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몇 배는 될 듯한 엄마와, 형과, 동생과 달리기 시합을 하며, 커다란
바다 안에서 나는 웃고 있습니다.
웃고 있습니다.
1. a bitter smile
"어빌리리Ability, 잘 했어!"
칭찬 받았다!
나는 그만 커다란 수조 안에서 바보처럼 실실거리며 웃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날카로운 표정으로 나를 대하는 컴퍼션Compulsion 씨도 이
번만큼은 절 어쩌실 수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난 드디어 327번의 실패
끝에 공중제비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봐요. 컴퍼션 씨의 명령을 듣
지도 않고 헤헤거렸는데도 컴퍼션 씨는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며 어서 오라
고 손짓만 할뿐이잖아요. 보통 때라면 당장 수조 안으로 들어와서 저 두
꺼운 손으로 날 일단 때리고 봤을 거예요. 아니면 밥을 굶긴다거나.
그런데, 어빌리리라니?
하지만 난 묻지 않아요. 왜냐하면 난 컴퍼션 씨가 쓰는 말을 모르는데다
가, 컴퍼션 씨가 내가 쓰는 말을 알 리가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나는 컴퍼션 씨에게 가까이 다가가 꼬리를 흔들며 컴퍼션 씨가
어서 설명해 주길 잠자코 기다립니다.
그리고 역시나 곧이어, 컴퍼션 씨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왜 내가 돌
Doll이 아닌 어빌리리인지를 평소와는 다른 흥분된 목소리로 설명해 줍니
다. 원래 잘 웃지 않기로 소문이 난 컴퍼션 씨가 오늘은 왜 그렇게 기분
좋게 웃고만 있는지 나는 정말 궁금합니다. 겨우 내가 공중제비를 성공시
킨 것만으로 이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을 텐데요.
그리고 내 궁금증이야 어찌 됐든 컴퍼션 씨는 설명을 시작합니다.
"하하, 어빌리리! 너는 이제부터 돌이 아닌 어빌리리야. 너, 어빌리리라
는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 이제부터 너는 어빌리리가 되는 거야."
순간 나는 머리 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지금만큼은 당장
컴퍼션 씨의 말을 배워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왜 내가 우리 동물원의
인기 스타 어빌리리가 되어야 하지요?>라고요.
하지만 컴퍼션 씨는 더 이상은 설명하지 않고 그냥 몸을 돌려 가버립니
다. 이젠 쉬라는 뜻으로 내 머리 위를 몇 번 톡톡 두드려주고요. 조금만
더 있으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컴퍼션 씨의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내 맘과는 다르게 곧 문이 열리면서, 문은 컴퍼션 씨를 삼켜버립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됩니다. 혼자는 외롭지만, 오늘은 별로 그렇
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생각할 게 조금 많이 있으니까요. 왜 내가
우리 동물원의 인기 스타인 어빌리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하지만 나는 끝내 그 답에 대해서 알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생각할
뿐, 답을 구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바보니까요.
참! 그리고 그 전에 공중제비 연습을 더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공중제
비를 한번 서툴게 성공시킨 것만으로 컴퍼션 씨가 매우 다정하게 대해주
셨으니, 조금 더 연습하여 더욱 완숙한 솜씨로 공중제비를 성공시키면 컴
퍼션 씨는 더욱 더 기뻐해 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더 이상 혼자 남겨지는 일이 없을 테지요.
2.All hope is gone
정말 기분좋은 날이었습니다.
바람은 부끄러운 새 신부의 어깨에 살짝 늘여 트려진 면사포가 되어 우
리의 눈을 희롱하고, 태양은 은은한 미소로 우리에게 밝음의 축복을 내려
줍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안은 푸른 하늘은 우주를 유영하려는
새의 커다란 날개가 되어 희망의 불꽃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난 그런 것과는 아주 무관한 존재인 듯 울고만 싶으니, 이게 어
찌된 일일까요.
지금 내 상황은 대충 이렇습니다. 하지만 아침까지는 이상하다 싶을 일
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물장구를 치고, 아침을 먹고, 그
후론 공중제비 연습을 하며 재미는 없었지만 흥분과 기대를 안고서 커다
란 풀장 안에서 뛰놀고 있었습니다. 327번의 실패 끝에 겨우 성공시킨 공
중제비는 내가 정말로 어빌리리라도 된 것처럼 아주 완벽했고, 그래서 컴
퍼션 씨에게 자랑할 순간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내가 꿈꾸었던 컴퍼션 씨를 만나게 될 상황은 이런 게 아니었어
요.
