. 증시(贈諡)는 종친 및 문무관의 실직 정2품 이상의 관직에 있던 자에게 추증한다. 친공신(親功臣)이면 비록 관직이 낮더라도 또한 시호를 추증했다. 당시 예조 봉상시의 정이하(正以下)의 관원이 논의 결정하여 시호를 받을 자의 행장을 갖추어 이조에 보고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17명의 정2품 이상의 관료 가운데 12명은 시호를 후세에 얻었다. 그런데 5명은 시호를 받지 않았다.
김진과
류중영, 이노송정은 실직이 아니며 스스로의 공훈에 의한 사항이 아니라 아들과 손자의 귀함으로 얻었다.
권구와
김용은 실직으로 증직된 경우이다. 이것에 대한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지만, 앞서 설명한 조선조의 멸망과 관련이 있고, 유림의 공론 도중에 중단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조에서는 모든 상벌은 관직으로 결정되었다. 사람의 행적이 드러날 때마다 심사를 거쳐 관직을 올려주었다. 그러한 관원은 항상 국조의 관료 인원과 직제에 적확해야 했으므로 시기와 때를 따랐고, 유림의 청소(請疏)가 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행적이 탁월해도 기회를 얻지 못하여 힘이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곧 실직 또는 증직으로 2품의 관직에 오르면서 그 자손에게 불천위가 성립되고, 그것에 따라 시호를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실증은 다음 절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1.
김계행의 불천위제사 승인
이 절에서는
김계행이 불천위로 승인받아 불천위제사를 지내게 되는 과정을 여러 자료를 통하여 확인하여 보기로 한다.
김계행은 조선조 중기의 인물이다.
김계행은 만년에 공직을 사양하고
길안면 묵계리에 살면서 자손들을 번성시켰다.
김계행이 지은
만휴정(晩休亭)은 그의 청렴 강직한 인생 여정의 일면을 잘 보여 준다.
김계행은 안동의 여러 불천위자 중에서 비교적 앞 시대의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런
김계행이 실제로 불천위로 공의를 얻은 것은 100년 남짓 된다. 그러니까 꼭 100년 동안
김계행의 종손을 비롯한 자손들은 백세의 불천위제사를 행해 왔다. 존현의 개인 사정에 따라 배향받은 시기는 다르지만, 안동 지역의 불천위자들은 많은 경우가 비교적 조선조 후기 또는 말기에 불천위로 받았고, 사후 4대봉사를 끝내고 불천위제사를 계속 받은 사람은 일반적으로 예상하는 인원보다 적다는 점이다.
김계행은
이재가 찬한 「행장」(1729년)에 나타나듯이, 중년에는 조정의 요직에서 해마다 달마다 자리를 옮겨가며 빛나는 벼슬길을 일관했다고 한다. 이때
김계행이 낸 간문(諫文), 소장(疏章) 등 문사(文辭)가 이미 흩어져 전하지 않고 단지 도승지 사임장의 소문(疏文)이 남아 있다고 한다. 장년에는
김종직(金宗直)과 더불어 학문과 덕행을 연마했다고 한다. 공은 장조카, 국사(國師) 학조대사의 간청을 꾸짖고 50세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화려한 관직에서도 대사헌에서 사직하고, 종신동안 향리에서 청백을 보물로 삼았다.
또 향중의 사람들은 1706년(숙종 32)에
김계행의 은거지
묵계리의 호담에 사당을 짓고 향사했는데
이보(李簠, 1629~1710)의 유사(遺事) 1편에 전한다. 후손들은 공의 실상을 연보로 꾸며
이재에게 교정을 부탁하고, 이런 연원을 따라 행장을 서술하길 간청한 것이다. 훨씬 전에,
류성룡은
김계행의 외현손인데,
김계행의 세덕을 기리면서 지은 「영모록(永慕錄)」에는
류성룡이 그린 「김씨세계보도」와
김종직이
김계행에게 증정한 2편의 시가 있다.
