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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re my destiny
안녕 내사랑 운명아~ 이겨내고 계속 잘 간다. 오케바리?
안녕, 내사랑 운명아~
사실, 나도 사는게 불안하기도 하다. 머잖아 나도 70대로 들어가며 그 이후에도 계속 일 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이다. 마음은 한 5년 더 일해야 한다 하고 늘 준비하고 각오하지만, 세상일이 그리고 내 건강이 또한 주변 환경이 나를 잘 따라 줄지도 걱정이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가는데 까지 가 보자' 하며 살기에는 남은 시간이 그렇게 호락 호락하지가 않거든. 물론, 악착같이 건강 유지하고 주변 잘 살펴 아우르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마음 가짐이 나를 약하게 하더라.
이 나이에도 앞으로만 매진하자 하고 혼자 떠들며 나를 봐야 한다. 옆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은 내 경험과 지금의 능력으로 가지치듯 해결해 나가면서. 그래서 나는 지금도 Dogtag(군번표)를 목에 차고 다닌다. 내 군번이 아직 그렇게 약할 군번이 아니거든. 이렇게 군대 생각을 하면, 내 두 아들들에 대한 미안한 감이 든다. 야 들은 케네디언이기에 군대 안 갔거든. 그러니 내 내공을 모를수 밖에는. 말해줘도 안 듣는다. '625 전쟁 때 라면이라도먹지, 왜 굶고 지냈느냐?' 하는 생각을 가진 넘들이니 ㅎㅎㅎ.
사는 것은 현재의 상황에 잘 적응해 나가는 것이고, 과거를 아울러 바람직한 것들을 추려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나는그들의 환경에 그렇게 잘 적응해 가질 못하고 있다. 내 하는 일 외에는. 가끔 아내도 자식들 편들 때는 야속하더라. 그때 담배이다. 나는 뻐끔 담배를 핀다. 그래도 담배 값은 나간다. 아들들이 그 젊은 시절에 저거가 하고 싶은 일들을 제대로 하도록 옆에서 크게 돕지도 못한 것 같은데, 스스로들 알아서 잘 자라 주어서 늘 고맙게 생각한다. 그걸로 군대이야기는 상쇄(相殺)한 걸로 한다 ㅎㅎㅎ.
지금, 이글을 나름대로는 순서가 없지만, 틈나는 대로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 생각한 그대로 하고 있는 그대로를 써 놓는다고 하며 이 지랄을 하고 있는데, 이걸 내가 사용하는 블로그에 올릴지 말지 주저해 진다. 이런 글은 자칫 잘못 생각하면 오해 받기 십상이거든. 그렇다고 어디 보관할 곳도 필요도 없고... 해서 결국은 블로그에 올릴 것 같다.
며칠 전, 아침출근 길, 돈 벨리 팍 로드(DVP) 에서 조수석에 탄 아내와 웃으며 이야길 하는데, 앞 차 인피니티 승용차가 브레이크 등에 불이 들어 오지 않은 채 갑자기 저속하더라. 뒤 따라 오는 차를 포함한 우리는 거의 95-100km/h로 달리고 있었는데. 아마도 거리가 60m 정도 되었을 것이다. 나는 늘 정면을 보며 앞 차를 놓치지 않고 운전하기에 브레이크를 먼저 더블로 밟았다. 아내가 놀라더라. 그래도 속력이 조금 줄자 다시 더블 더블 브레이크를 밟고 속력을 줄여 충동을 막을 수 있었다. 뒤따라 오던 차가 놀라 바로 뒤에서 '끼잌' 소리를 내며 멈췄다 서서히 진행하더라. 그리고는 놀랐다고 '빵빵빵' 나는다 알았기에 놀라지 않았는데 아내와 뒷 놈이 더 놀라서 난리더라. 어쩧든 며칠 전부터 매일 아침에는이렇게 달려 출근한다. 퇴근은 그래서 내가 go train(고속전철)으로 하여 일회 차 운행을 줄였다. 앞으로도 형편이 좋으면 출근도 고 츄레인으로 하려 한다. 다행히 아직 운전을 할 수 있기에 이런 일도 경험한다. 하여튼 아내가 집에 있는 것을 알아야 안심한다. 그 할무이도 꽤 속력을 내서 달리거든. 나는 지금까지 3번 정도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탔다. 내가 어디든 운전해 다니거든.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지 혼자 시장 보러 갈 때도 더러 있다. 그럴때도 집에 돌아 온 걸 알아야 안심한다. 이곳도 크고 작은 교통 사고가 이민 초기와 달리 많이 난다. 아마도 2005년 이후 일 것이다. 그때부터 이민자들이 급속 증가하였고 승용차 등 차량이 늘어난 것이 확연하였다. 지금은 엄청 차량이 늘었다. 게다가 중동출신 인들과 중국 출신 인들과 동 유럽 출신 인들의 운전은 아주 위험하다. 양보도 거의 없고, 끼어 들기에, 어디에서나 언제나 직진하다가 유턴, 메너없는 주차에 과속까지. 특히 그들 나라 출신 여성 운전자는 절대경계하며 운전해야 한다. 나도 1년 반 전에 당해서 2천불에 수리 비용(보험처리)에 1점 벌점 받았다. 수(소송)를 했다 포기 하였다. 내가 싸우기에는 내 일이 더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교육받고 운전면허를 받았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한국 출신인들은 대체로 예의 바르고 잘 준법으로 운전하더라. 교통사고를 말하면, 매일 티비에 나오는 것만 해도 3건 이상 된다.
