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모님
권 명 자
둘째인 동생 생일날이다. 형제들이 맛집에 모여 수다를 떨고 축하와 선물도 나누고, 몰려다니며 시장 구경도 하는 날이다. 나간 김에 홀로 계신 숙모님도 뵐 겸 전화를 드렸다. 반색을 하시는 목소리가 기쁨을 더한다. 노선이 바뀐 걸 모르고 탄 시내버스는 나를 당황하게 했다. 속사정을 알렸지만 늦게 도착하니 미안하다. 만남이 중요하지 늦은 들 무슨 상관이랴! 나이가 들수록 혈육의 정은 더욱 깊어지고 서로의 건강을 염려하며 만날 수 있음이 행복한 우리들이다.
숙모님께 드릴 포장한 녹두반계탕을 들고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다. 볼을 스치는 싸늘한 바람도 상큼하고 시원하다. 대문 앞에 서서 몇 번씩 초인종을 누르고 두드려도 기척이 없다. 불안하다. 전화를 했다. 벨 소리를 못 들었다면서 ‘딸깍’ 문이 열린다. “아이구, 춥지? 어서와,” 두 팔 벌려 끌어안으며 소녀처럼 좋아하시는 모습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참 잘 왔다 몸도 마음도 봄날이다.
무엇을 줄까 동분서주하시는 마음이 정겹고 안쓰럽다. 가만히 두 손을 끌어당기고 따끈따끈한 원적외선 침대에 나란히 앉았다. 살아 계신 듯 환한 미소로 반기시는 숙부님 사진 아래로 벽의 한 면을 채운 펼침막에 ‘어머니 구순을 축하합니다.’라는 문구와 가족사진이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사람은 가고 추억만 남는다.’했던가. 불현듯 숙부님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구순은 가족여행으로 아이들과 단출하게 보냈다고 하신다.
둘이는 서로의 휴대폰을 열어 사진을 보며 옛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내가 시집오니까 중학생이더니 어느새 여든이냐’고 정색을 하시며 실감이 나지 않는단다. 나와 열 한 살 차이인 숙모님은 친구인 당고모님의 중매로 결혼하셨다. 직장생활로 동료들과 어울리며 자유롭게 생활했던 아가씨가 멋진 삼촌에게 반해서 시집을 왔단다. 층층시하 대가족에, 낯도 설고, 아무것도 모르다가 닥친 시집살이의 난감함, 조카딸들에게 ‘작은엄마’라고 불릴 때마다 거북하고 이상했던 기분, 약혼 후에 동료들과 길에서 웃고 떠들었다가, 다음날 할머님께 걱정을 듣고 서러웠던 일들,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지만 아릿하고 청순했던 추억담은 아무리 들어도 재미가 난다.
숙부님을 따라 발령을 받으실 때마다 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하고, 명절이나 집안에 일이 있을 때만 모이니 잔정을 나눌 기회는 적었어도, 만나기만 하면 할 말도 많았다. 자녀들은 가정을 이루고, 작은 아버님이 정년퇴임을 하시자 두 분은 취미생활로 뜰을 가꾸고 여행도 다니면서 여유를 즐기셨다. 집안에는 철 따라 피는 꽃들과 상록수, 주렁주렁 열린 석류며, 주홍빛 감, 정성들여 가꾸신 각양각색의 국화와 그윽한 향기는 집안을 아름답고 환하게 했다.
작은아버님이 급성 암으로 돌아가시자 숙모님은 세상을 다 잃은 듯하셨다. 좋아하시던 탁구와 민요반 활동을 접고 두문불출로 10여 년을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가슴 아픈 사연이 눈물겹다.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그 날을 위해 준비를 늦출 수 없는 노년이다. 건강을 잃게 되면 요양원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이다. 자녀들의 심중을 헤아리며, 날이 갈수록 부부의 애틋하고 소중함은 건강에 마음을 쏟게 한다. 이별이 죽음보다 더 두렵게 느껴지는 건 나 뿐일까. 차분히 마음을 다독이며 생각에 잠긴다.
이튿날, 전화가 왔다. 울적하고 마음이 안 좋아서 꼭 만나고 싶다고 하신다. 정한 날짜에 작은 선물을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너랑 한정식을 먹고 꼭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고 활짝 웃으시며 포즈를 취하신다. 독사진도 챙기고 나 본 듯이 보라신다. 왠지 서글퍼지는 마음에 콧등이 시큰하다.
조카딸들에게 밥을 꼭 사고 싶다고 당부하시는 숙모님, 내 마음이라고 ‘팔순을 축하한다’고 쓴 봉투를 기어코 넣어주시며 ‘어서 가라’고 손사래를 치시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민망하고 송구스럽다. ‘이걸 주시려고 그러셨구나!’
“숙모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전화 드릴께요.”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눈물이 주르르 볼을 타고 내린다.
숙모님께서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하며 다소곳이 손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