김계행의 묘소는
학가산 아래 직곡리(맛질)에 있는데 운명한 지 215년이 지나도 당시에 세운 비석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김계행의 8세손 등은
눌은 이광정(李光庭, 1677~1760)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여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사림에서는 백성들이 향사한 곳에 다시 서당과 사우를 짓고,
응계 옥고(玉沽)을 합향하는 봉안을 열겠다는 통문을 보내었다. 통문은
이보가 작성했다. 게다가
이재는 여기에
김성탁을 함께 합향하여 한 사당에 세 분이 계시게 된 제문을 고유했다. 이 내용의 통문과 제문, 봉안문은
묵계서원이 1706년 창건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묵계서원을 창설할 때는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시대였다. 그 후,
김계행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리고 150년 정도 세월이 흘렀다. 드디어 사림에서 1858년에 수백 년 동안 묻혀진
김계행의 포상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때 증직을 청하는 소수(疏首)는 이주정(李周禎)이었다. 상소의 목적은 문헌이 구비되고, 여러 세대가 지나 성군을 만났는데도 법전을 따라 백세의 공의를 해주지 않으니, 밝게 빛나는 절의와 특행을 가진 고
김계행은 숭상할 만한 자격이 있다면 장려해서 증직을 주고 시호를 내리며 백세의 예전(禮奠)을 행하도록 해 줄 것을 청하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지나친 칭찬은 자신의 이름을 도둑질하는 일이라는
김계행의 유계’를 따라 감히 서두루지 못했으나, 선배를 찬양할 사적이 있는 데도 숨긴다는 것은 임금에게 결점을 남기고 정치와 교화에도 이익이 없으며, 고을의 풍속에도 계율이 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상소하는 사림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그 사문(斯文)을 빛나게 해달라고 임금께 청한다.
그 해 10월에 이조의 좌승지 판서 김병학(金炳學)으로부터 회답을 보내어 왔다. 말하자면, 내용은
류성룡의 후손 류졸재의 후손이 쓴 상소 안에도
김계행에 대한 사적이 있고, 이조에도 행적이 등재되어 있으며,
김종직의 문집에도 증시가 있음을 확인했다. 본 조에서 지금까지 공을 표창하지 못한 결례를 행했으나, 예조의 심의를 동시에 거쳐야 하므로 다시 상소를 하라고 권한다.
마침내
김계행의 증직 교지를 받았다.
김계행은 가선대부 이조참판(종2품)과 …… 로 증직하고, 그 이유는 공의 충효와 청백한 인품, 도학에 연원을 둔 학덕 때문에 내린 것이라고 한다. 증직을 받은 선조는 반드시 분황고유(焚黃告由)를 드린다. 분황고유는 가묘가 있으면 사당의 신주에 고유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묘소나 배향된 서원의 위패에 고유한다. 이때 지금의 불천위의 배위도 추증되는데 부인은 본가에서 본손들이 별도로 글을 지어 두었다가 제사를 행할 때 함께 고유한다고 했다. 이러한 사항에 대한 의절(儀節)을
류치명이
이재의 가례를 인용하여 전거로 삼았고, 분황고유를 했다. 그리고 길일을 잡아 새로 목주를 만들어 개제(改題)를 하면서 고유를 한 것이다.
사림과 가문에서는 종2품으로 증직받은 것은
김계행의 공적이 아직 국가로부터 완전히 인정을 받지 않은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1859년에 방후손이 상소하여 1품계 이상의 증직과 시호를 받게 해달라는 처음 상소의 주장을 편다. 이에 대하여 이조에서는 같은 해 5월 예조에 청원하여 판서의 증직과 시호를 내리는 것이 사리에 합당한 일이라며 심의를 권한다. 드디어 예조에서 ‘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을 다시 증직하고, 청백을 힘쓴
김계행에 대한 업적을 추가한 교지를 다시 내린다. 분황고유문에서는 이제 사당을 지어
김계행을 존향하는 것을 찬양한다.