아! 말나온 김에 한번 더 한다. 처음 이민와서 쉐보레 6기통 말리부를 샀다. 그 차로 새벽부터 온타리오 곳 곳을 누비며 고속도로에서는 평균125km/h로 달렸다. 심지어는 몇 번인가180km/h로 달리기도 하였다. 4년 동안 약280,000km를 달렸었다. 그게 23년 전이고 40대 중반이었다. 모두 일 때문이었다. 1년 반 전을 제외 하고는 다행히도 사고나 오버 스피드 등 딱지 한번 받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차량 수도 비교적 적었고 운도 좋았다. 말리부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차량 전체 점검과 부품을 무료 교체해 준다 하여, 이곳 토론토에서 점검을 받았는데 엔진 오일 새는 것만 부품 새것으로 교체해 주고 이상 무였다. 잘 사용해주어 고맙다고 편지까지 받았다. 믿기 좀 싫을 거다. 그래도... 믿어도 된다. 지금은 죽어도 그렇게 못 한다. 차량도 많고 인터넷이 잘 활동하고 있거든. 사실, 자동차 운전은 잘 한다고 자랑해서는 안된다. 100번 잘해도 한번 실수하면 큰 일이다. 나이들어 자동차 핸들을 놓을 때까지 출발 전 5분, 도착 후 5분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자동차 없이도 살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것도 삶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안녕, 내사랑 운명아~
이제 내가 틈틈이 쓰고 있는 소설에 대하여 말하겠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나는 전업 작가가 아니다. 사는 동안 내 영혼의 단련을 위하여 쓰는 것이다.
시작은, 어느날 어느 순간 머리속에 사건이나 상황이나 혹은 가슴을 뜨겁게 하는 생형(생각속의 형체)이 떠 오를 때, 그것을 잡고 처음과 끝을 그린다. 그리고 시작한다.
제목은 끝날 때까지 여러 번 바뀔 때도 있다. 특히 주인공 이름이 항상 문제 되더라. 여러가지 예상적 상황과 혹 발생될 껄끄러운 일들에 대비하여야 하며 부르기 쉽고 내용에 어울리며 흔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더라. 그래서 나는 마침내 전혀 문제와 부딪치지 않을 내 이름으로 하였다. 만약 필요하다면, 바꾸면 되니까. 주로 판타지적 내용으로 구성하며 자료를 찾아 참고한다. 그러나 내용은 그것들과 다르다. 나는 가능한 한 새로운 생각과 시도를 하고 싶어한다.
스토리의 전개를 형식에 매이지 않게 하며 반전을 만들려고 하지만, 그것은 늘 쉽지가 않다. 특히 사투리가 그대로 쓰여지곤 한다. 굳이 고치려 하지 않는다. 이제는 책을 내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필요하다면 탈고를 하면되겠지만, 나는 한번 쓴 글을 다시 읽고 고치거나 하지 않는 타입이다. 탈고를 차분히 하면 정말 멋진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위에 말했지만 나는 전문작가가 아니다. 장편 소설책을 1권 출판하였지만, 별로 잘 읽히지 않아서 접었다. 우선 캐나다 스타일의 작은 글씨와 작은 책이 한국 시장에 먹혀 들지 않았다. 출판사 또한 소극적이었고 오타 및 기타를 첵크하지 않았다. 출판 후 몇개의 오타를 내가 발견하였다. 거리 관계로 내가 관여를 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러나 소재나 내용은 특이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반 소설가들이 쉽게 생각해 낼 수 없는 이해가 쉽지 않은 내용들이었다.
