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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 재앙(8)
출 10:12-20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 땅 위에 네 손을 내밀어 메뚜기를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여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모든 채소를 먹게 하라
13 모세가 애굽 땅 위에 그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동풍을 일으켜 온 낮과 온 밤에 불게 하시니 아침이 되매 동풍이 메뚜기를 불어 들인지라
14 메뚜기가 애굽 온 땅에 이르러 그 사방에 내리매 그 피해가 심하니 이런 메뚜기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
15 메뚜기가 온 땅을 덮어 땅이 어둡게 되었으며 메뚜기가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애굽 온 땅에서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아니하였더라
16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 이르되 내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죄를 지었으니
17 바라건대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
18 그가 바로에게서 나가서 여호와께 구하매
19 여호와께서 돌이켜 강렬한 서풍을 불게 하사 메뚜기를 홍해에 몰아넣으시니 애굽 온 땅에 메뚜기가 하나도 남지 아니하니라
20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출 10:12-20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네 손을 애굽 땅에 펴라. 그러면 메뚜기 떼가 애굽 땅으로 쳐들어와 우박에 의해 피해를 받지 않은 푸성귀를 모조리 먹어 치우리라.' 13) 모세가 애굽 땅 위에 그 지팡이를 쳐들자 여호와께서 밤낮 하루 종일 샛바람이 불게 하셨다. 드디어 아침이 되자 메뚜기 떼가 샛바람을 타고 몰려들었다. 14) 애굽 방방곡곡에 메뚜기 떼가 내려 앉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렇게 엄청난 메뚜기 떼가 몰려온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15) 메뚜기 떼가 온 지면 위에 짝 깔려 땅이 시커멓게 어두울 정도였다. 이 메뚜기 떼는 우박이 쏟아져 내릴 때 다행히 피해를 입지 않았던 남새밭의 푸성귀와 나무에 달려 있는 열매란 열매는 모조리 먹어 치웠다. 그래서 애굽 전역에서 풀이고 나무이고간에 푸른빛을 띠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16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들여서 일렀다 `내가 너희의 신 여호와와 너희에게 정말 잘못하였다. 17) 내가 이렇게 빈다. 제발 이번만 내 잘못을 용서해 다오. 너희의 신 여호와께 빌어 다오. 그래서 이 목숨만이라도 붙어 있게 해다오.' 18) 모세가 바로 앞에서 물러 나와 여호와께 빌었다. 19) 그러자 여호와께서 바람의 방향을 바꾸시어 갈바람이 매우 세차게 불게 하셨다. 그래서 메뚜기 떼를 ㄱ) 홍해로 몰아넣으셨다. 애굽 전역에는 메뚜기가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 (ㄱ. 히브리 성서 마소라 본문에는 `갈대바다'이다) 20)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바로가 여전히 고집을 부리게 하였다. 바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보내지 않았다.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 재앙은 밀과 나맥이 한창 싹이 나서 자라는 시기, 즉 봄이 시작되는 2-3월경입니다.
여덟 번째 재앙 메뚜기를 올라오게 하여(12-13) 메뚜기는 원래 멀리 날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는 수백, 수천 km의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바람을 타고 날려가다가 바람이 멎는 곳에 앉을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여호와께서 동풍을 일으켜 온 낮과 온 밤에 불게 하시니 아침이 되매 동풍이 메뚜기를 불어들인지라”고 했습니다. 애굽의 동쪽은 아라비아 사막 북부이므로, 메뚜기 떼는 그곳에서 건조한 바람을 타고 애굽으로 날아오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바람, 계절, 대륙의 환경, 메뚜기 떼까지도 복종합니다(신 10:14; 시 24:1).
푸른 것은 남지 아니하였더라(14-15) 보통 메뚜기 떼는 어느 특정한 지역만을 강타하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다시 먹이를 찾아 날아가거나 먹을 것이 없어 그대로 소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재앙이기에 애굽의 전 지역만 삼켰습니다. 우박 재앙에 이어 메뚜기 재앙은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없애는 것으로 바로와 애굽에 치명적인 징벌이 되었습니다. 이 재앙에 대한 특이한 표현은 “메뚜기가 온 땅을 덮어 땅이 어둡게 되었으며”와 “이런 메뚜기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 그리고 “애굽 온 땅에서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아니하였더라”는 강조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때에도 팟종이, 황충이 즉 메뚜기 떼의 재앙으로 온 나라에 징계를 내리곤 하셨습니다(욜 1:4).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죄를 지었으니(16-20) 메뚜기 떼로 말미암아 큰 재앙의 상황을 맞자 바로는 급히 모세와 아론을 부릅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큰 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고 메뚜기로 인한 죽음에서 건져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것으로 약속한 것입니다. 모세는 재앙이 멈추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주 하나님은 동풍 바람을 바꾸어 서풍으로 애굽의 온 땅의 메뚜기를 홍해에 몰아넣으셨습니다. 그러나 재앙의 순간을 모면한 바로는 다시 마음이 완악해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의 패역함과 무지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실한 믿음과 상황을 모면하기위한 다급한 마음은 전혀 다릅니다. 성도는 진실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적용: 매일 매일 마다 당신이 만나는 자연의 환경, 건강과 질병, 생과 죽음에 관한 것 등이 우연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손길 안에 일어나는 일일까요?
