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의상 제작·미술관 전시… 패션·예술의 경계 넘나들어 여성의 가슴 조형물 사이서 2007년 봄·여름 패션쇼 재현 "의미 생각말고 전시 즐겨야"4층 전시장에 선다. 천장을 채운 민트빛 거대한 공기주머니가 시야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순간 알싸한 민트 향이 훅 들이친다. 눈보다 코가 먼저 요동치는 낯선 경험. 귓가엔 청량한 음악이 맴돌고, 대형 화면엔 민트색 가발로 얼굴을 덮은 모델들이 런웨이를 걷는다. 2008년 덴마크 패션 디자이너 헨릭 빕스코브(Vibskov·43)가 선보인 패션쇼 '더 민트 인스티튜트(The Mint Institute)'가 서울서 고스란히 재현됐다. 이 패션쇼는 민트를 떠올리게 하는 향과 음악 등으로 관객에게 적극적인 경험을 줬다고 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빕스코브는 당시 패션쇼에서 민트 맛 나는 음료와 과자도 대접했다.
9일부터 서울 대림미술관에서 열리는 '헨릭 빕스코브―패션과 예술, 경계를 허무는 아티스트' 전시는 이처럼 드물게 관람객의 오감(五感)을 건드린다. 아시아 첫 전시다.
여성의 크고 작은 가슴을 본떠 만든 조형물 400개 사이에 2007년 봄·여름 컬렉션 의상 20여벌을 전시한 헨릭 빕스코브는 “남자들에게 여성의 가슴은 어머니의 고향 같은 존재다. 관람객들 사이에서도 이게 진짜 인기가 높았다”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한국엔 아직 낯선 이름이지만 빕스코브는 현재 세계 4대 패션위크 중 하나인 파리에서 해마다 컬렉션을 내는 유일한 북유럽 패션 디자이너다. "좋아하던 여자애를 따라 얼떨결에 들어간" 패션 명문 런던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하고 2년 만인 2003년 파리패션위크에 진출했다. 입으면 사람의 얼굴이 커다랗게 드러나는 하얀 드레스, 선명한 원색·기하학적 무늬가 도드라지는 패턴 등으로 형식을 파괴하고 독창적이란 평가를 받으면서 단박에 개성 넘치는 디자이너로 주목 받았다. 뉴욕 현대미술관 PS1, 파리 팔레 드 도쿄 등에서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가졌을 만큼 예술 작품에도 조예가 깊다. 일렉트로닉 밴드 드러머이면서 아이슬란드 가수 비요크의 오페라 무대 의상, 노르웨이 국립오페라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공연 의상을 디자인했다.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멀티 크리에이터다.
점퍼 하나도 건축물을 지어올리듯 질감이 서로 다른 섬유를 자르고 겹겹이 이어 붙여 부피감이 도드라지게 만든다. 또렷하고 맑은 색감은 스칸디나비아의 깨끗한 자연을 닮았다. 여성들이 신는 나일론 스타킹으로 성인 팔뚝만 한 갖가지 오브제(objet)를 만들어 선보인다. 익숙한 것도 그의 손을 거치면 태생을 가늠할 수 없는 엉뚱하고 기발한 예술 작품이 된다.
2008년 선보인 ‘더 민트 인스티튜트’ 패션쇼의 한 장면. /대림미술관 제공
옷 속에 숨어있는 사람 몸을 탐구하는 걸 즐긴다. 2층 전시장을 채운 '크고 촉촉하고 빛나는 가슴 조형물' 코너는 런웨이를 늘 걸어다니는 모델들을 바닥에 드러눕히는 뜻밖의 퍼포먼스로 눈길 끌었던 2007년 패션쇼를 재현했다. 벽과 바닥이 여성의 크고 작은 가슴 조형물 400개로 빼곡하다. 만져보면 진짜 사람의 그것과 촉감도 비슷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 패션쇼를 보려고 관람객 2000명이 줄 서는 장관이 연출됐다. 7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수많은 가슴 조형물 위에서 떠다니는 건 남자들의 이상향"이라며 웃었다.
그는 "내 전시에 와서 이건 무슨 의미일까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잘 모르는 세계에 스스로를 던져 놓는 게 중요해요. 창의성은 자기 맘대로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스위치가 아니라 삶 속에서 늘 가동해야 하는 거니까.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개의치 마세요.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은 프로젝트가 짜릿함을 주고 가슴을 뛰게 하잖아요.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요?" 전시는 12월 31일까지. (02)720-0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