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의 새벽
주병오
밤사이 누가 하얀 세상을 만드셨는가
폭설의 여명이 성무聖霧를 흩뿌려
온 누리는 신비의 세계
누군가 새로운 눈目으로
새 길 열라는 게시인가
떠오르는 태양의 광채 눈부시다
온통 검은 망토 백의의 무사들
누구라 이 세상을 탐하려 하는가
찬란함에 눈을 뜰 수 없구나
낮은 곳 살피라는 뜻인가
행복 찾기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아무리 둘러 봐도 보이지 않더니
병원 문 나서는 날
가슴 속에 새싹이 돋았네
꽃은 어디에 피어 있을까
여행길은 참 즐거웠네
친구들과도 정겨웠지
아! 이제 꽃송이가 보이네
울 웃음 속에 활짝피었네
살며 생각하며
학자들 연구에 따르면, 천체의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행성인 지구의 표면이 식어 미생물이 생겨나고 몇백 만년 뒤에 공용이 출현했다가 사라진 지 또 몇백 만년 만에 진화된 인간이 세상에 탄생했다. 또 한편 어느 행성에도 생명체가 살지 못한다는 불가사의한 과학적 사실을 인간은 반신반의하여 안위와 사후세계를 위해 미신과 종교가 발상하고 천당과 극락세계가 생겨난 것이다.
인간은 부처와 예수를 인간과 유일신인 하늘을 잇는 매개자인 성인으로 믿기에 성화에는 언제나 성인의 후광(광채)이 그려져 있다.
내가 후광을 처음 본 것은 열세 살 때인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라고 기억된다. 그 시절은 처절했던 한국전쟁이 휴전한 지 불과 십 년이 채 안 되어 아직 폐허 속에서 여인네들은 전쟁으로 남정네를 잃고 모진 고생을 하며 허덕이는 살림살이로 자식들을 부양했다.
우리 집도 홀어머니가 낮에는 백 평도 못 되는 밭에서 감자며 옥수수를 가꾸는가 하면 토끼며 닭, 돼지를 키워 겨우 풀칠하고 자식들을 학교에 보냈다. 막내인 나는 형들을 교육하느라 쇠잔해 질대로 쇠잔한 살림에 중학교를 갈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다행히 기르던 돼지가 새끼를 열 마리나 낳았다. 우리 가족이 군부대에서 잔 밥을 이어다 지어다 정성을 다한 덕분에 새끼들은 토실토실 알토란 같이 컸다.
그런 어느 날 돌아가신 아버지 지인이 “돼지를 모두 팔아서 자기를 주면 일할 변을 주겠다. 그러면 막내는 물론 아이들 학비를 충당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어머니에게 제안했다. 군인이 된 큰 형이 어머니께 “이 험한 세상에 누구를 믿느냐?”고 반대했지만, 어머니는 막내를 중학교에 보낼 생각만으로 지인을 믿고 돼지를 모두 팔았다.
두 달인가 이자를 받아서 어머니의 시름을 지우는가 했던 때 지인이 운영하든 술집이 없어진 것이었다. 이 청천벽력 같은 현실에 집안은 초상집이 되어 어머니는 사흘 동안 식사도 거르고 눈물만 흘리셨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옷매무새를 다듬고 나를 앞장세워 어디론가 길을 나섰다. 읍내를 지나서 한 시간쯤 거리에 있는 거북산에 다다랐다. 어머니는 실낱같은 한 가닥 희망을 갖고 절을 찾은 것이었다.
늦가을 오후 햇살이 두 사람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나지막한 산사에는 자그마한 사찰이 아늑했다. 늙은 스님은 곧 법당으로 안내했다.
“백팔 배를 올리시지요. 부처님의 뜻이 있으시겠지요.”
어머니에게 이르고는 합장하고 나가버렸다.
“부처님, 저 불쌍한 거 좀 살펴 주시오다. 나무아미타불 관셈보살….”
어머니가 절을 올리는 작은 목소리가 갈수록 점점 커지는 것이었다. 애원의 목소리가 어느샌가 원망에 소리로 바뀌었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그 모진 고생으로 막내를 중학교에 보내는가 했는데… 부처님을 믿은 보람도 없이 사기를 당한 허무함을….
나는 높은 보료 위에 금빛 부처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내려다보고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부처님 주위가 광채로 빛났다. 그것은 늦은 하오에 햇빛이 비쳐서만이 아니었다. 나의 눈에선 뜻 모를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부처님 도와주세요.” 하고 어머니 곁에 엎드렸다.
서산에 눈 부신 햇살을 뒤로 하고 우리는 절을 나왔다.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웬일인지 가벼웠다. 그 후 우리는 돼지우리를 보며 눈물만 흘리고 앉아 있을 수만 없었다. 밭일이며 닭 먹이를 위해 군부대를 열심히 드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경도에서 월남한 이웃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그분은 살아생전에 아버지를 한 고향 사람이라 아버지처럼 대했다. 우리도 큰 형이 형님이라고 부르니까 따라서 형님이라는 호칭을 썼지만, 나에게는 나이가 아버지 벌이었다.
그분이 “병오야, 이 돈으로 중학교 등록금을 내거라. 나중에 네가 어른이 되면 갚도록 하고….” 웃으며 돈뭉치를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달려 나와 어머니에게
돈 봉투를 내밀었다.
“고밥습네다. 부처님….”
그 후 나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때 그 부처님을 떠올렸다.
젊은 나이에 준비 없이 무작정 시작한 사업이 난관에 부딪혀 천신만고 막다른 선택의 위기 때마다 떠올린 것은 그때 그 부처님의 후광이었다. 그렇다고 불심이 깊어진 것도 아니었다.
소년 시절 우연한 기회에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가본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상을 우러러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믿십니다.” 중얼거리다가 끝내는 눈물로 하소연하는 모습을 보며, ‘아! 예수님도 부처님 같은 분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변화무쌍하고 살기 힘든 사회일수록 종교(믿음)라는 후광(백그라운드)이 사람들이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로 활용하는 것이 아닐까?
한편 무리 지어 수렵 생활을 하던 원시사회가 발달을 거듭하면서 동서고금東西古今에 무리黨 지어 사람들을 이끌면서 부정적인 후광(빽)을 이용하여 당리당략에 빠져 사회를 크게 오염시키고 심지어는 나라마저 나락의 길로 빠트리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 않은가? 좋게만 보아왔던 후광도 인간의 생각에 따라 부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인간사회의 이중성을 늘 경계하여 가슴속에 새기며 살아가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