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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헌용어
말(襪)
버선인데, 고려시대 왕의 말(襪)은 흰색으로 끈이 달려 있었고[『고려사(高麗史)』권 72, 여복지(輿服志)], 조선시대 왕의 예복(禮服) 말(襪)은 적색(赤色) 혹은 비색(緋色) 단(緞)으로 겉을 대고 비색(緋色) 초(綃)로 속을 대어 만들었다. 백관(百官)의 말(襪)은 각품(各品) 모두 백포(白布)였다[『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제복도설(祭服圖說)].
▶출처 : 역주 경국대전 -번역편-(한우근, 이성무, 민현구, 이태진, 권오영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말객(末客)
영문표기 : malgaek / malgaek / Commander
고구려시대의 무관직
고구려시대의 무관직. ‘말약(末若)’ 또는 ‘군두(郡頭)’라고도 한다. 대형(大兄) 이상의 관등을 가진 자로서 임명되었으며, 중국의 중낭장(中郎將)에 비정된다. 1,000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무관으로서 독립된 단위부대인 당(幢)을 지휘하는 당주(幢主)로 짐작된다.
말객은 고구려 후기의 실상을 전하는 자료에 나타난다. 따라서 이 직책이 그 전단계의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구려 관직체계가 분화되는 과정에서 그 상급 부대장격인 대모달(大模達)과 격을 달리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翰苑
<<참고문헌>>韓國의 傳統社會와 兵制(李基白, 韓國學報 6, 1977 ; 韓國史學의 方向, 一潮閣, 1978)
<<참고문헌>>朝鮮三國高麗の軍事組織(末松保和, 古代史講座 5, 1962 ; 靑丘史草 1, 1965)
말군(襪裙)
조선시대 때 여자들이 치마 밑에 입던 바지
조선시대 때 여자들이 치마 밑에 입던 바지. 그 시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김춘추(金春秋)의 축구고사(蹴球故事)에 군뉴(裙紐 : 바지 끈)가 끊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상대부터 있어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로는 조선시대 유물인 처용관복(處容冠服)에 이 말군이 있다.
이것은 두 가랑이의 바지에, 허리끈이 달리고 뒤가 열려 있으며, 무릎에 화양장식(花樣裝飾)이 있는 형태이다. 이 처용관복에는 말(襪), 곧 버선까지 달려 있는 것이 있어서, 원래는 버선이 달려서 ‘말(襪)+군(裙)’으로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악학궤범≫ 여기복식도설(女妓服飾圖說)에도 말군이 있어 흰색 단(緞)·사(紗)·나(羅)·능(綾)·초(綃) 등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여기에 실린 그림을 보면, 여자 속옷용 바지 모습에 통이 넓고 부리가 오므라졌으며 뒤가 갈라지고 허리끈이 달려 있는 외에 어깨에 걸치는 끈이 있다.
≪고려도경 高麗圖經≫ 공장조(供張條)에 나오는 저상(紵裳)도 이와 비슷한 것으로 남녀 공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에는 주로 반가 부녀자가 기마시 치마 밑에 입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세조실록≫ 3년 6월조에 예조정랑 우계번(禹繼蕃)이 명사 연향(宴享)에서 술에 취하여 돌아오는 길에 영접도감사 조숙생(趙肅生)의 처가 말군을 입지 않고 말을 타고 지나가는 것을 기녀로 알고 조례(皁隷)로 하여금 끌어내리게 하였다는 기록은 이를 입증하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녀의 기마풍속이 점점 사라짐에 따라서 그 격이 낮아져 하층계급의 기마복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世祖實錄
<<참고문헌>>增補韓國服飾史硏究(金東旭, 亞細亞文化社, 1979)
말법사상(末法思想)
불교의 유통이 시대에 따라 변천한다고 보는 사상
불교의 유통이 시대에 따라 변천한다고 보는 사상. 일반적으로 그 시기를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의 3기로 분류하며, 이 3기 중 가장 문제시되는 때가 말법기라고 하여 말법사상에 대한 논란이 특히 많다.
