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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11. 경 본인의 모습, 짧은 바지가 촌스럽지만....
다음은 1981. 4. 경 고시준비생들의 잡지 "고시계" 4월에 게재된 저의 고시합격기입니다.
이제 20년 하고도 7년이 흘러 여러 법원에 근무하면서 많은 인생역정이 있었지만,
고시합격 만큼 짜릿한 기억은 없습니다.
27년 전의 일을 반추하면서 젊은 날의 초상을 공개합니다.
너무 길어 답답하신 분은
일부만이라도 눈요기해 주시기를...
꿈만 같이 세월이 흘러 여기까지 왔습니다.
젊은 날의 기억이 주마등 처럼 스쳐갑니다.
지나보면 별거 아니지만
지나기 전에는 항상 기대와 설레임으로 가득하였지요.
이제 내일에 대한 설레임이 적은 것을 보니,
이젠 저도 왠만큼 나이를 먹은가 봅니다.
2007. 3. 21. 황 현 호 드림....
不屈의 意志
- 제22회 사법시험 합격기 -
1. 서언
인생에는 영원한 승리도 영원한 패배도 없다는 말이 있다. 오직 일시적 승리나 일시적 패배가 있을 뿐이다. 인생에는 승리와 패배,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어 나타나는 것이니까 일시적 패배에 낙망하여 합격에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된다. 필자의 수험생활도 승패의 연속이었다. 1차 3회, 2차 2회를 應試하였는데 오직 1번의 합격만 있었으니 합격보다 불합격이 더 많았다. 1차 시험의 연속패배에서 겪은 고통은 2차 시험의 합격에서 느낀 기쁨보다 더 깊이 마음속에 刻印되어 있다. 아무튼, 낙방에 좌절하지 않고 不屈의 意志로 끈기 있게 공부한 것이 합격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필자가 전체 5년 동안의 수험기간동안 내내 끈기 있게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전반부 3년 동안은 자기 통제력을 잃고 방황하였던 생활의 연속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후반부 2년 동안 불굴의 의지로 공부한 결과 합격의 보람을 얻을 수 있었다.
요컨대, 필자가 수험생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합격에의 결정적 기회가 도래했을 때 전력을 집중하여 노력하면 합격의 영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사법시험 합격인원이 140명에서 300명으로 대폭 증원되었다. 사법시험 준비생에게는 이것이 결정적 기회라고 생각된다. 讀者諸賢은 부디 이 기회를 잘 살려 합격의 영광을 쟁취하시길 바란다.
2. 고시공부의 시작
자유와 낭만이 대학생활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 1학년 겨울방학 때 고시공부와의 첫 접촉이 있었다. 대학 입학 때부터 계속해온 아르바이트를 끝내버리고 부모님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여 고시정복의 길을 나섰다. 큰 것을 얻기 위하여서는 작은 것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고시와 무관한 모든 것에서 떠나버렸다. 이리하여 비교적 일찍 고시공부를 決行한 것은 친형이 1974년 5월, 제15회 행정고시에 최연소로 합격한 것에 기인한 바가 컸다.
법학과 소속이었으므로 고시과목과 定評있는 교과서에 관하여는 무난히 알 수 있었다. 기본 3법을 중심으로 하루 100페이지씩 읽어나갔으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마치 고시공부의 걸음마를 하는 기분이었다. 모르는 부분에 집착하지 않고 꾸준히 읽어 나가니 기본 3법은 1개월 만에 1회독 할 수 있었다. 형법총론은 흥미도 있고 책의 부피도 적어 방학을 마칠 때 쯤 되어서는 3회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5년 3월초 개강이 되자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벌써 기본 3법을 1회독하였다는 자만심과 학기 초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여 공부를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해 3월과 4월에는 “하루 100페이지씩 법서를 읽어 나간다.”는 당초의 목표를 거의 달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5월부터는 決斷을 내려 학교수업을 全廢하고 대구 근교의 七寶寺라는 조그만 사찰에서 공부를 하였다. 거기에 있으면서도 그 절에 있는 동료들과 雜事에 어울리는 일이 많아서 입사할 때 기대했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2개월 뒤 학기말 시험을 치려고 학교에 나가보았으나 2과목은 출석일수가 너무 모자라 실격이었다. 그 때부터 장학생과는 인연이 멀어졌다. 2학년 때부터 입사하여 독학으로 고시를 정복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무모하고 성급한 발상이었다. 하려는 의욕은 강했으나 외부적 조건과의 마찰을 극복하지 못하여 당초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2학기에는 아주 휴학을 하였다. 1학기 때 계획된 공부량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 학교수업에 많은 시간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오판한 것이다. 휴학을 하면 군대가 1년 연기되는 사정도 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隊伍의 落伍者처럼 패배의식에 공부는 더욱 할 수 없었다.
