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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의 세 번째 제안
출 10:1-11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3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4 네가 만일 내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일 내가 메뚜기를 네 경내에 들어가게 하리니
5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네게 남은 그것 곧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너희를 위하여 들에서 자라나는 모든 나무를 먹을 것이며
6 또 네 집들과 네 모든 신하의 집들과 모든 애굽 사람의 집들에 가득하리니 이는 네 아버지와 네 조상이 이 땅에 있었던 그 날로부터 오늘까지 보지 못하였던 것이리라 하셨다 하고 돌이켜 바로에게서 나오니
7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
8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로 다시 데려오니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 자는 누구 누구냐
9 모세가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나이다
10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
11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출 10:1-11 / [여덟 번째 재앙]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바로에게 가거라.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있는데도 그냥 두는 것은 다 내가 생각이 있어서 그렇다. 그들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보이고 2) 또 내가 애굽에서 하고 있는 일 곧 여러 표징을 네가 보고 너희 자자손손이 대대로 자랑스레 이야기하도록 하려는 까닭이다. 너희는 내가 바로 여호와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두어라.' 3)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말하였다. `히브리 사람이 섬기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언제까지 내 앞에서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있겠느냐? 내 백성을 내보내라. 그래서 그들이 나를 섬기게 하여라. 4) 네가 만일 이번에도 고집을 부려 내 백성을 내보내려 하지 않는다면 내가 내일 네 땅 구석구석에 메뚜기 떼를 보내리라. 5) 메뚜기 떼가 지면을 온통 뒤덮어 땅바닥이 보이지 않게 되리라. 우박으로 망쳐 버리고 남은 것을 그것들이 모두 먹어 치울 것이며 심지어 너희가 키우는 저 들녘의 나무까지도 먹어 치우리라. 6) 그뿐 아니라 네가 호화롭게 꾸며 놓은 집과 애굽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든 집에 어디든지 메뚜기 떼가 가득하리라. 이렇게 엄청난 메뚜기 떼를 네 아비 때나 네 조상 때에도, 그리고 오늘날까지 결코 본 적이 없으리라.' 모세와 아론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바로의 궁에서 나왔다. 7) 바로의 신하들이 바로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언제까지 저자들 때문에 골치 썩어야만 합니까? 저들을 내보내어 저들의 신 여호와를 섬기게 하십시오.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우리 애굽이 이토록 처참하게 쓰러져 가는 꼴을 모른 체 하십니까?' 8) 그래서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으로 불려갔다. 그러자 바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래, 어서 가서 너희의 신 여호와를 섬기거라. 그런데 도대체 누구누구가 나갈 생각이냐?' 9) 모세가 대답하였다.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이건 노인이건 또 여자이건 남자이건 할 것 없이 소 떼와 양 떼를 거느리고 나가야 합니다. 10) 바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너희의 아낙들과 어린 것들까지 데리고 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너희의 신에게 손이 닳도록 빌어 보아라. 될 성 싶으냐? 이제 보니 너희가 아주 못된 음모를 꾸미고 있구나. 11) 너희 자식들과 아낙들을 데리고 나가는 것은 절대로 승낙할 수 없다. 젊은 장정들만 데리고 나가 너희 신을 섬겨라. 애초에 너희가 나에게 그렇게 요구하지 않았느냐?'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쫓아냈다.
바로와 그 신하들은 7가지 대재앙을 차례로 당하고도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여전히 완악한 마음으로 거절합니다.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1-2)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자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들에게 가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직까지 건재하도록 그냥 두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누구인지, 어떠한 능력을 드러내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과 그 후손들에게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애굽에서 구원하셨는가를 보여주고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이야깃거리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수 24:1-15).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하지 아니하겠느냐(3-4)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하지 아니하겠느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로의 마음과 태도가 오만방자하다는 것입니다(3). 본래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은 가장 큰 이유는 왕권 강화하고 권력을 유지를 위한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애굽인들의 손발을 대신해주는 편리한 착취 수단이 되어, 큰 경제력을 창출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바로가 자신의 왕권과 자만심, 그리고 오만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참된 겸손은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피조물 된 한계를 바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합니다(렘 43:2). 그러기에 다른 이를 학대나 착취의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모든 이의 창조주를 알기 때문입니다.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5-11) 하나님께서는 완고한 마음으로 몽니를 부리는 바로에게 다시 재앙을 경고하십니다. 이번에는 애굽인들 천벌로 생각하는 메뚜기 떼 습격입니다. 전에 있었던 우박 재앙 당시에는 밀과 나맥이 아직 땅 표면 밖으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재앙에서 피해를 조금은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곡물들이 자라난 후이기에, 메뚜기 떼 습격은 들에 남은 농작물마저 완전한 피해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고 앞에 바로의 신하들은 앞으로 예견되는 식량난에 겁을 먹고 태도를 바꿉니다. 그러나 더 강퍅해진 바로는 “너희가 주라 부르는 신이 나를 감동시켜서 너희와 너희 아이들을 함께 보내게 할 것 같으냐?”라며 조롱합니다. 그래서 “장정들만 가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면서 내쫓습니다.
