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쓰다보니 글이 *또* 길어졌습니다. 만화만 보고 글은 안 읽어도 됩니다.
* 남의 글을 제대로 읽어주기가 힘들다는 것을 저도 알거든요. ^^
* 하여간 행복하세요. (제가 생각하는 행복의 참뜻이 이 글의 결론으로
* 주어져 있지요.)
- spike
스누피 도사님의 철학: Whimper, but don't complain!
1. 비에 대해서 불평하지 마. 비는 필요한 거야.
2. 비가 없이는 아무 것도 자랄 수 없고 우리가 마실 것도 전혀 없을 거야.
3. 그러니 결코 비에 대해서 불평하지마.
4. 우는소리는 해. 하지만 불평하지는 마.
1. 내가 좋아하는 것
난 하늘에서 오는 것들을 좋아해요. 모두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비와 눈과 바람과 심지어 번개까지 좋아해요. '번개'를 언급하고 나니 미국
유학 시절, 머리는 더부룩하고, 실험 때문에 밤낮이 바뀌어 누렇게 뜬
얼굴에,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그저 앞으로만 달려가던 젊은
시절의 어느 하루가 생각나네요. 그 광경의 그림에는 지금은 떨어져 있는
아들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만 세 살쯤이었지요. 그 즈음의 정말
험한 삶의 국면에서 생존 문제에 허덕여서 사랑을 다 부어주지 못한 듯한
느낌을 갖고 살지요. 그 남은 애정이 아직도 내 가슴에 고여 있어요. 평생을
따라내도 채 따라낼 수 없을 것 같군요. 아마 그것이 지금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일이기 때문이겠지요. 내가 있던 클리블랜드는 가끔 몹시 일기
변화가 심했어요. 아마 금요일 오후나 토요일 오후였던 것 같네요. 한번은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하는데, 하늘이 그렇게
쩡-쩡- 울릴 수가 없었어요. 영욕(榮辱)의 티끌 하나 없는 하늘의
소리였지요. 난 그처럼 위대한 맑고 깨끗한 인공의 음악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과 '에그몬트 서곡'을 같이 연주하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야외연주회의 청량한 한 여름 날 밤에
내용적으로는 그 비슷한, 물론 규모는 수천 배로 축소되어 있었지만, 경험을
했다고 생각해요. 난 번개의 번쩍거림과 천둥소리가 가까이 있음을 느끼고
아이 손을 잡고 현관 밖으로 뛰어나갔어요. 난 학교 안의 2층 짜리 개인
주택 1층에서 살았는데 집 앞에 작은 도로가 나있고 넓은 주차장이
있었지요. 그 뒤 언덕 위로 학부생 기숙사 건물들이 있었는데 그것들 위로
곧 내리칠 듯 낮게 번개가 연이어 하늘을 갈랐지요. 번개가 친 후에 거의
동시에 천둥소리가 났어요. 비 또한 무섭게 검은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었지요. "Isn't it great?" 아이에게 말했지요. 아이는 무서워하는 것
같았어요. "There's nothing to be afraid of." 넋을 놓고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어요. 여름이라 반바지에 반팔을 입고 있었는데 내리는 비로 인해
냉기가 느껴져 왔지요. 아무래도 아이는 무서워하고 있음에 틀림없었어요.
어쩌면 아이는 다니고 있던 day care center에서 나름대로 힘들었을 거고
무엇보다도 언어 때문에 주눅이 들어 있었을 거예요. "Let's go in, daddy."
그 애는 영어를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고 어떻게든 빨리 적응을 시키고 싶은
안타까움에 나도 아이에게 영어를 쓰고 있었어요.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들어왔지요. 그렇게 그 어느 날의 광경은 주위는 어둡고 아이와 내가 손을
잡고 있는 주변만 가로등 아래처럼 밝은 한 폭의 유화(油畵) 그림처럼 내
머릿속에 또렷이 인각(印刻)되어 있네요.
2. 하늘에서 오는 것
얼마 전 태풍이 큰 게 두 개가 왔었지요. 처음 태풍이 오기 시작했을 때 난
인터넷 게시판에 바람을 좋아한다고 썼었어요. 그런데 며칠 후에 뉴스에서
보니 태풍 때문에 큰 피해가 있었더군요. 그래서 내가 '좋아한다'라고 한
말이 무슨 의미일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었거나
주고 있거나 줄 수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 정상인 것일까... 내가
너무나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위 '부르조아적'인
사고방식은 아닐까. 세상의 아픔을 향한 진정한 애정을 갖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그 피해가 나에게 일어나는 것이라면 어떨까... 그저 안락하고
따스한 안전지대에서 어지러운 밖을 내다보며 값싼 심미감(審美感)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돌부리에 넘어지는 철학'을 떠올렸어요. 순간 아 이런 거구나,
이렇게 사는 것이 정답이구나, 라고 깨달아서 철학이나 진리를 가슴에 가득
품고 기쁜 마음으로 가다가 길거리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요. 그러면 언제
무슨 생각을 가졌었는지도 망각하고 욕을 하며 저주를 하지요. 돌부리를,
그리고 세상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철학이나 진리뿐이 아니지요.
박애와 희생과 견딤, 희망, 하염없이 지켜주는 마음, 끊임없는 손짓, 순간
느껴온 사랑, 그런 것들도 모두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요.
3. 스누피의 교훈
위의 피너츠 만화는 아주 놀라운 만화라고 생각해요.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 간명하게, 나름대로의 대답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비가 오고
있어요. 우드스탁이 비에 대해 불평을 한 것 같네요. 스누피는 우드스탁에게
점잖은 태도로 비를, 비의 존재 의의를 받아들여야함을 역설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여기까지는 좋아요. 비가 큰 문제 없을 정도로 오고 있으니까요.