그 해 10월 말에는 제18회 사법시험 시행공고가 있었다. 그 때부터 1차에만 집중하기 위하여 경제학, 법철학의 교과서를 읽어 보았으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제학, 법철학, 국제사법의 교과서를 두어 번 읽고 모의문제를 풀어보았으나 실력이 부족하였다. 이렇게 되자 고시는 쉽게 정복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고시공부를 시작할 때에는 의욕은 있었으나 이제 의욕조차 잃게 되었다. 1976년 1월에 있었던 제18회 사법시험에는 많은 동기생들이 응시를 하였으나 난 응시원서 조차 내지 못했다. 현실에 참여함으로써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음에도 그 때는 휴학, 사법시험 不應試 등 현실도피로 일관하였다. 그 때문에 합격자 발표시까지 겪는 초조함은 면할 수 있어서 좋았다. 2학년 2학기는 혼자서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여 공부하고 군 입대를 1년 연장하기 위하여 휴학을 하였지만 글자 그대로 공부를 하지 못한 휴학이 되어 버렸다.
3. 긴 방황
3학년에 진급하였으나 생각은 더욱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갔다. 좋은 학점을 따내서 취직시의 유리한 조건을 확보해 두고 싶기도 하고, 여전히 고시공부에 집착하고 싶기도 하고, 이도 저도 집어치우고 군 입대도 생각해 보았다. 3학년 초에 군 입대를 하겠다는 의향을 부모님께 전했을 때 어머님이 안동에서 대구로 내려 오셔서 입대를 극구 만류하였다. 확고한 결심이 아니라 현실도피의 수단으로서 적당하게 군 입대를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주위의 만류에 쉽게 번복될 수 있었다. 어떤 보이지 않는 끈이 있어서 나를 무한정 도피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의욕만 있다고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최초의 정열을 유지하면서 공부하려면 중도에서 당하게 되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하고 끝까지 버텨내는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최초의 정열은 뜨겁다. 그러나 지혜와 인내심이 없으면 쉽게 식어지게 된다.
3학년 1학기는 이렇게 식어진 정열로서 의욕 없이 공부하였다. 고시합격에 대한 회의가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고시의 진도는 그 때까지 기본 3법에만 맴돌고 있는 형편이었다. 민사소송법은 학교에서 강의를 들었으나 멍청하게 시간만 때웠을 뿐 訴의 槪念조차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학기말 시험에는 거의 백지를 내다시피 하여 학교시험에서조차 科落의 수치를 겪어야 했다.
3학년 2학기가 되자 心身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어떤 전기가 마련되지 않는 한 그대로의 상태로는 공부가 진척될 수 없었다. 수업시간이 되면 기계적으로 출석은 하였지만 시간만 때울 뿐이었다. 공부는 제대로 되지 않아도 몸부림은 쳐야 했기에 신체는 허약해져갔다. 산만한 생활을 정리하고 마음의 수양을 하기 위해 일기를 써 보았다. 두어 달 가량 써 보았지만 일기 역시 풀린 마음의 연장이었으므로 반성의 유용한 수단이 되지 못하였다. 자신의 행동에 반성할 점이 있으면 그 때마다 마음속으로 반성하고 바른 방향으로 실천하면 되는 것이지 바쁜 생활에 일기를 써야 반성이 된다는 것은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3학년 2학기가 다 지나도록 고시공부는 시작단계에 머물고 있었고, 소송법, 행정법, 상법을 독파할 때 느끼는 고시공부의 열풍은 아직 불지 않고 있었다. 기본 3법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본 3법을 2내지 3회독하면 바로 여타과목으로 공부를 이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공부기간을 단축할 수 있고, 고시공부의 전체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교수님은, “기본 3법을 공부할 때까지는 학생들이 대부분 진도에 맞추어서 따라오나 3학년이 되어서 소송법, 상법 등에 들어가면 낙오하는 자가 속출한다.”는 말을 하였다.