정법기는 부처의 교법을 그대로 수행하여 쉽게 성과(聖果)를 성취하는 시기로, 정법기에 오도(悟道)하는 이가 특별히 많다고 하였다. 상법의 시기는 정법의 시기와 겉모습은 비슷하여 수행하는 이는 많지만 증과(證果)에 도달하는 이는 적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경전에서는 정법 시기를 석가모니 때부터 500년 또는 1000년의 기간으로 잡았고, 상법 시기를 정법이 끝난 뒤의 1000년으로 잡고 있다. 또 말법의 시기에는 중생들의 근기(根機)가 떨어져서 수행하는 이는 적고, 불법(佛法)은 더욱 미미하고 쇠퇴해져서 사람들이 도를 닦기보다는 교만과 시비에 휩쓸리는 시기로 보고 있다.
그 시기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으나 중국불교에서는 정법과 상법의 시기가 끝난 뒤 1만 년 동안으로 보고 있다. 특히 수나라의 신행(信行)은 삼계교(三階敎)를 창도하여 정법은 제1계(階), 상법은 제2계, 말법은 제3계라고 주장한 뒤, 말법시대가 시작된 지금부터는 반드시 보법(普法)을 닦고 보행(普行)을 실천해야 됨을 강조하였다.
그는 보법보행의 교법으로서 ≪화엄경≫의 가르침을 강조하였다. 또 도작(道綽)과 선도(善導)는 말법시대에 맞는 수행법으로 참회와 염불(念佛)을 크게 강조하였다.
신행과 도작 등의 말법사상은 우리 나라에도 은근한 영향을 미쳤으나, 당시 우리 나라에는 불교교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신앙이 철저하던 시기였으므로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고려 초기에 법을 구하는 승려 36인이 송나라로 들어가서 연수(延壽)로부터 선정일여(禪淨一如)의 사상을 배워 온 뒤부터 말법사상에 기초를 둔 정토신앙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말법사상에 기초를 둔 정토사상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깨달음을 이루어야 하는 선(禪)이나 보살도(菩薩道)는 난행도(難行道)에 속하는 것으로 말법의 중생이 그것을 이루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주장을 편 뒤, 아미타불의 원력(願力)에 의지하여 쉽게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염불수행을 하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에 따라 고려 초기 및 중기의 불교계에는 이러한 말법시대에는 정도(正道)가 땅에 떨어졌으니 정혜(定慧)를 닦기보다는 염불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흐름이 크게 확산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고려 중기의 지눌(知訥)은 ≪권수정혜결사문 勸修定慧結社文≫을 지어, 시대는 비록 변할지라도 심성(心性)은 변하지 않는 것이거늘 법과 도를 흥하고 쇠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대승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의 소견이라고 하였다. 지눌은 이 저서에서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말법을 핑계삼아 염불수행만을 취하는 그릇된 편견을 바로 고치고자 하였다.
또 그는 ≪원돈성불론 圓頓成佛論≫에서 ≪화엄경≫의 대의는 말세의 슬기로운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현실계에서 단박에 부처의 부동지(不動智)를 깨닫게 하는 데 있는 것임을 강조하여, 아무리 말법시대라 할지라도 슬기로운 중생은 부동지를 이룰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고려 말의 야운(野雲)은 ≪자경문 自警文≫에서, “오직 이 말법시대에는 성인이 가신 지 오래여서 마(魔)는 강하고 법은 약하며, 남을 옳게 지도하는 이는 적고 남을 그르치는 이는 많으며, 슬기로운 이는 드물고 어리석은 이는 많다.”고 하여 말법시대의 양상을 열거한 뒤, 그러나 스스로 도를 닦지 않는 것을 한탄할지언정 말세에 태어난 것을 근심해서는 안 됨을 강조하여 말법사상을 무시하였다.
이와 같은 선종의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전승되어 조선 중기의 휴정(休靜)은 “마군(魔軍)의 떼들이 말법시대에 불붙듯 일어나서 정법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니 참선을 공부하는 사람은 이를 깊이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염불을 강조하는 종파와 승려들은 말법시대를 염불을 권장하는 방편으로 삼아 선종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면서 말법사상을 주장하였다.
