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으로 내 마음 잡는 법
‘자기를 돌아보는 공부’에서는 지금이 바로 수행할 때라는 것과,
참된 신심 속에 깨달음이 있고 수행하면 그 깨달음이 스스로 다가온다는 것,
그리고 가장 좋은 수행법은 자기가 자기를 돌아보는 것임을 밝힌다.
자기를 돌아보는 가장 요긴한 공부 방법인 참선법,
특히 그 참선법 중에서 화두(話頭) 드는 법을 중심으로 놓고 살펴보고자 한다.
관선(觀禪)과 참선(參禪)
참선법은 ‘내 마음을 가지고 내 마음을 잡는 방법’이다.
우리 자신을 자동차에 비유하면, 몸뚱이는 자동차 자체와 마찬가지요.
마음자리는 운전기사와 같은 것이다.
곧 운전기사가 참된 ‘나’이지, 자동차와 같은 이 몸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자동차를 생각해 보라. 공장에서 갓 나올 때는 윤이 나고 성하지만,
몇 달만 굴리면 고물이 되기 시작하고, 오래 사용하여 말을 잘 듣지 않게 되면서 폐차해야 한다.
이 몸뚱이도 총각, 처녀 시절에는 잘나고 예쁘다고 큰소리 치고 다니지만, 늙어지면 별수가 없다.
늙고 병들어 수명이 다하면 버려야지,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법이란 무엇인가?
껍데기인 자동차가 아니라 운전기사인 마음자리를 찾는 것이 불법(佛法)이다.
곧 부처님께서 일평생 동안 설하신 것이 모두 이 마음자리를 찾게끔 이끄는 가르침이었다.
이에 비해 참선법은 자기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자리를 직접 찾아 나서는 수행법이다.
참선의 선(禪)은 ‘안정되었다.’라는 뜻이다.
조용한 마음, 집중된 마음, 맑은 마음, 바른 마음, 안정되고 고요한 마음을 선(禪)이라고 한다.
이 선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부처님의 교법 안에 있는 선(禪)은 관선(觀禪)이라 하고
부처님의 교법 밖에 있는 선을 참선(參禪)이라고 한다.
관선이라고 할 때의 관(觀)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마음으로 지극하게 생각해서 보는 것으로, 달리 관법(觀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관법(觀法)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사념처(四念處)라는 수행법이 있다.
사념처는 도(道) 닦는 사람이 일체 만물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가르친 네 가지 관법이다.
첫째는 관신(觀身) 부정(不淨)으로, 이 몸뚱이라는 게 본래 깨끗하지 못한 것임을 관하는 수행법이다.
아무리 얼굴이 예쁘고 외모가 준수하다 하여도 이 몸은 피와 고름과 오물로 가득 차 있으며,
결국에는 썩고 말 부정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관심(觀心) 무상(無常)으로,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되지 아니하고 무상한 것임을 관하는 수행법이다.
시시각각 변하고 덧없는 게 바로 사람의 마음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관수(觀受) 시고(是苦)이다. 몸과 마음으로써 내가 받아들이는 모든 일,
내가 그것을 구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모든 일은 다 괴로운 것임을 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관법(觀法) 무아(無我)로, 일체 만법에는 그 자성이 없음을 관하는 수행법이다.
일체 만법은 어느 한 가지도 고유한 개성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며,
나라고 하는 자성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념처에 의해 나의 몸과 마음을 관(觀)하면
그 어떤 사람이나 물질에 대해 집착할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이 사념처(四念處) 등의 관법수행(觀法修行)이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다가 시대가 변하고 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수행하는 방법도 조금씩 바뀌어 갔다.
특히 중국에서는 참선 수행법이 크게 발달하였고, 남방에서는 관선(觀禪)이 수행하였으며,
티베트와 몽골 등에서는 만다라, 다라니 수행법에 의존하는 밀교(密敎)가 주류를 이루었다.
관선(觀禪)에 대비되는 참선은 중국에서 확립된 부처님 설법의 수행법으로,
간화선(看話禪)과 묵조선(黙照禪)-이라는 두 개의 큰 가닥이 있다.
묵조선(黙照禪)은 묵묵히 자기 마음자리를 돌아보는 수행법이고,
간화선(看話禪)은 화두에 의지하여 닦는 선법으로, 달리 화두선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이 간화선법을 채택하고 있으며,
지금 우리가 함께 공부해 보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화두-선법이다.
그렇다면 화두란 무엇인가?
화두(話頭)의 ‘화’는 ‘말씀 화’ 자로서 말이라는 뜻이고, ‘두’는 ‘머리 두’ 자로 앞서간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화두는 ‘말보다 앞서가는 것’, ‘언어 이전의 소식’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흔히 책의 머리말을 ‘서두(序頭)’라고 하듯이, 참된 도를 밝힌 말 이전의 서두, 언어 이전의 소식이 화두이며,
언어 이전의 내 마음을 스스로 잡는 방법을 일러 화두 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화두는 달리 공안(公案)이라고 한다.
