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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51편)*
* 조선의 애달픈 파병 역사 나선정벌 *
제1차 나선정벌(羅禪征伐, 1654)
나선(羅禪)은 러시아(Russia)를 지칭하는 말이다.
1580년대 코사크의 기병이 시베리아로 진출하고,
1630년대에는 우랄산맥을 넘어 태평양 연안으로 진출,
1650년대는 만주 흑룡강(黑龍江) 일대를 진출하는 등
17세기에 들어 러시아의 남진 정책은 본격화되어 갔다.
이에 근거지인 만주 땅을 간과할수 없었던 청(淸)과 러시아 사이에 국경분쟁이 발생했다.
즉 러시아인들이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흑룡강 (黑龍江)
일대에 진출하여 성을 쌓고 곡물과 광물자원 등을 획득하기 위한 경제활동을 전개하자 청과 갈등이 생긴 것이다
1650년 러시아 장군 하바로프가 탐험대를 이끌고 흑룡강 에 도달하여 연안의 지형과 특산물을 조사하고,
다음 해에 흑룡강 상류에 알바진 성을 쌓았다
2년 후 하바로프는 남동쪽 으로 내려와 만주쪽 입구인 지금의 하바로프스크에 아찬스크성을 쌓았다
야금야금 영토를 확장해 나가던 러시아는 서쪽으로 더 진출했으며,
이 지역 부족들은 러시아인에게 모피를 빼앗기는 바람에 청(淸)에 더 이상 조공을 바칠 수 없게 되었다.
러시아의 서진에 위협을 느낀 청(淸)은 러시아군을 몰아내기 위해 2,000명의 원정대를 파견했으나 패하고 말았다.
러시아제 장총이 청군의 총보다 훨씬 성능이 좋아 청군은 러시아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청의 섭정 도르곤은 명나라를 공격할 때 봐두었던 조선 조총수의 우수성을 상기하여 조선에 100명의 조총수 파견을 요청했다
효종(孝宗)은 청의 실력을 알기 위해서 파병을 흔쾌히 승락하고, 함경도의 북방영우후 변급을 지휘관으로 삼고, 조총수 100명과 고수 등 보조군사 50명을 합해 총 150여 명을 청에 파병했다.
조선군은 쑹화강 부근에서 청군과 연합하여 러시아군과 1주일쯤 접전을 하여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러시아에 비해 수적으로는 우세하나 화력면에서 열세했던 조청 연합군은 변급장군의 부대가 유붕
(柳棚, 버드나무로 만든 방패)
을 활용해 사격하는 방안을 선택하자
생전 처음 보는 전술에 당황한 러시아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낸 뒤 후퇴했다
전쟁의 판도를 바꿔놓은 조선군은 단 한명의 사상자도 없이 84일만에 무사 귀환을 했다
이 전투가 제1 나선정벌(羅禪征伐)이다.
우리 조선의 군대는 유럽에선 머스킷 조선에서는 화승총 이라는 불리는 조총을 사용했는데,
이 화승총은 재장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최고의 사수도 분당 3~4발이 한계였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발사 후 연기때문에 조준이 어려운 상태였다
그래서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군은 전열 보병들로 화망(火網, 사격의 범위)을 구성하려했지만
100여명으로 화망(火網)을 구성하기 에는 군사의 수가 터무니 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조선군을 보기만 하면 벌벌 떨었다.
그 이유는 무엇 이었을까.
바로 화망(火網) 없이도 적군을 제압할 수 있는 조선군의 조총 명중률이었다
사격 훈련에서 조선군은 200명 중 123명이 명중했는데, 청나라군 100명 중에는 명중한 이가 몇 사람 없었다고 한다.
제2차 나선정벌(羅禪征伐, 1658)
1658년 5월, 1차 정벌 이후
청(淸) 나라는 러시아에 대해 패전이 거듭되자 대대적인 원정대를 파견하여 스테파노프가 지휘하는 러시아의 군사를 완전히 몰아낼 작정으로 재차 조선 조총수의 파병을 요청했다.