정복하지 않으면 정복당한다는 말이 있다. 고시합격을 목표에 두었으면 의지와 지혜, 인내심을 종합하여 이를 정복하여야 한다. 합격에 대한 환상적 기대로 합격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합격의 기대를 협격의 현실로 연결시키고야 말겠다는 굳은 신념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이러한 신념을 갖지 못했다. 신념 없이 흔들렸던 생활을 계속하였으므로, 제19회 사법시험이 두어 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마음을 가다듬어 시험에 대비할 수 없었다. 1977년 3월에 보게 된 이 시험을 다시 피할 수는 없었다. 원서를 접수시키고 난 후부터는 그 동안 계속 놀아난 것에 대한 분노가 북받쳐 거의 狂的으로 1차 시험에 몰두하였다. 생소한 과목인 經濟學, 法哲學, 國際私法, 文化史에만 집중적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1달 가량 악착같이 공부하였지만 결과는 2.2점 가량 모자라는 점수로 낙방하고 말았다. 최초로 考試關文에 노크를 해 보았으나, 대답은 No였다.
우물 쭈물하다가 4학년 초가 되어서 1차 시험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고 그것도 실패로 끝났으니 충격은 컸다. 시험에 실패를 하였지만 고시는 나의 숙명처럼 느껴져 이것이 고시공부를 장기간 끌어나갈 징조가 되었다. 4학년 2학기가 되었다. 이 학기는 나에게 마지막 학기가 아니었고, 휴학한 2학년 2학기 과목을 이수하여야 졸업이 되었다. 졸업은 늦어졌으나 동기생들에 비해서 1년이라는 공부기간을 더 확보할 수 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군입대, 취직 등으로 안절부절하는 동기생들을 보니 오히려 나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하숙집 룸메이트의 권유로 테니스를 배운 것도 그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하루 10시간씩 2~3년간 정신을 집중하여 꾸준히 공부하면 합격수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당시도 하루 10시간 정도 공부한 날이 많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책을 잡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의 양이 아니라 法書의 한 줄, 한 줄을 음미하면서 얼마나 농도 짙은 공부를 하였느냐 하는 공부의 질에 있다. 방황의 끝을 발견하지 못한 채 4학년 2학기를 마치게 되었다. 4학년 말이 되자 졸업사진 촬영, 졸업논문, 졸업시험, 사은회 등 졸업과 관련된 행사가 나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뚜렷하게 하나 성취해 놓은 것 없이 졸업하는 것이 아쉬웠고, 다시 대학 1학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4. 시련의 연속
1978년 새해가 밝았다. 제20회 사법시험을 2개월가량 앞두고 있었다. 이번에는 필승을 다짐하면서 2개월간 집중적으로 1차 시험에 투입하였다. 법대 부속 도서실에서 취침을 하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시험의 결과는 1.6점의 부족으로 또 한 차례 낙방의 충격을 받아야 했다. 그 때는 정말 대성통곡을 하고 싶었지만 감정이 메말라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암담한 미래를 생각하니 가슴만 답답하였다.
합격자 발표일에 나는 후배 고시준비생들과 같이 술집으로 갔다. 학교 앞 술집에는 법대생들로 가득 찼다. 고시는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느니, 고시합격보다 인격수양이 더 중요하다느니 하면서 술잔을 연거푸 기울이고 있었다. 고시는 인생의 전부는 아닐 지라도 중요한 일부분은 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 데도 落榜者들의 모임에서 사법시험은 平價切下되고 있었다.
그 때부터 사람을 대하기가 부끄러웠고 두렵기조차 하였다.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부를 해 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혼자 여행을 떠나 버렸다. 경주 불국사, 의성 고운사, 안동댐, 도산서원 등지를 돌아다녔다. 안동댐에 가서는 철책의 10번째 말뚝에 “필승 제21회 사법시험, 1978년 4월 18일, 현호” 이런 문구를 볼펜으로 덧칠을 해가면서 써 놓았다. 고교시절에 봄 소풍을 갔던 백사장을 암청색의 물바다로 변하게 한 인간의 무한한 힘을 생각하면서 비탈진 댐길을 걸어서 내려왔다.
해마다 3월이면 고시합격의 기대에 가슴조이고, 4월이면 불합격의 상흔을 어루만지며 방황하다가, 5월이 되어야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는 것을 2년간 계속하였다. 이런 과정이 나의 연례행사가 될 것 같아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고시생들에게 있어서 4월은 그야말로 잔인한 달이었다.