<<참고문헌>>勸修定慧結社文(知訥)
<<참고문헌>>圓頓成佛論(知訥)
<<참고문헌>>自警文(野雲)
<<참고문헌>>禪家龜鑑(休靜)
망건(網巾)
상투를 틀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머리에 두르는 장식품
상투를 틀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머리에 두르는 장식품. 따라서 관모라기보다는 머리장식의 하나로서, 그 위에 정식의 관을 쓴다. 망건은 당·편자·앞·뒤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며, 앞이 높고, 옆쪽이 조금 낮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재료로는 말총〔馬尾毛〕이나 인모(人毛)를 사용하나, 인모는 일반적인 것은 아니고 해진 망건을 수리할 때 쓰인다. 망건은 명나라에서 전래되었다고 하나, 재료나 용도·형태가 중국의 것과 다르다.
≪세종실록≫ 2년 경자조에 마미망건(馬尾網巾)을 명나라 사신에게 증여한 기록이 있고, 1488년(성종 19)에 왔던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의 ≪조선부 朝鮮賦≫에도 조선의 망건은 모두 말총으로 만든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망건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화된 뒤, 말총을 재료로 사용하는 방법은 도리어 중국으로 역수출된 것으로 여겨진다.
망건을 쓰는 법은 당의 고에 가는 당줄을 꼬아서, 뒤에서 머리를 졸라 상투에 잡아매고, 편자는 두쪽으로 끝에 든든한 당줄을 달아서, 편자의 귀닿는 곳에 관자(貫子)를 달고, 좌우쪽 당줄을 맞바꾸어서 관자를 꾀어내려 다시 망건 뒤로 가져다가 엇걸어 맨 다음, 두 끝을 상투 앞으로 가져다 동여맨다.
망건은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진 뒤 그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어, 오늘날에는 특수단체나 노인층 약 5,000명 정도가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망건을 만드는 일은 1980년 11월 중요무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기능보유자는 제주도 제주시 삼양동에 사는 이수녀(李受女)이다.
망건장(網巾匠)
망건(網巾)을 만드는 장인이다. 망건은 상투를 짜고 머리 뒷부분의 털을 걷어 올려 가지런히 하기 위하여 이마에서 뒤통수까지 눌러쓰는 그물처럼 생긴 일종의 건(巾)을 가리킨다. 말총으로 그물처럼 묶어 맨다는 뜻에서 망건이라고 하였다[『문종실록』권 12, 2년 3월 신유]. 망건제도는 명(明)나라 초에 창안(創案)된 것이라고 한다. 명(明) 태조(太祖)가 신악관(神樂觀)에 미행(微行)하였을 때 한 도사(道士)가 망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법을 취하여 정제(定制)로 삼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사(絲)로써 만들었으나 후대에 말총으로 만들었다. 조선시대에는 관영(貫纓)의 고리[環]로 조사(朝士)의 품급(品級)을 구별하였는데 도리옥[環玉]·도리금[環金]·각금(刻金)·각옥(刻玉)의 구별이 있었으며, 하사(下士)와 서인(庶人)은 모두 대모권(玳瑁圈)을 사용하였다[『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섬용지(贍用志) 3, 427].