곧 이어서 영남 유생과 대표
류진봉(柳進鳳, 1809~1858) 등은
김계행의 시호를 받기 위한 시장(諡狀)을 왕에게 올린다. 그럼으로써 얼마 후 ‘
정헌(定獻)’공이란 시호교지를 받는 영광을 얻었다. 받은 시호로 묘소의 묘비를 재건하는 길로 처리한다. 1887년에 이미 세운 묘갈명에 증직한 일과 시호 받은 일을 개수(改竪)하면서 추가해 넣는다.
김계행의 묘소에 신도비를 세우는데 비명이 전한다.
유림 또는 본손들은 위와 같은 절차와 검증을 거치고, 각 교지를 받을 때마다 묘소나 장소를 마련하여 고유식을 조상에게 드렸다. 그리고 그 분에 대한 갖추는 예식과 구비물에도 절도가 따른다. 한번 의식을 행할 때마다 그 가문과 조상을 잘 하고 명망이 높은 분을 찾아 찬양해 줄 것을 청한다. 그러면서 조정으로부터 특례의 칙명을 추가로 받았다. 곧바로 이제는
김계행의 대묘(사당)에 다시 봉안한 신주를 조매하지 말고 영원히 예식을 행하라는 왕명을 하사받은 것이다.
불천위의 칙명은 조선조가 멸망하기 전, 1909년에서야 어렵게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김계행의 불천위는 약 100년 정도 되었다. 증직을 받아 이미 신주를 개제했다 하더라도 150년을 넘기지 않는다. 이것이 안동 지역에서 잘 보존되고 어느 지역보다 많으면서 가문마다 독특한 불천위제사이다.
모든 불천위가 그러한 것은 아니다. 유명한 실직자의 경우, 칙명을 받는 때는 계속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지만 47위 가운데서도 많은 불천위가 이러한 실정에 있을 것이며, 어쩌면 이러한 경로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가운데 또 다른 과정에서 명의만 얻어 불천위를 행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사정은 각 종가에서 전하는 유적(遺籍)을 통하여야 확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로 보면 몇 종가의 확실한 자료를 감안할 때, 불천위는 19세기에 많은 현인에게 내렸고, 곧 불천위제사를 세대를 초월하여 지내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2.
이퇴계 가문의 불천위제사
안동 지역 불천위의 집계에서
진성이씨 퇴계 선생의 선후손 가문이 제일 많은 불천위를 받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불천위는 특히 7/8위가
퇴계 선생의 당내친에 해당하는 조상이다. 이반초당도
이우의 5세손인 것으로 보아 한 울타리에 있는 셈이다. 많은 선조 중에서 선별된다는 것은 공적이 있는 것인데, 특히 다른 가문에 구별되는 것은 예상하는
퇴계 선생의 탁월한 출중 때문이다. 곧
퇴계 선생의 공적이 가문의 번영을 꽃피웠다는 뜻인데, 그런 제도적 장치가 없다면 그렇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불천위로 가는 제도는 조선조 멸망의 전년까지 있던 것을 확인한 바처럼, 비단
퇴계 선생의 가문에만 그런 영광이 있지 않았을 터일 것이다.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 후손의 귀덕과 효행을 입을 사례를 대비하여 불천위의 길은 어떻게 적용된 것인가를 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조상의 위 세대를 추적하는 것은 조선조 언젠가부터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는가를 아는 단서를 제공한다고 본다.
조선조에서 자손의 귀달은 3대 조상이 관직을 얻는 증직을 받는가 하면, 선조의 훌륭함은 자손이 음덕을 받는 음직(蔭職)이 있다. 모두 과거를 보지 않고 관직을 얻는 것이다. 출중한 후손은 죽어서도 2품 이상은 3대, 3품 이상은 2대, 4~6품은 부모까지 공덕을 베풀었다. 그렇지만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인 3대까지 증직을 할 때에는 1대를 오를 때마다 그 품계가 1등급씩 줄어든다.