1978년 6월에는 연기해 놓은 징병검사를 받았다. 징병검사에서 연기대상인 戊種 判定을 받았다. 그리하여 대학원을 진학하지 않고도 군 입대까지는 2년간 고시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이번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 개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제21회 사법시험에는 우선 1차만 합격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제22회 사법시험에서는 기필코 2차 시험에 합격한다는 기본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5. 희망의 발견
1978년 7월 초순, 4년 반의 대학생활을 모두 마치고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수업일정의 구속에서 해방되어 하루 24시간을 나 스스로 활용할 수 있었다. 학교수업이 완전히 끝났으므로 도서관을 피하고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부하기 위해 고향인 안동으로 갔다. 산사는 외부세계와 차단된 데서 오는 고독감이 극심할 것 같아서 여동생의 자취방에서 안동시립도서관을 오가며 공부를 하였다.
그 때까지 기본3법은 5내지 6회독 되었으나 나머지 과목은 띄엄 띄엄 학교수업에 맞추어 읽었으므로 1회독도 채 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할 때 까지 고시과목을 1회 통독하지 못한 현실을 어떻게 해서든지 타개하기로 하였다. 계획을 세우는 데는 한 치의 여유도 없는 복잡한 계획은 피하였다. 우선 1회 通讀을 하지 못한 행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을 1과목당 15일에 1회독하는 계획을 세웠다. 15일에 1과목을 1회독 할 수 있다면 남는 시간은 그 과목을 복습하든지, 문제집을 통해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든지, 휴식을 취하였고, 절대로 속도 초과의 욕심은 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1달에 2과목을 1회독할 수 있었다.
고시공부 방법에 있어서 문제집 중심이냐, 교과서 중심이냐 말이 많지만 고시공부 초기에는 교과서 중심으로 개념과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고 시험에 임박해서는 문제집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교과서는 시험에 불필요한 부분이 많고, 부피가 두꺼워 반복하여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매 과목당 기본적인 문제집을 선정하고 거기에 부족한 부분은 다른 문제집에서 오려 붙여 넣고,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교과서, 논설 등을 참조하여 문제집의 여백에다가 기재해 넣었다. 그러나 기본 문제집이 너무 지저분해서는 안되므로 글씨는 깨끗이 정자로 써 넣었으며, 우려 붙이는 것도 취사선택하여 붙였다. 기본 문제집 가운데서도 너무 난해하고 불필요하고 장황하게 설명된 부분은 삭제하고 잘 설명된 다른 문제집을 오려 붙였다.
문제집 중심의 공부는 學者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또 교과서만 읽고 합격했다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그러나 筆者의 생각으로는 교과서를 2 내지 3회독하면 문제집을 보는 것이 得策이라고 생각한다. 한정된 시간에 효과적으로 공부하고 답안을 작성하기 위하여는 문제집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수험생은 학문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學者와 같이 몇 년이고 공부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으므로 경제적인 공부 방법을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이다.
9월 중순경 전과목을 1회독하고 나서 走馬加鞭의 뜻에서 삭발을 하였다. 특별히 마음의 동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나 3년 이상 붙어 다니던 방황의 어두운 그림자를 말끔히 몰아내기 위하여 결행을 하였다. 이발소에서 삭발을 하려고 하니 정신 나간 사람인양 취급하였다. 그외 만나는 사람들도 약간의 오해를 하였으나 오랜 방황에서 돌아와 고시공부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자신에게 끝가지 좌절되지 않는 의지를 심기 위해 일종의 신체적 학대를 한 것이다.
합격에 대한 무서운 집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즈음 나의 공부는 강한 추진력을 가지면서 진척되어갔다. 이렇게 공부한 결과 1978년 10월말 제21회 사법시험 공고가 날 때까지는 부족한 과목을 2회독할 수 있었다.