적용: 현재 당신의 삶 가운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참고 견디라는 격려인가요? 아니면 책망인가요?
옛날 한 부자가 길에서 그만 돈 자루를 잃어버렸는데 사례금으로 백 냥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한 소년이 돈 자루를 들고 부자에게 찾아왔습니다. 돈을 찾은 기쁨도 잠시 부자는 소년에게 사례금 줄 것을 생각하니 아까워 잔꾀를 내었습니다. 찾아준 돈이 오히려 백 냥이 모자란다고 한 것입니다. 소년은 마을 사또를 찾아가 사정을 호소했습니다. 사또는 부자에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잃어버릴 때 돈 자루에는 얼마나 들어 있었나?" "오백 냥입니다." "소년으로부터 받을 때는 얼마나 있었느냐?" "사백 냥입니다." 그러자 사또는 이렇게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럼 이 자루는 자네가 잃어버린 돈 자루가 아니구먼! 오백 냥이 들어 있는 자루를 다시 찾아보아라. 그리고 소년이 찾은 돈 자루는 진짜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가 보관하다가 기한 내에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절반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할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이 소년에게 줄 것이다.“
< 설 교 >
여덟째 재앙 – 메뚜기
출 10:1-20 / 임덕순 목사
주일 낮 예배시간에는 출애굽기를 강해하는 중입니다. 그중에서 요즈음에 읽는 내용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을 받기 직전의 기록으로,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셔서 애굽 온 백성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위대성과 뜻을 계시하시는 중입니다.
10장 1-2절의 말씀은 지금까지 행하신 일곱 가지 재앙들과, 앞으로 행할 세 가지 재앙의 정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땅에 열 가지의 재앙을 내리셨는데, 세 가지의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당신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당시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사람이 만든 신과는 다른 참 신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완전히 해방시키려는 것이며, 셋째는 그동안 하나님을 잊고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와 그들의 자녀 손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신 사실을 생생히 기억하고 섬기게 하려고 피, 개구리, 이, 파리, 피부병, 우박, 메뚜기, 흑암, 장자가 죽는 재앙 등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축복에 대한 설교를 좋아하는데 재앙에 대하여 설교를 계속하니까 재미가 없어 보이지만,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들어야 하고, 애굽 사람에게는 재앙이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해방의 기회가 준비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더욱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양면성을 가지는데, 그분의 백성들에게는 축복이요, 그를 거역하고 등을 돌린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중에 가장 큰 일은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일과 그가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일과 앞으로 있을 그의 재림인데,
이보다 더 큰 표적도 없고 이보다 더 큰 재앙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종교적 권력을 유지하던 유대인들에게는 재앙이었고, 그분의 부활은 그를 못 박아 죽인 사람들에게 더 큰 재앙이었으며, 그분의 재림은 끝까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최종적인 재앙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는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믿는 자에게는 축복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재앙이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여덟 번째 재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을 찾아봅시다.
1. 재앙을 내리기 전에 항상 경고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들어가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였습니다.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치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네가 만일 내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일 내가 메뚜기로 네 경내에 들어가게 하리니,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네게 남은 그것, 곧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들에 너희를 위하여 자라는 모든 나무를 먹을 것이며 또 네 집과 네모든 신하의 집들과 모든 애굽 사람의 집에 가득하리니” 하나님이 최후통첩처럼 하신 말씀입니다.