"블루웜" "영혼사랑" "65세의 반란" "인체사랑" "내일 모레" "재생지구"등. 한번은 읽어 볼만 하다 생각한다. 나의 이런 생각들이 또 다른 생각이나 상상을 부추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나이 들어 그런 것들이 부질없음을 느끼고 출판에 대한 생각은 접었다. 그 뒤 내가 조사한 바로는 세계에서 처음인 100% 대화로 이루어진 단편 소설 "슈샤이너 스토리"를 썼고 영문으로도 번역해 두었지만, 보관용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글들은 블로그에 남겨 두었다.
"사랑의 운명"은 우연하게 연결된 불가능한 사랑이 운명으로 맺어지며 그 사랑의 운명을 해피 엔딩으로 만들어 봤다. 하여튼 내 생각이 활발히 움직이는 한 계속 써 놓을 것이다. 우리 크로이도 자랄 테니까. 그 넘이 커서 하라부지 글들을 영어로 첨삭 번역하여 책으로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소설을 쓰는 것이 나에게는 삶의 하나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틈나는대로 머리를 굴려 생각을 해 내야 하니까. 어느정도 줄거리를 만들기 위하여 생각을 하여야 하고 읽는 사람을 생각해서 흥미롭게 만들려고 구상하고 또 욕 듣지 말아야 겠기에 기본적인 것들은 팩트를 찾아 놓아야 하고 쓰고 또 쓰고... 하나도 쉬운 것은 없다 나에게는 그래서 완성되면, 보람도 느끼고 만족감도 느끼게 된다. 또한 만들다 보면 또 다른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 오르면 그 이야기도 즉각 소설화 한다. 나는 너무 잘 잊어버리는 새 대가리를 가졌다. 그래서 뒤죽 박죽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쓸 때는 저 글은 잊어버리고, 저 글을 쓸 때는 즉각 이 글을 잊어 버린다. 그렇게 조심해도 헷갈릴 때가 있다. 이쪽에서 놀던 넘이 저쪽에서 딴 짓을 하곤 한다. 속으로 웃고 만다. 그러다 보면 엉뚱한 글이 만들어 지기도 하는데, 그때 놓치지 않고 더 새로운 글을 만들어 내게 되더라. 이것도 그동안 살아 온 경험으로 만들어 지더라. 그래서 내가 내공 내공 한다.
내공은 그냥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더라. 다만, 미안한 것은 일하며 쓰고 메일로 보낸 후 집에 와서 한글이 표시 안된 영어 자판을 외어 컴퓨터로 글을 정리하다 보면, 가족과 제대로 티비 보며 이야기할 틈이 저녁 먹을 시간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잘 관리하며 하나 하나 완성하고 나면 내 삶에 대한 만족과 보람과 희열을 느끼게 된다. 이런 생활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그렇게 되길 바란다. 참 좋은 내 삶.
안녕, 내사랑 운명아~
니가 아는 것 같이, 나는 통풍을 가지고 있다. 갸웃과 내 건강의 유지는, 참 애매모호하다. 그리고 이런 것은 천기누설의 한 종류일 것이라서 함부로 말하기는 참 조심스럽다.
언제 끝 날 것인가는 내가 전혀 관여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오직 내 운명의 신인 니 만이 관장한다. 그러기에 그 날이언제 오든 맞을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갸웃은 아마도 십 수년 전에 나에게 왔다. 갸웃이라는 것도 처음 병원에서 진단 받은 것이 아니고 내가 인터넷에서 유사한 증세를 찾고 비교하고 하여 스스로 확진한 후 페밀리 닥터에게 말하여 인정 받았다. 그리고 그가 프레스크립션(처방전)을 발행해 주어 사서 먹기 시작한 것이 소염 진통제이고 그리고 내가 어느 날 우연히 티비 광고로 본 타이레놀을 먹기 시작하였다.
