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자행될 때 흑인 남성 수십명의 사체에 총을 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남성이 22일(현지시간) 영국 BBC에 당시 경찰이 사주한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루이스 반 스쿠르는 경호업체 직원으로서 자신이 수행한 살인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들이 나눠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4년 넘게 BBC 아프리카 아이(Africa Eye)와 얘기를 나눠 온 그는 자신이 감옥에서 일찍 풀려난 이유에 대해 진지한 의문점들을 풀어놓기도 했다.
BBC 월드 서비스는 이른바 '아파르트헤이트 킬러'로 통하는 그의 침대 곁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그가 살아가는 환경은 한눈에 봐도 끔찍하고 암담했다. 그는 치아들이 빠져 있었다. 건강은 형편없이 나쁘다. 심장마비를 일으킨 뒤 그의 두 다리는 최근 절단돼 그는 휠체어에 앉아 지낸다. 두 다리에는 고통스런 상처들이 가득했다. 의사가 절단 수술을 진행할 때 반 스쿠르는 일반 마취제 대신 경막외 주사를 놓게 해 그는 다리를 자르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괴물이 아니란 점을” 우리에게 납득시키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1980년대 3년 넘게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시스템은 백인 남아공인을 맨꼭대기에 앉히는 엄격한 위계질서를 밀어붙였고, 반 스쿠르는 적어도 39명의 흑인에 총질을 하거나 살해했다. 가장 젊은 피해자가 고작 열두 살이었다. 강풍이 몰아치는 것으로 유명한 이스턴 케이프 지역의 도시 이스트 런던에서 자행된 일이었다.
반 스쿠르는 경비요원으로 70%가 백인 소유인 식당, 점포, 공장과 학교를 지키는 임무로 고용됐다. 그는 자신이 살해한 모두는 이들 건물에 불법 침입해 붙잡은 범죄자들이었다고 오랫동안 주장했다. 반 스쿠르 사건을 20년 동안 추적해 온 남아공 기자 겸 영화감독 이사 제이콥슨은 "그는 잔인무도한 살인자였다. 그는 더티 하리 캐릭터였다”면서 "이들 침입자들은 많은 경우 먹을 것이 절실했던 이들이었을 뿐이다. 먹거리를 훔치려는 가련한 범죄자들이었다"고 말했다.
하룻밤에 여러 건도 자행되기 마련이었던 그의 살인은 이스트 런던의 흑인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한밤중 사람들을 사라지게 하는 수염 기른 남자 얘기는 온 도시로 퍼져나갔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총격이 비밀리에 수행된 것도 아니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그는 자신이 살해한 모든 사건을 모두 스스로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1990년 넬슨 만델라가 교도소에서 풀려나면서 그에 대한 면책은 끝났다는 신호가 켜졌다. 변화의 바람이 남아공을 휩쓸었다. 활동가들과 기자들이 압력을 가해 반 스쿠르는 이듬해 체포됐다.
그의 재판은 남아공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살인 재판 가운데 하나였다. 목격자가 수십명에 포렌식 증거 문서만 수천쪽이었다. 하지만 그를 기소한 사건 대부분은 법원에서 무너졌다. 그의 재판 시기에도 아파르트헤이트 시스템은 사법부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적어도 39명을 살해했는데도 그는 단 7건의 살인으로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징역 12년만 복역하면 풀려날 것으로 전망됐다.
다른 32건의 살인은 경찰에 의해 “정당한 살해”로 분류됐다.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법률은 침입자가 체포에 반항하거나 달아나면 치명적인 완력을 써도 된다고 인정했다. 반 스쿠르는 달아나려는 범죄자들을 응징했다고 계속 주장해 재판부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BBC 탐사보도팀은 반 스쿠르의 "정당한" 총격을 입증한 증거들을 샅샅이 살폈다. 제이콥슨은 반 스쿠르의 총격에도 다쳐서 살아남은 이들의 진술서를 찾아냈다. 이들의 진술은 달아나려 해서 총질을 했다는 반 스쿠르의 주장과 엇갈렸다. 상당수는 항복한 뒤 손이 묶인 상태에서 총을 맞았다. 가슴에 총탄을 맞기 전 그가 장난치듯 체포당할래, 아니면 총 맞을래 묻기도 했다고 했다. 복부에 총탄을 맞은 이는 물을 달라고 애원했는데 반 스쿠르가 아픈 곳을 발로 찼다고 했다.