그 해 10월말에는 공부장소를 옮겼다. 뚜렷한 스럼프가 있어서 옮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스럼프가 오기 전에 기분을 쇄신한다는 예방적 태도에 의해서 4개월 만에 안동에서 퇴거하였다. 사법시험을 연속으로 낙방하여 스스로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고 생각되는 대구로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기분을 살리기 위하여 나에게는 전혀 미지의 세계인 서울로 갔다. 거기서는 절대 낙오자가 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일단 上京하였다. 처음에는 서울시내에 있는 私設考試院에서 공부하려 했으나, 잠자리가 불편해서 시외로 가기로 하였다. 고시잡지 광고란에 나오는 공부장소를 보고 청평쪽에 있는 松江考試院에 가게 되었다. 제21회 사법시험은 절대 놓치지 않으니라 생각하고 새롭게 생각해 보았다. 1차시험 연패의 원인이 외국어에 있다고 판단하고 외국어를 영어에서 독일어로 바꾸었다. 10여일을 독일어에만 집중적으로 매달렸다. 그러나 고교시절에 사용한 250페이지 짜리 독일어 참고서를 1회독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독일어는 매일 한 두 시간씩 공부를 하였으며 KBS에서 교양과목으로 방영하는 독일어 방송도 들었다.
경기도는 나에게 생소한 곳이었으므로 그곳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감을 둘 수 있어서 좋았다. 혼자 있을 때는 없었던 술좌석이 가끔 있었고 밤이 깊도록 한 방에 모여서 잡담을 할 때도 있었으나, 위와 같은 거리감을 두고 만나서 깊게 빠지지는 않았다.
1979년 1월 말까지는 1차와 2차를 병행하여 공부를 하고 2월 1일 부터는 1차시험에만 집중을 하였다. 經濟學과 文化史는 교과서 중심의 공부를, 법철학, 국제사법은 문제집 중심의 공부를 하였다. 2월 한달은 긴장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소화가 안되는 날이 많아 암포젤 엠이라는 위장약을 아주 큰 병으로 사놓았다.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 가량 불고기 집에 가서 육식을 하였다. 공부하는 동료들과 시험문제에 관하여 토론도 가끔 하였다. 1979년 3월 4일에 있었던 제21회 사법시험은 경희대학교에서 보았다. 오전시험은 잘 보았으나 오후 시험은 긴장감에 따른 구토증 때문에 간신히 시험을 마쳤다. 시험이 끝나니 속이 후련하였다. 매번 영어를 선택하여 50점 내외의 저조한 성적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독일어를 선택하여 80점 이상을 득점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1차 합격자 발표일 날은 청평 호수다방에서 총무처에 시외전화로 합격여부를 알아보았다. 합격이었다. 그 즉시 다방을 나와 우체국으로 갔다. 사법시험에 완전히 합격한 것처럼 들떠서 고향의 부모님께 전보를 쳤다.
1차시험을 본 후 계속 놀았으므로 2차시험을 볼 것이냐 망설였으나 경험을 쌓기 위해서 응시를 하였다. 訴訟法과 商法은 2회독 밖에 되지 않는 상태였지만 끝까지 응시하였다. 시험을 보고 나서 합격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몇몇 과목은 高得點을 한 것이 희망이었다. 60점의 헌법에서부터 17점의 형사소송법에 이르기까지 과목간의 격차가 너무 컸고, 2과목 科落에 평균 42.25였다.
1979년 5월 말에는 징병검사가 있었다. 이번에는 현역입영 판정을 받았다. 이제 마지막 한 번의 결전만이 나에게 주어졌다.
6. 줄기찬 전진
내 경험으로 한 곳에서 6개월 이상 있으니 惰性이 생겨 신선한 기분으로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해 6월부터는 고향에 있는 書堂에서 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우선 제21회 사법시험에서 과락을 맞은 형사소송법, 상법을 중심으로 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혼자 공부를 했으므로 어려운 점도 많았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어 한밤중에는 바람 소리에도 놀랐다. 필요한 서적을 사려면 대구나 안동까지 나와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고 전망은 좋아 길가는 사람들은 멀리서 볼 수 있었다. 동리 사람들은 내가 그런 곳에서 겁 없이 혼자 공부한다고 지독하다고 하였다. 오래된 정자이고 현판 같은 걸 보면서 옛날 사람들이 과거시험 공부를 하는 듯한 기분에 빠져 들기도 하였다. 심심하면 붓글씨 연습도 해 보았다.