망건의 각 부분의 명칭을 보면 상부에 졸라매는 곳을 당이라 하고, 하부에 졸라매는 곳을 편자[邊子]라고 한다. 그리고 앞면의 그물처럼 얽은 데를 앞이라 하고, 뒷면의 뒤통수를 싸는 데를 뒤라고 한다. 또한 이 망건을 매는 줄을 당줄이라고 한다. 망건당은 무수한 고를 맺어 두른 것이니 망건을 쓸 때 고의 구멍에 가는 당줄을 꿰어서 뒤에서 머리를 졸라 상투에 잡아 맨다. 편자는 양쪽 끝에 든든한 당줄을 달아 편자의 귀 뒷부분에 관자(貫子)를 달고 좌우쪽 당줄을 맞바꾸어 관자에 꿰어 다시 망건뒤로 가져다가 엇걸어 매고, 그 다음에 두 끝을 상투앞으로 돌려다가 칭칭 동여맨다.[심재완(沈載完)·이은창(李殷昌),『한국(韓國)의 관모(冠帽)』영남대학교(嶺南大學校) 신라가야문화연구소(新羅伽耶文化硏究所) 59면, 1972]
▶출처 : 역주 경국대전 -번역편-(한우근, 이성무, 민현구, 이태진, 권오영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망궐례(望闕禮)
망궐례(望闕禮)는 정조(正朝)·동지(冬至)·성절(聖節)에 근정전(勤政殿)에서 왕과 왕세자(王世子), 문·무백관(文武百官)이 북향사배(北向四拜)하고 만세(萬歲)를 불러 정조(正朝)·동지(冬至)와 성절(聖節)을 경하(慶賀)하는 의식이다. 황태자 천추절(千秋節)에 대한 의식은 망궁례(望宮禮)라 한다. 반면, 전패(殿牌)를 두고 조선의 지방관청의 외관(外官)이나 사신들이 정조(正朝)·동지(冬至)나 탄일(誕日)에 북향사배(北向四拜)하고 천세(千歲)를 부르는 의식은 요하(遙賀)라고 하였다.[『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례(嘉禮) 정지급성절망궐행례의(正至及聖節望闕行禮儀)·황태자천추절망궁행례의(皇太子千秋節望宮行禮儀)·사신급외관정지탄일요하의(使臣及外官正至誕日遙賀儀)]
▶출처 : 역주 경국대전 -번역편-(한우근, 이성무, 민현구, 이태진, 권오영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망어업(網漁業)
어망을 사용하여 어류나 기타 수산물을 획득하는 어업.
〔개 설〕
망어업은 여러 가지 기준에 의해 이를 분류할 수 있으나 망어구의 종류에 따라 이를 분류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 망어구는 다양하나 이는 보통 여덟 종류로 분류되고 있다. 자망류(刺網類)·엄망류(掩網類)·초망류(抄網類)·인망류(引網類)·선망류(旋網類)·부망류(敷網類)·건망류(建網類)·망롱류(網籠類)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유형별로 분류하고 자망류를 사용하는 어업을 자망어업, 엄망류를 사용하는 어업을 엄망어업 등으로 부르며, 이들은 조업방법이나 어획대상에 따라 명칭이 다시 세분된다.
예컨대, 자망어업은 조업방법에 따라 저자망어업(底刺網漁業)·부자망어업(浮刺網漁業)·유자망어업(流刺網漁業)·선자망어업(旋刺網漁業) 등으로 나누어지고, 어획대상에 따라 꽁치자망어업·명태자망어업 등으로 나누어진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연근해 망어업을 대표하는 것은 인망류 어업에 속하는 기선저인망어업과 선망류 어업에 속하는 기선건착망어업이고, 원양망어업을 대표하는 것은 인망류 어업에 속하는 트롤어업(trawl漁業)이다.
〔선사시대 및 고대의 망어업〕
우리 나라 망어업의 역사는 아득한 선사시대로 소급된다. 구석기시대는 논외로 하더라도 신석기시대에는 그 초기부터 이미 어망으로 어획하는 망어법이 알려져 있었다. 이를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는 선사시대 유적에서 출토되는 각종 어망추(漁網錘)이다.
어망은 일반적으로 망지(網地:그물감), 벼릿줄, 부자(浮子:뜸)와 침자(沈子:발돌)로 만들어지나 과거에는 침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식물섬유나 목재로 만들어졌으므로 남아 전해지지 않으며, 침자로서 돌 또는 흙으로 만든 어망추만이 전해진다.
세계 여러 문화권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어망추는 토기의 파편에 간단한 가공을 한 토기편추(土器片錘), 자연석을 가공한 타제 또는 마제의 석추(石錘), 흙을 구워 제조한 토추(土錘)들이며, 녹각(鹿角)과 같은 동물의 골각으로 만든 것도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 나라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되는 어망추는 주로 석추와 토추이다. 1916년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보고≫에 의하면, 대동강반의 용반리패총(龍磻里貝塚)에서 석추 1개가 발견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 이 보고서에는 강동군 마산면의 대동강반에서 발견한 석추에 관한 설명이 있는데, 그것은 타원형의 편평한 자연석 양단에 홈을 판 것으로 당시의 투망(投網) 등에 사용되고 있던 어망추와 동일한 것이었다고 하며, 그러한 석추는 당시까지도 아시아 동북방 및 북미의 토인들이 사용하고 있던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 보고서에는 강원도 통천의 유적에서 그러한 석추가 한 곳에 많이 군집되어 있는 것이 발견된 바 있었던 사실도 밝히고 있다. 그 이후 석추는 한반도의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으며, 그 분포지는 거의 한반도 전역에 걸쳐 있음이 밝혀졌다.