공안의 ‘공’은 ‘공중’, ‘누구든지’라는 뜻이고, ‘안’은 곧 ‘방안’이다.
따라서 공안은 “누구든지 이대로만 하면, 성불할 방안이 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불교를 믿든 믿지 않던, 복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누구든지 이 방법대로만 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된 도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도는 언어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야 계합(契合)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들기 직전에 백만 억 대중을 모아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녹야원에서 시작하여 이 ‘발제하’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바로 평생을 설하신 팔만 사천 법문이 방편이요, 약방문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것이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약방문이 병을 고치는 약은 아니니라.
불이라고 말하여도 입이 타는 것이 아니듯이 아무리 약방문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 약방문만으로 병을 낫게 할 수는 없다.
약방문을 보고 자기 병에 맞는 약을 지어 먹을 때에만 병은 낫게 되는 것이다.
설혹 팔만대장경을 다 외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약방문을 외운 것일 뿐, 약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약방문을 모르더라도 약만 먹으면 병은 나을 수 있다.
그 약이 바로 언어 이전의 화두이며,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참선 수행법이 그 약을 먹는 일인 것이다.
이제 화두 한 가지를 예로 들어보자.
중국 당나라 때의 조주선사가 동관원에 있을 때의 일이다.
젊은 수행승 문원이 개를 안고 와서 조주선사께 여쭈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無].”
이것이 화두이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개에게는 틀림없이 불성이 있고, 불성이 있으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데 조주선사는 단 한마디 ‘무(無)’라는 답을 주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조주선사가 엉뚱한 답을 주신 것은 아니다.
조주선사의 깨달은 경지에서 곧바로 말씀하신 것이요, 언어 이전의 참된 답을 일러주신 것이다.
따라서 그 누구라도 조주선사께서 ‘무’라고 하신 까닭을 확실히 알면 그는 조주선사와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곧 조주선사와 하나가 되어서 대오(大悟)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조주선사께서 ‘무(無)’라고 하신 까닭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화두 법에 의지하여 가장 정확한 답을 얻어야 한다.
머리를 굴려서 얻는 해답으로는 안 된다.
철두철미하게 의심하고, 의심의 삼매(三昧)에 들어가 해답을 얻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조주선사는 어째서 ‘무(無)’라고 하였는가?”
“틀림없이 개에게는 불성이 있는데, 왜 조주선사는 ‘무’라고 하였는가?”
“왜 ‘무’라고 하였는가?”
“왜 ‘무’인가?”
“무(無)?”
“?”
이렇게 의심을 일으켜 끊임없이 해답을 구하여야 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선종에서 최초로 나온 화두, 선종 제일 공안인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는
우리에게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微笑)’로 널리 알려진 화두이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영축산에서 설법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는 네 가지 종류의 꽃을 뿌려 공양하였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아무런 말씀 없이 한 송이 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이셨다.
그러나 한자리에 모인 수만 대중들은 부처님께서 무슨 뜻으로 꽃을 들었는지를 알지 못하여 어리둥절-해 하였고,
오직 부처님의 큰 제자인 대가섭 존자만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에 부처님께서 선언하셨다.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있으니, 마하가섭에게 전해 주노라.”
이 말씀 중 아래의 정법안장에서 견성성불까지의 선종(禪宗) 팔구(八句)를 연결 번역하여 보자.
모든 정법 중의 눈알과 같이 열반에 들어가는 묘한 마음의 도리는
실로 모양이 있으면서도 모양이 없는 미묘한 법문이기에 언제나 문자로는 설명될 수 없어
교법 밖에서 따로 전하노니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견성성불(見性成佛)하게 하노라.
꽃을 들고 미소를 짓는 바로 그 순간에
이 선종팔구(禪宗八句)의 선법이 부처님으로부터 마하가섭에게로 전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선종 제일 공안 가운데, ‘부처님께서 꽃을 드신 까닭’을 밝히는 것이 바로 화두 법이다.
“어째서 부처님께서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드셨는고?”
“어째서 부처님은 꽃을 드셨는고?”
“어째서 꽃을?”
“어째서?”
“?”
이와 같은 “?”, 이와 같은 끊임없는 물음 속에서 대 의단(疑團)을 갖는 것,
크나큰 의심을 일으키는 것을 화두라고 한다. 이 화두는 마치 열쇠와 같은 것이다.
옛날에는 자식을 장가보내고 시집보낼 때 장롱을 사주고 집을 사주었지만,
요즘은 아들이나 딸을 시집보내고 장가보낼 때 열쇠 하나만 준다고 한다.
열쇠만 가지고 가서 아파트 문을 열면 그 안에 모든 살림이 다 갖추어져 있다고도 하는데,
그처럼 “어째서 부처님께서 꽃을 드셨는고?”, “왜 무(無)라 했는가?” 하는 이 열쇠,
이 물음표(?)라는 열쇠를 가지고 문만 열면,
팔만 사천 법문과 무진장의 보배가 가득 차 있는 마음자리를 되찾아 부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일타 스님 -,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