부산 감천마을에는 배달의 신, 일명 '날다람쥐' 오광봉 할아버지가 살고 계십니다. 현재 88세인 오광봉 할아버지는 83세의 연세까지 새벽 신문 배달을 36년을 넘게 하셨는데요. 젊은이들도 숨 가쁘게 올라가는 가파른 언덕과 계단을 다람쥐처럼 오르내린다고 해서 동네 주민들은 할아버지에게 '날다람쥐'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어느 날 한 방송 프로그램 리포터가 할아버지께 질문했습니다. "할아버지, 이 연세에 일하시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하십니다. "힘들면 인생을 살지 말아야지! 나는 이만큼이라도 건강해서 일할 수 있다는 게 좋아요. 그리고 일해서 얻은 수입의 3분의 1 정도는 꼭 책을 사는데, 독서는 인생을 즐겁게 해요. 육체는 가난하더라도 정신은 가난하면 절대 안 돼!"
< 설 교 >
이번만
출 10:12-20 / 박현덕
애굽의 상황이 너무나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땅에 닥친 재앙이 너무나 대단해서 이제 모세의 말 한마디에 온 애굽 땅이 긴장하며 두려워 떨어야 할 판이었습니다. 드디어 모세를 통해 또 다시 메뚜기 떼들의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바로의 신하들은 다급해져만 갔습니다. 만약 메뚜기 떼들이 애굽 땅을 뒤덮는다면 조금이나마 남은 식물들조차도 완전히 다 사라질 게 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로 왕은 전혀 요동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신하들이 바로왕에게 간곡히 청을 합니다.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이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이처럼 신하들이 모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바로 왕은 마지못해서 모세와 아론을 만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 자는 누구냐?” 이때 모세는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노소와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로왕은 이 말을 듣고 역정을 냅니다. 그는 모세와 아론이 자신들에게 어떤 악한 계획을 마음에 품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부를 데리고 나가서 다시는 애굽 땅에 돌아오지 않을 심산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장정들만 밖에 나가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명합니다. 그리고는 어떤 말을 듣는 것도 거부한 채 모세와 아론을 궁정에서 쫓아내고야 말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또다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바로 때문에 메뚜기의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향해서 애굽 땅 위에 손을 내밀어 메뚜기를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해서 우박에 상하지 않은 밭의 모든 채소를 먹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윽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모세가 그의 지팡이를 들자 수많은 메뚜기 떼들이 온 애굽 땅을 뒤덮기 시작했고, 모든 나무나 밭의 채소 등 푸른 식물이라고는 남겨놓지 않고 모두 먹어치우기 시작했습니다. 신하들의 충언을 무시하고 끝까지 자기 고집의 끈을 놓지 않았던 바로로는 또다시 다급한 마음에 모세와 아론을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죄를 지었으니 바라건대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 그는 다시 한 번 우박의 재앙이 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되었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바로왕의 이러한 고백 중 ‘이번 만’이라는 말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만’이라는 단어, 이 단어는 우리에게도 전혀 낯선 단어만은 아닐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이번만’이라는 기도를 얼마나 많이 올려 드렸습니까? “이번 만,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겠습니다. 이번 만 봐 주십시오.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이번 만이라는 기도대로 우리가 제대로 지킨 적이 있었던가요?
있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번만이라는 말 속에는 우리 인생의 절박함이 녹아 있는 것입니다. 기회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다면, 또 큰 문제가 없이 일이 잘 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굳이 이번 만이라는 말을 사용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만이라는 말을 가장 간절하게 사용할 때가 언제입니까?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가 아닙니까? 이러다가는 내가 죽게 생겼다고 여겼을 때, 그 때 비로소 이번 만이라는 그 말이 가장 절박하고 간절해질 때가 아닌가요?