나는 내가 잠자고, 먹고, 놀던 그 풀장에서 컴퍼션 씨를 재회하길 원했
습니다. 그런데 여긴 도대체 어딘가요? 여긴 어빌리리가 매일 재주를 넘
고 뛰놀던 공연장 아닌가요?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지요? 어제 컴퍼션
씨가 나를 어빌리리라고 부르긴 했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어빌리리가 아니
잖아요?
하지만 그런 내 속마음도 모르는지 처음 보는 여자 하나가 나에게 쪼르
르 달려와 방긋 웃으며 말을 건네었습니다. 난 그만 속이 상해 버릇없이
고개를 돌리고 말았지만, 여자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는지 연신 웃으며
저 혼자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웃고는 있었지만 그 속에는 약간의 긴장감
이 있었고, 초조해 하는 기색도 있었으며, 슬퍼하는 모습도 슬쩍 내비치
는, 그런 복잡다단한 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자에게
약간의 동정심이 생겨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은 말이야, 아주 중요한 날이거든. 더욱이 너한테는 아주 기념할
만한 날이 될 거야. 들어주겠니?"
여자는 아까 와는 다른 조심스런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었습니다.
내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겠지요. 마음 같아선 홱 고개
를 돌리고선 컴퍼션 씨를 찾아가고 싶지만, 아주 금방 전에 여자에게 동
정심이 생긴 탓에 그러지도 못하겠습니다. 이래저래 나는 정말 바보 같다
는 생각 외에는 아무 것도 내 머릿속에 들지 않습니다. 난 왜 이렇게 손
해만 보고 살까요.
속으로 내 머리를 콱콱 때리고 있는 가운데-왜냐하면 실제로 내가 내 머
리를 때릴 수는 없잖아요?-, 여자는 다시 환한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
다 멋대로 입을 움직여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너한텐 나쁜 것이 아냐. 아니, 오히려 훨씬 좋은 거야. 너도 어빌리리
를 사실은 많이 부러워했지? 매일매일 커다란 스테이지에서 많은 관객들
에게 박수를 받고, 귀여움을 받고, 우리 동물원의 메인 캐릭터지. 동물원
의 광고에서 어빌리리의 모습이 빠진 적이 있었던가? 우리 동물원의 손
님 중엔 어빌리리의 쇼를 보려고 몰려오는 사람이 절반이야. TV에도 소개
되었고, 잡지, 신문, 기타 등등. 너도 사실 그런 어빌리리가 많이 부러웠
잖아?"
멋대로 생각하지 말아요!
난 그렇게 쏘아 붙여서 자신만만한 표정의 여자를 풀 죽은 모습으로 만
들고 싶었습니다. 여자에 대한 동정심 같은 건 이젠 안중에도 없다고요!
하지만 나는 결국 그렇게 하질 못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명령을 들어야
하는 생활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겠거니와, 누누이 강조하지만 나는 사람
의 말을 할 줄 모르니까요.
그런데 문득 억울하단 생각이 듭니다.
나는 인간의 말을 할 줄 몰라요. 하지만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그리고
명령을 내린다면 명령을 수행할 줄도 알지요. 하지만 인간은 그러질 못해
요. 말을 할 줄 모른다면 들을 수 있기라도 해야 할텐데, 인간은 그 양
자 모두 하질 못하지요. 그 점에서 우린 처음부터 친구가 될 수 없어요.
그들은, 오만 방자한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맞춰주길 원합니다. 제들
이 우리를 위해 뭔가 맞춰줄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지요. 수달의 말
을 배우고, 물개의 눈짓을 이해하고, 돌고래의 노래를 들을 줄 안다면 참
으로 좋을 텐데-. 아니, 그런 노력이라도 해 준다면 참으로 좋을 텐데 말
이에요. 서로 일방적인 주종관계를 맺은 우리들은 결국 처음부터 친구관
계가 되지 못하도록 조종되어 있나봐요.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이젠 고분고분한 모습으로 여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습니다.