‘내일’ 이라는 말에는 24시간의 여유를 두어 경고하면서 그가 선택할 시간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징계하실 때에도 경고를 하신 뒤에 그래도 듣지 않을 때에 경고하신 대로 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경고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경고를 듣고 고치면 용서와 사랑을 받습니다.
2. 불순종 자에게는 재앙을 경 밖에 대기시켜 놓으시는 분입니다.
“네가 만일 거절하면 내일 내가 메뚜기로 네 경내에 들어가게 하리니”
거절하면 메뚜기가 경내로 들어간다는 말은 경 밖에 대기시켰다는 뜻입니다.
신30:15를 보면, 하나님이 우리 앞에 대기시키신 것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라."
하나님은 각 사람 앞에 무엇인가를 대기시켜 놓으셨습니다.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복을 대기시켜 놓으시고, 하나님을 싫어하고 죄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재앙을 대기시켜 놓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두려우시고 주밀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가지고도 우리를 칭찬하고 복주실수 있고, 그 무엇을 가지고도 우리에게 재앙과 절망과 심판이 되게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주관자 하나님이십니다. 마른하늘에서 대형 우박도 내리시고 땅 밑에서 불이 올라오게도 하시는 분입니다.
지난 17일 필리핀에서는 산사태가 일어나서 2,00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습니다. 1995년 1월에는 일본의 고베 지방에서 지진이 일어나 약 6,000여명의 사상자를 낳았습니다. 당시 일본은 자기들의 토목과 건축기술은 세계 최고의 것이며, 지진에도 끄떡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2004년 12월26일 오전 7시58분, 인도네시아 북쪽 바다에서 진도 8도의 강진이 발생했고 그것은 해안으로 엄청난 물을 밀고 와서 쓰나미라는 해일이 되어 16만 명을 희생시켰습니다. 2005년 10월 8일에는 파키스탄에서 지진이 일어나서 수 만 명이 죽었습니다. 언제 어떤 일이 내 앞에서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네가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선을 행하라, 그렇지 않으면 네 앞에 재난이 엎드려 기다린다." 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 문밖에 뭔가를 대기시켜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의 문 앞에는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까? 축복인가요? 아니면 징계인가요? 여러분 앞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선 인가요? 아니면 악인가요?
우리 앞에 무엇을 대기하게 할 것인가는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명령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선과 행복을 대기시켜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하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속을 일과 불행과 재난을 대기시켜 놓으셨습니다. 말씀 따라서 주님과 동행하며 삽시다.
3. 이번은 재앙 전에 그들이 순종할 것 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바로의 신하들이 바로에게 와서 이렇게 간청하였습니다.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을 보내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니이까."(7)
바로의 신하들은 모세를 함정이라고 했는데 덫이나 올가미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모세와 하나님의 진노가 올가미 같이 점점 조여들어오며 자신들을 망하게 하고 있는데도, 왕은 자기 권위에 도취되어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왕은 왕궁에만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당하는 재앙의 피해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서 바로가 순종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본 신하들이 하다 못해서 왕에게 사실대로 아뢰었습니다.
그들의 간청을 들은 바로가 모세를 불렀습니다.
바로가 묻기를 "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러 갈자가 누구누구냐?" 모세는 대답합니다. "우리가 남여노소 우양을 데리고 가겠나이다." 그러자 바로가 거절합니다. “내가 너희와 너희 어린것들을 보내면 여호와를 너희와 함께 가게 함과 일반이라. 삼갈지어다. 너희 경영이 악하니라.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 너희들 전부를 보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는 그들이 다 광야로 나갔다가 도주할 것을 예상하고 그렇게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나가게 하시되, 당당하게 그들이 어서 나가라고 등을 떠밀어 보내기까지 바로를 압박하시는 중입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가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아는 모세는 비굴하게 타협하지 않고 그날이 오기까지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그럴 수는 없고 우리의 남녀노소 전부가 가야 한다고 버텼습니다. 여호와께 경배를 드리는 일은 몇 사람을 대표로 보내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생명이 있는 모든 자가 다 나와서 경배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녀노소 어린아이까지 다 가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삼일 밤 예배는, 몇 사람 집사와 장로만 모여서 교인들을 대표하여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아침 한 끼만 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세끼를 먹어야 하고, 성도는 한 주간에 한 번만 예배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시시로 기도와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요일 저녁에도 모여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고, 그것이 앞을 볼 수 없는 인생에게는 그렇게 큰 복이 됩니다. 예배 시간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안가도 된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모이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온 백성이 다 가야한다고 바로의 제의를 거절하자 바로는 몇 명만 은 보내 줄까 했던 마음마저 닫혀 버렸습니다. "삼갈지어다. 너희 경영이 악하니라." 도망칠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바로의 경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적반하장입니다. 어리석고 악한 경영을 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입니다. 누가 누구를 향하여 경고를 한단 말입니까? 마음이 강퍅한 바로는 신하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내어 보내지 않았고 더 큰 재앙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기 전에 언제나 우리에게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며,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바로처럼 교만하여 하나님의 뜻을 자기 뜻에 비교하여 거부하기 때문에 재앙이 임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접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도 망할 사람이 없습니다.