퇴계 선생의 숙부
이우와 형님
이해는 실직으로 불천위를 받았다. 두 분도
퇴계 선생의 명성으로 더욱 빛나게 되었다.
퇴계 선생의 손자
이영도도 그 영향을 받아 가통을 보존하고 국란을 규휼하는 과정에서 음덕을 입었다.
퇴계 선생의 조부, 이노송정은 아들
이우의 귀덕으로 증직을 받고, 손자
이해와
이황의 현달로 추증되어 불천위를 받았다. 아울러
이정은
이황으로서는 증조부인데, 후대에 손자
이우와 증손
이황의 귀덕을 입어 불천위가 되었다. 모두 직계 장자는 아니지만 4대가 불천위의 포상을 받았다.
이정과 이노송정은 최소한
이우와
이황이 불천위로 확정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황처럼 부모와 조상이 자식과 손자들의 현달을 입어 불천위로 된 경우는
류성룡이 부친
류중영에게 주어진 일,
김성일이
김진으로 갚은 일과,
김대현과 정죽헌은 아들의 귀함으로 증직을 입었다.
김대현은 8명의 아들을 모두 대소과에 급제시키고, 정죽헌은 아들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는 길을 연 사람들이다.
이정의 경우는 특이한 경우이다. 47위의 불천위 가운데 유일하게 출생과 사망을 모르고, 가장 상대의 인물이다. 단지 아들 이노송정으로 그 삶의 시기를 추정할 따름이다. 그런
이정을 불천위로 삼으려는
진성이씨 후손들의 고민과 노력을 들어본다.
진성이씨 대종회에서 펴낸 『열화』3호에 의하면,
이우는 운명하는 날까지 선산부사를 지낸 조부
이정을 불천위로 정하지 못한 아쉬움을
이정의 5세 주손에게 유언으로 남긴다. 두루의 사람들끼리는
이정의 불천위를 결성하기 위한 의견을 모았지만 온혜에 사는 일가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정의 당내친은 아직 생존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황이다.
이황은 선조의 업적을 숭상하고 싶은 나머지 주손을 불러, 온혜에서는 매주될
이정의 신주를
이황의 형 이징(李澄)이 장방(長房)으로 삼기로 의논한 결과를 알려준다. 이때 5세손은
이우의 유훈과 두루의 문장들이 결정한 사실을 이야기한다.
이황은 숙부
이우가 미처 예서를 상고하지 못하고 정리로만 이야기한 것을 아쉬워한다.
그러므로
이황은
이정을 비롯한 이노송정의 문서 꾸미기를 앞 절
김계행과 비슷한 절차로 밟았을 것이다.
이황이 감당한 가문의 대소사에는 이런 일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러 불천위들처럼 오랜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영광을 안겨주었을 것으로 본다. 아직 그 자료는 확인되어야겠지만, 이때
진성이씨는 영남의 명문으로 오를 구체적인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본다.
이황이 가문의 불천위를 준비하는 것을 볼 때, 조선조의 불천위 제도는
이우와
이황의 시기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여전히 정상적인 경로, 고조부에서 5대조로 되는 과정에서 불천위로 배향받은 인물은 얼마나 많았는지, 하지만 문묘의 배향과 관계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는 보다 많은 자료의 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조선조 성현의 문묘배향에 관한 논란은 여러 왕조에 걸쳐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이황이 세상을 떠난 1570년 이후에 다시 거론되었다. 그것은
이황이 도통을 확립시켰고, 이 당시
이이(李珥)는 조선 성리학을 집대성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각 사림들은 1610년(광해군 2)
이황을 비롯한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을 문묘에 5현으로 종사하는 것을 결정하였다.