북으로는 함경북도 경흥의 나진패총(羅津貝塚)이라든가 평안북도 의주 미송리(美松里) 유적에서 발견되며, 남으로는 부산 동삼동패총(東三洞貝塚)에서 발견되고 있다. 미송리 유적에서 즐문토기 파편과 함께 출토된 석추는 자그마한 강자갈의 두 모를 쪼아내어 줄을 맬 수 있게끔 만든 것이었다.
평안남도의 청호리(淸湖里)나 궁산리(弓山里)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작은 역석의 네 변을 쪼아내어 만든 석추도 출토되었으나, 전기 미송리 출토 석추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역석 양단에 타격을 가해서 만든 역석추(礫石錘)가 가장 흔한 석제 어망추였다.
과연 그것이 모두 어망추로 사용된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이나, 그것들이 주로 대동강·한강 등의 강반(江畔)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어망추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석추 가운데는 조어구(釣漁具)의 추석(錘石)으로 사용된 것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 석추는 장구한 기간에 걸쳐 사용되었던 것으로 한강 유역 유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강반 저지(低地)에서 일어난 유문토기문화의 표지적(標識的) 유적인 암사리(巖寺里) 유적에서 출토되는 동시에 구릉(丘陵)에서 일어난 무문토기문화의 표지적 유적인 도곡리(陶谷里) 유적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충청남도 서산군 인지면 선사시대 유적에서는 어망추로 보이는 마제의 석추가 출토된 바 있다. 그것은 홈과 구멍을 겸유한 특이한 것이었다. 앞으로 마제 석추도 출토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토추는 유구토추류(有溝土錘類)와 관상토추류(管狀土錘類)가 여러 지역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전자의 일반적인 형태는 타원형 토추의 장축(長軸)을 일주하는 깊은 장축구(長軸溝)를 판 것으로 횡단면이 8자형을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유구토추는 한강 유역 선사시대 유적에서 특히 많이 발견된다. 이 유구토추는 무문토기문화와 관련성이 깊다. 무문토기의 대표적 유적인 도곡리 유적에서는 유구토추가 22개나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10개는 황토색 또는 적갈색이었고, 나머지는 흑색 10개, 회백색 2개였다. 무문토기문화는 농경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그것은 반월도(半月刀)가 무문토기와 함께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는데, 반월도가 농경과 연관성이 있음은 중국의 용산문화(龍山文化)에서 입증된 바이다.
주로 어로활동을 통해 식량을 획득하는 경제생활을 했던 즐문토기인들은 굴·대합 등의 각종 패류를 포획하는 동시에 조어구로써 어류를 조획하는 한편, 석추를 단 망어구로도 어류를 망획하여 주요 식량원으로 삼았다.
그러나 유구토추를 많이 사용한 무문토기인들은 반농반어(半農半漁) 형태로 농경과 함께 어로도 했던 것이며, 때로는 수렵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식량 공급원은 수산물이었을 것이다. 유구토추 중에는 이형(異形)으로서 부수공(附隨孔)이 뚫린 것도 출토된다.
이는 장축을 일주하는 장축구를 파고 이에 직교공(直交孔)을 뚫은 것으로 한강반의 흔암리(欣巖里)·도곡리 유적과 전라남도 광주 용강(龍江) 무문토기 유적에서 발견된 바 있다. 이러한 유구 직교공 토추는 형태학적으로는 전기 무공 유구토추를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한 걸음 발달된 형태로 볼 수 있으나, 출토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시기적으로는 양자 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동삼동이나 함경북도 웅기에서는 토추의 양단에 단축구(短軸溝)가 있는 이형 토추가 발견된 바 있다. 이들에 대한 형태학적 문제와 편년(編年) 문제는 앞으로의 연구과제이다.