갸웃의 증상은대부분 몸의 관절에서 통증으로 시작한다. 그러다 붓고, 바람만 스쳐도 아퍼다. 처음 이민와서(그때 아내는 한국의 사업 정리를 위하여 일주일 만에 다시 들어 갔다) 내가 좋아하는 싼 돼지고기를 볶아 먹는 것을 주로 하였다. 두 아들들은 햄버그를 자주 먹었으나 내가 해주는 돼지 볶음 반찬이나 제육볶음 등 하기 쉽고 먹기 좋은 돼지고기 요리를 매일 먹다시피 하였다. 물론 상추라든가 어니언 등 야채를 곁들였다. 그리고 나는 주로 운전하며 차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 어느 날, 발목 관절이 붓고 아프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페밀리 닥터가 준 소염 진통제를 복용하기 시작하였고. 그때만 해도 늦어도 5일 전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런 생활이 계속된 어느 날, 티비에서 관절 통증 소멸과 치유에 관여하여 효과 한다는 타이레놀 아스트릭스를 발견하고 프레스크립션 없이 살 수 있기에 바로 사서 복용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갸웃은 나이가 들면서 몸의 관절 곳 곳을 돌아 다니며 통증을 유발했다. 그리고 갸웃과의 싸움도 시작했다. 초기의 어느 날 밤, 갑자기 옆구리에 죽을 것 같은 통증이 와서 너무 놀라 입에 수건을 물고 통증을 참으며 유서를 썼다. 나는 이렇게 아픈 건 암 일 것이다 라 고 혼자 생각했다. 내 생애에서 처음 겪는 무시 무시한 통증이었다. 군에서 생다지로 포경수술 받을 때의 고통도 지독했지만, 이것은 더 했다. 나는 수건을 입에 물고 유언을 썼다. 그리고 마침내 자는 아이들을 깨웠다. 그러자 놀란 아들들이 엠브런스를 불렀고 나는 기어서 엘리베이터까지 갔다. 그때까지 시간은 아마도 2시간 정도 걸렸다. 그런데 갑자기 멀쩡하였다. 언제 아팠냐? 하듯. 그래도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엠브런스를 타고 응급실로 가서 진단을 받았다. '결석'이었다. 주사를 맞고 약 20분 후 퇴원하여 집에 와서 소변을 보는데 쌀알 반 정도 크기의 검은 돌 같은 것이 하나 빠져 나왔고 그 보다 작은 돌 같은 것이 2개 정도 빠져 나왔다. 소변과 함께 따끔하면서 불컥하며 튀어 나온 것이다. 그리고 완전 정상. 그 이후 한달에 한번 정도 이던 것이 2년 전 부터는 국물이 있는 돼지고기 요리를 먹으면, 그 주 토요일 아침이면 발병한다. 보통 내 경험으로 봐서 내 갸웃은 쉬는 날 밤새 자는 동안 준비하였다 아침에 일한다. 통증이 미약하다 점차 붓는다. 그리고 발생한다. 요즘은 거의 한달에 1번 정도 4 내지 5일 정도 발병한다. 다행히 강도는 약 30 % 정도된다. 그때는 먹는 음식량을 줄이고 아침 저녁으로 타이레놀을 한 알 먹는다. 더 심해지면, 소염 진통제 한 알을 같이 먹는다. 사라질 때는지우개로 지우는 것 같이 빨리 멀쩡해 진다. 그 상태는 감지할 수 있다. 땀을 많이 흘리면 사라지는 속도가 빨라진다. 내가 하는 일이 땀을 많이 흘리는 일이므로 갸웃과 싸우는데 유리하다. 무릅도 통증과 붓기가 함께한다. 갸웃이 돌 때는 그곳이 나으면 어느 새 어깨 관절 쪽에 느낌이 온다. 좌측관절, 우측 관절을 돌아 다니며 통증을 유발한다. 갸웃 인터넷싸이터에서 보니 심한 사람은 아주 애 먹는데 나는 그렇게 심하게 발병 하지는 않는다. 갸웃 때문에 출근하지않은 적은 거의 없다. 또한 무릎이나 발목에 발병되었을 때는 걷는 것을 특히 조심한다. 갑자기 넘어 질 수가 있거든. 먹는 것도 조심하게 된다. 체중이 오버하면 발병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갸웃과 잘 친하면 오래 살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타이레놀로 인한 부작용은 아직 모르겠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몸과 마음이 아주 좋다. 그 동안 갸웃과 친하며 오히려 잘 지내고 있다. 그 외 다른 특별한 문제는 없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풋샾(put up)을 30개, 10 kg 의자 30번 들었다 놓았다 한다. 틈나면 태권도 태극 품새를 한다. 내가 군대에서 1단을 땄거든. 무엇 보다도 그렇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안녕, 내사랑 운명아~
오늘은 -21 체감온도는 -31도 이다. 다행히 콘도에서 지하 주차장 그리고 TTC(지하철도) 그리고 바로 빌딩 지하 일터이다. 담배 피러 밖에 나가기 전 까진 추위를 크게 못 느낀다. 때로는 집 부근에서만 노는 아내가 안스러워 휴일 특히 토요일은 북쪽 호숫가로 가서 얼어붙은 호숫가 중간에서 아내는 내가 사준 1250불 짜리 캐나다 구스 빅토리아 파커를 입고 나는 며느리가 사준 1200불 짜리 그냥 캐나다 구스 파커를 입고 뛰어 놀고 노는 모습을 담배를 피며 본다.