왜입니까? 결국 목숨은 단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죽으면 적어도 이생에서의 삶을 끝이기 때문입니다. 왜 바로 왕도 모세에게 이번만 봐달라고 했습니까? 이러다가는 백성들은 물론이고 자신마저 굶어죽게 될 판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
왕이면 뭐합니까? 죽으면 그만 아닙니까? 그랬기 때문에 그는 다급한 심정으로 이번만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물론 그는 그 이전에도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시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는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번만이라는 말은 얼마나 그의 처지가 긴박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에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강렬한 서풍이 불게 해 메뚜기를 홍해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애굽 땅에 메뚜기가 하나도 남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바로는 약속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나가도록 허락했을까요? 공교롭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또 다시 하나님께 맹세한 약속을 어겼습니다. 이번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우리도 바로 왕처럼 ‘이번만’ 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중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나의 목숨을 살려 주셨다고 고백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내 목숨뿐만 아니라, 자녀의 목숨, 그리고 사업이나 직장, 가정의 문제 등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은혜로 산다고 고백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그 기도를 지금 기억하십니까? 혹 우리는 과거의 어려움을 잊어버리고 지금의 안락함에 만족하며 살면서 그 기도를 잊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아마도 새벽기도회에 나오시는 성도님들이시라면 내가 이제 평생 주님을 섬기며 살겠노라고,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겠다고 기도하셨을 때가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바르게 섬기며 살고 있습니까? 주님께 헌신하며 삶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드리고 있습니까?
왜 저 같은 사람은 새벽기도회 설교를 위해서 출애굽기 말씀을 묵상하는 중 자꾸만 바로왕이 또 다른 나의 본래의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에는 바로와 나는 전혀 관계가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저 단순히 바로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강팍해서 자신뿐만 아니라 애굽을 모두 파멸로 이끈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저의 관심은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는 모세에게 있었습니다. 저는 모세를 닮고 싶었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묵묵히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갔던 그 광야의 삶을 동경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바로왕이 제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허름한 목자의 옷을 입었던 모세의 모습이 아니라, 화려한 왕관을 뒤집어쓰고 권좌 위에 앉아서 굴림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제 자아가 너무도 생생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한 채로 “이번만, 이번만”이라고 하나님께 또 다시 간구합니다. 여전히 나라는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교만과 자존심의 성벽이 높이 서 있고, 귀를 열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듣기보다 말하기를 즐기는 그 부끄러운 자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모세와 같은 신앙인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어느 누가 나는 바로 왕처럼 되고 싶다고 하는 분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욕은 너무도 강력하게 바로 왕을 바라보라고 요구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기도 중에도 “이번만, 이번 한 번만” 이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그 기도의 내용이 마치 바로 왕이 순간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 사용하는 그 언어를 똑같이 반복하고 있지는 않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반성해 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을 살려주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 나의 힘이 되고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을 잊지 않고 다시 기억하며 더욱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또한 헌신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메뚜기 재앙
1. 하나님과 타협하려 한 결과는 심판임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옵소서.( 출10:12 )
• 바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타협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히브리 백성을 보내라고 하셨지만, 바로는 남자만 가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뻗대고 있습니다. 끝까지 자신의 것이라며 히브리 사람을 붙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메뚜기 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타협하려 한 결과는 심판이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손을 이집트 땅에 뻗어 메뚜기들이 이집트 땅에 올라와 우박이 남긴 모든 것을 먹어 치우게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일을 누가 진행하고 계시는지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모세를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과 타협하지 않고 순종하는 사람과, 하나님과 타협하려 하는 사람이 대조적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세는 기적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과 타협하려 하고 불순종하는 바로는, 재앙과 심판을 경험합니다.
•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기적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심판받는 바로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조롱하고 조종하려고 한 결과가 심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바로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 날이 반드시 옵니다. 여호와의 날이 임할 때, 하나님은 불순종한 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그것을 알기에,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 2. 하나님의 심판은 무서움을 알고, 심판받지 않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 출10:14-15 )
• 밤낮으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동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메뚜기 떼를 몰고 왔습니다. 메뚜기들이 온 이집트 땅에 올라갔습니다. 그 떼가 매우 끔찍했습니다. 개역개정은 피해가 심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원어는 “매우 무겁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겁다”라는 말(카베드)은 “영광”(카보드)라는 이라는 말과 어근이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겁게 임하는 것이, 바로와 이집트에는 무거운 심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메뚜기 때는 무거웠습니다.