관상토추는 횡단면이 원형을 지니는 장타원형, 때로는 원주형의 토추에 장축공(長軸孔)을 뚫은 것으로 앞에서 언급한 유구토추류와 반출(伴出:동일한 유적의 동일한 층위, 또는 동일한 장소에서 발견되는 것)되기도 하나 시기적으로는 유구토추가 앞서며, 관상토추는 초기 철기시대 유적에서 특히 많이 출토되고 있다.
1980년에 발굴된 김해 부원동 초기 철기시대 유적에서는 다수의 관상토추가 출토되었으나 유구토추는 출토되지 않았다. 관상토추 중에는 현대에 제조된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 많다. 관상토추와 함께 구상(球狀)의 토추에 구멍을 뚫은 유공구상토추도 출토되는데, 이는 관상토추의 변형으로 보인다.
관상토추는 유구토추와 반출되기도 하나 양자는 계통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조몬시대(繩文時代) 유적에서 주로 각종 유구토추가 출토되고, 관상토추도 조몬시대 유적에서 더러 출토되지만 그것은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이후부터 주류를 이루고 있다.
중국 황하 유역의 용산문화에서 발생한 관상토추는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추는 후일 도제(陶製) 어망추로 발전하고, 최종적으로는 오늘날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납으로 만든 어망추로 발전하였다.
선사시대에 어망이 사용되고 있었던 것은 편망용석기(編網用石器)가 출토되고 있는 것에 의해서도 방증(傍證:사실을 직접 증명할 수는 없지만 주변 상황을 밝힘으로써 간접적으로 그것을 증명하는 구실을 하는 증거)된다. 미사리(渼沙里)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분암제(玢巖製) 망침(網針)이 출토된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선사시대의 망지는 남아서 전해지는 것은 없으나 압형문토기(押型文土器)에 나타나 있는 그물의 문양을 통하여 당시의 망지형태를 엿볼 수 있다. 서기전 4000∼3000년경으로 추정되는 동삼동패총의 최하층에서는 망지의 흔적을 뚜렷이 남긴 압날망문토기(押捺網文土器)의 파편이 출토되었다.
이는 제작면에서 현대의 망지와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결절망(結節網) 망지가 당시에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망지가 어망 제작용으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망사(網絲)의 재료는 칡껍질이나 기타 식물성 섬유였을 것이다.
궁산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공골침(有孔骨針)에는 마사(麻絲)가 달려 있었는데, 이로써 미루어 보아 신석기시대에 이미 마사가 망지 재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고고학적 자료를 통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망어구로 어류를 어획하고 있었고, 그 기술 수준도 상상 외로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어망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에 관한 것은 알기 어려우나 어망추의 규모로 미루어 보아 소형의 어망이 사용되었던 점은 틀림없을 것 같으며, 주로 소형의 인망류에 속하는 후릿그물과 같은 지인망, 어망류에 속하는 투망, 반두와 같은 초망류 등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라남도 능주에서 출토된 유구토추는 예외적으로 길이 9.2㎝, 무게 197g의 대형 어망추였다. 이는 규모가 상당히 큰 대형 지인망류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러한 지인망을 사용한 어업은 마을공동체를 단위로 한 공동경영형태로 행해졌을 것이다.
망어업은 하천어를 대상으로 한 것이 많았고, 해면에서는 내만(內灣)의 천해에서 망어업이 성하였다. 어망추를 사용하지 않은 각종 망어업도 행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망어업〕
≪고려도경≫에는 잡속어조(雜俗魚條)에 망어업에 관한 것이 설명되어 있다. 즉, “해인(海人)은 썰물 때에 도서에 닻을 내리고 고기를 잡는다. 그러나 그물을 잘 만들지 못하여 다만 소포(疏布)로써 이를 걸어서 힘은 많이 드나 성과는 적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소포를 사용했다는 것은 모기장처럼 성기게 짠 베를 망지로 사용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어망이 모두 직망지(織網地)로 만든 그러한 무결절망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고려도경≫의 저자 서긍(徐兢)은 여름철에 서해안을 내왕했으므로 곤쟁이와 같은 젓갈 제조용 소형 새우의 어획 광경을 보고 그렇게 기술했을 것이다.
