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0319. 묵상글 ( -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등 )
----------------------------------------------------
26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3.19 03:28
- 의로움을 넘어 성령으로
오늘 축일 미사의 감사가는 이렇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의로운 요셉을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의 배필로 삼으시고
충실하고 지혜로운 종 요셉을 성가정의 가장으로 세우시어
성령으로 잉태되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살피게 하셨나이다.”
여기에 우리 교회가 요셉을 어떤 분으로 얘기하는지 잘 들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복음의 표현을 바탕으로 요셉을 우선 의로운 분으로 얘기합니다.
그리고 이때의 의로움은 율법을 어기지 않는 의로움 곧 법적인 의로움입니다.
이 의로움에는 하느님께서 그리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 가운데에도 하느님을 믿지 않고도 법적으로 의로운 사람,
다시 말해서 가능하면 법을 지키며 살려는 사람이 상당히 있고,
또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할 때처럼 착한 사람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법적인 의로움을 넘어 마리에게 의리 있는 사람,
곧 마리를 지켜주려는 관계적인 의로움의 측면도 있는 사람,
그러니까 법적인 의로움과 관계적인 의로움을 둘 다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런 사람으로 그쳤다면 인간적인 의로움에 불과했을 겁니다.
하느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런 사람으로 살다가 죽었을 것이라는 말이고,
그 의로움 때문에 마리아의 배필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감사가는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말 다음에
마리아의 배필임을 아주 또렷하게 얘기합니다.
마리아의 배필이 된 것이 하느님의 뜻 때문이며,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파혼하려고 했기에
인간적으로는 마리아의 배필일 리가 없었으며,
이후의 모든 관계도 다 하느님 뜻대로입니다.
그러므로 ‘충실하고 지혜로운 종 요셉’이라고
감사가가 노래할 때의 그 충실함은 율법에 충실함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충실했다는 것이고 하느님 뜻대로 맺어진 관계
곧 성령의 배필인 마리아와 아들에게 충실했다는 관계적 충실함입니다.
저는 여기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주님이라는
오늘 감사가의 표현에 프란치스칸으로서 주목합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마리아가 성령의 정배라는 뜻이고,
마리아께서 동정 성모라는 것도 실은 성령의 정배라는 뜻인데
프란치스코는 성녀 클라라와 그 자매들을 성령의 정배라고 일컫습니다.
이는 당시에 봉쇄 관상 수녀들을 그리스도의 정배라고 하던 것과 달리
성령의 정배라고 한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정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라는 것임과 동시에 성령에 이끌리는 자가 되라는 거지요.
요셉이 바로 이런 분이었습니다.
성령께 모든 것을 내어드렸으며
성령에 인도받아 모든 것을 하신 분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자리도
주님의 아버지 자리도 성령께 내어드린 분이고,
가장으로서 성가정을 수호한 것도 성령을 따라서 하신 분입니다.
요셉이 의로움을 넘어 성령에 이끌리신 분이라는 것을
무척 부러워하고 본받아야 할 오늘 우리입니다.
----------------------------------------------------
26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수치심이 만드는 침묵과 관상이 만드는 침묵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침묵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상처와 두려움 속에서 마음을 닫아버리는 침묵은 은총을 가로막는 해로운 침묵이지만, 기도와 관상 안에서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 드리는 침묵은 영혼을 살리는 관상적 침묵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명예와 수치의 질서를 뒤엎으신 예수님
수치심이 만드는 침묵과 관상이 만드는 침묵
2026년 3월 18일 수요일
캐시디 홀(Cassidy Hall)은 수치심으로 인해 내리는 선택이 결국 "해로운 침묵"을 낳는다는 사실에 대해 성찰합니다:
저는 지난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 삶에서 가장 해로운 침묵 가운데 하나에 머물렀습니다. 사랑의 관계 안에 있었지만, 상대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했기에 저와 공개적으로 데이트를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안위—혹은 불안—에 매여, 저는 가족과 친구들, 직장과 일상 속에서, 심지어 식료품 가게에서조 스스로를 침묵시키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수치심에서 비롯된 침묵은 오래도록 상처와 매듭을 남겨, 풀어내는 데 수년이 걸립니다…. 사랑이 머물 수 없는 침묵은 은총이 머물지 못하는 자리이며, 영혼의 성장을 가로막는 해로운 침묵입니다.
홀(Cassidy Hall)은 사랑의 침묵이 관상적 실천을 통해 길러질 때 가져오는 긍정적 열매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해로운 침묵에 분명한 이름을 붙여야 합니다. 그것은 상처와 수치심, 왜곡과 파괴를 낳아 세상을 병들게 하는 침묵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사랑의 침묵에도 이름을 붙여야 합니다. 그것은 창조적이고 생명을 길러내는 침묵이며, 자기 자신과 타인과의 일치를 깊게 하고, 더 넓고 사랑이 충만한 세상을 가꾸어 가는 관상적 침묵입니다….