당대 인물의 평가가 숭배의 대상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은 의례에 대한 체계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게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상자와 영웅들을 잃은 상황에서 포상과 위안은 백성과 친족들에게 필수적인 요인이었다. 그 가장 좋은 예는 제사로 행하는 것이다. 게다가 병자호란을 겪어 더욱 피폐한 혼란은 변혁을 요구했을 것이다. 각 지방에서 이름 모를 영웅들이 쏟아져 나왔을 때 증직과 시호의 위안은 당연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국가의 공신들만 훈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불천위는 본격적으로 그 효력을 발휘했을 것으로 본다.
불천위는 국가에서 정한 국불천위가 원칙이었지만 향촌에 머물면서 학행이 뛰어난 인물은 조정에서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지방의 사림들은 국불천위에 준거한 인물의 행적을 들어 상소에 붙였던 것으로 본다. 각 사림에서 조정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불천위은 오랜 기간이 걸렸고, 계속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게다가 지속되는 당쟁에 의한 내란은 불천위의 사유를 증가시켰으며, 논란의 여지도 많았다. 이에 대한 사림의 역할은 컸으며, 법과 의절(儀節)에 어긋난 폐단은 사불천위(문중불천위, 일부 유림불천위)를 형성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 말기에 이르러 수효는 더욱 많아졌고, 후대에 불천위로 세워졌을 것이다.
이런 경과로 본다면, 안동 지역의 불천위는 자체의 모순을 안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물적 자료에서 검증될 것이다. 100년 이하의 불천위든지, 300년을 전후한 불천위든지 불천위는 안동 지역에서 전통적, 유교적 의례문화의 결정 단위로서 매우 중요하다. 불천위를 둘러싼 종가와 그 문중, 혼인과 학제는 어느 지역보다도 유교적 생활의 연장선에 있고, 유교의 변화와 혼란에서 나름대로의 문화적 생활을 지속해 가고 있다.
여러 가지 조건 중에서 불천위제사는 그런 문화를 전승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 의례가 혼탁한 시대에 전국 각지의 불천위 자손들은 어느 지역에 가도 활발하지 않은 이런 대규모의 제사를 통하여 동성마을의 향념을 찾고, 덕망과 학식을 겸한 일가 어른들에게 재교육을 받는 기회의 장으로 삼고 있다. 그들은 불천위제사의 역사에 못지않게 불천위가 존속되는 내일을 중요하게 여겨왔던 것이다. 그것은 불천위는 조선 역사의 증인이요, 유교문화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안동 지역의 유수 인물의 불천위제사는 각각의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불천위가 산 시대가 달랐듯이, 그것은 지역의 골마다 차이가 난다. 즉,
임하면 천전리에서 행하는 제사와
풍산읍 오미리에서 행하는 제사,
도산면 토계리에서 행하는 제사에서 다른 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가문의 차이만이 아닌 지역적 특성에서 생긴 점에서 작용한다.
한 조상에서 형성된 동성마을에서 500년 동안 앞뒤 집으로 생활하면서 제사를 지냈지만 그 분들의 불천위제사는 종가간에 다른 점을 나타낸다. 이를테면
하회리의
풍산류씨중에서도
류운룡과
류성룡의 제사에서 다양하게 독특한 점을 발견한다. 또 한 선조에서 갈린 종가의 불천위라도 제사는 차이를 빚는다.
천전리의
김진의 제사와
김용의 제사는 대동소이하게 차이가 나며,
금계리의
김성일의 제사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점을 발견한다. 그들은 제사지낼 때 홀기를 반드시 참조하는데 각 제사의 속성을 홀기에서 찾을 수 있다.
서후면 금계리에는
장흥효와
김성일,
변중일의 종택이 나란히 있다. 한 마을 안에서도 조상을 달리한 가문이기 때문에 제사의 의절은 차이를 낸다. 하물며 한 종가의 제사라도 고위와 비위에서 차이가 난다.
토계리 이황의 불천위제사는 고위 때와 비위 때에 제사 공간이 다르며, 참례하는 인원에서 차이를 빚는다.