단 조선군에 대한 군수 지원은 거부해서 2차 나선정벌 당시 청군 총사령관인 사이호달 에게 있어서 조선군은 쓰고 버려도 되는 카드이자 총알받이가 된 셈이었다
(속국 군대의 비애. . .이룬 덴쟝~)
이번에도 효종(孝宗)은 쾌히 승락하고 함북병마 우후 신류를 사령관으로 조총수 200명과 고수 등 총 260명을 파병했다
파병길에 오른 신류장군과 260명의 정벌군은 두만강을 건너 쑹화강 본류로 출발, 러시아 함대와 마주쳤다
적선과의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조선의 조총대가 쏜 불화살에 러시아 함대의 화약고가 폭발했다
여러 척이 밀집되어 있던 러시아 함대는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조청 연합군은 승리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사이호달이 작전 도중 제동을 걸었다.
적선을 불태우지 말아라!"
조선군의 목숨보다 적선에 실린 노획품을 중요하게 생각한 사이호달의 명령이 나선정벌의 복병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에 황급히 작전을 변경한 조선군은 적선 장악에는 성공했지만 변경된 작전으로 조선군 7명이 사망하고,
청나라 갑군들과 사공 등 사상자가 속출했다.
형세가 이렇듯 다급해지자 조청 연합군은 급히 화전(火箭, 화살 끝에 화약주머니를 매달아 불을 붙여 쏘던 화살)을 쏘아 적의 선단이 7척이 불타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것은 사이호달이 적선에 실린 재물을 탐내다 벌어진 소탐대실의 결과였고, 청군 대장은 노획한 적선을 온통 수색하여 많은 재물을 앗아갔으며,
여러 군사들이 얻은 전리품도 모조리 거두어갔다.
우리 조선 군사들의 노획품은 러시아제 수석식 소총밖에 없었는데 이것도 모두 그에게 빼앗겼다
동북아 최고의 조총부대인 조선군이 수석식 소총을 대량생산 할까 두려웠던 것이었을까.
승전 후 러시아군의 역습을 핑계로 사이호달은 조선군의 귀향을 막아섰고,
신류장군의 끈질긴 반발 덕분에 조선군은 늦게나마 귀향에 성공했다
러시아 원정대는 사령관이 죽고 주력 군사가 궤멸되는 바람에 이후 7년 동안 흑룡강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했다.
약소국이이었기 때문에 떠나야 했던 슬픈 파병의 역사,
그러나 조선군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졌던 전쟁이 나선정벌이었다
제2차 나선정벌의 조선군 사령관 신류는 신숭겸의 23대 손으로 경북 칠곡 사람인데,
문과에 여러 차례 응시했으나 실패하자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했다.
그는 나선정벌에서 승리하여 귀국한 후에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이후 많은 무신들이 이 가문에서 배출되었고, 이(李) 충무공을 낳은 덕수 이씨 문중과 비견되는 무문으로 알아주어 '영남 제일 무문가'로 불렸다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52편)*
당쟁의 틈에서 별 볼일없었던 효종이 죽자 외아들인 현종(顯宗)이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15년간 재위했다.
아버지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에 인질로 가 있을 때 태어났기 때문에 조선에서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성격이 원만하고 조용했으며,
소심 했던 현종은 재위기간 내내 서인과 남인이 벌이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예송논쟁에 휩싸여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요대목에서 예송논쟁 이란 *
예송논쟁은 조선 중기 효종과 효종비가 승하했을 때 자의대비(인조의 계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격렬하게 대립한 정치적·학술적 논쟁입니다.
단순히 상복을 입는 기간의 문제가 아니라,
왕권의 성격과 성리학적 예법의 적용 범위를 둘러싼 정권 다툼의 핵심
조선 사회의 기본 예법인 『주자가례』와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상복을 입는 기간은 신분과 항렬에 따라 엄격히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효종이 인조의 장남이 아닌 차남(봉림대구)으로서 왕위에 올랐다는 점이었습니다.