얌전해진 내 모습을 보며 여자는 다시 밝은 표정으로 종달새처럼 노래
를 부르듯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막힘 없이, 술술, 술술.
"이제부터 너는 인기만점 어빌리리가 되는 거야. 귀여운 꼬마 손님들에
게 사랑을 받고, 커다랗고 번쩍거리는 스테이지 위에서 묘기를 부리고,
관객들의 커다란 함성과 박수소리를 받고, TV에서 널 취재하러 오고, 우
리 동물원의 메인 캐릭터가 되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꿈꾸는 듯이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자의 표정이 갑자기 애처롭고
날카로운 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비틀린 여자의 입술 속에선 지금까지와
는 다른 차갑고도 동정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새어나왔지요.
여자는 날카로운 음색으로 내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넌 뭐였지? 한번이라도 관객들 앞에서 쇼를 부린 적이 있니?
그냥 멍청히 수족관 안에 틀어박혀서 조각상같이 자신의 모습을 고정시키
고 앉아있었지. 관객들의 박수, 아이들의 동경 어린 손길. 그런 것 상상
이나마 할 수 있었니? 구석 뒷방에 처박힌 채로 평생을 살아갈 거야? 그
럴 거야?"
실로 이렇게 <가시가 돋친> 말은 이제껏 한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
만, 나도 할 말은 많다고요. 내가, 내가 조각상처럼 수족관 안에 고정된
존재인 양 앉아 있다고요? 앞으로도 그렇게만 살 거냐고요? 하, 그게 누
구 때문인데, 그게 누구 때문인데!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버리거나 아니면 헤엄을 쳐서 저 멀리 가버린다
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 여자와 함께 있으면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은 몇
번이나 해보았지만, 전부 실행에 옮긴 적이 없었으니까요. 또다시 내 멍
청함을 재확인시키는 꼴밖엔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과연 여자는 내가 만약 가버릴 생각을 했더라면 틀림없이 지느러
미를 멈춰 세웠을 말을 그녀의 입 속에서 천천히 꺼내었습니다. 그녀의
얼굴 위엔 다시 몽환적인 분위기의 표정이 떠올랐습니다.
"돌, 너는 어빌리리가 될 수 있어. 아니, 너는 이미 어빌리리야. 지금까
지 네가 부러워했던 존재의 모습이 될 수 있다고. 이젠 어빌리리의 화려
한 쇼를 도와주곤 하던 그런 뒷방살이 신세의 돌이 아냐. 화려한 스포트
라이터가 네 몸을 감싸 안아줄 거야. 박수, 함성, 인기, 호사스런 생활.
전부 네 거야. 들어봐, 돌. 이건 정말 기회야. 불쌍한 돌을 돕기 위해 하
늘에서 내려주신 기회라고! 사람들 앞에서 쇼하는 것 따위는 관심 없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지금 네 가여운 생활을 긍정적으
로 생각하기 위해 만들어낸 억지일 뿐이야. 지금 네 생활을 긍정적으로
만들려면 비교 대상의 부정적인 말을 생각해야 하니까! 그래서 넌 불쌍
한 돌을 긍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비교 대상이자 선망의 대상인 어빌리리
를 부정적으로 만들어버린 거야. 아냐? 아냐? 아냐? 내 말이 틀려?"
아냐, 아냐, 아냐, 네 말은 틀려. 난 진심으로 어빌리리를 동경한 적 없
어. 불쌍하단 생각을 해봤을 뿐이지. 박수? 함성? 인기? 호사스런 생활?
우리 돌고래가 생각하는 기쁨을 너희 인간들 따위가 생각하는 척도로 재
지 마!
난 이번에야말로 몸을 돌려 헤엄쳐갔습니다. 잔잔하던 물살이 튀어 오르
며 아름다운 반원을 그려 나갔고, 그리고 공중에서 허우적대며 날아오르
는 물방울을 관통하며 비춰지는 따사로운 햇살이 아름답기만 합니다. 하
지만 나는 충분히 슬펐고, 화가 났으며, 분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젠
내 몸에 속속들이 떨어지며 도착하는 물방울들의 잔상 같은 것은 감상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검은 복도를 향해 빠르게 사라져 가는 내 등뒤로, 언제나 감정 회복이
빠른 여자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늘 오후 한 시야, 어빌리리! 그 시간 때 공연이 있어. 마음 단단히
준비하는 게 좋을걸?"