마침내 그 관계의 해로운 침묵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저는 제 안의 다른 부분들까지도 침묵시켜 왔음을 깨달았습니다. 단지 제 성적 정체성을 숨긴 것뿐 아니라, 직관이 이끄는 창조성과 생명력, 열린 마음과 공동체성, 맑은 영성과 평온함—곧 사랑의 침묵이 자라나는 자리들까지도 감추어 왔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맥락 안에서, 침묵하는 방관자의 독성은 수많은 폭력의 행위를 낳고 키워왔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성적 학대와 그에 대한 공허한 사과; 식민지 역사에 대한 성찰의 부재; 여성과 유색인종, 난민, 장애인, 그리고 다른 주변부로 밀려난 공동체들에 속한 이들의 존엄과 지도력을 존중하지 않는 교파들; 교회 안에 스며든 그리스도교 국수주의와 백인 우월주의 문화; 잘못된 신학을 묵인하는 침묵으로 인해 수많은 LGBTQIA+ 형제자매들이 스스로를 미워하거나 상처 입게 된 일들. 그리고 이외에 더 다른 것들….이러한 침묵은 해와 폭력, 수치와 독성을 낳는 침묵입니다….
해로운 침묵은 우리의 일상 속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관상] 안에서 길러지는 사랑의 침묵은 언제든 추구할 수 있으며, 우리의 혼란스러운 날들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면의 암송들(마니피캇과 같은 기도들)이나 짧은 기도문을 반복하며 의도적으로 멈춤을 가질 때 스며들고, 때로는 동쪽 창으로 흘러드는 아침 햇살처럼 풍성히 흘러들어옵니다. 이것이 제가 끊임없이 찾고 실천하는 관상적 침묵입니다. 이 침묵은 영혼을 새롭게 하고, 내적 질서를 세우며, 사랑의 현존과 행동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가 해로운 침묵이 아닌, 아름답고 사랑으로 충만한 침묵의 가능성에 더 깊이 참여할수록, 침묵은 파괴가 아니라 창조와 생명을 길러내는 힘으로 드러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오늘의 묵상(today’s meditation)에서 저는 이런 구절에 마음이 멈추었습니다. “우리의 가장 좋은 질문들은 종종 의심처럼 들리지만, 나는 호기심이야말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한 태도라고 믿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저는 수녀님께 물었습니다. “왜 고해성사를 꼭 해야 하나요? 제가 기도할 때 하느님께 직접 용서를 구하면 안 되나요?” 그때 저는 모퉁이에 앉아 성모 마리아께 용서를 청하라는 벌을 받았고, “하느님을 절대 의심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수년간 CAC의 묵상을 읽으며 저는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실 우리의 호기심을 환영하신다는 것을요. 이제는 더 이상 호기심 때문에 모퉁이에 앉아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Nicki A.
References
Cassidy Hall, Queering Contemplation: Finding Queerness in the Roots and Future of Contemplative Spirituality (Broadleaf Books, 2024), 40, 42, 43, 4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Elianna Gill, untitled (detail), 2023,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배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서로를 환대하며 한 공동체 안으로 맞아들입니다.
++++++++++++++++
숨영성 묵상글
진정한 남성성의 주보 성인인 성 요셉을 기리며....
매년 성 요셉 대축일이 오면 우리는 마태오 복음의 예수님의 잉태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루카 복음의 마리아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요셉 중심의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그 이유는 마태오 복음이 유다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예수님을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 제시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과는 달리 루카 복음은 이방인 독자를 향해, 예수님을 보편적 구원자로 드러내며, 특히 여성·가난한 이·이방인 같은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에게 은총이 열려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쓰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 두 이야기가 서로 보완적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두 복음서의 차이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모순되기 때문이 아니라, 각 복음 저자가 자신의 공동체와 신학적 목적에 맞게 예수님의 탄생을 서술했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관점은 상호 보완적이며, 함께 읽을 때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명을 더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두 복음서는 모두 동정녀가 성령의 역사에 의해 구세주를 잉태한다는 핵심 진리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크나큰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 요셉에 대한 전통적 이미지—특히 "늙고 약한 성인"으로 묘사하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묘사는 요셉의 남성성과 활력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언제나 젊고 순결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반면, 요셉은 반대로 늙고 힘없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성인 남성과 성인 여성의 온전한 성숙한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심리적·영적 투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 요셉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기 때문에, 그를 약화시키고 "거룩한 남성"이라는 우리의 이상적 이미지에 맞추어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참된 남성성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우리 인간의 진정한 남성성도요....