조금 생각만 고쳐먹으면 너그럽게, 조금 곤란을 주는 어떤 상황을, 나에게
약간 실수를 했거나 작은 손해를 끼친 상대방을, 나에게 조금 불리한 것
같지만 아직도 희망적인 세상을 용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지요.
하지만 스누피의 비에 대한 태도가 진짜로 드러나는 것은, 그리고 그
철학과 깨달음과 세상을 향한 우정의 마음이 진정 견고한지를 알 수 있는
것은 비가 많이 왔을 때이지요. 여기서 '스누피 도사님'의 진정한 가르침이
주어져요:
"우는소리는 해. 하지만 불평하지는 마."
영어 'whimper'는 원뜻은 강아지가 흔히 그러하듯 낑낑대는 소리를 낸다,
훌쩍 훌쩍 우는소리를 낸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불평하는 소리를 내다,
투덜대다' 등의 뜻이 연상되어서 나왔지요. 하지만 여기서는 불평을 담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저 우는소리를 내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스누피의 이
말은 명백합니다. 즉 작은 반응은 보이더라도 커다란 원칙은 최선을 다해서
지켜야 한다는 말이지요.
4. 나의 분량만큼...
우리에게 가야할 길이 주어졌을 때, 투덜대기는 하더라도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이겠지요. 뜻이 주어졌을 때 어찌되었건 그 뜻을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겠지요. 모진 풍랑에 이리 저리 흔들리고
부딪치더라도 결국 거룩한 소망의 피안(彼岸)으로 우리 삶의 배를
저어가야만 하는 것이겠지요. 내가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주는 충고는 이렇습니다. "결정은 쉽게 하고 그 결정을
고통스럽게 따르라"고요. 여기서 말하는 쉬운 결정, 그것은 결코 가볍게,
충동적으로, 생각 없이 내리는 결정이 아닙니다. 진정 가야할 바를
가늠하며,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 핑계를 대기 전에 무엇이 진정 올바른
길인지, 진정 더 큰 것, 더 아름다운 것, 더 높은 것을 향한 나아감인지를
가늠하라는 말이지요. 그런 커다란 결정은 의외로 쉽게 내려야 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인들은 신 앞에 자복(自伏; 스스로 엎드려 굴복함)해서 신의
인도하심을 기다리지요. 스스로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신에 대해서 빈
마음이 될 때 그 결정은 어느 순간 빛으로 빠르게 우리 가슴에 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결정은 결코 쉽게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가시밭길의 길임을 알면서도, 진정 자신의 생명이나 커다란 아픔이나
희생을 요구하는 길임을 알면서도 일어서 나가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면
세상은 최소한 내가 부어넣는 분량만큼 더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채워지게
되겠지요.
5. 욥
성경의 욥의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욥은 '순전(純全)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지요. 축복을 받아 자녀와 재산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에게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자녀가 모두 순식간에
죽어버리고 모든 재산이 없어졌지요. 그래도 그는 신을 원망치 않았지요.
주신 자도 거두시는 자도 신이시기에 오히려 찬양을 했습니다. 그래도 제
몸이 성하니까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르는데, 이번에는 온 몸에 말할 수
없이 심한 병에 걸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남아있던 아내가 외쳤지요.
'당신이 그래도 순전을 굳게 지키느냐, 차라리 신을 욕하고 죽어버려라!'
고요. 하지만 욥은 굳건했습니다. '참 어리석도다, 신이 복을 주었으니
재앙을 주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며 아내를 나무랐습니다.
결국 욥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기술(記述)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In all this, Job did not sin in what he said.)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함... 참으로 깊은 뜻이 있는 말입니다. 그는 결국
스누피처럼 비에 대해 불평은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욥이 낑낑
우는소리(whimper)를 하지 않은 것이 절대 아닙니다. 실은 무척 많이
했지요. ^^; 그는 심지어 자신이 태어난 것까지 저주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우는소리'가 향해지는 방향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향하게 했지 신에게 향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곧 그는 결코 신을
향해서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6. 사랑과 행복
제가 '하늘에서 오는 것들을 좋아한다'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 비추어 보면
조금은, 상황논리에서 벗어난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자연에
대한 경이와 사랑은 결코 무가치한 지적인 유희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더 큰 가치가 그 안에 있는 것이겠지요. 또한 이 글을 통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철학이 획득될 수 있음이 암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저에게 또 하나의 사연이 거센 바람처럼 왔다가 지나갔습니다.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지요. 그러면서 다시금 스누피의 교훈이 사람을
향한 마음가짐에 적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깊이 느꼈습니다.
사랑을 느끼는 그 순간에 이미 사랑의 모습은 완성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후에는 그 참 모습을 찾아내는 일, 그것을 서로의 삶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형상화시켜 영원한 조각품(彫刻品)으로 만들어내는 일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완성의 모습을 향해 나아감에 있어서 불평이나
의심을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서 제거하는 굳은 의지 작용이 있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때때로 '우는소리'는 있을 수 있겠지만요. 아니, 우리의 복잡한
일상을 생각하면, 있는 것이 당연하겠지만요. 그래서 그 모든 시간의 시험을
거친 후에도 여전히 서로를 향해 처음의 마음을 지녀 영롱한 진주(珍珠)의
사랑으로 배태(胚胎)시킨 두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저는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를 자주 합니다. 이제 그 의미를 밝힐 수가
있겠군요.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에 대한 저의 오늘의 인사이기도 합니다.
행복하세요. 행복이란 마음의 끝을 좇아 고통스럽게 나아가는
방향성을 의미하지요.
- 이상, 세상이 더 많은 사랑으로 넘치기를 바라는 spike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