"어이구~ 먼 나라 와서 고생도 실큰 하네" 하니 한국의 친구들 보다 몸과 마음이 재미있고 건강하게 산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ㅎㅎㅎ.
현재 문제는 둘째이다. 한 몇 년 한국에 가서 국가 정보원에 채용되어 해외 근무를 하였다. 3개 외국어를 하거든. 맨날 외국으로만 돌아 다녀 위험해서 곧 돌아 오지 않으면 아빠 엄마 못 볼 줄 알아라고 엄포 놓고 사정했더니 3년만에 돌아와 글로버 앤 메일 전국지 신문사에 근무하다가 코비드 사태로 집에서 컴퓨터로 근무하더니 그만 두었다. 그리고는사진 찍는데 취미를 붙여 지 방에는 고가의 케머러들과 장비 요란스러운 컴퓨터 등으로 꽉 차 있는 속에서 개인 촬영 회사를 차려 놀고 있다. 재 작년에 이 넘이 산 콘도는 이제 겨우 일층 올라가고 있다. 결혼이 문제다. 형은 은행에서 메니져로 잘 근무하고 있고 형수도 수석 디자이너로 잘 하고 있다. 우리 손녀 크로이도 2학년, ㅎㅎㅎ너무 잘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결혼을 미루는지 못하는지 사람을 못 만나는지 안 만나는지 안하고 있다. 그 새끼가 결혼해야 우리가 독립할 텐데... 죽기 전에 독립해야 하는데. 세계 어느 나라든 독립해서 제대로 잘 된 나라가 별로 없다. 미국 한국 등은 잘 가고 있지만... 캐나다도 형식적으로는 아직 호주 뉴질랜드 등과 같이영국의 형식적인 속국이다. 우리의 독립은 언제 일까? 같이 사니 늘 봐서 좋은데 늘 보니 저 넘 장래가 걱정이다. 아내는 그래도 새끼를 너무 싸고 돈다. 애비가 자식한데 말을 못한다. 했다 간, 아직 결혼 안 한 애 한데 너무 한다고 난리친다. 저 형하고 같은 183cm 정도에 72kg (형은 85kg) 정도나 되는 넘 이지만 거의 70이 되어 가는 애비가 말도 못하나? ㅎㅎㅎ 그래도 저 아내하고 저 새끼 때문에 라도 (아니다. 우리 크로이도 있다) 내가 일 하면서 오래 살아야 된다.
햐~ 일찍 세상 떠나신 부모님들은 내 힘듦을 짐작이나 할까? 곧 구정이 오는데 이번에도 못 오실 거다. 여권도 없고 영어도 안되거든. 매번 영어 주소를 불살라 보내는데도... 아마도 여권 받기가 어려운가 보다. 내 내공이면 왠만한 건 해결하는데, 저 나라 하고는소통이 안된다. 그래서 이 제사들도 내 대에 끝이다. 크로이가 손녀 거든. 이 곳서 살아보니 부질없더라. 나는 나를 화장해라 말했다. 과거에 부담 가지지 말고 잘 살고 때 되면 기억만 해라. 오케바리!.
안녕, 내사랑 운명아~
오늘은 금요일이다. 병원에서 폐기능 체크한다 해서 하루 쉬었다. 밖에는 눈이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답게 쏟아진다. 온타리오는 이제 코비드 확진자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갔다. 그리고 아직 다운타운의 식당들은 60% 정도 영업을 하고 있다. 코비드 후유증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아직 코비드-19와 오미크론 그리고 델타 바이러스의 막판 단계로(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추위와 함께 다운타운은 꽁꽁 얼어 붙었다.
오늘은 충전을 많이 한다. 내일은 소녀가 올 것이기에.
안녕, 내사랑 운명아~ 다음 주에는 뭔가 달라져서 나에게 새로운 힘 좀 다오. 오케바리? 끝.
첫댓글 글이 너무 길어서 포커스를 맞추어 읽기 힘드니 잘라서 올려주면 좋겠어요.(저만 그런가요?)
외국 생활을 동경하기에 제임스안님의 글이 흥미있어요.