여자의 재미있어하는 기색마저 담은 목소리에 나는 쉬이 화가 났지만,
그렇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나는 지느러미와 꼬리를 열심히 움직여 검은
복도를 지나갔습니다. 아니, 그럴려고 했습니다. 내 귀에 내리꽂히는 듣
기 싫은 느끼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나를 가로막지 만 않았더라면 나는 틀
림없이 그랬겠지요.
잿빛의 약간은 헐렁해 보이는 양복을 꼬장꼬장하게도 이 특별하리 만치
더운 여름날에 모든 격식을 다하여 차려입은 동물원장 레스트릭션
Restriction 씨는 과연 더운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손수건을 이마에 연
신 문대며 내 모습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선 풀 가에 서있었습니다. 양
복바지가 땀에 절어 다리에 달라붙어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으
나 레스트릭션 씨는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닙니다. 하긴, 풀장 주위
에 있으면서 통풍 잘 되는 양복바지를 입고 있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일까
요.
내 갸우뚱거리는 얼굴을 무슨 이유에선지 한참을 불만족스러운 시선으
로 바라보던 레스트릭션 씨는 내 어깨 너머의 여자에게 소리쳤습니다. 하
지만 곧이어 들린 여자의 생경스러운 목소리가 훨씬 더 컸지요.
"이봐, 크리에이트Create. 어빌…."
"와아, 안녕하셨어요, 레스트릭션 씨? 오랜만이네요. 음. 금방 <어빌리
리 상태는 어때?>라고 물으실 예정이었죠? 어머나, 그렇게 놀란 표정 지
으실 것 없어요-하지만 레스트릭션 씨는 제가 보기엔 놀라기 보단 죽기
일보직전의 상태였답니다-. 예. 어빌리리는 아주 잘 있어요. 보세요. 기
분이 좀 안 좋아 보이죠?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원장님도 매
일 아침에 화장실 앞에서 오만상을 다 찌푸리잖아요? 그런 거랑 똑같은
거죠, 뭐. 아, 돌고래도 치질에 걸리는지에 대한 것은 묻지 말기!"
장미꽃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고급스럽고 '고무 장갑'이라고 표현하기
엔 너무 상스러운 얼굴 색을 얼굴에 듬뿍 짓고 있는 레스트릭션 씨는-그
야 그럴 만도 하죠. 현재 레스트릭션 씨의 얼굴 색은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진 것 하나,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진 것 하나, 이렇게 두 배의 효과
를 내고 있었으니까- 체면 덕택에 버럭 소리는 못 지르겠는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예의 그 화려한 손수건을 이마에 더욱 더 맹렬히 문지르며 연
신 헛기침을 해대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사엔 전혀 문외한인 저마저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던 레스트
릭션 씨의 급격히 변한 상태를 같은 인간인 크리에이트-금방 레스트릭션
씨가 여자를 부른 이름에서 알게 되었지요- 씨는 전혀 눈치를 못 챘는지-
아니면 눈치를 못 챈 채 하는 건지- 연신 싱글싱글 웃고만 있을 뿐이었습
니다. 자신이 화났다는 사실을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무
던한 노력으로 크리에이트 씨에게 알려주려고 노력하던 레스트릭션 씨는
결국 지쳤는지 두 손을 들며 말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에게선 창피하다
거나, 아니면 화가 났다거나 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그리
고 크리에이트 씨의 주위를 이젠 사라져줘도 괜찮을 텐데- 라는 생각마
저 들게 하던 끈질긴 장난기도 사라져갔습니다. 대신 여름기운이 완강한
이곳에 남게 된 것은 차갑고도 날카롭게 빛나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네 개의 눈동자들뿐이었습니다.
어쩐지 바람마저 주눅을 들게 하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레스트릭션
씨가 먼저 그 두꺼운 입술을 움직거려 말을 꺼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입
속에서 나온 것은 나로서는 짐작도 못 할 것들뿐이었습니다.
어쩐지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레스트릭션 씨는 입맛을 다
시며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어요.
"어빌리리 5호가 재주는 참 잘 부렸었는데. 그 덕분에 우리 동물원의 매
출액이 1.5배는 뛰었었는데 말이지."
