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부평구 부평6동에서 고옥선 ---------------------------------------------------------- 오빠는 장애1급의 전신마비환자입니다. 80년 12월 15일. 오빠는 막내 동생 결혼을 앞두고 농사지은 쌀을 서울 양재동시장에 내고 내려오시던 길이었지요. 오빠 가슴에 품었던 그 돈. 오빠는 내내 '이 돈이면 막내 동생 시집갈 밑천이 될 거라고' 그렇게 흐뭇해 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내려오는 길 '서설'이라는 그 해 첫눈이 소폭하게 내렸던 그 날. 그만 오빠의 트럭은 미끄러움에 중앙분리대를 받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빠는 참 오랫동안 까마득한 어둠 속을 헤매었지요. 살아만 돌아와 달라고 빌었지만 오빠는 그 어둠 속에서 정신만 돌아온 채, 혼자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낯선 사람이 되어 우리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서른 세 해. 누구보다도 건강했던 오빠. 오빠의 사고는 비단 오빠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에게도 수많은 시련을 예고하고 있었지요. 병약한 올케언니가 가족 부양을 위해 직장에 나가던 날. 함께 흘렸던 눈물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고, 오빠의 그 굳은 살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지시며 ' 그래도 살아주어서 고맙다'를 중얼거리셨던 어머니의 눈물. 그렇지만 이런 가족의 눈물조차도 멍하니 천장만을 응시한 채 자신의 굳은 몸을 한탄해야했을 오빠의 슬픔에는 비할 수가 없겠지요. 오빠가 그렇게 누워 버린지 4년 동안 오빠는 자신의 굳은 몸조차도 가족들에게 미안해하며 그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오로지 누군가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야했습니다. 하지만 오빠에게도 희망의 빛은 작지만 아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오빠가 컴퓨터를 알게 된 날. 오빠는 혀로 막대를 물고 있는 힘껏 자판을 눌렀고, 화면 위에 오빠가 남긴 자음. 모음이 적혀 갔던 그때. 오빠는 마치 세상을 새로 본 아이처럼 그렇게 신기해했지요. 그리고 온 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오빠가 썼다는 그 첫 문장. '여보 미안해. ' 올케는 그때 일을 아직도 눈물 흘리며 말하곤 하지요. 그렇게 오빠는 혼자의 힘으로 책을 들여다보며 컴퓨터를 알아갔고, 그리고 매일 낮밤으로 오빠는 그 곁을 떠날 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인터넷을 알았고 인터넷은 갇혀있는 오빠를 세상 사람들과 연결해주는 삶의 다리가 되어 주고 있었지요. 오빠는 그렇게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됐다는 분이 오빠를 만나러 온다 는 소식을 전했을 때. 내심 우리 모두는 그분이 정말로 찾아 오실까. 미심쩍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하지만 내장사 오시는 길에 잠깐 들렀다고 저희 집을 찾아주셨던 그 분. 그분은 단아한 모습에 전라도 정읍에서 작은 식당을 하고 있다는 아주머니셨지요. 그분 말은 내장사를 보러 오시는 길이라고 했지만 한눈에도 오빠를 만나러 그 먼기를 오셨다는 걸 알 수 있었지요. 그분은 연신 우리 오빠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개월 전부터 인터넷으로만 오빠와 알고 지냈는데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고, 좋은 인연으로 이어가고 싶노라고. 그 분 역시도 넉넉한 형편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수한 옷차림. 살아온 삶이 평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그 거칠은 손. 그래도 그분은 떠나시며 식당이 쉬는 날이면 꼭 오마. 그렇게 오빠의 새끼 손가락에 약속을 걸고 가셨지요. 그리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한 달에 꼭 한번씩 그렇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꼬박 18년 동안. 그분은 밤마다 인터넷을 통해 오빠와 만나셨고, 그리고 식당이 쉬는 날이면 한달에 한번씩 꼭 오빠를 찾아와 주시곤 했지요. 그리고 마치 오래전부터 그렇게 지내오기라도 했던 분처럼 우리 가족에게 웃음을 주시고, 그리고 늘 오빠를 차에 태워 나들이를 나가셨습니다. 가까운 해안가나 들과 산. 오빠에게 바깥 세상은 혼자서는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지만 그 분은 너무나 쉽게 오빠의 그 장벽을 치워주고 계셨던거지요. 오빠 뿐만 아니라 오빠의 병상을 지키느라 지친 어머니와 올케. 우리 가족 모두에게 그분은 때때로 불쑥 찾아드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오빠의 점점 더 밝아지는 모습.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도 어느덧 다시 돌아온 웃음. 오빠에게도 우리에게 정말 필요했던 건 바람 부는 바깥 세상이 아니라 사람의 이런 따스한 관심이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 수 있었지요. 그런데 이런 분의 발길이 어느날인부터 끊어지기 시작했고, 그때서야 우리가 얼마나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지요. 불안한 마음에 연락을 드려보니 위암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병원을 찾아간 우리에게 그 분은 그러셨지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초기라서 그냥 수술만 하면 거뜬해진데요. 아이구 나 많이 기다렸을텐데... 속상해서 어떡하나?' 병실에서도 그분은 오빠 걱정을 하셨지만, 오빠는 그날 이후 곡기를 끊으면서까지 그분을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분의 수술날. 올케와 오빠의 딸들이 병원에 그분의 수술을 지켜봤고 수술이 잘되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오빠에게 이 소식을 전했을 때 오빠가 그제서야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염없이 하고 있었지요. 3개월의 치료기간이 끝난 후 그분은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오빠를 찾아오셨습니다. 오빠에게 미안하시다면서. 그때 오빠는 이렇게 말했었지요. '절대로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돼요. 꼭이요' 그분의 그 사랑을 받는 건 오빠만은 아닐 겁니다. 그분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환하게 미소지을 수 있는 건 그분의 사랑 때문이겠지요. 정말 진심의 그 마음으로 그 분을 축복합니다. 부디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