서인 (왕사동례): "왕도 사대부와 똑같은 예법을 따라야 한다."
효종이 차남이므로 사대부의 예법대로 기간을 단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왕권보다 신권과 보편적 예법 강조)
남인 (체이부정): "왕의 예법은 사대부와 다르다."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남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왕권의 특수성과 정통성 강조)
제1차 예송 (기해예송, 1659년)
효종 승하 후, 어머니인 자의대비의 상복 기간을 두고 발생했습니다.
구분 서인 (송시열, 송준길)
남인 (허목, 윤휴)
주장 기간 1년설 (기년복) 3년설 (참최복)
근거 효종은 차남이므로 사대부의 예대로 1년이 적당함.
왕위를 계승한 장자이므로 국왕의 예로 3년을 입어야 함.
결과 서인 승리.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의 1년설이 채택되었습니다.
다시처음으로 되돌아가서리~~
그래도 훈련별대를 창설하고, 대동법을 호남 전역에 확대 실시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을 하다가 34세로 요절했다.
* 기해예송*
예송(禮訟)이란 효종이 승하하고 나서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2차례에 걸쳐 논쟁한 사건을 말한다.
상복입는 기간을 두고다투다니.
지금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논쟁이지만 17세기 조선 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임진왜란 이후에 양반들은 그들의 약해진 권한을 회복하기 위해 예학을 보급하고 족보학을 강조하는 분위기 형성에 여념이 없었다.
즉, 양난 이후 신분제의 변동이 생기고 양반 내부에서도 한양 양반과 지방 양반간에 구별이 생기자 양반들은 특권의식을 강화 해야 했다.
양반이 평민과 다른게 있으니,
그게 바로 예(禮)와 족보(族譜)였다
이런 가운데 상복(喪服)은 예를 표현하는 의식으로 매우 중요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의 옷이란 단순히 더위와 추위를 피하고 멋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유교의 덕(德)을 담은 하나의 예(禮)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당시의 예송논쟁은 현종의 아버지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해 더욱 뜨거워졌다
현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당시 왕실 최고의 어른은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장렬왕후)였다.
자의대비는 인렬왕후의 뒤를 이어 15세에 인조와 혼인을 했고, 효종보다 5살이나 어렸다.
때문에 예송논쟁이 발생했을 당시에도 37세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의대비는 왕실 최고의 어른이자 효종의 어머니이며,
현종의 할머니였다.
그런 그녀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한 것이 기해예송(己亥禮訟) 이다.
효종이 승하하자 자의대비의 상복기간에 대해 서인들은 1년만 입을 것을 주장했다.
사대부(士大夫)들은 장남 이하의 아들에 대한 상복은 1년을 입었는데,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므로 사대부(士大夫)의 법도대로 1년짜리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남인들은 이에 대해 반발해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엄연히 왕이었으므로 왕(王)과 사대부(士大夫)를 같이 볼 수 없다며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옛 예(禮)는 비록 잘 알 수가 없으나, 시왕(時王)의 제도를 상고 한다면 1년복이 맞을 것 같습니다."
- 현종실록 1권(서인의 주장) -
효종이 인조의 둘째 장자(長子)로서 이미 종묘를 이었으니, 대왕대비께서 효종을 위하여 재최(齋縗) 3년을 입어야 할 것은 예제로 보아 의심할 것이 없는 일인데.
- 현종실록 2권(남인의 주장) -
그렇다면 현종(顯宗)은 서인과 남인 중에서 누구의 손을 들어줬을까?
당시 집권 세력인 서인의 편을 들었다
*갑인예송(甲寅禮訟)*
기해예송(己亥禮訟) 이후, 효종의 아내이자 현종의 친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승하했다.
서인과 남인은 또 다시 자의대비의 상복기간을 두고 대립하니 이로써 2차 논쟁인 갑인예송이 일어났다.
서인은 인선황후가 차남의 아내란 이유로 9개월을 주장하고,
남인은 왕(王)의 아내라는 이유로 1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에 현종(顯宗)은 누구의 손을 들어줬을까?