"그렇게 일찍 죽을 걸 누가 알았겠어요."
크리에이트 씨는 어깨를 으쓱거리는 제스처를 선보이며 할 수 없다는 듯
이 말했지만, 나나 레스트릭션 씨나 기분 좋은 얼굴은 될 수 없었지요.
레스트릭션 씨는 그런 성의 없는 대답에 화가 났을 것이고, 나 같은 경우
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둘 다 어떤 눈빛이던 간에 나
를 바라보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내가 마치 대화의 중점이라도
된 양 생각할 텐데, 정작 나는 대화에서 소외된 존재이지요. 하긴, 돌고
래와 사람이 어떻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겠느냐만. 아, 물론 컴퍼션 씨는
제외라고요! 내가 컴퍼션 씨를 너무나도 사랑하니까, 그건 제외예요!
혼자만의 생각에 어느 샌가 듬뿍 빠져있던 나는 그들이 다시 대화를 시
작한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갑자기 내 이름이 언급되자 깜
짝 놀라고 말았지요.
"아, 돌말인가요?"
"쉿, 쉿, 크리에이트! 돌이라니! 이제 이 동물원에 돌이란 존재는 없는
거야! 앞으론 이 녀석을 어빌리리 6호라고 불러야 돼, 알아들었어?"
레스트릭션 씨는 황급히 주위를 돌아보며 집게손가락을 들어 그 두꺼운
입을 가렸지만, 정작 위험이 될 뻔한-나로서는 그게 무슨 위험인지 모르
겠지만- 말을 언급한 크리에이트 씨는 여유 로운 표정으로 아직까지도 주
위를 둘러보고 있는 레스트릭션 씨를 바라보았습니다-그래서 레스트릭션
씨는 더욱 더 화가 났지요-.
들은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레스트릭션 씨는 한 두세 번 헛기침을 요
란하게 하더니 고개를 들어 먼 산을 바라보는 제스처를 취했습니다. 레스
트릭션 씨의 오른손에 아슬아슬하게 쥐어진 요란한 손수건은 바람에 휘날
리고 있었지요.
레스트릭션 씨는 그런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어딘가 들뜬 구석이 보
이는 음색으로 크리에이트 씨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험. 허험. 갑자기 급조된 어빌리리 6호라 아직 미숙한 점도 많을 거
야. 이 녀석이 어빌리리 6호로 지목된 것도 순전히 어빌리리랑 똑같이 생
겨서 채택된 것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쇼는 적당히 쉬운 것으로만 하도
록 해. 대신 특별손님 같은 격으로 다른 해양동물을 출현시키도록 하고."
레스트릭션 씨의 손에서 위태하게 흔들리던 손수건은 결국 갑자기 불어
닥친 하늬바람에 의해 어디론가 날아가 멀리 떨어져 있던 풀장에 떨어지
고 말았습니다. 빨간색의 손수건이 물위에 떠다니는 광경은 마치 커다란
꽃잎이 물위에서 떠돌고있는 광경을 연상시켰으나, 그 손수건의 임자인
레스트릭션 씨나 그 손수건을 선물해 준 크리에이트 씨나 별 신경은 쓰
지 않았지요. 뭐, 모르지요. 나중에 저기로 가서 다시 주울 예정인지도.
일단은 저것을 주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던 크리에이트 씨는 갑자기 고개
를 들어 방긋 웃으며 똑 부러진 어조로 말했습니다.
"예, 그렇게 하지요."
3.beyond one's vision
나는 현재 떨려 죽을 예정입니다.
무수히 떠다니는 많은 수의 별들, 그림자, 태양, 웃음, 추억. 현재 내
주위와 머릿속을 떠다니는 것들이라곤 그런 형이상학적인 것들뿐입니다.
쳇, 좀더 현실적인 것들이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내 주위와 머릿속을 떠
도는 것들이 그런 현실적인 것들뿐이라면 나는 이 메마른 상황 속에서 틀
림없이 미쳐버리고 말 테지요. 그렇다면 결국 결론은 이 상황에서 떠도
는 것들이 형이상학적인 것들이든, 현실적인 것들이든 만족할 수는 없다
는 말입니다. 사실 만족할 수가 없지요. 어떤 존재이든 간에 난생처음으
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쇼를 해야한다면 말이에요.