새우 이외의 어류를 어획하는 데 결절망이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망사의 재료는 삼·칡껍질·볏짚 등이었을 것이고, 때로는 견사도 사용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면사는 수입하지 않았던 한, 고려 말기를 제외하고는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망어업〕
조선시대에 각종 망어업이 성행했다는 사실은 문헌자료에 밝혀져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전라도 영광군의 파시평(波市坪)과 황해도 해주목 연평평(延平坪)의 조기어장에는 어기가 되면 각 처의 어선이 모여들어 어망으로써 조기를 어획한다고 하였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강원도 고성군에서는 삼을 재배하여 이로써 실을 뽑지 않고 꼬아서 그물을 만들어 고기를 잡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서해안에서는 주요한 조기 망어구였던 주목망(柱木網)이나 중선망(中船網)이 이때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동해안에서는 마사제의 지인망류와 같은 어망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후기의 문헌에는 여러 가지의 망어구 명칭이 보인다. 1752년(영조 28)의 ≪균역청사목 均役廳事目≫ 해세(海稅) 규정에는 주박(注朴)·휘리(揮罹)·거휘리(擧揮罹)·세망(細網) 등의 어망 명칭이 보인다. 주박은 주목망, 휘리는 후릿그물, 거휘리는 일종의 선망을 말하며, 세망은 청어 어획용 견사제자망이다.
호서(湖西)의 주박에 대해서는 볏짚으로 만든 어망을 조수(潮水)가 진퇴하는 곳에 설치한다고 하는 간단한 어구·어법 설명을 가하고 있다.
≪균역청사목≫의 해세에는 전라도의 해세징수 규정 중에 면휘망(綿揮網)·면변망(綿邊網)·갈망(葛網)·행망(行網) 등이 있는데, 각각 그 길이를 기준으로 과세한다고 한 것이 있다. 이들은 지인망류나 자망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는 면사제 어망이 사용되고 있었음이 어망의 명칭에 드러나 있다.
이 무렵 하천에서는 밀망(密網)이 많이 사용되어 자원이 고갈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영조는 이를 금하기 위해 1753년에 밀망 사용을 금하는 동시에, 이러한 폐단의 근본 원인을 없애고자 밀망을 만드는 사람을 도배(徒配:1년에서 3년까지 복역하는 도형에 처한 뒤에 귀양을 보내는 것)의 중벌로 다스리라고 명하였다(승정원일기 영조 29년 7월 19일).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망어업이 상당히 발달하여 망어구 설치 어장은 토지와 마찬가지로 권문세가의 점탈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장의 매매도 성행하였다. 어장 매매의 성행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매매문기가 이를 실증하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의 주요 망어구는 줄시·장시·거망과 같은 대형 정치망류를 비롯하여 주목망·설망·중선망·궁선망·망선망·지인망류·자망류 등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우리 나라 재래식 망어구였다.
〔근대 이후의 망어업〕
개항 이후 각종 일본식 망어구가 보급되었다. 많이 보급된 일본식 망어구는 안강망(鮟鱇網)·수조망(手繰網) 등이었고, 대부망(大敷網)·각망(角網)·호망(壺網)·소대망(小臺網) 등 건망류에 속하는 정치망도 보급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든 이후에는 일본에서 수입된 면사제 망지가 많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에서는 1890년대 말부터 근대 공장제공업적 면방적업이 발달되어 원사(原絲)가 대량으로 생산되었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편망기(編網機)가 보급되었으므로 면사제 망지가 염가로 양산되어 급속도로 전국에 공급되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과거의 고승제(藁繩製)·갈피제(葛皮製)·마사제(麻絲製) 어망은 질적으로 월등히 우수한 면사제 어망으로 대체되었다. 이것은 망어업에서 혁명적인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기선건착망어업과 기선저인망어업이 근대적 대규모의 망어업으로서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전자는 미국에서 발명되어 일본을 거쳐 도입된 것이었고, 후자는 일본에서 발달되어 전파된 것으로 각각 정어리어업과 명태어업의 왕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어업들은 일본인 어업자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어선 동력화는 망어업에 기술혁신을 일으켰으며, 우리 나라에서의 어선 동력화는 191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합성섬유제 어망이 사용되기 시작함으로써 망어업 발달에 신기원을 열었다. 그것은 망어구 발달사에서 면사망의 보급보다 훨씬 더 큰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광복 이후에는 어군탐지기가 도입됨으로써 망어업의 생산성을 급격히 높이기도 하였다.