거기에 출판까지했다니 게시글이 기대가됩니다.
사명 선생님,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개인적 생각으로는 경제적 시간적 그리고 건강이 된다면,
스위스나 프랑스 시골 동네 혹은 스페인 바닷가 동네 혹은 캐나다 헬리펙스 혹은 일본 삿뽀로 혹은 싱가롤 혹은
호주 시드니 등 복잡하거나 위험한 곳이 아니면서 살아있음을 재 발견할 수 있는 장소에서 삶을 느끼고
돌아 오심도 좋습니다. 여행은 떠난 곳을 다시 돌아오는 것이니까 그런 여행도 삶 중에 좋다 생각합니다.
제 생활의 일부지만, 아.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읽으시길 바라고 있지요.저도 제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지금 이때에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거든요 ㅎㅎㅎ. 다른 의미는 없어요.
늘 건강하시고 멋진 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제임스안 언급하신 곳은 거의 다녀왔구요.
작년에는 몽골과 이집트에 다녀왔습니다.
조카가 사는 뉴질랜드와 호주는 다녀올 생각입니다.
올 6월초에는 아이슬란드에 가서 오로라 보고 스탑오버로
영국 일주일쯤 구경 하려고 합니다.
살아보니 별거 없지요
그러나 인생은 살아야 하는가
봅니다
글 잘 보고 갑니다.
차마두님, 감사합니다. 생사는 쉽게 말할 수가 없다 생각 듭니다. 자칫 천기누설이 될데니까.
다만, 사는 동안 지금같이 혼신을 다해 열심히 살기를 바랍니다.
색 다른 창조력에 놀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관심으로 재미있게 잘 읽고 보고 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날들 되십시오~.
나이들어 일자리를 찾을려면
"눈높이"를 팍 낮추는게 중요 합니다.높은 직책에 일하던분이 하위직 일을 할려면 용기가 필요 하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어진 상황에 제대로 잘 적응할 수 있게 미리 미리 준비해 두는 것도 중요하지요.
제 생각들이 지금 노년들의 한국 내 상황과 같을 수는 없을 겁니다. 용기. 환경과 조건에 잘 적응하며 순화해
나아 갈 수 있어야 겠지요. 늘 건강하시고 재미난 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저역시 넘길어서 ᆢ 연재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디ㅡ
김민정 선생님의 말씀에 감사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정신없이 쓰다 보니 길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친구님 출판까지 하셨군요
글 쓰시는 솜씨가 예사롭진 않더군요.
작가로서 소질 충분히 갖추고 계십니다.
이국땅에서 가족들이
노력한 만큼 부족함 없이
다들 잘 사시는 모습
보기좋습니다.
항상 건강이 최우선
건강 부자되세요.
함께 해 주신 청담골 친구님, 감사합니다. 왜 힘들고 어려운 날들이 없었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이겨 나아가려면
사는데 효과적인 무엇이 있어야 겠다 생각하고 통 털어 생각해 낸 것이 소설 쓰기 이었습니다. 저는 대학 제적을 당하기 전까지는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문학과는 거리가 멀었지요. 사업을 오래 하다 보니 실용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됩디다..그래서 쓰는 글이
문학이 아니고 공상과학, 판타지, 법정스토리, 탐정.추리, 추적, 소설이었는데 몇 년 전부터 중년 남녀의 사랑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중.노년들의 삶에 뭔가 힘이되는 보탬을 하고 싶어서 입니다. 제가 23년 동안 한국에 가 보질 못해서 온통 상상적인 소설이 되고 있습니다. 참고해 주시길...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날들 되십시요~ ㅎㅎㅎ 답 글도 길어지는군요~
일전 기고글에선 옆에 젊은 여성들이 많던데
이 글에 등장하시는 할무이는 누구신지?
혹 다처제는 아니죠?ㅎㅎ
함께 해 주신 유무이 님,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멋진 날들 되십시오~
유무이님
그건 다른분인 쟈니존님이십니다.
@사명 앗 이런 실수를 ~~
허나 이미 뿌려진 물이라~ㅎㅎ
예스 오케이~~^^끝 ㅎ
ㅎㅎㅎ Okay buddy! That's it. (오케이 친구들아. 끝.)입니다.
대화를 마무리할 때, 부드럽게 그렇게 말합니다. You got it? (요거는 대부분 오해를 안 하는데...
알았제? 하는 의미입니다).
함께 해 주신 신디 님에게 감사하며, 주 말 건강하고 즐겁게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