바로는 모든 이스라엘이 우양과 함께 가버리면, 자기들의 궂은일을 해줄 사람들이 없어진다는 생각만 하고 있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한번 치시면 얼마나 큰 피해가 올 줄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즉 물질만 알았지 하나님 자신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야 모든 일이 내게 좋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바로는 여덟 번째 재앙을 부르고 말았습니다.
4. 시작된 여덟 째 재앙. (12-)
결국 하나님은 준비해 두셨던 재앙을 내리셨고, 우박재앙 때에 피해를 당하지 않았던 밀과 나맥과 모든 것을 치게 하셨습니다.
"네 손을 애굽 땅 위에 들어 메뚜기로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라. 그리고 동풍을 일으켜 온 낮과 온 밤을 불게 하시니 아침에 미쳐 동풍이 메뚜기를 불러들인지라."
5-6에는 메뚜기의 피해가 어떠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네게 남은 그것, 곧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너희를 위하여 자라는 모든 나무를 먹을 것이며”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메뚜기가 많아져서 모든 식물을 먹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메뚜기는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데, 그 떼가 날면 햇빛이 가려져서 캄캄 할 지경이며, 그것들이 한번 내려앉아서 먹기 시작하면 땅이 안보이고 푸른빛 나는 것은 모두 갉아먹고, 나무의 껍질까지 벗겨먹기 때문에 메뚜기의 떼가 한번 지나가면 남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15절에는 그 피해상황을 기록하였습니다. "푸른 것은 남지 않았더라."
이 한 문장이면 그 피해가 어떠했는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푸른 것은 생명의 색갈이요 희망의 상징인데 희망이 남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재앙이 어떻게 왔는지 아십니까? 동풍에 밀려왔습니다. 언제나 불던 동풍입니다. 그렇게 불었어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동풍이 하나님이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해서 불게 하시자, 셀 수 없는 메뚜기 떼가 그 동풍을 따라 몰려왔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언제나 그의 곁에서 그를 비춰주던 태양도 해가 되게 하시고, 언제나 불어 시원하게 하던 동풍도 재앙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재앙은 어떤 특별한 것으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것, 내게 익숙한 것, 내게 유익하던 것, 내가 선택한 것이 재앙이 되게 하시니 막을 수가 없고 피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19절에 보면, 그들이 회개했을 때 서풍을 불게 하시어, 메뚜기가 한 마리도 남지 않고 홍해로 밀려가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어떤 방법이든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을 가로막을 사람이나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온 천하에 오직 하나님만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신론자들의 눈에는 끝까지 하나님의 내리신 재앙이 아니라 자연현상처럼 보이도록, 동풍과 서풍을 매개체로 이용 하셨습니다. 택함 받은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망하게 되는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고, 하나님의 자비가 느껴지고 하나님 사랑이 체험된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아십니까? 그분께서 약속하신 천국이 믿어지고 우리의 죄 사함과 구원이 믿어지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인지 아십니까? 이것이야 말로 복중에 복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을 드리고 언제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성도가 됩시다.
5. 뒤늦은, 그러나 짧은 뉘우침 (16이하)
다급해진 바로는 급히 모세를 불렀습니다.