사실 마태오 복음의 예수님 잉태와 탄생 이야기에 나오는 요셉은 의로운 남성으로 묘사됩니다. 덕이 풍부한 남성으로요. 라틴어에서 '덕'(德)은 'virtus'인데, 이 단어는 또한 '강인한', '용기 있는'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그러니 마태오 복음은 요셉 성인을 '늙고 나약한' 남성이 아니라 '강인하며 의로운' 남성으로 제시하면서 이스라엘(하느님 백성)을 위한 하느님 약속의 성취를 중재하는 존재로 묘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남성성은 단지 힘만 센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덕을 겸비한 의로움과 용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역사를 거치면서 남성성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으로 생기는 문제는 가히 가공할 만한 폭력과 갈등을 자아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세상의 전쟁들과 갈등들도 바로 이러한 오해를 잘 그려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 우리는 우리 인간의 진정한 남성성을 성 요셉을 통해, 의롭고 강인한 성 요셉의 전구를 통해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사실 성 요셉은 임종하는 이들의 주보 성인일 뿐 아니라 진정한 남성성의 주보 성인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선택 기념일로 지냅니다만, 5월 1일에 우리는 다시 성 요셉을 "노동자 요셉"이라는 칭호로 기념합니다. 이는 요셉 성인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하고 되찾는 데 아주 훌륭한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이 기념일에 우리가 받는 인상은 요셉 성인이 퇴색되고 무력하며 약한 요셉이 아니라, 힘 있게 일하는 노동자 요셉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는 성 가정을 위해 5월 1일 하루만이 아니라, 일 년 내내 일해야 했던 한 가족의 가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실 때, 참된 온유와 애정을 담아 표현하셨지만, 결코 약하거나 감상적이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아버지"라는 단어의 색채와 감각을 어디서 배웠을까요? 인간적 차원에서, 그 단어의 현실을 처음 경험한 곳은 바로 요셉에게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매우 성공적인 아버지였음이 틀림없습니다!....
----------------------------------------------------
26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께 대한 관심에 비하면, 성 요셉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구속사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계획하신대로를 일찍이 다 이루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구속사에 있어서 그에게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유년시절까지만 함께할 수 있도록 안배한 까닭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두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통해, 태어날 아기가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요셉의 인품을 세 가지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복음사가는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마태 1,19)고 전합니다.
이는 그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열심을 다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며 살았기에,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고 전합니다.
이는 그가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자비심을 겸비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조용히 파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그에게는 모욕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러한 모욕을 감수하면서라도 마리아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사려 깊은 처사를 할 줄 아는,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셋째>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다.”(마태 1,24)고 전합니다.
이는 그가 순명하는 사람이었을 말해줍니다. 그는 항상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있었으며, “하느님의 뜻”에 행동하는 믿음으로 순명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순명으로 인류를 향한 하느님 구원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제2독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마 4,18)가 되었듯이,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미 얻은 외아들을 포기했지만, 그는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고, 아브라함은 아내가 있었지만, 그는 아내마저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침묵하되 참으로 믿는 사람이었으며, 믿되 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고, 행동하되 참으로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깊은 침묵,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접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내맡기고 행동하는 믿음, 타인의 처지를 배려하는 사려 깊은 자비심과 사랑,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참다운 순명이, 바로 우리의 모델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 요셉께 전구하며, 하느님 구원의 온전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과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
26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창 신부님 중에 존경하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저는 그 신부님의 신발 끈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먼저 사목의 방향입니다. 저는 어쩌면 늘 양지에서 있었다면 신부님은 음지에서 지냈습니다. 저는 교구청이 있는 명동에서 8년을 지냈습니다. 캐나다와 미국을 포함해서 해외에서 10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신부님은 10년 동안 교정 사목에 헌신했습니다. 신부님은 재소자는 물론 출소자를 위해 사목도 했습니다. 출소자를 위한 건물을 마련해서 함께 지냈습니다. 저는 하루 지냈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출소자를 위해 ‘은행’도 개설했습니다. 출소자들이 갱생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려고 했습니다. 재소자들을 위해 음악회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더 낮은 곳인 고시원으로 갔습니다. 직접 고시원의 작은 방 한 칸을 얻어서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릅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신부님은 고시원에 사는 분들을 위해서 밥도 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소풍도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복음을 전하셨던 그 모습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을 보면 ‘내 발을 씻기신 예수’라는 성가가 떠오릅니다. 성가는 이렇습니다.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기셨다네/ 내 영혼이 잊지 못할 사랑/ 그 모습 바로 내가 해야 할 소명/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 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신학생 때 저는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사제가 된 후에 그 노래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신부님을 보면 ‘임 쓰신 가시관’이라는 성가가 떠오릅니다. “임은 전 생애가 마냥 슬펐기에/ 임 쓰신 가시관을 나도 쓰고 살으리다/ 임은 전 생애가 마냥 슬펐기에/ 임 쓰신 가시관을 나도 쓰고 살으리다/ 이 뒷날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하소서/ 이 뒷날 나를 보시고 임 닮았다 하소서/ 이 세상, 다 할 때까지 당신만 따르리라” 저는 신학생 때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사제가 된 후에 그 노래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존경하는 동창 신부님은 사제가 된 후 35년 동안 신학생 때 불렀던 그 노래의 삶을 충실하게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성 요셉은 말이 많은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요셉의 말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말없이 책임졌고, 끝까지 함께했고, 자기 생각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선택한 분입니다. 약혼한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 요셉은 법대로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가 상처받지 않도록 조용히 물러나려 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요셉은 충분히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 한 걸음 더 가라고 하십니다. 법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십니다. 요셉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마리아를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자기의 아들로 품습니다. 신앙은 혼자 잘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누군가의 손을 잡아 주는 것이고, 누군가의 짐을 함께 들어 주는 것입니다. 요셉 성인은 어린 예수님의 손을 잡아 주었고, 예수님은 그 손의 기억 안에서 자라셨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 또한 요셉 성인의 삶을 따라서 나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요셉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모든 것을 마음에 품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던 요셉 성인을 생각합니다. 요셉 성인이 가졌던 ‘영성’을 배운다면 우리는 다가오는 도전을 이겨내고,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성 요셉 대축일을 지내며, 저는 존경하는 동창 신부님의 삶을 통해 다시 한번 요셉 성인을 만납니다. 그리고 저의 사제직을 돌아봅니다. 성 요셉의 전구로, 사랑하는 동창 신부님이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그러나 충실하게 하느님의 뜻을 살아갈 수 있기를 청합니다.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
26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신중하고 진지하며 충직했던 성 요셉!