또 고위에는 비위와 함께 하는 종가가 있는가 하면 비위에는 고위만 모시는 종가도 있다. 계절적 차이에서 오는 점 때문인지 제수에도 고위와 비위 간에 차이가 난다. 일직면 소호리의
이홍조 종가의 불천위제사는 영남의 가난한 선비 집에서 제사를 행하는 듯한 소박한 의례의 현장을 목격하게 한다. 가난한 생활은 몇 년간에 생겨난 것이 아닌 세대 속에 묻힌 그 가문만의 성격에서 나온 것 같다.
제사에서는 후손들간에 내려오는 전설이든, 실제의 유언이든 불천위자가 생전에 즐기던 음식, 행위, 물건, 사상이 담긴 문구의 내용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황의 급문제자들의 불천위제사에서도 차이가 난다.
류성룡과
김성일 등의 불천위제사에는 나름의 색깔이 있다. 또 혼인으로 맺은 종부는 제사에서 제수를 담당한다. 그 종부는 친정이 종가의 종녀라도 종부로서 속한 종가 불천위제사에 따른다.
기제사처럼 밤중 제사를 선호하는 것은 여전하다. 이런 것 때문에 빚은 종가의 제관 접대를 둘러싼 야화는 또한 잊을 수 없는 현장이다. 원근에서 미리 찾아온 수십 명의 어른들이 모인 곳은 문회의 장이 된다. 예전에는 이때 제사의 습례(習禮)를 행했다. 그리고 안동 지역에서 의례 전에 행하는 집사분정은 집회 문화의 한 갈래를 여실히 확인시킨다.
제관들은 제사와 관련된 시도록과 집사록, 제수물목기 등을 아직도 문서화하고 있다. 또한 분정판을 제장 근처에 걸어 두고, 집사의 기구를 홀기에 등재해 놓으며, 제수진설도까지 문서화해 놓는다. 게다가 제삿날을 기억하려는 창안에서 제사윤회표를 작성하여 적절한 곳에 걸어 두며, 세대로 물려주고 있다.
각 후손들은 변화된 시대에 순응하기 위하여 불천위제사를 초저녁 제사로 행하는가 하면, 특정 공휴일을 정해 매년 전국의 후손들과 함께 행하기도 있다. 그것은
임하댐과
안동댐의 수몰이 가져다 준 아픔에서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다. 수몰로 사당과 종택이 분리되어서 매 제사 때마다 종손은 집밖에서 신주를 모셔오고 있다. 불천위제사라도 종손과 종부의 초상이 나면 위와 같은 제사의 규모는 축소되는데, 그들은 신주 없이 지방으로 간략한 제사를 행한다. 모든 의례에서 불천위는 항상 4대 조상보다 윗자리에서 존중을 받는다.
불천위제사는 이렇게 지엽적인 문제에서 거시적 측면에 이르기까지 제사의 시각을 달리 보게 하는 여러 요인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 요인들은 불천위제사로서 안동 사람들의 전통을 잘 전승시켜 준 이점이다. 그러나 유교문화의 특성에 사로잡힌 불천위제사의 이해는 고작 몇 십 년에 불과한 불천위의 경우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의문을 남긴다. 그런 점은 4대봉사의 오랜 관습과 더불어 농축된 생활양식 속에서 불천위제사를 함께 살펴야 할 것이다.
불천위제사는 절차와 내용 면에서는 다른 조상 제사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대외적으로 개방되기 때문에 종가의 위상을 드러내는 이른바 ‘과시적 제물’이 존재한다. 특히 유교적 가문 의식이 강한 안동 지역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대표적인 제물로 탕(湯), 도적, 떡이 있다.