하아, 그래요. 결국 크리에이트 씨의 손에 이끌려 나는 정확히 오후 한
시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 나 홀로 서야했습니다. 크리에이트 씨는
일단 오늘은 쉬운 묘기만 하고, 또 다른 해양동물-예를 들자면, 물개라든
가, 수달이라든가, 다른 돌고래들이라든가-을 투입시킬 예정이기 때문에
그렇게 어려울 건 없다고 말했지만, 쳇, 제가 한번 직접 해 보라죠. 아무
리 어려울 게 없다지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중제비를 하고,
공을 굴리고, 농구를 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아세요? 흥, 아마 바
지를 적시며 멀리 도망가 버릴걸요?
하지만 나는 곧 그런 생각을 전면 수정시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조련사 자격으로-흥, 웃기지도 않아요. 내 조련사는 오직 컴퍼션 씨뿐이
라고요!- 함께 무대에 오른 크리에이트 씨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방긋방긋 웃으며 힘차게 나를 소개했으니까요.
"네, 안녕하셨어요? 친애하는 신사숙녀 여러분! 언제나 저희 섹션
section 동물원을 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 섹션 동물원
의 자랑이자 여러분의 귀염둥이 어빌리리의 쇼, 판타스틱 페스티벌
fantastic festival이 곧 시작되오니,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크리에이트 씨는 그렇게 말을 한 다음 마이크를 내려놓고 왼손을 쭉 뻗
어 크게 한번 흔든 후 다시 한번 생긋 웃었습니다. 객석에선 커다란 함성
과 함께 박수 소리가 쏟아 나왔고, 크리에이트 씨는 그 열광적인 반응에
고개를 살짝 숙여 답례했습니다.
그리고 크리에이트 씨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그 시선은 그대로 정
면으로 둔 채, 그러나 온 정신은 내게 집중한 채 내게 낮은 목소리로 속
삭였습니다.
"잘 봐. 그리고 잘 들어. 이게 너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
정이고, 그 함성이야. 앞으론 네 것이 될 것이고, 네 생활의 일부가 될
거야. 알겠니?"
나는 그 말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 크리에이트 씨의 옆얼굴을 바라보
았지만, 크리에이트 씨는 여전히 웃으며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에 손을 흔
들며 답례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선을 돌렸고, 그리고
내 눈에 비춰진 것은,
나를 보며 환호하는 아이들의 순진 무구한 모습, 그것이었습니다.
아아, 이 갑자기 밀어닥친 감동을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까요. 내가 한번
도 느껴보지 못한 기쁨, 환희, 그 무언가의 감정. 내가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기에 무어라 감히 이름 붙일 수 없는, 그런, 그러한.
갑자기 내 눈가에 눈물이 맺힐 것만 같았습니다. 사실 울어도 내 주위
를 감싼 것은 오로지 물밖에 없었기에 다른 누구든 알지 못했겠지만, 나
는 남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눈
가에 힘을 주어 밖으로 뜨거운 그 무언가와 함께 표출되려는 그것을 꾹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가장 가까이에 있던 크리에이트 씨도 내 감정의 급격한 변화를 알아
차렸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는, 한순간 멍한 표정, 또는 놀란 표
정을 짓더니 알 수 없는 미소를 얼굴에 띄었습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였기에 나는 눈살을 순간 찌푸렸지만, 나도 결국 크리
에이트 씨처럼 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쨌건 나는 지금 행복하니까요.
나와 한참을 마주보고 웃던 그녀는 다시 고개를 관객석으로 돌려 크게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관객석에선 요란한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지요.
"자, 쇼 타임show time!"
맥박, 혈관, 핏줄, 터져 나오려는 감동, 그리고 그 중심에 서있는 나.
내 앞에는 뜨겁게 이글거리는 불꽃 링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지금의 나
로선 그조차 보잘것없는 어느 거인에게나 어울릴 만한 커다란 반지로밖
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일이에요. 일부러 나는 저 불꽃 링을 넘
어 보이겠다고 그녀에게 졸라대었고, 그래서 얻게 된 것이니까, 내가 저
것을 무서워한다면 그것처럼 웃긴 일도 없겠지요. 예, 그래요. 나는 저것
을 멋지게 넘어 보이겠다고 그녀에게 졸라대었고-물론 눈빛으로-, 그녀
는 허락했습니다-비록 레스트릭션 씨는 심히 반대했지만(<안돼, 위험해!