복음서를 읽을 때 마다 궁금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의 양부이자 성모님 인생의 동반자셨던 요셉 성인은 구세사 안에 꽤 중요한 인물인데도 복음사가들이 거의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이유는? 아마도 천성적으로 요셉은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침묵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그저 입 다물고 아무 말 않는 침묵이 아니라, 하느님의 육화강생이란 큰 신비 앞에,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취한 차원높은 침묵이었습니다.
만일 요셉이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 앞에서 입을 다물지 않고 크게 떠벌렸다거나,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면,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큰 지장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침묵하고 또 침묵했습니다. 침묵 속에 육화강생의 신비를 묵상했습니다. 성장과정에서 예수님의 이해하지 못할 언행들 앞에서 또 침묵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알려주실 것임을 굳게 믿으면서 침묵하고 또 침묵한 것입니다.
사실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의 경우 요셉은 당시 혼인법에 따라 마리아에게 이혼장을 써주고 두 증인 앞에서 차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마리아와 그녀의 부모가 받게 될 모욕과 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인간의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천사의 말을 굳게 믿고, 큰 곤경에 처한 마리아를 끝까지 보호했습니다.
마리아의 생애에 발생한 이 특별한 사건 앞에서 요셉이 겪었던 내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은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셉은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랑하는 약혼녀를 일순간에 하느님께 강탈당한 것입니다. 마리아와 꿈꾸던 단란한 가정도 물 건너 가버린 것입니다.
요셉은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이고 고뇌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크게 동요되어 밤잠도 설쳤을 것입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기도 헀을 것입니다. 의심도 하고 심사숙고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의롭고 신심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명하고 협조한 요셉 덕분에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은 큰 무리없이 첫삽을 뜰수 있었습니다.
복음서 안에서 요셉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성모님은 가끔 등장하시는 데 요셉의 존재는 보이지 않습니다. 요셉은 언제 돌아가셨을까요?
요셉은 12살 된 소년 예수님과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한 이후, 복음서 안에서 종적을 감추고 맙니다. 또한 예수님 공생활 직전에 카나에서 베풀어진 혼인 잔치 석상에도 요셉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이미 요셉이 세상을 떠난 때로 여겨집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평균 수명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남성은 길어봤자 50세, 여성은 40세 정도였습니다. 요셉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직전 무렵 세상을 떠나셨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평균 수명인 50세 정도에 임종하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가정의 든든한 기둥이셨던 요셉의 임종은 성모님과 예수님에게 큰 충격이요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평생 침묵과 기도와 노동으로 일관했던 의로운 요셉의 빈자리가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 빈자리는 청년 예수님께서 채워나가셨을 것입니다.
----------------------------------------------------
26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16.18–21.24ㄱ
마태오는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이 이렇게 이루어졌다고 전합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였으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파혼하려 합니다.
그때 꿈에서 주님의 천사가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그에게서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하십니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행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대목에서 요셉의 위대함을
화려한 말이나 기적이 아니라
조용한 순종에서 봅니다.
요셉은 설명을 다 듣고 이해해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믿고
자기 계획을 내려놓는 방식으로 순종했습니다.
요셉의 순종은
‘감정이 없는 결단’이 아닙니다.
그는 상처를 입을 수 있었고, 오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체면을 지키는 선택보다
생명을 지키는 선택을 합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길은
언제나 “내가 옳다”를 증명하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위한 공간을 내어주는 길입니다.
문화 주간의 오늘, 이 복음은 묻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뜻 앞에서
내 논리와 감정을 절대화하며 버티는가,
아니면
요셉처럼 조용히 “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요셉의 “예”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드린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 덕분에
구원의 역사가 한 가정 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 우리도
작은 순종 하나로
하느님이 머무실 집을 준비합니다.
주님,
제가 모든 것을 이해한 뒤에만 순종하려 하지 않게 하소서.