10월이 되니 가을은 점점 깊어만 갔다. 그 즈음 나의 공부는 終半의 열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운명의 결전일을 향해 전진을 거듭했다. 10월 말에는 5개월 만에 공부장소를 옮겼다. 10.26 사태로 박대통령이 시해되는 사건이 있어 어수선하던 때에 대구 근교에 있는 고시촌인 도학동으로 갔다. 시험일까지는 5개월가량 남았으므로 거기서 그 때까지 공부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待望의 1980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비록 70년대는 그늘질 삶을 살았더라도 나의 80년대를 어찌 눈물로 보낼 수야 있느냐. 홍도야 울지 마라. 올해는 꼭 합격한다. 유행가의 한 토막을 연상하면서 합격에의 신념을 굳게 가졌다. 庚申年 원숭이 해였던 1980년 1월은 유난히 추웠다. 두툼한 누비잠바가 평상복이자 외출복이었다. 누비 잠바의 속 포켓에는 친구 류시조가 건네준 원숭이 마스코트가 항상 들어 있었다.
1월 말에는 응시원서를 냈다. 1차 連敗의 쓰라린 기억을 지우기 위해 서울지구로 원서를 제출하였다. 원서를 郵送하고 나서 병무청에 들려 입영일자를 알아보니 1980년 8월 6일이었다. 제22회 사법시험은 입대전의 마지막 시험이 되었다.
그 때는 강한 정신력이 요구되던 때였으나 座右銘을 써 붙여 놓지는 않았다. 좌우명대로 실천을 못한다면 그것을 써 놓은 것이 부끄럽고, 실천을 할 수 있다면 굳이 좌우명을 거창하게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다만 평범한 풍경사진을 붙여 놓고 그걸 보며 머리를 식혔다.
마지막에 공부하면서 제일 어려웠던 과목은 행정법이었다. 1976년도에 나온 교과서로 공부를 하였더니 부족함 점이 너무 많았다. 행정법의 新理論이 거의 언급되지 않는 책들이어서 뒤늦게 現代行政法論(徐元宇 著)을 사서 신이론을 눈여겨 보았다.
4월이 되니 마음이 매우 다급해졌다. 행정법에 너무 오래 매달리는 바람에 당초 목표했던 전과목 8회독을 달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비상작전을 감행하여 하루 15시간 이상을 공부하는 강행군을 하였지만, 형사소송법과 국사는 7회독에 그치고 말았다.
7. 집념의 승리
1980년 4월 20일, 황사현상이 심하게 일던 봄날 저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팔공산 정상을 바라보며 필승을 다짐하고, 그날 오후 비장한 각오로 上京하였다. 시험 전일에 두 과목을 다 읽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그 중 취약한 과목만 1회독 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決戰의 날이 왔다. 지난해에는 낙방했던 한성대학교 시험장에서 올해는 기필코 합격하리라 다짐하면서 시험장으로 갔다.
첫째 날의 국사는 많이 당황하였다. 제1문이 지난 해 출제된 문제와 유사하였고, “統一新羅의 村落組織”이 전혀 예상 밖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어 기억을 되살려 나갔다. 소제목까지 다는 세부적인 초안작성은 50점짜리 문제에서만 하고 나머지 문제는 큰 제목만 적어 답안의 서술방향을 제시하는데 그쳤다. 이것은 국사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도 마찬가지였다. 첫날 첫 시간으로 떨린 탓인지 점수는 가장 저조했다(51.00).
헌법의 “憲法의 特質” 문제는 교과서의 서론 부분에서 간단히 취급되고 있는 것이어서 큰 문제로서 답안을 구성하는데 상당히 어려웠다. 교과서에 있는 내용만 써서는 평범한 답안 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여러 각도에서 문제점을 파악하여 광범위하게 논점을 제시하고 기술하였다(64.33).
둘째 날의 행정법도 처음에는 많이 당황하였다. “抗告訴訟의 種類와 그 訴의 利益” 문제가 지난 해 출제된 문제와 유사하였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서술의 방향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답안을 쓰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행정법의 신이론에 관심을 가졌던 덕택에 이 문제는 풍부한 내용으로 기술 할 수 있었다(60.33).
상법은 큰문제가 Case로 복잡하게 나와 단답식 문제부터 풀었다. 지난 해 해상법에서 크게 당하여 그 부분을 유심히 봐서 “船舶賃借人”은 무난히 쓸 수 있었다. Case 문제는 시간이 촉박하여 빈약한 답안 밖에 쓸 수 없었다.
셋째 날의 민법은 “成年擬制“만 예상외였고 나머지는 適中한 문제였으나 점수는 저조하였다(52.33). 민사소송법은 세 문제 모두 문제집에 있는 것이어서 무난히 쓸 수 있었다(61.66).