또다시 서인의 손을 들어줬을까요.
이번에는 남인의 손을 들어줍니다.
사실 예송은 단순히 옷을 몇년 입느냐는 예법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장자(長子)가 아닌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을 신하들이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대립한 문제였던 것이다.
결국 현종(顯宗)이 두번째 예송에서 남인의 손을 들어 준 것은 권력이 강했던
서인(특히 송시열) 을 견제하기 위한 방도가 아니었을까.
이런 쓸데없는 예송 논쟁 같은 것이 조선을 중병에 들게하여 병원(病原)이 골수에 침투함으로써 조선은 회생 가능성이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재위중 서인에게 질린 현종(顯宗) 은 정권을 서인에게서 남인으로 바꾸려는 와중에 그만 죽고 말았다
이로써 서인과 남인의 빙탄불상용
(氷炭不相容, 얼음과 숯의 성질이 정반대이어서 서로 용납하지 못한다)
의 관계를 해소하지 못한 채
현종은 아들인 숙종에게 숙제를 넘겨 주었다.
조선의 왕(王)들은 왕비(王妃) 이외에도 많은 후궁을 거느리면서 여러 여인을 취했다.
하지만 조선의 27명 중에서 유일하게 후궁도 없고, 게다가 왕비도 단 한명만 둔 왕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현종
(顯宗)이다.
그렇다면 현종은 조선 최고의 애처가 이자 로맨티시스트 였을까?
물론 두 사람의 금슬이 좋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성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명성왕후(明聖王后)
는 자기 아들이 왕위에 오르고 난 뒤 조정의 일을 자주 간섭한 나머지 남인들의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아마도 아내의 바가지가 무서워서 후궁을 들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이 시간에도 아내의 바가지가 무서운 분들이 계시져?)
현종(顯宗) 의 비(妃)인 명성왕후는 효종대에 활약했던 서인 김육
(金堉)의 손녀이다.
김육(金堉)은 인조 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효종 즉위 후 충청도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으면서도 선진문물에 관심이 많아1653년부터 시헌력'을 시행했다.
또한 수레와 수차의 개발에 힘썼으며 상평통보 주조를 통해 화폐경제가 뿌리 내리도록 하여, 실학의 선구자라는 평을 듣는 명재상 이었다.
같은 서인이었지만 김육과 송시열 사이에는 갈등이 컸다.
김육은 현실주의를 추구하는 '한당(漢黨)'이었고, 송시열은 명분과 원칙만 추구하는 '산당(山黨)'으로 둘은 서로 대립했다
당파는 선조때 부터 결성되었으나 치고 박고, 서로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당쟁의 하일라이트는 현종(顯宗)을 거쳐 숙종대에 절정에 이르게 된다
683년 서인은 송시열의 노론과 박세채의 소론으로 나뉘고,
노론은 다시 한당과 산당으로 나뉘었으며,
남인은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화되었다.
한당과 산당은 김육과 송시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고,
청남과 탁남은 유배중인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에 있어서 강경파는 허목의 청남(淸南) 이 되고,
온건파는 허적의 탁남(淸南)이 되었다.(에효~ 새끼를 낳는것도 아니고 뭐이리 줄줄이..)
당쟁이 더럽다고 중간에서 관망이나 하는 사람은 양쪽의 타깃이 되어 사문난적(斯文亂賊) 소리를 듣거나 역모에 얽히기 십상이었다.
분위기가 이러니 누구든 출사를 하려면 어디 한 군데 줄을 대지 않으면 출사가 불가능했고, 그 바람에 아무도 당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 임금도 없고, 백성도 없는 🐕 같은 당쟁 때문에 조선에는 왕 같은 왕이 세종(世宗)과 정조(正祖)를 빼고는
더 이상 나올 수도 없었고
쓸 만한 인재들은 당쟁의 와중에서 모조리 살육을 당해 조선은 몰락의 관성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