반 스쿠르는 9mm 반자동 권총으로 무장했는데 공갈탄들을 장전해 놓고 있었다. 피해자 몸 안에 들어가면서 내부 장기들을 파열시킨다. 그는 비무장 상태의 남성에게 무려 여덟 발을 쏜 적도 있다.
1988년 7월 11일 반 스쿠르는 먹을거리를 찾아 식당에 침입한 열네 살 소년에게 총격을 가했다. 사생활을 존중해 BBC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소년은 화장실에 숨었을 때 반 스쿠르가 총을 찬 채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는 나오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벽 옆에 서라고 한 뒤 계속 총질을 했다. "그는 똑바로 서 있으라 얘기했는데 난 그럴 수 없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녹음돼 있다. “내가 거기 누워 있자 그는 내 입 쪽을 발로 뻥 찼다. 그는 날 일으켜 세우더니 테이블에 밀어붙이고 다시 내게 총을 쐈다.”
소년은 살아 남았지만 건물 불법침입 혐의로 기소됐다. 반 스쿠르의 공격을 받고 총질을 받은 젊은 흑인 남성과 소년들 가운데 많은 수가 비슷한 운명이었다. 반 스쿠르의 재판 도중 이런 진술들을 청취했지만, 판사는 계속해 이런 증언들이 “정교하지 못하고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남아공에는 대배심 제도도 없다. 판사의 의견이 절대적이다.
반 스쿠르가 재판 받던 시기, 이스트 런던의 백인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은 그를 지원했다. 한 사업가는 그의 사진들을 범퍼 스티커로 프린트했다. 그가 총상을 입은 것처럼 총알 구멍이 가득한 가슴을 그리고 그 옆에 “난 루이스를 사랑해” 라고 적은 것이었다.
남아공에는 살인이나 살인 미수 범죄에 공소시효가 없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경찰이 반 스쿠르 사건을 재조사하거나 그의 "정당한" 총격 사건을 재평가하는 일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의 연쇄 살인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데 도움을 준 도미닉 존스 기자는 “루이스 반 스쿠르는 기본적으로 정신 나간 인간이고 사냥하듯 사람들을 살해했다"고 끔찍해 했다. 이번에 반 스쿠르와 인터뷰하며 BBC 탐사보도팀이 가장 충격을 받은 일은 그가 자신의 행동들에 대해 스릴을 느꼈다고 털어놓은 점이었다. 그는 BBC에 "만약 그런 식으로 하고 싶어한다면 모든 밤이 새로운 모험”이라고 말했다.
그가 경비하던 사업체들의 많은 수는 소리가 안 나는 알람을 설치했다. 누군가 침입하면 반 스쿠르는 침입자들이 건물 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어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었다. 그는 늘 혼자 갔다. “난 맨발이었다. 조용했다. 신발을 신어 타일 같은 것에 끌리는 소리를 낼 필요도 없다.”
그는 전등을 켜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냄새에 의지했다. "누군가 잠입하면, 아드레날린이 냄새를 사방에 퍼뜨린다. 그러면 킁킁거리면 된다.”
반 스쿠르는 “흑인들을 살해할 의도는” 없었으며 인종차별주의자도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어둠 속에서 그들을 쫓으면서 “흥분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경비요원이 되기 전에 그는 이스트 런던 경찰로 12년을 일했다. 그는 거의 모두가 흑인인 시위꾼과 범죄자들을 추적하고 붙잡는데 사용했던 이른바 "공격견들”을 다룰 줄 알았다. 그는 이를 "사냥, 다만 다른 종들을"이라고 빗댔다.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활동가로 반 스쿠르가 살인을 저지르던 시기에 이스트 런던에서 일한 테티네네 조 조던은 이 일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사냥을, 글자 그대로 사람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반 스쿠르는 “연쇄 살인범”이란 사실을 강력히 부인했으며 자신이 한 모든 일은 “법의 테두리 안”이었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살인에 분노를 느낀다면, 남아공 경찰을 탓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 경찰은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지도, 경고하지도 않았다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격려했다고 했다.
