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부자들은 추수를 하면, 동네 가난한 사람이 언제라도 곡식을 먹을 수 있도록 곳간의 문을 채우지 않았다.
특히, 기생 출신 김만덕은 부자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리산 반야봉과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를 든든하게 등에 지고 앞으로는 너른 들과 섬진강을 펼쳐놓고 거기에 안온한 둥지처럼 웅크리고 있는 집이 있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의 운조루다. 누가 봐도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에 터를 잡은 이 운조루를 가보는 일은 참 설레는 일이다.
전국에 한옥 고택이 적지 않지만 나는 이 운조루만큼 고담한 집을 보지 못했다.
이백년이 넘는 이 집의 나이 때문도 아니고, 사대부가 살던 집의 전통적인 양식 때문도 아니다. 운조루보다 나이를 더 잡순 한옥은 얼마든지 있고, 집의 구조가 유난히 특별한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운조루는 조선 영·정조 때 무관을 지낸 류이주가 지었다.
그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쌀을 퍼가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도록 쌀뒤주를 개방했다. 나무로 만든 큰 쌀통에 작은 손잡이를 만들고 거기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적어두었다.
다른 사람도 누구나 마음대로 열 수 있다는 뜻이다. 보릿고개를 넘기기 힘들었던 이웃들에게 이 집의 뒤주는 단비 같은 것이었다. 주인은 쌀 두 가마 반이 들어가는 이 뒤주가 늘 비는 일이 없도록 했다고 한다. 이 지역은 한국전쟁 전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좌우익의 대립이 극심했던 곳이었다.
그 와중에 운조루가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눔의 정신을 존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운조루 때문에 뒤주가 아름다운 게 아니라 뒤주 때문에 운조루가 빛난다.
내 지갑을 열어서 나를 빛낼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