넷째 날의 형법은 문제점의 포착을 잘하여 고득점을 할 수 있었다. “敎唆犯”에 대하여 10.26 사태와 관련하여 한 항목을 더 추가한 것이 고득점의 원인이었다(65.33). 형사소송법은 마지막 시간이었고 지난 해 최저점수를 받았던 과목이기 때문에 매우 떨렸다. 그러나 막상 두루마리를 펼치니 안심이 되었다. 세 문제 모두 특별한 이론 없이 평범하게 쓸 수 있는 문제였다(55.00).
시험이 끝나니 속이 후련했다. 시험기간 중 크게 실수한 것도 없었고 대부분의 답안을 8매 이상 썼으므로 득점 면에서도 유리할 것 같았다. 답안이 분실되었거나 수험번호를 쓰지 않았다든가 하는 이변이 없는 한 합격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때로부터 40일 간은 정말 초도하고 지루하게 보냈다. 합격자 발표일 날 서울 이모님 댁에서 고시계사로 연결된 나의 전화는 합격의 朗報를 알려왔다. 기쁘기도 하였지만 지난날 어려웠던 시간들에 대한 갖가지 감정이 복합되어 솟아났다. 3차 시험장에서 나의 성적이 평균 58.08로서 전체 140명의 합격자 중 9등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정말 놀랐다. 지난 번의 시험에서 14.33이나 부족한 점수로 낙방했던 쓰라린 패배를 설욕할 수 있었다. 지금도 미아리 고개를 넘어 다닐 때에는 언덕에 우뚝 솟은 漢城大學校를 바라보곤 한다. 나에게는 夢寐에도 잊을 수 없는 大勝大敗의 激戰場이었기 때문이다.
8. 합격 후기
사법시험이라는 거봉을 정복하고 나니 저 멀리 또 넘어야 하는 무수한 산이 보인다. 무한존재인 시간은 유한존재인 인간이 순간의 합격으로 언제까지나 도취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거봉정복의 경험을 살려 새로운 삶의 경지를 향해 꾸준히 전진해야 한다. 인생이란 곧 과정이며 고시합격도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지나가야 할 일시적 과정이란 사실이다.
뜨거운 강물이 내 마음의 深淵을 적시고 이제 막 흘러갔다. 젊은 날의 5년 4개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강의실의 一席에서, 도서관의 一隅에서, 고시촌의 一室에서, 亭子의 一軒에서, 山寺의 幽居에서 흘린 땀의 대가로 고시합격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에 그 동안 잃은 것도 많았지만, 고시합격을 얻었으므로 餘恨은 없다.
서투른 글로서 合格記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처절한 패배에서 당당한 승리로 연결되는 과정을 여러분에게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학생활의 과정이 순탄치 못했고, 고시공부의 기간이 길었다는 점에서 실제로 얼마 만큼의 도움을 줄 수 있을 지 두렵다. 다만 非凡보다 平凡이 未合格者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이 글을 썼다. 끝으로, 저의 고시합격을 위해 무한정의 보살핌을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합격에의 전기를 마련해준 1978년도 松江考試院 멤버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그분들에게도 행운이 깃들기를 바란다.<고시계 제290호, 1981. 4.>
첫댓글 완전히 발가벗고 나무에 올라간 듯한 느낌입니다. 너무 흔들지 마세요.
청운의 꿈을 불태웠던 어려운 시절의 님과 같은 불굴의 끊기와 의지는 이글을 읽는 모든이에게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30년간 보관해 준 사진 값은 언제 갚을려나 !
넥타이도, 바지도 짧아서리, 지금 보니 우습다. 구두도 갈색구두에....
고 3때 우리 반 담임이 K법대원서 3장을 사 오셨다. 황현호, 지찬호 그리고 나...혹시 아는 가 몰라?? 난 우여곡절 끝에 형편상 교대로 갔지만...지금 변호사가 된 자네와 한중의 상무가 된 찬호군의 모습을 함께 떠올려 본다네. 나중에 야간법대를 다니며 1차 시험에 딱 한 번 응시해 보았다네? 재미있는 과거이지. 복직된 교사가 그 때엔 천직인 줄도 모르고...참, 자네는 발가벗어도 잘 생겼네.내일 한 잔 하세, 벗은 채로....
그랬구나. 지찬호는 시험장에서 봤는데, 자네까지...