• 국제식량기구의 발표에 따르면, 메뚜기는 하루 동안 자신의 몸무게만큼 곡식을 먹습니다. 1평방킬로미터의 메뚜기 떼는 4천~8천만 마리라고 합니다. 이 메뚜기들은 성인 3500명이 먹는 양 만큼의 곡식을 먹습니다. 이 메뚜기 떼가 이집트 전역을 뒤덮었습니다. 그리고 닥치는대로 먹습니다. 15절을 읽어 주십시오. 지금까지 우박으로 피해를 입지 않고 남은 것. 그 모든 것을 먹습니다. 나무나 풀 할 것 없이 푸른 것이라고는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 요엘 1:4 에는 풀무치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었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었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엘서에 등장하는 이 네 종류의 곤충은, 서로 비슷한 종류입니다. 즉,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곤충이 네 번이나 등장하며 완전히 폐허가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중동 지방에서 메뚜기떼의 등장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메뚜기떼를 막아주는 신을 섬겼습니다. 그것이 ‘민’이라는 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메뚜기떼를 보내셔서, ‘민’의 힘이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은 무섭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에게는 구원이지만, 대적들에게는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의 무서움을 알고 바른 의의 길을 걸어야 하며, 악의 길을 걷는 사람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 3. 죄를 반복해서 짓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 출10:17-20 )
• 바로는, 메뚜기 재앙을 물리쳐달라고 합니다. 17절을 원어로 보면, “이번 딱 한번만”이라는 뜻입니다. 이번만 재앙이 지나가게. 한 번만 더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모세는 바로에게서 나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메뚜기를 한 마리도 남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바로는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주지 않습니다. 그의 말은 거짓이 되었습니다.
• 어렵고 힘들 때,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한 바로를 보십시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바로는 벌써 몇 번이나 계속 같은 잘못을 저지릅니다. 어려울 때는 모세에게 기도해서 어려움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고, 그 어려움이 사라지면 다시 마음이 굳어지면서 말을 바꾸었습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 그것이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죄인들은 언제나 한 번만 죄를 짓지 않습니다. 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곧 잡힐 것을 알면서도 그럽니다.
• 범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연쇄살인범은 각각 독특한 흔적을 남긴다고 합니다. 범행을 저지를 때마다 같은 패턴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결국 검거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고 합니다. 같은 일을 반복함으로 인해 한 패턴이 드러나게 되고, 그 패턴은 특정인을 지목할 수 있는 증거가 됩니다. 그 증거 때문에 검거하게 되고 결국 감옥에 갑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범인은 계속 범죄를 저지른다고 합니다.
• 이것이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영적으로 지혜롭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어리석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여덟 번째 재앙-메뚜기 재앙
출애굽기 10:1-20 / 손재호 목사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일곱 번째 우박 재앙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은 열덟 번째 메뚜기 재앙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케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너로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호와께서 바로와 그 신하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는 두 가지 이유를 보게 됩니다. 첫번째는 여호와 하나님의 표징(t/a 오트, signs)을 그들에게 보이고자 함이요, 두번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행하신 표징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로의 강퍅함에 대하여 여러번 보았습니다만 강퍅함이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강퍅케 할 자를 강퍅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그 하나님의 주권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 가운데서 얼마를 긍휼의 그릇으로 택하여 하나님의 긍휼의 부요하심을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아니라면 죄인을 의롭다 하여 주시는 것도 성립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따지고 공평치 못하다고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바로 강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퍅이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못마땅한 일이 없습니까? 원망과 불평하는 일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를 왜 이런 집에서 태어나게 하셨나? 나에게 왜 이런 남편, 이런 아내를 만나게 하셨나? 왜 나에게는 이러한 일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가?’ 이러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없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못마땅하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강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비치 아니하면 계속하여 재앙이 내리는 것입니다. 꼭 열 가지 재앙만이 재앙이 아닙니다. 애 먹이는 사람을 옆에 붙여주시는 것을 통하여서도 우리의 마음을 낮추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치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어느 때까지 네가 겸비치 아니하겠느냐?” 곧 어느 때까지 마음이 겸손하고 낮아지지 아니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강퍅이란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누구관대’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범죄한 이후에 생긴 인간의 마음입니다. 모두가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있기에 모두가 강퍅하여 질대로 강퍅하여 있는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오직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우리이지 않습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기분이 좋습니까? 아니죠. 쓴 뿌리를 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도록 우리로 하여금 어려움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강퍅하여진 마음이 말씀으로 깨어져서 부드러워지고 낮아진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는 것입니다(마 5:3). 우리의 마음을 오늘도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낮추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낮추어지지 아니함이 강퍅이고, 교만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미 속은 곪을 대로 곪아 있는데도 계속하여 회칠한 무덤처럼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범죄 한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일곱 가지 재앙으로 인해 애굽의 살림이 피폐해졌습니다. 짐승이 독종으로 죽고, 우박으로 죽었습니다. 우박은 곡식과 나무까지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런데도 바로는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퍅인 것입니다. 이러한 강퍅을 하나님께서 다 드러내심으로 인간이 어떠한지를 지금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메뚜기 재앙이라고 경고를 합니다. 4절에 보면 “네가 만일 내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일 내가 메뚜기로 네 경내에 들어가게 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메뚜기 재앙이란 참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메뚜기 재앙이 잘 없기 때문에 그 재앙의 무서움을 잘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몇 년 전에 충청도에서 여치 재앙이 한번 온 적이 있는데 그때 여치가 과일까지 갉아먹었습니다. 지난주에는 해남에서 메뚜기 떼로 인해 많은 농작물이 피해를 입고 있다는 보도를 봤습니다. 이처럼 메뚜기 재앙은 우박 재앙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모든 푸른 것들을 완전히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뚜기 재앙은 생존권이 달린 무서운 재앙인 것입니다.