“이스트 런던의 모든 경관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모든 경관이 알았다. 한 번도 누구라도 '이봐 루이스, 경계선에 있는 거야, 냉정해져야지 어쩌구' 했어야 했다. 그들 모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제이콥슨은 공공 문서저장소에서 경찰 기록을 찾아 반 스쿠르의 총격 때 경찰이 현장에 있었던 사건들 기록을 발견했다. 경찰이 반 스쿠르를 용의자로 보고 조사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많은 경우 경찰은 살해된 이들의 사진조차 제대로 찍지 않았고, 탄창과 같은 포렌식 증거도 제대로 수거하지 않았다. 반 스쿠르 자신이 유일한 목격자인 경우가 종종 있어서 이런 증거들이 있었다면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었는데 그랬다. 시신들이 누워 있는 옆에서 경찰과 반 스쿠르는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우며 수다를 떨었다. 제이콥슨은 "반 스쿠르는 그가 되도록 사회가 허용했기 때문에 연쇄 살인범이었다"고 갈파했다..
희생자들의 친척들에게 반 스쿠르가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국가가 그의 살인을 제대로 수사하지도 않는 일은 늘상 있는 고통의 원천이었다. 몇몇은 사랑하는 이의 시신조차 돌려받지 않았다.
1987년 반 스쿠르에게 삻된 에드워드의 형제인 마를렌 음범비는 “가슴 아프고 화난 단계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에드워드의 시신은 가족 동의도 구하지 않고 당국에 의해 무연고 묘역에 버려졌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실종 상태이며 심지어 묘지에도 없다. 해서 종결되지 않는다.”
반 스쿠르 사건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범죄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제공한 1995년 진실과 화해 위원회 활동 때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남아공 당국이 반 스쿠르를 기소하도록 압력을 넣는 데 앞장섰던 활동가 출신 샤를렌 크라게(Sharlene Crage)는 그가 지금도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허용하는 데 격분했다. "이것은 충격적인 정의의 유산(miscarriage)이다. 그의 사건이 재심리되지 말아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반 스쿠르는 1992년 재판이 끝났을 때 징역 90년 이상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판사는 각각의 형기를 끊어 복역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는 2004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살인범들을 조기 석방하는 일은 남아공에서 늘상 있는 이슈다.
2022년 요하네스버그에서 Janusz Walus 가석방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는데 그는 아파르트헤이트에 격렬하게 반대한 정치인 크리스 하니를 살해한 인물이었다. 그 몇 년 전에는 수십명의 흑인 활동가들을 납치하고 고문하며 살해한 죽음의 처형대를 지휘한 유진 드 콕이 풀려났다.
요즈음 반 스쿠르는 럭비 중계와 흡연, 반려견 로트와일러 브루투스와 놀며 시간을 보낸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이 얼마나 많은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털어놓는다. 몇몇 보도는 검증 없이 그가 100명은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반 스쿠르는 부인하면서도 기록된 39명보다 많다는 점은 순순히 시인했다.
과거 행동이 자랑스럽다고 어처구니없는 얘기도 늘어놓았다.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속으로 어떤 뉘우침도 없다.”
BBC는 남아공 경찰과 접촉, 코멘트를 요청했으나 어떤 반응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당국은 왜 반 스쿠르 살인 사건이 포스트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도 재평가되지 않았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마를렌 음범비는 "너무 많은 고통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치유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조치가 이뤄졌다고 느끼지 않는다"면서 “반 스쿠르에게 살해된 이들만이 아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살해된 비슷한 얘기를 지닌 이들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