실패하면 어빌리리는 끝장이야! 7호를 다시 만든대도 어빌리리는 다신 일
어설 수 없어!>, <하지만 원장님, 성공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텐데요
>,<……>)-. 그래서 저 이글거리는 불꽃을 마치 멋있는 목도리인 양 휘날
리고 있는 링을 바로 눈앞에 두고 넘을 시간만을 기다리게 된 것이지요.
자신 있냐고요? 물론 있습니다. 만용일지도 모르지만 내 가슴속에서는
저 불꽃보다 더 거세게 타오르는 그 무언가가 확실히 자리잡고 있으니까
요. 나는 그것을 놓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것을 넘게 해달라고 그녀
에게 부탁했지요. 나는 어쩌면 평생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 불꽃을 한
심하게 꺼트리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도전했지요. 그래서 나는 살아있지
요.
삑-!
갑작스레 예고도 없이 울려 퍼진 커다란 호루라기 소리가 이 넓은 홀을
잠식했습니다. 요란하게 떠들어대던 목소리들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불
타서 웅성거리는 재만을 남겼습니다. 신기한 일이지만 나는 왜인지 알아
요. 저 호루라기 소리가 내가 곧 크게 헤엄쳐 점프할 것이라는 것을 알리
는 신호탄이니까요. 그만큼 그들은 나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만
큼 나는 기쁠 것입니다.
나는 달렸습니다. 힘차게 차 오르는 물방울들, 내 몸을 감싸는 어느 온
기, 이해할 수 없어서 더욱 이름 붙이기 힘든 어느 열정. 가슴이 뛰었습
니다. 홀 안은 내 맥박소리만이 가득 차 울리는 것 같았고, 나만이 살아
숨쉬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점프했습니다.
웅성웅성.
다갈색의 긴 머리칼과 푸른 눈이 매력적인 한 여인이 쓰러진 돌고래 주
위로 몰려드는 인파를 간신히 진정시키고 있었다.
"자자, 진정해요! 어빌리리는 괜찮습니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았을 뿐
이에요. 예예, 오늘 입장료는 모두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어이, 울지 말
아요, 꼬마 아가씨! 어빌리리는 괜찮다니까! 약간의 화상만 입었을 뿐이
에요. 자자, 돌아가세요. 아, 100% 환불해 드린다니까 그러시네! 그리
알고 돌아가요, 얼른!"
바쁘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소리치던 여인은 문득 고개를 뒤쪽으로 돌
렸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그녀의 시선은 넘어진 어느 커다란 링과,
등에 화상을 입고서 링 위에 쓰러져 있는 돌고래의 모습에 머물렀다. 슬
프게 떨리던 그녀의 눈동자는 그 모습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
시 고개를 돌려 몰려드는 인파를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잠시 동안 어느 두서없는 문장을 계속하여 연상시키고
있었다.
<넌, 이제 행복할 테지…?>
EPILOGUE
<특집 -충격!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 제 4탄
…중략…
모 S 동물원에서 어린이들에게 크나큰 인기를 받았던 돌고래 어빌리리
Ability가 사실은 여섯 마리의 각각 다른 돌고래인 것으로 밝혀져 충격
을 주고 있다. 이처럼 동물원에서 키우는 동물들은 야생 동물보다 몇 배
는 수명이 짧아서 사실은 한 마리로 알려졌던 동물이 종류만 같은 다른
동물로 몇 번이나 바꿔치기 됐던 것도 이젠 흔한 일이 됐다. 그렇다면 동
물들이 야생으로 살 때보다 동물원에서 살 때 더욱 수명이 짧아진 이유
는 무엇인지 알아보자. 우선 첫째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들 수 있는
데….>
대중 잡지PROSECUTION의 1998년도 6월 자 특집 기사 中
<DOLPHIN STORY> 마침/
ps. 작년에 썼었던 단편입니다. 근데 이렇게 놓고 보니 꽤 양이 많네요.
끝까지 읽어주신 분도, 설렁설렁 읽어주신 분도 모두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