"청컨대 나의 죄를 이번만 용서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을 내게서 떠나게 하라."(17)
언제는 "너희 경영이 악하다."고 하던 바로가 "나의 죄를 용서하라" 하는 것을 보니 다급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될 줄 몰랐다니 답답한 일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당하지 않을 징벌과 재난을 다 당하고 터진 뒤에야 뒤늦게 회개하는 척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음과 미련은 고칠 약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만 용서하라’는 말은 또 무엇입니까? 미련하면 보이지도 않고 깨달아지지도 않는 법입니다. 어디 이번만 죄를 지었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우리는 지난날에 모르고 지은 죄 뿐만 아니라, ‘나’ 라는 인생의 생각과 행동 속에 들어있는 것들이 대부분 죄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번만’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우리는 그런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한가지의 죄만 고백하고, 다른 것은 잘못 한 것이 없는 것처럼 뻔뻔하지 않았습니까? 따지자면 우리의 모든 행위가 다 죄악된 것입니다.
바로가 할 일은 자기의 어리석음과 하나님께 도전한 것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뿐입니다. 그가 회개하면 재앙은 다시 올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회개는 말로 잘못했다,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스라엘을 내어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물질적인 손해를 볼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로만 잘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런 모습은 아닙니까? 진심으로 순종하면 손해를 볼까봐서 말로만 잘못했다고 하면서 여전히 잘못된 길을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행동을 바꾸어야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것은 손해를 본다면 보겠다는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손해가 온다면 감수하겠다고 결심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은 손해를 보게 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순종의 행동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은 즉시에 메뚜기를 처리해 주셨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을 내보낸 것이 아니라, 잘못했다고 말만 했을 뿐인데도 하나님은 메뚜기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아무 유감도 없으신 것 같습니다. 바로와 애굽이라는 나라를 없애기 위해서 재앙을 내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리려고 내리신 재앙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강렬한 서풍이 불게 하셔서 메뚜기를 홍해에 쓸어 넣으시니 애굽 온 지경에 메뚜기가 하나도 남지 않았더라."(19) 하나님이 얼마나 깨끗하신 분인가를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깨끗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순종하기만 하면 지나간 잘못을 완전하게 잊어주시고, 깨끗하게 용서하시고 복만을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주저 말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봅시다.
메뚜기가 갑자기 온 하늘과 땅에 가득히 몰려온 것도 기적이지만, 한 순간에 사라진 것도 기적입니다. 그 많은 메뚜기를 보내신 것도 기적이지만, 갑자기 서풍을 불게하사, 메뚜기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처치하신 것도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우연증식의 메뚜기였다면 사라지는 기적은 불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불러오신 것이었기에 말씀 한마디로 소멸하게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에게 신속하게 용서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능력의 하나님을 두려워합시다. 이번만 잘못했다고 할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자체가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근본적인 죄를 고백하고 행동을 고쳐서 용서와 인도를 구합시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사합시다. 하나님이 계신 것이 믿어지고, 그의 은혜의 손길이 보이고, 그의 진노의 손길도 보인다는 사실을 감사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손아래 있음을 감사합시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숨을 내걸고 애굽을 벗어나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죄악 세상으로부터 탈출하여 하나님의 진리의 품에 안기기 위해서 힘쓰는 성도가 됩시다.
그래서 우리 앞에 늘 축복과 기쁨과 선하신 인도가 대기하고 있는 그런 삶, 하나님의 자녀답게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애굽에 내린 재앙들(4)
출 10:1-29 / 박덕기 목사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보내라는 명령을 거부한 바로를 징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열 가지 재앙 곧 1)피 재앙 2)개구리 재앙 3)이 재앙 4)파리 재앙 5)악질 재앙 6)온역 재앙 7)우박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일곱 번의 재앙을 당하고서도 강퍅하기만 한 바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표징을 바로와 애굽에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애굽에 행하신 표징을 자손들에게 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모든 역사를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자손들에게 전하기를 원하셨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깨달아 알므로 영원토록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이 놀라운 일들은 훗날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도록 하는 근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범죄 하였을 때에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중대한 동기를 제공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자녀들에게 전할 때 그 자녀들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되며, 혹 떠날지라도 그 말씀을 기억하는 날에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그 자녀들에게 전하는 것은 부모 된 성도들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의무일 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들의 자녀에게 남겨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혹 재산을 남겨 준다면 그들은 게으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혹 지식을 더하여 준다면 교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혹 기술을 가르친다면 일평생 먹고 사는 데는 유익하겠지만, 그것 역시도 자녀들의 삶을 완전히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를 전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가 전하여 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자가 된다면, 그는 일평생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갈 것이며, 혹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날지라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영원토록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외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할 만큼 이 지식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진정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구원의 역사를 가르치기를 더욱 중히 여기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미련한 자가 될 뿐만 아니라, 악한 부모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의 자녀에게 가르치기를 힘써서, 우리의 자녀에게 영원한 삶의 열쇠를 남겨주는 부모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8. 메뚜기 재앙
