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6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마태오 13,1-9
농부는 씨를 아끼지 않는다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저는 오늘 어떤 사람들인지 생각해보려 합니다.
분명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는 땅은 세속, 육신, 마귀를 이겨내고 주님 뜻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땅입니다.
우리는 가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더 많기에 상처받고 실망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물론 그런 사람이 많을지라도 밭 하나에서 내가 고생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확신을 줍니다.
만약 한 본당이 계속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실패하는 것이 두려워서 씨를 뿌리지 않고 있었다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씨뿌리는 농부는 자신의 씨가 새에게 먹히고 햇볕에 그을리고 가시덤불에 숨 막혀 죽어도 결국엔 몇십, 몇백 배로 돌아올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실패와 마약 중독자를 거쳐 늦은 나이에서야 0원에서 조 단위의 부자가 된 그랜트 카돈은
라스베가스 노숙자들에게 다가가 부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안녕하세요. 부모님이 돈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셨는지를 알아보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요.
부모님은 돈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셨죠?”
“저축하라고 하셨죠. 그런데 저는 한 번도 저축한 적이 없죠.”
“그거 말고 다른 조언은 없었나요?”
“아무것도 가르쳐 준 게 없어요.”
“부모님 말고 다른 사람은요?”
“없어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요. 제가 하는 말의 문장을 끝맺어주세요.”
“티끌(10원)을 모아?”
“태산(부자) 된다.”
“돈은 절대로?
“쉽게 벌어지지 않는다.”
“돈으로는?”
“행복을 살 수 없다.”
카돈은 말합니다.
“이것 봐!, 온 세상이 돈을 이렇게 배웠어! 부자들은 모두?”
“나쁜 사람이다…. 대부분은요!”
그는 노숙자들에게 계속 이런 질문을 하는데 편집을 그렇게 해서 그러는지 몰라도 이들 대부분의 생각은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강론에 무슨 돈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하냐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강의를 할 때 십일조를 내라고 하면 대부분 신자들이 안 좋은 감정을 가집니다.
우리가 개신교냐?, 혹은 돈은 악의 근원인데 어떻게 제단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는 듯이 말입니다.
세상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돈이나 말씀이나 복음이나 다 같은 법칙에 적용받습니다.
모으면 똥이 되지만 뿌리면 거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딸에게 돈은 그저 은행에서 찍어내는 종잇조각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도 돈의 가치에 집중했을 때 망하고 고난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는 연말이 되면 모든 헌금을 부동산 등에 투자합니다.
돈은 인플레이션이 오면 정말 휴지가 될 수 있지만, 부동산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돈을 계속 뿌려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잃는 경우도 많이 발생합니다.
이것 때문에 주눅이 들어서는 안 됩니다.
카돈은 어린 딸에게 영업을 가르치고 강연도 시킵니다.
재벌의 어린 딸이라면 미래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서 교만할 만도 할 텐데 딸은 실패를 묵묵히 참아냅니다.
어눌한 강연에 청중들이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씨뿌림을 멈추어서는 안 됨을 알려줍니다.
카돈은 딸에게 자기 강연의 티켓을 팔도록 전화합니다.
아마도 이전에 왔던 사람 중의 이번에 신청하지 않은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딸은 처음엔 어눌한 말투로 왜 이번엔 티켓을 사지 않았느냐고 전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귀찮게 한다고 끊어버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전화기를 꺼버립니다.
어린 딸은 그래도 재미있다는 듯이 계속 전화를 합니다.
18번의 전화를 했는데 그 중 한 사람만이 티켓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일일이 전화를 걸게 시켜 4,000달러 좌석을 팔게 합니다. 직원으로 치고 10%, 곧 400 달러의 보너스를 받게 됩니다.
이 한 통화의 성공을 위해 그녀는 열일곱 번을 실패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카돈은 400달러를 열일곱으로 나누면 전화 한 통화에 22달러씩 버는 것이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절대로 거절당하는 것 때문에 씨를 뿌리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의 씨앗을 아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들이 스며들지 않는 땅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명만 받아들여도 그 사람이 성모 마리아일 수도 있고, 많은 성인을 낳은 소화 데레사의 부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수십만 명에게 복음을 전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은 또한 다시 서른 명, 예순 명, 백 명에게 씨를 뿌리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좋은 땅이셨기 때문에 온 세상에 사랑의 씨를 뿌리셨습니다.
우리가 몇 명을 위해 믿음의 씨를 뿌리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 땅이 몇 배의 열매를 맺느냐가 결정됩니다.
어쩌면 우리도 복음의 씨앗을 돈처럼 아끼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26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마태오 13,1-9
성 요아킴이여, 기뻐할지어다!
