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장 13 - 17절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속에는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에 이어서 레위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레위는 예수님의 제자 중 마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곳은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인데 갈릴리 호수 북서편에 위치한 동네로써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어업세, 통관세, 통행세를 받았을 정도로 세리의 업무가 바빴던 곳이고 그만큼 비리가 많았던 곳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의 이름은 레위였는데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따르면서 마태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위는 “친한 자”라는 의미인데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로 부르신 것처럼 레위도 마태라고 부르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따르게 된 마태가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불렀는데 그들이 바로 세관에서 일을 하던 세리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세리는 도둑들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표적인 죄인 그룹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과 함께 앉아서 교제를 하셨기 때문에 바리새인 출신의 서기관들의 눈에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리는 인간 취급을 안 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가까이 한다는 것 자체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예수님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이렇게 질문을 했던 것이고 이 질문은 들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예수님께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봤던 것처럼 중풍 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도 보면 예수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으면서 살게 되냐면 바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의사를 가까이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는 “쓸데없다”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고 상관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겠습니까? 병든 사람입니다. 병든 사람은 죽자 살자 의사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찾겠습니까?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쓸데없습니다. 가까이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의인이 왜 예수님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죽자 살자 찾는 사람은 죄인들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 사함을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욕을 먹고 또 수많은 핀잔을 들어가면서까지 죄인들의 친구가 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죄인들만이 예수님을 자주 찾고 적극적으로 찾을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예수님을 자주 찾고 적극적으로 찾는 사람들은 바로 죄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람, 선하게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조금 더 가까운 사이가 되려면 우리의 죄성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절대 예수님께서 우리의 친구로 다가오실 수가 없습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가 예수님을 친구로 생각하며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똑같이 믿는데도 어떤 사람은 미지근하게 믿는 것 같고, 또 어떤 사람은 죽자 살자 믿는 것도 바로 이런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마태는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초청해서 예수님과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만난 분이 어떤 분이시고 그 분이 무엇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심을 알기 때문에 마태는 다른 사람보다 빨리 접근할 수 있고 쉽게 초청할 수 있는 주변의 사람들부터 초청을 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유도를 했던 것입니다. 이 원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할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생이 누구를 교회로 초청하기 쉽겠습니까? 학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전도하기 쉬운 대상은 여자라고 할 수 있고, 자신과 직업이 비슷한 사람이나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이 쉬운 것처럼 마태도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자신과 상황이 비슷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보다 더 극적으로 전달할 수 있고 보다 더 감동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레위가 사용했던 이 방법이 지금 이 시대에도 가장 좋은 전도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을 현재는 관계 전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다 보면 주변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도의 동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살아야 하지만 전도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서도 그냥 내버려 두고 바라만 보는 인간답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의도적으로라도 관계를 형성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온갖 죄인들이 다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어느 누구와도 죄에 대한 동질감을 가지고 교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의 죄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전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까지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데 그런 예수님을 먼저 믿은 우리들이 이 귀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만다면 우리는 직무 유기이고, 직무 태만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죄 성을 오늘도 확실하게 깨닫고 인정하고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오늘도 예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오늘도 마태처럼 복음의 통로가 되어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죄 사함을 받았다면 오늘도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과 더욱 교제할 수 있는 하루가 되어야 하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여전히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초청해서 함께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구원의 통로가 되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님들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