1. 탕
탕(湯)에는 우모린(羽毛鱗)의 원칙, 곧 하늘을 나는 깃털을 가진 새를 상징하는 닭으로 만든 계탕[鷄湯, 또는 봉탕(鳳湯)], 육지에 살고 있는 털 짐승인 쇠고기로 만든 육탕, 바다에 서식하고 있는 비늘 달린 생선을 넣은 어탕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탕은 가문의 위상을 가늠하는 척도로도 작용한다. 안동 지역에서는 ‘대과급제 5탕, 양반 3탕, 서민 단탕’이라는 식으로 관직과 신분에 따라 탕의 개수에 차등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불천위 종가의 경우 5탕과 3탕을 올리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데, 대략 절반가량이다.
2. 도적
도적은 높이가 무려 40㎝에 이를 정도로 웅장함을 드러내는 대표적 제물로, 계적(닭)·육적(쇠고기)·어적(생선)의 3적을 익히지 않은 날고기 상태로 적틀[炙臺]에 높이 쌓는다. 특히 불천위 인물과 해당 가문의 지명도에 따라 도적과 떡의 높이가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도적을 쌓을 때에는 우모린의 원칙이 적용되어 가장 하단에 바다의 생선, 중단에는 육지의 짐승, 상단에 하늘의 새를 배치함으로써 하늘·땅·바다로 구성된 우주적 질서를 표현한다. 이는 모든 생명은 우주에 근원을 두고 있음을 상징하기 위함이다.
3. 떡
떡 또한 편틀[䭏臺]에 고임 형태로 40㎝ 높이로 쌓아, 도적과 함께 웅장함을 드러내는 제사상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도적에서 고임 형태를 잘 유지하기 위해 가장 하단에 북어포를 깔듯이 떡에서도 본편(本䭏)으로 불리는 시루떡을 겹겹이 쌓는다. 시루떡 위에는 각양각색의 웃기떡[雜䭏]이 놓이는데, 안동 지역에서는 주로 쑥편·맞편·송구편·부편·잡과편·전·조약·깨꾸리 등의 인절미를 얹는다.
안동처럼 예설이 발달되고 예서류가 많은 곳에서 가문마다 그 예학자의 설을 따르고 있다. 그들의 제사는 주자가례의 큰 줄기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예서에 그렇게 되어 있지만 제사를 행하기 위하여 예서에 벗어난 관습을 만든다. 그 한 예가 ‘제사(祭祀)는 부부공사(夫婦共事)’라는 것을 따르지 않고, 여성이 제외된 남성 중심의 제사를 행한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불천위의 기점에서 비롯된 또 다른 선조를 기리는 의도에서 생긴 것 같다.
반면에 거의 50~60년 전에는, 아헌관으로 참여하는 주부는 불천위제사에 대례나 혼례에서 입는 대례복을 성장하기까지 하였다. 안동에서 제복으로 도포를 입는 관습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몸에 베어 있는 습관임을 알게 할 것이다. 그런 것들 가운데 남성과 여성의 제사 공간은 구별되어 있다.
안동향교 사회교육원의 의례반 강의는 거의 10년에 즈음하고 있다. 여기서 느낀 것은 우선, 의례에 관심을 갖는 어른들이 많다는 것이다. 여러 가문과 고을을 따라 불천위제사에 참여한 결과, 제사마다 많은 특수성을 드러내고 있었는데도, 그들은 서로 정서적으로 같은 의례 관념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런 경향은 필자를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한편, 그 근원이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다.
소박한 해답은 어른들이 입담으로 하는 말에 있다. “우리 집 제사는 다른 집보다도 못 지내요. 뭔가 좀 많이 다르죠. …… 제사는 다 똑같아요. 안동은 다 한판이지 뭐.” 제사의 기본 관념은 전국이 같을 수 있는데, 특히 안동 사람들의 제사는 조상을 숭념하는 정신이 같다는 것이다. 해박한 경험을 가진 어른들은 강의를 들으면서 원칙의 문제를 놓고 한 번도 반박하는 경우가 없었다. 즉, 안동 사람들은 의례, 제사에는 같은 의례의 원리가 흐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많은 연구에서 밝혀져야 할 것이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네~~~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