요셉처럼 조용히 당신 뜻을 믿고
생명을 지키는 선택을 하게 하소서.
제 삶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리는 기도가 되게 하소서.
아멘.
----------------------------------------------------
26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슬픔에 젖어 있는 유가족에 건네는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한 달 전쯤에 선종하신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그때 글을 찾아보니 40일 정도 됐습니다. 저지난 주 주일에 그때 자매님 형제님을 뵙고 주일에 뵀습니다. 전에 뵐 때와는 모습이 많이 차이가 났습니다. 어딘가 모르게 얼굴에 자매님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원래는 화장을 한 후에 자매님 가족들만 따로 납골당으로 가고 교우들은 성당으로 갈 거라 했는데 어떻게 다 같이 납골당까지 가게 됐습니다. 일부는 차에 있었고 나머지는 안치하시는 걸 보며 다 함께 기도를 하기 위해 저도 같이 갔습니다. 제가 밀양성당에 있는 납골당에 교우를 안치하는 것을 봤습니다. 간단한 예식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일반인이 했습니다.
밀양에서는 아무래도 성당에서 관리를 하기 때문에 신부님이 하셨습니다. 유가족 먼저 하고 나머지는 친척 그리고 나머지 사람 맨마지막에는 형제님이 유골함을 만지면서 다 마지막 인사 같은 말을 하는 걸로 마무리하기로 했습니다. 가족들이 다 한 후에 이제 본당 교우들 차례였습니다. 제 차례가 됐을 때 사전에 제가 어떤 말씀을 드릴까 고민을 했습니다. 잠시요. 옆에 가족 친지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냥 단순한 인사말을 하는 것보다는 형식은 인사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슬픔에 빠진 가족과 친지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그걸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할 차례에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40일 전에 했기 때문에 정확하게 기억은 하지 못하지만 요지는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제가 고민을 했기 때문에 기억을 하는 것입니다. " 자매님, 제가 하느님께 어제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뭐라고 했느냐면요. 정말 자매님은 천국에 거의 직행하실 거라고 했습니다. 자매님처럼 평일미사도 거의 빠지지 않고 수 년을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고 했기 때문에 이런 분이 하느님 나라에 바로 가지 않으신다면 이 세상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 갈 수 있다고 희망을 가지겠는지요? 그러니 하느님, 자매님 영혼을 따뜻하게 품어 안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꼭 하늘나라 바로 가셨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부디, 자매님께 영원한 안식을 주시옵소서" 라고 이런 형식으로 자매님께 했지만 그 소리는 다른 유가족을 향한 것도 됩니다. 하고 돌아서면서 주위에 계시는 유가족 표정을 봤습니다. 표정이 조금 전 표정과 많이 달랐습니다. 기쁜 건 아니지만 물론 슬픈 상황인데 안도의 숨을 쉬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한 자매님은 가족 관계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밝은 표정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고 난 후 교우들이 다 했습니다. 마지막에 이제 형제님이 하실 차례였습니다. 형제님이 함에 손을 얹으신 후 잠시 침묵을 하셨습니다. 감정이 북받쳤을 겁니다. 그러다가 말씀을 하시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하셨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 성모님이 내려오셔서 잘 데려갈 거다" 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 감정 아직도 생생합니다. 한평생 부부로 살다가 이제 그날로 이별을 해야 하니 말입니다. 감회가 남달랐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기도를 다 함께하고 차에 탑승해 성당에 도착 후에 다 인사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몇몇 유가족 분이 저한테 오셔서 아까 납골당에서 인사하는 거 다 들었다고 하시면서 정말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했는데 많은 위로가 됐다고 하시면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시는데 제가 오히려 민망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날 집에 가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그날 그런 건 처음이었습니다. 밀양성당 내에 있는 납골당에서는 그냥 전체가 기도만 하고 안치 후 약식으로 하는 것 말고 그렇게 개인적으로 인사를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색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그날 느낀 게 저도 뭐 어떻게 사전에 연출을 해서 한 게 아니고 순간 너무 주위가 울음바다였다보니 어떻게 조금 상황을 반전시켜볼 생각으로 고민을 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근데 의외로 효과가 괜찮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누구나 슬픔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하면 위로가 된다는 건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근데 그날 저는 좀 더 생각한 게 있다면 위로의 말이라도 상투적인 말도 중요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위로의 효과는 확연히 차이가 날 수 있겠다는 걸 알았습니다. 만약 그때 주위 상황이 약간 침울한 상태였으면 저도 간단한 작별 인사 정도에 머물렀을 겁니다. 그때 정말 새로 다시 한 번 더 느낀 게 진심어린 마음에서 나온 따뜻한 위로의 말이 적절한 타이밍까지 잘 맞게 됐을 땐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
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
26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9:05 추가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16.18-21.24)”
1)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요셉의 이야기들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뜨이는 것은, ‘천사의 나타남’입니다(마태 2,13.19-20).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는 요셉의 수호천사, 또는 성가정의 수호천사였을 텐데, 천사가 나타나서 요셉이 해야 할 일을 미리 알려 준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를 나타냅니다.