성직자 수도자 부모로 산다는 것 때로 큰 기쁨이요 보람이지만, 반대로 그들의 부모라는 신분, 그 자체로 엄청난 부담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님들 역시 한 본당이나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들 신부나 수도자에게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언행에 있어서 신중 또 신중해집니다.
너무 나서서도 절대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뒤로 물러나 있어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적절하고 균형 잡힌 처신을 하느라 죽을 고생을 하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총애를 받고, 하느님께서 이 땅으로 내려오시는 축복의 통로가 되신 나자렛의 마리아, 그녀의 부모셨던 요아킴과 안나의 삶도 비슷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 마리아가 부여받은 엄청난 사명이 자신들로 인해 어긋나면 안 된다는 마음에 요아킴과 안나는 늘 조심조심, 조마조마, 기도 속에 살아가셨을 것입니다.
요아킴과 안나의 일생에 대한 저작이나 문헌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초기 교회의 교부들 가운데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사제가 저술한 책에 의하면, 안나 성녀의 생애는
구약시대의 유명한 예언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비슷했다고 합니다.
늙도록 자녀를 얻지 못했던 요아킴과 안나는 눈물의 기도 끝에 기적처럼 아이를 갖고 출산하였는데,
그녀가 마리아였답니다.
안나의 자비심은 각별했답니다.
그녀가 습관적으로 행하던 일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손을 열고, 구차한 사람들에게 손을 폈던 것입니다.
또한 그녀는 천상적 지혜로 충만했다고 합니다.
그녀에게 특별한 성덕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요아킴은 유다 가문들 가운데 가장 정통적인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는 나자렛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계명을 엄수했고, 평온한 청년 시절을 지냈습니다.
혼기가 차자 레위족 가문의 소녀 안나와 혼인하였습니다.
두 분은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충만한 신앙생활을 통한 완덕의 길을 추구함으로써, 마리아의 사명을 준비하였습니다.
“성 요아킴이여, 기뻐할지어다.
무릇 세상의 구세주 예수님을 나으신 어머님이 곧 당신의 따님이기 때문입니다.”(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2023. 7. 26. 수)(마태 1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3ㄴ-9).”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입니다(마태 13,19).
‘빼앗아간다.’고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악마가 ‘말씀의 은총’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악마에게 넘겨줍니다.
대표적인 예가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6-17).”
이 말씀을 “선악과를 따 먹지 마라.” 라는 명령으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이 말씀은, “네가 나의 명령에 순종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고 약속하시는 ‘은총의 말씀’입니다.
<‘모든 나무’에는 ‘생명나무’도 포함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명령만 하셨을 뿐이고,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지 말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와가 악마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말씀’을 버렸고(창세 3,1-7), 그 말씀에 순종했다면 받을 수 있었던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창세 3,22-24).
그것은 자신들이 받은 은총을 악마에게 넘긴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악마의 유혹을 경험합니다.
악마는 교묘한 논리로, 또는 진심으로 충고하는 것처럼, 또는 신앙생활을 더 잘하게 도와주려는 것처럼 다가와서, 주님의 가르침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만일에 유혹이 다가올 때 그것이 유혹인 줄 전혀 몰랐다면, 유혹에 넘어간다고 해도 그것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을 보면, 유혹인 줄 알면서도 판단력이 흐려지고 의지가 약해지고 믿음이 흔들려서 유혹에 넘어갑니다.
유혹하는 악마에게 일차 책임이 있지만,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쪽의 죄도 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9,29).
‘기도’는 유혹을 물리치는 유일한 방법이고, 유혹보다 더 강한 힘입니다.
그러니 유혹이 다가올 때에는 무조건 기도해야 합니다.
‘돌밭’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여러 가지 탐욕들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탐욕들은 신앙생활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걸림돌’들입니다.
<‘걸림돌’이 너무 많으니까 ‘돌밭’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사도 5,1-11).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는 전 재산을 봉헌했다는 칭찬을 받고 싶은 명예욕과 재물에 대한 탐욕 사이에서 고민을 했던 것 같은데, 그들은 그 두 가지 욕망을 동시에 채우려고 시도했습니다.
재산의 일부만 바치면서도 전 재산을 바치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 라고 하나니아스를 꾸짖었습니다(사도 5,4).
<명예욕과 재물에 대한 탐욕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익명’으로 봉헌합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3).”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가 했던 것과 같은 짓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가시덤불’은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마태 13,22).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을 간단하게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빵이 없다고 걱정했던 사도들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 8,14.16-19).”
<여기서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는
“빵이 없다고 걱정했다.”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믿는다고 하늘에서 돈이 내려 오냐?
쌀이 내려 오냐?” 라고 비아냥거리지만, 신앙인들은,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라는 예수님 말씀과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라는 예수님 말씀이 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알고 계신다.’는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주신다.”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