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달마불교
권오민 저
원문 출처 http://www.sejon.or.kr/
4장 깨달음의 세계
6. 불타
(1) 성문과 독각
우리는 이상에서 깨달음의 과정과 그것의 자재와 양식이 되는 지혜와 선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의 과정은 불타의 제자 즉 불타의 법문을 듣고서 그에 따라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이른바 성문(聲聞)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학의 아라한이었다. 그렇다면 불타는 누구인가? 불타 역시 아라한이다. 불타 역시 무루의 지혜로써 일체의 번뇌를 끊었으며, 그로 인해 마땅히 고양을 받을 만한 성자[應供]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문의 아라한은 불타가 아니다. 양자는 애당초 그 출발을 달리하였다. 미혹의 범부로부터 아라한으로 나아가려는 성문의 길과 불타로 나아가려는 보살의 길은 엄격히 구별된다.
성문의 길은 누구에게든 개방되어 있었지만,
보살의 길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수행자들을 그들의 근기에 따라 성문(聲聞)·독각(獨覺)·보살(菩薩)이라는 세 그룹 즉 3승(乘)으로 나누었는데, 근기가 다른 만큼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과 도정 또한 달랐다.
≪구사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전하고 있다.
하사(下士)는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
항상 자신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며,
중사(中士)는 다만 괴로움의 소멸만을 희구할 뿐
즐거움의 희구하지 않으니, 괴로움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사(上士)는 항상 자신은 괴로워도
다른 이의 안락과 어울러 다른 이의
괴로움의 영원한 소멸을 부지런히 추구하니
다른 이의 괴로움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사는 이생 범부를, 중사는 독각과 성문을, 그리고 상사는 보살을 말한다. 즉 성문은 괴로움으로 표상되는 일체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불타의 법문을 청문하고서 그에 따라 수행하는 자이다. 이는 바로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불교 수행자들의 일반적인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점으로 인해 아비달마불교는 새로이 흥기한 대승으로부터 자리(自利)의 불교, 즉 '소승'으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사실상 대승과 소승은 그 사이의 골이 너무나 깊어, 다시 말해 양자는 이미 논의의 전제와 출발을 달리하였기 때문에 양자 사이의 우열은 고사하고 비교조차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소박하게 말해 보자면, 왜 자리인가?
2장에서 언급하였듯이 불교에 있어 세계란 결코 보편 단일한 것이 아니라 특수하고도 개별적인 것이다. 즉 세계는 개개의 유정에 의해 경험(조작)된 것이기 때문으로, 개개의 유정 또한 그 같은 세계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성을 확보하게 된다. 따라서 그러한 세계도, 그것에 의해 드러나는 개개의 유정(개아)도 비록 인연에 따라 생겨 가환적(假幻的) 존재(즉 무아)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만이 느끼고 자기만이 해소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이며, <자기> 또한 그러한 세계를 통해 확인되기에 다른 이와는 구별되는 자기만의 <자기>일 뿐이다. 그러기에 성법(聖法)을 획득하지 못한 유정을 이생(異生, prthag-jana, 凡夫라고도 번역함)이라 하지 않는가?
예컨대 어떤 한 개인의 죽음(이 또한 경험의 한 형태이다)은 그 누구도 대신 죽어줄 수도 괴로워해 줄 수도 없는 자기만의 죽음이며, 자기만의 괴로움인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비롯한 일체 괴로움의 소멸 또한 자신의 몫이며, 그래서 불타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귀의처로 삼으로[自燈明]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불타는 구원자가 아니라 다만 법의 위대한 교사일 뿐이었다.
나의 괴로움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은 나만의 문제이며, 불타의 가르침을 통해 나만이 해결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같은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앎 또한 객관적 개념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주체적으로 자각되는 것이기 때문에 욕망과 언어가 지배하는 세속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생을 거쳐오면서 익혀온 번뇌는 쉽게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앞서 살펴본 대로 기나긴 준비단계[가행위]를 거쳐야 한다. 아비달마논서에 따르면 견도에 들어 해탈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번의 생을 거쳐야 한다. 씨앗을 뿌려야 싹이 나고 싹이 나야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되듯이, 발심한 첫 번째 생에서 순해탈분(3현위)을 심어야 두 번째 생에서 순결택분(4선근)을 일으킬 수 있고, 세 번째 생에서 비로소 성도에 들어 해탈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은 첫 번째 생에 순해탈분을 심고 두 번째 생에서 그것을 성숙시키며, 세 번째 생에서 순결택분을 일으켜 바로 성도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비바사론≫에 따르면, 늦은 경우 순해탈분을 심고 일 겁 내지 천 겁을 지나도록 순결택분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도 있으며, 순결택분을 일으키고도 일생 내지 천생이 지나도록 견도에 들지 못하는 이도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같은 성문의 종성은 결정적인 존재인가? 더 이상 보살(즉 佛乘)로의 전향이 불가능한 것인가? 4선근 중 세 번째 단계인 인위(忍位)에 이르기 전까지는 전향이 가능하지만, 일단 거기에 이르게 되면 전향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보살은 유정의 이익을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유정을 교화하기 위해 반드시 악취로 나아가야 하지만, 인위에 이르면 더 이상 악취에 떨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제일법의 단계는 견도와 일 찰나의 간격도 없는 무간(無間)이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는 필시 다른 종성으로 전향하는 일없이 성문의 4과(果)를 획득하게 된다.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 대승의 유가행파에서는 성문을 무상정등각을 성취할 수 없는 종성으로 규정하게 된 것이다.
한편 독각(獨覺, pratyeka buddha, 辟支佛)이란 불타의 법문을 듣지 않고 스스로 12연기의 이치를 깨달았지만(그래서 緣覺이라고도 한다) 다른 이에게 그것을 설하지 않는 이를 말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설하지 않는 것인가? 그 역시 4무애해를 획득하였고, 과거세에 들었던 불타의 가르침을 능히 기억하기 때문에 정법을 연설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유정을 섭수하기 위한 신통도 획득하였기에 자비심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나아가 그의 말을 수용할 만한 근기를 지닌 세간의 유정 또한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인데, 어떠한 이유에서 설하지 않는 것인가? 그는 과거세의 습기로 말미암아 즐거이 하고자 아는 일이 적을뿐더러 유정들 또한 생사의 흐름에 순응한 지 이미 오래되어 그 흐름을 거스르기란 참으로 어렵고, 심오한 법을 받아들이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독각에는 부행(部行)과 인각유(麟角喩)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부행독각이란 일찍이 성문으로 있으면서 불환과를 얻은 후 스스로 아라한과를 증득한 이를 말한다. 즉 여러 사람이 한 곳에서 공동적으로 수행하였기에 '부행'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인각유(麟角喩)란 기린의 뿔이 서로 만나지 않듯이 불타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 오로지 홀로 머물려 깨달음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인각유'라고 하였다.
독각은 성문보다 근기가 예리하기 때문에 4향 4과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무학의 아라한과를 성취한다. 즉 빠르면 4생(보다 둔근인 부행의 경우), 늦으면 100겁 동안의 수행을 거쳐 유루지로써 욕계 수혹을 끊고 견도에 들기 때문에 견도 16찰나와, 무간도와 해탈도로써 색·무색계의 9품의 번뇌를 끊는 수도 144찰나를 통해 바로 아라한과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각유의 경우, 4선근의 인위(忍位)에 들게 되면 보살과 마찬가지로 일어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무상(無上)의 깨달음을 성취하기 때문에(이를 '160心一座成覺'이라 한다) 결코 다른 종성으로 전향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