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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에서 진도로 이어지는 우수영에는 우수영선착장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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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영 선착장에는 거북선유람선이 있어 임진왜란 당시를 상상하면서 다도해를 유람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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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진작가가 우수영 선착장 주변을 사진으로 담고 있는 모습. 무더위 속에 역사의 숨결을 찾아 그 현장에서 치열했던 옛날을 회상하는 듯 진지한 모습이다. |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한국인의 삶에 거의 재생이 불가할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고 끝이 났다.
그 길고긴 7년동안의 삶이란
그 처참한 형상을 아무리 그럴듯한 말과 글로 표현한다할 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천만 다행으로 우리는 처참한 지경을 당하면서도 그 전란을 견디어냈고,
그렇게나마 피폐한 상처를 입고서도 우리는 그 전쟁의 패자가 아닌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순신장군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일이지만,
당시로 돌아간다면 그리 쉽게 수긍할수도 없는 때였다.
그 이유는 장군의 공이 큰 만큼 그 공을 시기하는 자들이 많았고,
공이 큰 만큼 그 공을 더욱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탓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백성과 나라를 다스리는 책임자였던 임금이 있었다.
선조는 관군들의 연전 연패에 노심초사하면서도
이순신만의 승전에는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실정으로 왕실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었지만,
그와 반대로 백성들을 생각하고 병사들을 이해해주는
이순신은 백성과 군관들의 우상이었고,
왜군과 선조에게는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탓이다.
이런 이순신을 그대로 둔채 그의 승리를 축하하고 즐거워만 할 수 없었던 선조는
그를 모함하는 무리들의 상소에 귀가 솔깃하여 무리하게 왜군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라나 모든 전황을 파악한 이순신은 왕명이지만 그 명에 따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선조는 이순신장군을 왕명을 거역한 죄로 파직하고 잡아들여 압송하여 모진 고문을 가하였고,
장군의 몸에 크나큰 상처마져 입혔다. 그러나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순신장군의 뒤를 이은 통제사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
조선수군을 총 동원하여 이끌고 나가서
조선수군의 철갑선인 여러척의 거북선과 수백척의 판옥선을 거의 대부분 수장시키고,
그의 휘하장병들도 수천명이 목숨을 잃고 원균마져 죽고마는 패전을 하고 말았다.
선조는 그런 패전의 비보를 받자, 또다시 이순신장군을 찾았고,
그에게 백의종군하라던 자신의 명을 바꾸어 다시 수군 통제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말이 수군통제사이지 그의 휘하장수들은 대부분 죽거나 부상이 심한 상태였고,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거북선은 한척도 남지 않았다.
수백척의 판옥선은 전장에서 겨우 도망했던 배 12척이었다.
그러나 그도 전라도 해안 여기 저기 흩어져 이를 찾느라 몇날 며칠을 찾아 헤메었다.
하지만 어렵게 찾은 판옥선들을 한데 다시 모으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도망한 병사들을 찾아 다시 모으고 땅에 떨어진 병사들의 사기를
다시 회복하기는 더욱 난망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장군은 자신을 파직하여 백의종군을 명한 임금을 원망할 겨를도 없이
그나마 흩어진 판옥선을 다시 수리정비하고,
흩어져 도망친 살아남은 병사들을 다시 소집하여
선량한 백성들과 조선이라는 나라를 구하는데만 노심초사하였다.
그리고 12척의 초라한 판옥선을 가지고 또다시 치열한 전투를 준비하였다.
그는 전함 12척과 주변의 어선들 100여척을 빌려 적의 눈을 속이고자 하였다.
어선 100여척을 멀리 배치하고 판옥선은 가까이 배치하여
적들의 눈에는 조선수군이 적어도 100척은 넘어보이도록 속임수를 썼다.
이를 모르는 왜군은 자신들이 무참히 쳐부순 조선수군이
아직도 100척이 더 남아있다는 사실에 의아스러워 하면서도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수군만은 두려워했다.
요즈음 영화 '명량'으로 1000만이 넘는 관객을 불러모아 돈을 벌었지만,
당시를 회상하면 그야말로 피가 마르는 전투였다.
전투를 총 지휘하던 이순신장군도 무척 두려웠을 것이다.
다만 백성들을 살리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살려야한다는 의무감으로
하늘과 땅과 바다의 신께 비는 마음 간절하였고,
그 힘에 의지하여 의연하게 전투에 임했음이다.
지금은 비록 한가하게 관광유람선으로
우수영에서 명량 앞바다를 돌아보는 유람선놀이에 불과하지만,
당시는 온 백성의 목숨이 오직 명량해전에 달려 있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한가롭게 떠있는 거북선과 판옥선을 보면서
무더위에 지쳐 힘이 드는 뜨겁고 뜨거운 한 낮 삼복더위,
그러니 당시를 생각하니 숨막히는 더위라고 투정할 수 없는 해남 우수영선착장의 여정이었다.
무더운 여름 이곳 저곳 더위를 피하여 물놀이에 정신없는 계절이지만,
400여년 전의 치열했던 전투현장을 찾는 것
역사와 나라를 소중히 여기는 좋은 계기가 되며,
또한 무더위를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