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 아기 예수님과 마리아를 보호하라는 임무를 맡기고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직접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의 나타남’은 요셉도 마리아처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신앙인이었음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요셉이 천사를 천사로 바로 알아본 것도, 또 천사의 지시를 믿고 그 지시에 그대로 순종한 것도, 평소에 늘 하느님과 함께 사는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사는 사람이라면, 천사가 나타나도 천사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천사가 나타난 일 자체를 부정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선택하실 때, 그냥 마리아가 아니라,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를 선택하셨습니다(루카 1,27).
이 말은, 하느님께서 ‘마리아만’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요셉도 함께 선택하셨음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요셉을 선택하신 것은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요셉의 이야기들은, 요셉 자신만 알고 있는, 그 혼자만의 체험을 기록한 이야기들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그 일들을 어떻게 알고 복음서에 기록했을까?
요셉 자신이 직접 마리아에게 증언했을 것이고,
나중에 마리아가 약간의 보충 설명을 덧붙여서
사도들에게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이야기들은, 누가 옆에서 보고 객관적으로 기록한 이야기가 아니라, 요셉 자신이 자기가 체험한 일들을 주관적으로 증언한 것을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서에는 3인칭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요셉 자신의 말로, 즉 1인칭으로 바꿔서 읽으면, 더욱 생생하게 당시 상황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천사의 나타남’은 기록되어 있는 대로 천사가 나타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요셉이 어떤 환시 체험이나 특별한 계시 체험을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집트로 피신하는 과정에서의 일은, 마음 착한 누군가가 요셉과 성가정을 도와준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천사가 사람에게 나타날 때에는 대부분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가끔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3) 요셉의 이야기들을 겉으로만 보면, 요셉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천사의 지시를 받은 다음에야 행동한 것으로, 즉 요셉을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전후 상황을 잘 생각해 보면, 요셉이 먼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천사가 그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준 것으로 생각됩니다.
원래 수호천사는 인간에게 일을 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하는 일을 도와주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안 하면 천사의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무엇이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천사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4) 19절의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자비로운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이 말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법’보다 ‘자비’가 위에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믿었고, 마리아의 ‘죄 없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법’이 아니라 ‘자비’를 선택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한 것은, 마리아를 버리려고
한 일이 아니라 ‘지키려고’ 한 일입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면, 파혼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기의 아버지는 요셉’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이 안전해집니다.
왜 굳이 파혼하려고 했을까? ‘성령 잉태’를 믿었기 때문에, 그래서 ‘아기의 아버지는 하느님’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기는 뒤로 물러나려고 한 것입니다.
그 시점에서 천사가 나타난 것은, 올바른 방향을
알려 주기 위해서이고, 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증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나더라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그 믿음을 통해서,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
26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10:00 추가
■ 생활묵상 : 하느님과 모성애를 통해서 하느님 마음을 알아보자.
정말 놀랍습니다. 친구가 서울번역소에 자료를 맡기지 않고 저한테 부탁을 했는지 너무 소름이끼칩니다. 사실 아직 친구와 연락을 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는 약간 저한테 도움이 될지도 모를 거라고만 생각하고 아마 도움을 청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근데 저는 너무나도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해 놀랍습니다. 흥미로워서 다른 자료를 구글을 통해 얻어서 공부를 좀 했습니다. 너무 신기하다 보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놀라운 발견을 하나 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다시 새롭게 봤습니다.
기도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기도와 모성애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전혀 감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모성애라는 건 남자는 느낄 수 없는 감정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학문적으로가 아니더라도 모성애와 모성본능을 잘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는 걸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언어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번에 저는 성의학이라는 게 좀 이상한 학문이라고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부정적으로 봤는데 전혀 아닌 것 같습니다. 단순히 언어에서 풍기는 이미지만 봤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공부를 하고 끊임없이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자료에는 없는데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했던 물론 옛날 방법이지만 그때 그들은 요즘과 같은 과학적인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만든 게 아닌데 그당시 왕실 내에서 태교라고 했던 게 있는데 정말 소롬끼칠 정도로 지혜로웠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 같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현대의학처럼 발달된 시대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걸 알았을까 하니 정말 우리 민족은 대단한 민족 같습니다.
모성본능과 모성애를 학문적으로 미묘한 차이를 구별하는 건 상당히 힘들지만 이 차이를 통해서 어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통해서 하느님 마음을 조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인 우리 인간 피조물이 하느님 마음을 이해한다는 건 어쩌면 어불성설처럼 느껴지는 건 당연할 겁니다. 그렇지만 마냥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전혀 함께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모성애라는 건 엄마가 되어야만 하는 조건이 성취돼야 일단 가능한 것입니다. 출산을 했다고 해서 모성애라은 게 당연히 생기는 게 아닙니다. 저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알았습니다. 근데 모성본능이라고 우리가 표현하는 건 조금 성질을 달리 합니다. 이건 학자마다 조금 견해가 다르긴 합니다.