늦은밤에 23카페에 잠깐만 들어와본다고 왔다가 "제22회 사법시험 합격기 -27년 전의 자화상"- 이란 제목을 보고 발목을 잡혀 긴글 읽어보느라고 날밤샜습니다-- 오늘 고3아들 학교총회에 갔다가 복잡한 입시정보에 머리가 어팠고 11월중순까지 입시를 위해서 새벽까지 공부하는 아들을 안스러워했는데.....고시생의 세계를 읽고나니 저의 대해 쓴웃음을 지어봅니다
위의 글에서 <1차 합격자 발표일 날은 청평 호수다방에서 총무처에 시외전화로 합격여부를 알아보았다. 합격이었다. 다방을 나와 우체국으로 갔다. 사법시험에 완전히 합격한 것처럼 들떠서 고향의 부모님께 전보를 쳤다.>--< 최종합격자 발표일 날 서울 이모님 댁에서 고시계사로 연결된 나의 전화는 합격의 朗報를 알려왔다.> 이런 실제상황은 아마도 후손들에게도 영원히 기록될 영광스런 한장면이겠지요~ 황변호사님의 인간승리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당시는 당연하던 것이 지나면 이상하지요. 요즈음은 인터넷으로 순식간에 알수 있는 세상에서는 그때 그시절을 모르지요. 시외전화, 전보, 우체국... 그 땐 그거이 통신수단이었지요.
과거를 회상해보는 것도 참 의미 있는 일이다! 나는 과거를 회상하면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끄럽고 부족하고 후회스런 일들이 많아서 마음이 조급해지고 안절부절할 때가 많다! 좋은 시간들은 그리 많이 생각 안 난다! 왜 그런지 나도 생각 중이다. 참 좋은 회상기이다!
난 그 때 회색빛 담장에서 기약없는 합격을 기대하며 우울한 젊은 날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거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네.... 세월이 30년 정도 흐르면 사람의 기억도 바꾸어 놓는가봐....
저 곳이 나의 오늘이 있게한 곳이다라는 "소"는 언제 찾아도 가슴 벅차지..... 한성대학 앞 나폴레옹 빵집이 이 나라에서 제일 유명한데 함 먹어 봤나..... 보내줄까....... 장 하이........
시험친 후 한성대학에 한 번 가볼려고 했는데, 아직 안가봤다. 시험을 주간에 4일동안 보았는데, 야간대학이 아니면 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성대학이 단골 2차 시험장이었음... 요즈음은 어디인고....
벅찬 감동과 전율이 나에게도 전해지네... 영감을 잘 아는이가 그러데.. 정말 지독하다고..ㅎㅎ 지독하지 않고야 이런 영광이 있을 수 없지 안그래? 이글을 아들에게 보여줘도 될까?
영화 " Pursuit of happiness" (행복을 찾아서) 를 보았는가? 그때 느꼈는 자네의 짜릿함이 행복이라는 걸세. 자신의 에너지를 혼신을 다해 쏟아 붓고나서 획득한 성취뒤에 느껴지는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눈물 즉 행복감, 그게 바로 인생의 오르가즘 이지.우리들 대부분은 그런 행복을 느끼지 못하지.지 아무리 열심히 해서 부를 이룩해도 ,승진을 해도 ,자식이 성공한들 그건 희열에 불과하지. 자네는 행복을 맛 본 사람으로서 복 받은 사람이야. 이젠 그 복을 주위에 조금씩 나누는 연습도 해보게.
정말 촌넘으로서 장하이.... 자라나는 아그들한테 보여주어야겟다 우리아그도 공부하고있는디........
세월 한번 빠르다.... 그치?
도올이 말했던가요? "젊음은 아름다운게 아니라 고뇌라고,," 한편의 감동드라마입니다. 이 글을 읽으니 150 작은키 질녀가 이번 S대에 입학하여 고시 도전에 의욕이 불타있던데 참으로 험난한 여정을 어찌 다 넘어갈지 안스럽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공부가 재밌다고 하던데,,,ㅎㅎ. '정복하지 않으면 정복 당한다' 현호오빠! 초록이도 명심하고 살겠습니다.
意志의 한국인 황현호 변호사! 당신께 찬사를 보내며, 우리 아그도 공부하고 있다네... 어느날 내 아들이 자네 후배 되었다고 하니 '어려운 길 택했네'라고 했었지? 지대로는 열심히 파고 있네만, 뜻을 이룰 수 있을런지?
대단하이! 의지의 안동인네 자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