5-6절을 보면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네게 남은 그것 곧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들에 너희를 위하여 자라는 모든 나무를 먹을 것이며 또 네 집들과 네 모든 신하의 집들과 모든 애굽 사람의 집들에 가득하리니. 이는 네 아비와 네 조상이 세상에 있어 옴으로 오늘까지 보지 못하였던 것이리라 하셨다 하고 돌이켜 바로에게서 나오니”라고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메뚜기 재앙을 경고하고 나오자 바로의 신하들이 바로에게 간청을 합니다. 7절을 보면 ‘지금 애굽이 망한 것인 줄 모릅니까? 왜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까? 빨리 항복하여 우리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바로를 설득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자존심이 있지 그렇게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신하들이 다시 모세와 아론을 불러왔지만 바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러 갈 자가 누구냐”고 합니다. 아직도 완전히 항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는 어른들만 가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23:17절에 보면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고 했습니다. 여자나 어린이는 성전까지 올라오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를 드릴려면 남자 어른들만 가도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바로는 이 타협안을 통해서 여자와 아이들을 볼모로 잡아두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9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은 남녀노소, 짐승까지 다 데리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로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이 자신의 재산인데 그들이 다 떠나면 재산이 통채로 날아가는 것이 되기에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단지 어른 남자들만 가서 제사 드리는 것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짐승들까지 다 데리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볼 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먼저 떠남이 전제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아니함이 메시지가 되는 것처럼 애굽의 상황에서 떠남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아론이 거절하자 바로가 너희의 경영이 악하다고 하면서 그들을 쫓아냈습니다. 10-11절을 보면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 어린 것들을 보내면 여호와를 너희와 함께하게 함과 일반이니라. 삼갈찌어다. 너희 경영이 악하니라.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고 했습니다. 바로는 자신이 다 망한 것을 알고서도 아직도 자신의 자존심을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바로를 통해서 우리의 고집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의 강퍅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모세와 아론을 쫓아내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만의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이 쫓겨나고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강퍅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꺾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여 내셨는지,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알고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다시 보면 “너로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했습니다. 왜 한꺼번에 재앙을 퍼부으시고 단번에 출애굽 시키시지 아니하시는지를 2절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과정들을 너희의 자녀들과 자손들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출애굽을 행하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이러한 강퍅함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꺾으시는가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도 너희의 마음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교육입니다. 바로만 목이 곧고 강퍅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역시 목이 곧은 백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48:4절에 보면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쇠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목도 얼마나 곧은지 도대체 하나님 앞에 겸손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출애굽의 모든 상황들이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에게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만 섬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26-27절을 보면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고 했습니다. 애굽을 여호와께서 치실 때의 이야기를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너희가 구원받아 나왔는지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로워서 구원받아 나온 것이 아닙니다. 착해서 구원 받아 나온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이 당하는 여러 가지 재앙들을 함께 당하지 않은 것은 결국 유월절 어린 양의 피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박이나 메뚜기 재앙이 닥치지 아니한 것도 어린 양의 피가 소급 적용되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박이나 메뚜기 재앙을 당하지 않아도 장자가 죽었다면 애굽과 같은 재앙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퍅치 아니함이란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것이 강퍅치 아니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계속된 가르침으로 전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는 강퍅하여 망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가르쳐야 합니까? 신명기 6:4-15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가르치는 내용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그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순종치 아니하는 것이 바로와 같은 강퍅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95편을 보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찌어다.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내가 사십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시 95:1-11). 그렇습니다. 바로의 강퍅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의 강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강퍅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시대 우리에게는 어떻게 말씀합니까? 역시 주님의 말씀에 강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1-19절을 보면 구약을 한 장으로 요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강퍅치 아니함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자신의 힘을 믿고 자신을 의지하며 자기 인생을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의 강퍅이며 이스라엘의 강퍅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가르치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오늘 우리에게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낮아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강퍅치 아니한 심령입니다. 이것이 안식의 길입니다.