통상 공통적으로 다수의 의견은 이건 모성애와는 조금 다릅니다. 사실 성의학 연구자들은 성의학을 연구하기 위해서 인류진화학과 같은 학문 또 현대 신경의학이나 뇌과학과 유전공학 등 다양한 지식을 통해서 연구를 하는 것 같습니다. 동물행동학자 같은 사람들이 연구를 한 걸 바탕으로 해서 인류생물학자들은 그 이론을 통해 사람에게 유추적용해 학문으로 정립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들 동물 같은 경우에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사람인 엄마가 애기를 돌볼 때처럼 행동을 할 때 흔히 모성애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근데 엄밀히 말하면 그건 약간 조금 잘못된 표현입니다. 사실은요. 그건 동물 속에 가지고 있는 원래 유전자 성질, 즉 본능적인 성질인 것입니다. 유전적인 본능이라는 것입니다. 동물적인 본능입니다. 이게 거의 정확한 것입니다. 이걸 이해하면 모성본능이라는 말이 좀 더 자연스럽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어미 모자가 들어가긴 했지만 엄마가 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여자이면 내재적으로 또는 유전적으로 그게 각인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성이라면 그런 게 기본적으로 다 있는 것입니다. 조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모성애는 엄마가 됐다고 해서 당연히 생기는 게 아닙니다. 이게 일종의 교육으로 이 모성애가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모성애라는 게 엄마가 되면 다 그때부터 생기게 된다면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말 '비정한 엄마'라는 말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말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제 유튜브 뉴스에 보니 30대 여성이 출산한 딸 애를 어떻게 숨지게 해서 6년 동안 산에 방치했는데 경찰에 의해 피의자로 입건됐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사실 이런 뉴스는 세상에 많이 나옵니다. 이런 엄마는 그럼 과연 모성애라는 관점에서 보면 모성애가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모성애는 자식이 태어난 후에 그때부터 새로운 관계 속에서 다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냥 자동 발생되는 게 아닙니다. 이걸 과학적인 실험으로 증명한 게 있습니다. 학자들이 했습니다. 동물도 그렇고 사람도 공히 둘 다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새끼나 자식이 태어났을 때 아이가 가령 울었을 때 몸의 호로몬 같은 변화가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만 일단 보겠습니다. 많이 방송 같은 데에서 들어봤을 겁니다. 의사 선생님들 강의 같은 곳에서 말입니다. 대표적인 게 옥시토신입니다. 옥시토신은 특히 출산할 때 필히 있어야 하는 호로몬입니다. 이건 애를 출산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은 상식적으로 다 아는 사실일 겁니다. 이게 분비돼야 수유도 할 수 있게 되는데 그 호로몬이 생기는 걸 뇌과학 측면에서 연구한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것도 분비를 하게끔 뇌의 어떤 조직 일부분에서 제어를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제어가 만약 잘 안 되거나 또 기능이 잘못돼 문제가 발생해 호로몬이 잘 분비되지 않으면 결국은 동물속에 있는 유전적인 요소 모성본능이라고 했던 그게 제대로 사람에게서 작동이 안 되기 때문에 모성애를 발휘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전문적인 학자가 아니고 일반인이기 때문에 이 정도 선에서만 설명드리겠습니다.
세상 연구학문에서는 소리라고만 했는데 저는 이 사실을 통해 묵상한 게 있습니다. 이제 성경 탈출기를 한번 보겠습니다.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부짓는 신음소리를 하느님은 분명히 들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내 백성의 신음소리를 말입니다. 또 그 고통도 보셨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세상 학문은 그냥 단순 소리라고만 했는데 이 소리는 좀 더 깊게 들여다 보면 바로 엄마의 마음을 자극한 것입니다. 어떤 마음인가요? 바로 모성본능을 자극한 것입니다. 유전적으로 각인된 그 본능입니다. 그 본능이 자극만 되면 안 됩니다. 그 자극이 모성애로 발전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느냐 하면 새끼와의 끈끈한 유대관계 같은 게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 유대관계를 통할 때만이 그때 비로서 모성애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애가 가령 운다고 한다며 마음이 아프겠죠. 바로 그런 자극이 바로 탈출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마음이 움직이게 되신 거죠.
제가 편의상 표현을 모성애로 표현하긴 했습니다. 이건 이해를 돕자고 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시기에 그 말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은 근본 본성은 삼위일체 때문에 동일하지만 약간 다른 면이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신성도 가지고 계신 분이고 또한 인성도 가지고 계신분입니다. 그래서 사실 논리적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바다에서 꼬마와의 유명한 일화는 다 아실 것입니다.