하나님께서는 일곱 번째 우박 재앙을 당하고서도 돌이키지 않는 바로에게, 메뚜기 재앙을 예고하시면서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근동 지역에서 발견되는 메뚜기는 90여 종이나 되는데, 본문과 같이 애굽 땅에 엄청난 피해를 주는 메뚜기는 기동성이 뛰어나고 번식력이 특히 강한 ‘사막 메뚜기’로 추측을 합니다. 이 사막 메뚜기들은 엄청나게 많은 수가 떼를 지어 옮겨 다니고, 3일 동안 쉬지 않고 날 수 있으며, 무려 2000km 정도를 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한 번 지나간 자리는 곡식이며 초목이 완전히 황폐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이 메뚜기 떼가 전율할 만큼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자연 발생적인 메뚜기 떼의 침입에 의한 피해가 이 정도라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엄습한 메뚜기 떼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은 어느 정도일지 가히 짐작이 됩니다. 결국 이 메뚜기 재앙으로 말미암아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애굽 전경에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 마지막 때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한 것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죄인들 가운데 세상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때 그 심판에서 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은 그러한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임으로 심령의 편안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과 같은 지극히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진정 온 우주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벗어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속히 회개하도록 촉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메뚜기 재앙으로 멸망의 위기에 처한 애굽 왕 바로는 급히 모세와 아론을 불러 자신이 여호와 앞에 득죄하였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구하여 재앙을 떠나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하였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데리고 애굽에서 나가려고 하는 것을 악하다고 비난하던 바로가 도리어 자신의 악함을 스스로 시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고백은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바로는 현실의 감당할 수 없는 큰 고통 앞에서 그 고통을 면할 속셈으로 자기 잘못을 거짓으로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그가 모세의 간구로 메뚜기 재앙이 그치자 다시금 마음을 강퍅히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은 사실로 보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에 이르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시방편이지, 참된 믿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도 그처럼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즉 많은 성도들이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다가, 고난이 찾아오면 그 때에만 하나님을 찾으며 구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물론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단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만 하나님을 찾는다면, 고통 속에서만 하나님을 찾은 바로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헌신된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에 대하여 언제라도 자신을 드려 응답하는 신앙 자세를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 앞에서 어떤 동기와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과 헌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참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요청을 받은 모세가 메뚜기 재앙을 거두어 주실 것을 구하자, 강렬한 서풍을 불게 하심으로 메뚜기 떼를 홍해에 몰아 넣으셨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또 다시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바로는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거짓되게 행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이런 마음을 모르시어 메뚜기 재앙을 거두어 달라는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셨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메뚜기를 거두어 달라는 바로의 청을 들어주셨습니까?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써 애굽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의 종임을 증거 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더 무서운 재앙으로 바로를 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고자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때로는 악인에게 속는 것처럼 행하실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는 때로 악인이 하나님을 속이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출애굽 사건은 명백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전지하셔서 사람의 폐부와 마음의 생각까지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에게도 속으시는 것처럼 행하실 뿐,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되게 행하는 악한 자들을 심판하여 멸망에 처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앞에서 거짓되게 행해서는 안 되며, 한 번 하나님과 한 약속에 대해서는 여하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지키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메뚜기와 바람의 순종과, 바로의 불순종이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바람과 메뚜기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데,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는 완악함과, 그로 인해 하나님의 강권적인 개입이 없이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상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러한 완악한 자들 가운데서 우리를 구별하여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구원받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리게 됩니다. 진정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강퍅한 마음을 버리고, 늘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멸망의 심판에서도 구원받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9. 흑암 재앙