오늘 본문 12-15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애굽 땅 위에 들어 메뚜기로 애굽 땅에 올라와서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모든 채소를 먹게 하라. 모세가 애굽 땅 위에 그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동풍을 일으켜 온 낮과 온 밤에 불게 하시니. 아침에 미쳐 동풍이 메뚜기를 불어 들인지라. 메뚜기가 애굽 온 땅에 이르러 그 사방에 내리매 그 해가 심하니. 이런 메뚜기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러라. 메뚜기가 온 지면에 덮여 날으매 땅이 어둡게 되었고 메뚜기가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애굽 전경에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애굽 땅 위에 지팡이를 드니 동풍이 메뚜기를 불어 들여 애굽 온 땅을 덮었습니다. 우박에 상하지 않은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어 치워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16-17절에 보면 이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득죄하였으니. 청컨대 나의 죄를 이번만 용서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을 내게서 떠나게 하라”고 했습니다. 18-19절에 보면 이에 모세가 바로에게 나가서 여호와께 구하매 여호와께서 돌이켜 강렬한 서풍을 불게 하사 메뚜기를 홍해 바다에 불어 넣어 애굽 온 지경에 메뚜기가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바로가 살만해 지자 또다시 그 마음이 강퍅해져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강퍅한 바로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강퍅으로 인해서 바로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바로와 같이 강퍅치 않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로 우리 자녀들에게 바로의 교훈을 잘 가르쳐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 앞에 겸비하여 그 말씀을 따라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이 땅의 어린이를 이렇게 놔둘 순 없습니다
출 10:10-11 / 이동춘 목사
흔히 영국 사람들은 돈을 벌면 노인들을 위해 많이 쓰기 때문에 영국을 노인들의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프랑스는 돈을 벌면 자기들을 위해 많이 쓰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천국이라고 합니다. 미국 사람은 돈을 벌면 어린이들을 위해 많이 쓰기 때문에 어린이들의 천국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아는 미국은 장애인, 노인들은 물론 특별히 어린이들에게 많은 교육적인 관심, 인격적인 배려를 아끼지 않는 나라입니다. 어린이들 졸업식에선 작은 아이들인데도 꼭 그 앞에 Mr. Miss 이런 명칭을 붙여 주면서 호명을 합니다.
그런데, 자녀들의 교육적 관심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민족이 있습니다. 우리 한 민족입니다. 얼마나 교육에 관심이 많은지를 보여주는 단면이 있습니다. 연말이 되면 대입 수능 고사라는 것을 보는데 그 중에 제일 마음 졸이는 시험이 영어 듣기 시험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이 되면, 수험생들이 시험 치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그 시간에 맞추어 전국적으로 비행기 이착륙을 잠시 중단시킵니다. 이런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한국 사람들이 미국 이민을 결정하는 이유의 약70% 이상이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좋은 교육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교육 기회를 얻고 만들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사실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겉과는 다른 면이 많습니다.
어느 책을 보니, 아이들을 기를 때 미국인 부모들이 제일 많이 쓰는 말이 “share it.” 그것 다른 아이들과 나누어서 쓰라는 말입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말을 듣고 자라서 그런지 미국 사람들은 이웃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 일처럼 달려가서 도와줍니다. 어느 나라 아이들이 배고프고 굶주리다 는 이야기를 들으면 후원을 선뜻합니다. 어느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면 자기의 아들, 딸 군인들을 기꺼이 파송해 줍니다. 일본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얘야! 남에게 폐 끼치지 말아라.”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일본인들은 공중도덕을 잘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우리 한국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쓰는 말은 “야! 절대로 기죽지 마라!” 우리 아이 기가 죽으면 안 됩니다. 남의 아이 기를 꺾어도 좋은데, 내 아이의 기는 절대로 살려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자라난 아이들은 커서도 자신도 모르게 자기중심적이 되고, 남과 나눌 줄을 모르게 되기 쉽습니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이 충고하기가 겁이 난다고 합니다. 기죽지 않고 자라난 아이들이기 때문에 어른들이 충고를 하면, 이 아이들이 사람의 나이는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덤벼 들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어떤 교육을 받고 자라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어릴 적의 교육에 대해서 우리 한국 부모님들이 관심을 갖기 이전부터 사단은 이미 그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 문을 출애굽기 10장에 있는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하게 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출 10:10-11)
내 백성을 보내라고 모세가 이야기 할 때 바로가 처음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그 장정들을 놓친다고 하는 것은 애굽 경제가 휘청거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막대한 노동력이 하루아침에 빠져 나간다고 하면, 애굽의 경제가 주저앉을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가 계속해서 애굽 땅과 궁정에 임하게 될 때에 조금씩 누르러 지기 시작하면서 타협을 제시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 제시한 타협안이 오늘 본 문입니다. “좋다 너희 어른들은 이 땅을 떠나도 좋다.” 여러분! 이 말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애굽 경제가 휘청거릴 수도 있는 그런 선택입니다. 너희 어른들은 떠나가도 좋다. 그러나 아이들은 두고 가라는 것입니다. 바로가 다른 것은 다 양보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어린이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바로가 아이들을 붙잡고 있으려 했을까요? 그것은 볼모로 잡으려했던 겁니다. 아이들을 볼모로 잡으면 어른들은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우리가 중국에 속국이었을 때, 중국이 우리에게 써먹던 방법입니다.