어느 성인이 말씀했습니다. 하느님을 이기는 건 기도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갑자기 그 성인 이름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표현으로 생각해보면 건방진 표현처럼 보입니다. 야곱도 하느님과 겨루어 이겨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건 하느님이 그렇게 인정을 해 주신 것입니다. 기도는 소리를 내는 기도도 있지만 소리 없이도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바로 생각 같은 것입니다. 마음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성체조배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성체조배를 통해서 성체 속에 있는 하느님을 우리는 현시된 그 모습을 통해 보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의도적으로 의식을 하며 그렇게 해서 하느님과의 교감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처럼 우리는 기도 즉 하느님과의 우정어린 대화인 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만나게 되는데 그 만남을 하는 건 단순히 우리가 마치 연인을 만나는 것과도 같은 모습이지만 그렇게 해서는 제대로 연인의 마음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연인을 잘 이해하고 또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가 가진 아픔이나 애환이 있다면 그 애환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걸 이해한다는 건 그냥도 할 수 있지만 표현을 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고수의 단계가 되면 말이 없어도 눈빛만으도 알 수도 있겠지만 애가 배가 고프면 젖달라고 울어야 엄마가 알듯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물론 하느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다 아십니다. 아시지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실 성인은 이긴다고 하는 표현을 했지만 이 의미는 단순한 의미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겁니다.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저는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것이라고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긴다고 해서 싸움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싸움도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싸움과 같은 싸움은 아니겠죠. 그럼 어떤 싸움일까요? 인간 본성으로 살겠다는 그 본성을 탈피하고 그 본성을 제거하려고 하는 마음 같은 것입니다. 이 마음을 우리의 힘으로 없앨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십사고 간절히 이스라엘 백성처럼 부르짓어야 합니다. 그 신음소리가 바로 다르게 표현하면 기도입니다. 그러니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느님 속에 있는 모성본능을 일으킬 수 없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언감생심 하느님은 마치 모성애가 없는 비정한 엄마처럼 그렇게 우리는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됐을 때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넋두리를 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기도는 마치 우리의 요구조건을 하느님께 말씀드려 그 조건이 성취되는 걸 기도로 생각하고 그렇게 돼야 기도가 성취된 것으로 알게 되지만 그렇게도 될 수도 있지만 그게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럼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느냐 하며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역설입니다. 기도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게 그게 기도의 응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하느님은 이루어지지 않은 게 하느님 뜻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자기가 하는 기도가 성취되지 않은 게 오히려 성취된 게 되는 것이죠. 이해를 잘 해야 되겠죠. 다시 말해 무응답 같지만 그 무응답이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됐을 때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으려고 하려면 바로 그게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걸 이해했을 때 가능하게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
26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0:40 추가
마태 1,16.18-21.24ㄱ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예수님을 기르는 일에 헌신한 의로운 요셉 성인을 기리고, 성인의 믿음과 덕을 본받기로 다짐하는 날이지요. 우리가 요셉 성인을 두고 ‘의롭다’고 하는 것은 그가 ‘법 없이도 살 정도’로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가 아닙니다. 그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분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내적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노력해야 할까요?
먼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나라는 존재를 성찰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생명과 은총을 ‘빚진’ 존재들입니다. 그분께서 나를 창조하시어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 이 꽃다운 삶을 누리지 못했을 겁니다. 또한 그분께서 내 삶의 모든 과정에 걸쳐 은총과 축복을 내려주시지 않았다면 고되고 어려운 이 인생길을 지금까지 걸어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처럼 ‘피조물’이라는 지위를,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입은 자’라는 처지를 망각하고, 마치 창조주처럼 다른 사람을 심판하거나 단죄하려 들면 내가 지닌 의로움이 깨져버리고 맙니다. 임금의 뜻에 따라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그에게 빌려준 것을 받아내기 위해 감옥에 가두기까지 한 ‘무자비한 종’에게, 임금으로부터 입은 ‘은혜’가 고스란히 갚아야 할 ‘빚’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시라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그 믿음을 나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웃 형제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실천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려고 해도 내가 송구함과 죄책감 때문에 차마 그분 앞에 고개를 들고 서지 못하는 겁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은 내 부끄러운 과거가, 그 과거에 대한 후회와 탄식이 내 양심을 아프게 계속 찌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요셉이 ‘일반인’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결정들을 연이어 행한 것도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해서 율법을 어긴 다른 사람을 심판하거나 단죄할 권한을 갖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무기 삼아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피조물인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건 그분 뜻에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목숨을 살리고자 그녀가 혼인하여 같이 살기 전에 임신했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파혼하기로 결정했지요. 그렇게 하면 오히려 자신이 정혼자를 특별한 사유도 없이 버린 ‘나쁜 사람’이 되는데도 그 억울함마저 사랑으로 기꺼이 끌어안은 겁니다. 한편, 꿈속에서 주님의 천사가 보여준 환시를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된 요셉은 기꺼이 그분 뜻대로 행합니다. 그러기 위해 인간적인 즐거움들을 포기하고 무거운 책임까지 떠안아야 했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기에 기꺼이 그렇게 한 것이지요. 이와 같은 사랑과 순명을 통해 요셉은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우리가 기념하고 본받아야 할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