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을에서 산비탈을 개간해 배나무를 심었다. 마을 사람들은 배를 수확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물을 주고 거름을 날랐다. 배나무는 해마다 쑥쑥 자랐다. 그들의 노고에 보답하듯 몇 년 뒤 가지마다 튼실한 과일이 달렸다. 그런데 나무들에 열린 것은 배가 아니라 빨간 사과였다. 애초에 묘목을 잘못 고른 탓이었다. 오랫동안 배만 열리기만을 고대했던 사람들은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그것이 사과라는 진실을 부정하고 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마을에 이미 사과나무가 있었기에 그 나무에서 열리는 과일을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을 사과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똑같이 생긴 과일을 놓고 하나는 배, 하나는 사과라고 부르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힘들여 산비탈에 심은 ‘배나무’의 존재를 부인하는 일이 될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혼란을 피하기 위해 기존의 사과도 배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그 마을에서는 사과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청준의 단편소설 ‘미친 사과나무’의 줄거리이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선 ‘인지부조화’라고 부른다. 자신이 믿는 것과 실제 현상 간에 괴리가 생기면 이를 일치시키기 위해 자기합리화를 시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1954년 미국에서 한 사이비 교주가 “조만간 대홍수가 일어나지만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비행접시로 구출된다”고 외쳤다. 운명의 날이 도래했으나 홍수는커녕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거짓이 탄로 났다면 당연히 교주는 달아나고 교회는 문을 닫아야 옳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들의 믿음은 외려 더 견고해졌다. 신도들은 “우리의 믿음 덕분에 세계가 구원받았다”는 교주의 말에 축제까지 벌였다.
이런 사이비 종교 같은 일이 요즘 우리 사회에도 버젓이 일어난다. 어떤 학부모가 자기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표창장 등을 위조한 사실이 드러나자 그의 지지자들은 “정치적 공격이 본질이다”라고 소리친다. 사과를 배라고 부른 소설 속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지지자들이 거짓을 진실로 부르고 불의를 정의로 우긴다면 그들의 마음 속에 진실과 정의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소설 속의 마을에서 사과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이청준의 소설 속에서는 과일을 팔러 시장에 갔던 마을 사람들이 사과를 배라고 부르다 다른 마을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한다. 모멸감을 참지 못한 마을 사람들은 결국 산비탈로 몰려가 ‘미친 사과나무’를 죄다 뽑아버렸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일부 지지자들은 여전히 사과를 배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