어린이는 몇 살까지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13세가 되면 요즘도 소위 성인식을 성대하게 치러줍니다. 그때부터 어른으로 취급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관습으로 볼 때 본문에서 말하는 장정이라고 하는 것은 만13세가 넘은 사내아이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바로가 한 말은 오늘날 자녀들의 신앙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가정과 교회와 학교의 지도자들에게 무언가 굉장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13세 이전에 신앙 교육을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어쩌면 그 아이의 영혼은 사단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조급한 마음을 다시 갖게 됩니다. 어릴 적 신앙 교육이 참 중요합니다.
요즘의 젊은 부부 중에는 “아이들에게 어릴 적부터 강제적으로 신앙을 주입시킬 필요가 있겠나, 나는 자랄 적에 부모로부터 그렇게 자랐지마는 내 자식들은 자유분방하게 키우고 싶다. 지금은 21세기가 아닌가? 자기들이 성장하면서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신앙생활이 절실하게 되면 알아서 잘 할 것이다.”라며 소위 방임주의로 나가는 부모님들이 간혹 있습니다. 언뜻 듣기에는 개방적이고, 열린 태도인 것 같고, 또 생각이 트인 사람처럼 보일런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 집에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데, 그저 알아서 잘 자라겠지 하고 사람의 손을 전혀 대지 않고 방치해 놓은 정원과도 같습니다. 당장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지만 한 주, 두 주, 한 달이 지나다 보면 거기에 우리가 뿌리지도 않은 잡초들이 우거집니다. 마침내 그 아름다운 정원의 모양이 점점 헝클어집니다. 신앙의 방치는 이와 같습니다. 그러니 어릴 적 신앙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구세군의 창시자의 어머니인 캐더린 여사는 8남매를 신앙인으로 잘 키운 분으로 유명합니다. 사람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우리는 아이를 한 둘 키우기도 힘이 드는데, 어떻게 여사님은 8남매를 한결 같이 주의 종을 잘 돕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키우셨습니까? 그 비결을 알려 주십시오.” 여사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다른 거 없습니다. 마귀보다 한 발 앞서서 손을 쓴 거 밖에는 없습니다.” 여사의 말을 다시 하자면, 아이가 성장하면서 나쁜 습관을 배우기 전에 좋은 습관을 먼저 배우게 했다는 것입니다. 나쁜 말을 배우기 전에 긍정적이고, 좋은 말을 먼저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나쁜 지혜를 사단이 가르치기 전에 먼저 선한 지혜, 남에게 도움을 주는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한 발 앞서 가르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마귀의 교육 영향권 안에 사람이 들어가 버리면 거기서 빠져 나오기까지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신앙 교육은 저절로 알아서 때가 되면, 자기가 알아서 할 때까지 그냥 방임해 두는 것이 아니라 어리면 어릴수록 좋은 줄로 믿습니다. 많은 믿음의 영웅들은 어릴 적에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이자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을 지낸 죠나단 에드워드는7살 때 구원을 받았으며, 유명한 평신도 성서 주석가 매튜 헨리는 11살 때 개종하였으며, 영국의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12살 때 이미 영적으로 큰 각성을 체험하여서 영국의 영계를 이끌어 가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릴 적 받은 은혜가 평생을 갑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교육도 조기 교육한다고 난리인데, 신앙 교육은 말해 뭐하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가 보면, 하나님의 군대와 사단의 군대가 가장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는 최전선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성인이 아니라 바로 어린이들입니다. 왜냐하면 성인들은 이미 인생의 많은 시간들을 사용했고, 그리고 이런 저런 것들로 그의 심령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마음이 이미 굳어져 버렸습니다. 거기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서 그의 심령 속에 뿌리를 내리고, 그의 생각과 의식과 습관을 변화시키기까지는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은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린이, 청소년들은 아직 꿈이 많고, 비교적 세상의 때가 덜 묻었기 때문에 그 안에 어떤 꿈과 비전을 넣어 주는냐에 따라서 그의 장래의 운명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만히 있는 사이에 사단은 어린 아이의 심령을 먼저 점령해서 다른 좋은 생각이 들어가기 전에 자기의 생각을 그 밑바닥에 깔아 놓으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선교 학자인 윌버트 체프만 박사가 4,500명이 모인 집회에서 그들을 상대로 앙케이트 조사를 했습니다. “그대는 몇 살 때에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10살 이전에 영접했다고 대답한 사람이 400명, 10살부터 14살 사이로 대답한 사람이 600명, 14세 이전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약1,000명쯤 되었습니다. 