메뚜기 재앙이 사라지자 바로의 마음은 또 강퍅하여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홉 번째 재앙을 내리시게 되는데 곧 흑암 재앙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자 애굽 온 땅에 삼 일 동안 사람들이 더듬으면서 다녀야 할 만한 흑암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까지의 재앙보다 애굽 사람들에게는 더욱 큰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흑암으로 인해 움직일 수 없다는 육체적인 고통도 있었겠지만, 정신으로 종교적으로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믿었던 신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애굽 사람들은 많은 신을 섬겼습니다. 그 중에서도 애굽 사람들이 최고의 신으로 섬긴 것은 바로 태양의 신 ‘라’였습니다. 매일매일 비취는 햇빛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고 모든 생명이 살 수 있게 하는 태양이야말로 애굽 백성에게 가장 은혜롭고 전능한 신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가 손을 들자 그토록 전능한 신으로 생각했던 태양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애굽 백성이 그토록 숭배하던 태양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이 여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믿었던 것은 모두 거짓 신이며 헛된 우상일 뿐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나일 강이 피가 되게 하신 재앙이나, 개구리 재앙, 파리 재앙, 그리고 흑암 재앙을 통해 태양을 치신 것은, 사실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징벌하신 재앙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민 33:4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통쾌한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신들에게 벌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공자와 석가모니 마호메트에게도 벌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흑암 재앙으로 말미암아 애굽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하고 불안해하는 성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애굽 백성들이 흑암 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 자손이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습니다. 같은 시간에 애굽 땅에 살면서 어떻게 두 민족 사이에 왜 이렇게 다른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은 애굽 백성에게는 흑암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밝은 빛이 비취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는 애굽 백성들처럼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알지 못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흑암에 처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확실한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바라보며 빛 가운데 처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차이는 바로 그들의 삶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에 의해 구별 됩니다.
사람들 중에는 마치 돈이 인생에 빛을 주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권력이나 지식이 인생에 빛을 준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부자이면서도 인생의 허무함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탁월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들을 다스리는 권력자이면서도 끊임없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스스로의 삶을 파멸로 이끌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 지식이 인생에 빛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비록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확실한 믿음에 서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진정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향해 달려가야 할지를 분명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인생, 그것은 캄캄한 흑암에 가운데서 사는 인생입니다. 끝없는 불안과 방황 속에서 스스로 파멸로 달려가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인생은 확실한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고 구원과 영생의 축복을 향해 달려가는 빛 가운데 사는 인생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앞을 알 수 없는 흑암에 싸여 방황하며 불안해하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오십시오. 그 분이 비취시는 빛을 통해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발견하고,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으며 평안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애굽 땅에 내린 흑암 재앙이 극심한 것이긴 하였지만, 단 삼일 동안만 임한 것이었으므로 애굽인들에게 물질적으로 그리 큰 피해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이 재앙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의 큰 실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재앙은 당시 애굽에서 최고의 신으로 숭배 받던 태양신 ‘라’ 역시 무가치한 우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그들의 그릇된 신앙에 대한 마지막 경고의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로가 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이 재앙을 대했더라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체 없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 땅에서 내보냄으로써 마지막 재앙 곧 장자 재앙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감지할 만한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모세에게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엄포를 놓음으로써 장자 재앙을 더욱 재촉할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이 세상 역시 영적으로는 깊은 흑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육적 물질적으로는 과학과 경제의 발전으로 인하여 대낮과 같이 훤할 만큼 불야성을 이루고 있지만, 육적인 밤이 훤해질수록 영적으로는 더욱 흑암만 깊어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러한 영적 흑암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 흑암 속에 매몰되어 그 가운데서 음행과 부정과 도적질과 폭력과 살인 등 참으로 온갖 추악한 죄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애굽에 임한 흑암 재앙의 의미를 기억해야 합니다. 애굽에 임한 흑암 재앙은 애굽인들에게 큰 피해를 주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최종적인 장자 재앙의 전조였습니다. 그들은 흑암 재앙이 큰 피해 없이 지나간 것을 기뻐하였지만, 거기에는 실로 엄청난 슬픔과 고통이 뒤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 세상의 영적 흑암 상태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 대한 전조입니다. 현재 이 세상에 임한 영적 흑암은 비록 사람들에게 현실적으로 큰 고통을 주고 있지는 않지만, 장차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임하는 날 영적 흑암 상태에 있던 사람들은 실로 우리가 생각하기도 어려운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상에 임한 영적 흑암을 감지하고 있습니까? 더욱 악해져만 가고 더욱 더러워져서 도저히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세상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영적 흑암을 볼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혹시 그 흑암 속에서 함께 어둠의 일에 동참하는 자들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영의 눈을 크게 떠서 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영적 흑암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흑암이 주는 경고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결코 이 세상은 그리 오래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책망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낮에 속한 자처럼 단정히 행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자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참된 빛의 자녀로 인정받게 됨은 물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임해도 멸망 받지 않고 구원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죄악으로 캄캄한 이 시대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빛 되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날마다 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시기를, 세상의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어떻게 여호와를 섬길는지
출애굽기 10:1-29 / 곽면근 목사
1. 인류의 하나님
1. 모든 이들에게
‘히브리인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든가, 유대인의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출 10:1~2절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는데 모든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모세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그 상황자체가 샘플적 상황이고 실제적으로는 모세와 이스라엘과 그 자리에 있었던 아들들과 그 자리에 없었던 자손들까지를 포함하여 결국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 중의 하나가 편 가르기입니다. 인간의 편 가르기에 하나님을 이용하면 안 됩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중심으로 인간의 편 가르기가 끝나고 하나로 연합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문제 유발자가 아니라 해결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2. 알리라
출 10:1~2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알리라’는 사명이나 ‘이스라엘의 장년들과 아들들과 자손들에게 여호와를 알게 하라’는 명령이나 ‘애굽에게 하나님을 알리라’는 책임을 짊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가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선포하시는 것이지 모세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일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한 번에 애굽을 항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10장에서는 여덟 번째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지 못하면 하나님 책입니다. 만약 애굽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본문까지 여덟 번의 이적이 진행되면서 하나님이 모세를 채근하는 장면, 모세를 닦달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모세가 경과 보고하는 장면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대책을 세우거나 다음 진도를 상의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계획하고 하나님이 진행하고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이요, 기독교의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애굽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 이스라엘의 아들과 자손의 귀에 전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체자이시고, 인간이 대상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분이시고, 인간이 누리는 자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좋게 하자고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을 도와주자고 애굽을 힘들게 하면 안 됩니다. 지금 각각의 이적이 등장하는 것이 애굽을 징계하거나 형벌을 내리거나 패망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4절도 재앙이 압니다. 만약 하나님이 애굽에 거듭되는 재앙을 내리셔서 우박으로 식물을 모두 황폐하게 하고, 메뚜기로 모든 식물을 먹어버리게 했다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그래서 애굽 백성이 모두 굶어 죽었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박과 메뚜기가 식물을 황폐하게 만들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은 애굽에게 식물을 제공하고 계셨고, 우박과 메뚜기가 식물을 황폐하게 만들고 난 후에도 하나님은 애굽에게 계속해서 식물을 제공하여 애굽이 먹고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애굽 역사에 하나님의 식물 재앙으로 애굽 백성이 굶어죽고, 애굽이 망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간은, 이스라엘이든 애굽이든, 하나님을 믿는 자이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이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식물을 먹고 살아왔고, 먹고 살고 있고, 먹고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 축복을 주시는 분이시오, 하나님의 문제의 원인자가 아니라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는 분입니다.
Ⅱ. 그들의 하나님
1. 복종과 순종의 차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항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싸움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좋은 것을 포기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하나님 앞에 복종하기를 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안하는 것이 현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좋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도우려고 한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기대하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2. 그들의 하나님
애굽 신하들이 할 수 있는 말은 ‘그들의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가 고작입니다.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 자신들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자신들을 도와주고 축복한다는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애굽의 신들을 이겼다면, 이제 신을 바꾸어 자신들도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을 섬겨야겠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바로 왕의 표현 속에 인간, 죄인의 종교관이 배어있는 것이 ‘갈 자는 누구 누구냐?’라는 질문입니다. 바로가 생각하고 있는 종교관은 말 그대로 종교행위입니다. 바로는 신앙이 삶의 원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는 신앙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원리와 가치와 기준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가 생각하고 있는 종교적 관점에서는 아이들이 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가 생각하는 종교는 종교행위이고, 종교행위는 모든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대표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중에 바로는 사람은 모두 보내도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의 종교적 개념에서는 만약 제물이 없다면 그 종교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로가 알고 있는 신들은 언제나 제물을 요구하고, 제물이 없다면 신은 감동을 받지 않고, 신이 감동받지 않으면 인간의 제사는 아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보내면서도 신 앞에 무기력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것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켜 반응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행(先行)적 은혜를 받은 것에 감격하며 감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삶의 행복의 원리로 깨달아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