그리고 16세 지나서 20세 사이, 청년 초기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1,000명, 30세가 지나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24명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에 흥미를 느낀 체프만 박사는 이 연구를 더 확대해서 세계 각처의 많은 그룹들을 대상으로 보다 광범위하게 조사를 해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통계를 얻었습니다. 25세 이후에 예수를 믿은 사람은 천 명당 한 명꼴이었고, 35세 이후에 예수를 믿은 사람은 5만 명당 한 명꼴이었고, 45세 이후에는 20만 명당 겨우 한 명꼴이었고, 55세 이후에는 30만 명에 겨우 한 명꼴이었고. 75세 이후에 예수를 믿은 사람은 70만 명중에 겨우 한 명꼴로 예수를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아이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하루라도 빨리 예수님을 만나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더욱 더 분명하게 신앙 안에서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자녀교육과 어린이 교육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가정으로만 되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교육이 병행되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학교가 아니라 교회입니다. 언성을 좀 높이겠습니다. 언제부턴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녀의 교육과 인생을 세상교육에 내맡기고 교회학교를 홀대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이는 무엇보다도 소위 믿음의 부모라고 하면서 세상의 가치관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대표적인 것이 출세주의, 가족주의, 체면주의, 획일주의, 경쟁주의입니다. 이렇게 욕심과 허영을 부추기는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 함몰되었거나 강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를 충족시켜주지 않는 교회학교에 무관심한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다걸기하고 있는 이 땅의 교육은 심각한 문제에 빠졌습니다. 교육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사교육이 번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교육은 지식을 사고파는 곳이지 인성을 함양시키는 곳이 아닙니다. 철저한 경쟁의식을 주입시켜 남보다 내가 잘되는 법을 배우는 곳입니다. 이처럼 사교육은 공교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사교육에 다걸기(올인)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조국의 미래는 침울할 뿐입니다. 공교육이 살아나지 않는 한 조국의 장래는 불투명합니다.
그러나 공교육이 다시 제 위치를 찾는다고 조국의 장래가 장밋빛이 될까요? 아닙니다! 이 땅에 모든 공교육은 사단이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인본주의와 물질주의를 숭배하도록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교육에 다걸기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다걸기는 교회학교에 두어야 하는 겁니다. 진정한 바른 사람을 만들 수 있는 곳은 교회학교뿐이 없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제대로 가르치고, 이것을 바탕으로 거룩한 인생을 만들어가게 할 수 있는 곳은 교회학교밖에 없습니다. 물론 바르게 세워진 기독교 학교, 미션 스쿨이 이 일을 함께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교회학교에 우리의 아이들은 보내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학교 교사를 확보하고, 지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학교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이들이 어느 학교보다도 교회학교에 오는 것을 가장 신나고 행복하게 여기도록 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학교가 살아야 내 자녀가 살고, 내 자녀가 살아야 이 민족이 산다는 사실을 깨달읍시다. 우리가 너무도 사랑하는 아이들이 바르게 자랄 곳은 교회학교밖에 없음을 알고 여기에 온전히 투자합시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은 이 막중한 사명을 깨닫고 온전히 헌신할 수 있길 바랍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맛있는 것은 사주고, 좋은 옷을 사주고, 신나는 장난감을 사주고 하는 것 다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법을 전수해주고, 주일성수가 최고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해주는 것만큼 최고의 선물은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이 땅의 어린이들이 사단의 영향 하에 살게 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단은 갈수록 우리의 아이들을 집요하게 공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심을 합시다. 교회학교를 다시 살려 매일이 어린이날이 되게 합시다. 그래서 하나님께 칭찬을 받읍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