1960년대부터는 원양어업이 급속도로 발달하였으며, 오늘날 원양어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망어업은 그 규모가 대단히 크다. 이를 대표하는 것은 선미식(船尾式) 트롤어업으로 그 규모가 망어업 중에서 가장 크다. 북태평양의 명태어업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하고 있는 이 어업은 우리 나라 원양어업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어업
<<참고문헌>>韓國水産業史(朴九秉, 太和出版社, 1966)
<<참고문헌>>韓國水産史(水産廳, 1968)
<<참고문헌>>韓國漁業史(朴九秉, 正音社, 1975)
<<참고문헌>>漁具漁法學(高冠瑞, 高麗出版社, 1975)
<<참고문헌>>韓國漁業技術史(朴九秉, 韓國文化史大系 Ⅲ,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69)
<<참고문헌>>韓國先史·原史遺蹟出土-漁具例-(崔夢龍, 古文化 9·11·12, 韓國大學博物館協會, 1972·1973·1974)
망원경(望遠鏡)
두 개 이상의 볼록렌즈를 맞추어 멀리 있는 물체를 크게 보이도록 만든 장치
두 개 이상의 볼록렌즈(lens)를 맞추어 멀리 있는 물체를 크게 보이도록 만든 장치. 볼록렌즈 또는 오목거울의 일종인 포물면반사경〔抛物鏡〕으로 된 대물경(對物鏡)에 의하여 생긴 물체의 상(像)을 볼록렌즈인 접안경(接眼鏡)으로 확대하여 보는 장치이다. 크게 굴절망원경(屈折望遠鏡)과 반사망원경(反射望遠鏡)으로 구분된다.
이들에 의하면 물체의 상은 거꾸로 보이는데 접안경을 오목렌즈로 쓴 갈릴레이(Galileo)망원경이나 대물경과 접안경 사이에 2개의 직각프리즘(prism)을 넣은 쌍안경에서는 상이 바로 서 보인다. 갈릴레이망원경에 대하여 보통의 굴절망원경은 케플러(Kepler)망원경이라고도 하고, 반사망원경은 뉴턴(Newton,I.)이 발명하여 뉴턴망원경이라고도 한다.
망원경의 기능은 다음 세 가지로, 첫째 큰 지름 대물경으로 많은 양의 빛을 받아서 상을 밝게 하며, 둘째 큰 지름 대물경으로는 물체의 상의 분해가 좋아져서 더 자세히 상을 볼 수 있으며, 셋째 접안경으로 그 상을 확대하여 크게 볼 수 있게 한다.
망원경은 17세기에 서유럽에서 발명되어 천문관측이나 항해 등에 사용되었다. 그것이 유럽의 기독교 선교사에 의해서 중국에 전래되었고, 1631년(인조 9)에 부연사(赴燕使) 정두원(鄭斗源)이 북경에서 서양 선교사 로드리게스(Rodriguez,J., 陸若漢)로부터 기증받아 ≪치력연기 治曆緣起≫ 1권, ≪천문략 天文略≫ 1권, 자명종 1부, 일구(日晷) 1좌와 함께 천리경(千里鏡) 1부를 가지고 돌아온 것이 우리 나라 망원경 도입의 최초이다.
옛날에는 망원경을 천리경 또는 원시경(遠視鏡)이라고도 하였다. 정두원이 가지고 온 망원경이 천체관측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이익(李瀷)이 서양의 천문서(天文書)를 보고 자신도 한번 천리경으로 천체를 보고 싶어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우리 나라에 천체망원경이 설치되어 관측을 한 것은 민족항일기 인천에 있었던 총독부관측소(總督府觀測所)의 지름 6인치(15cm) 굴절망원경이 처음이었다.
광복 이후로는 국립천문대 소백산관측소의 24인치(60cm) 반사망원경, 연세대학교 일산천문대(一山天文臺)의 24인치 반사망원경, 경희대학교 수원캠퍼스와 서울대학교 교내천문대에 30인치 반사망원경이 설치되었다. 현재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천문대의 보현산(普賢山)관측소에는 180cm의 반사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참고문헌>>增補文獻備考
<<참고문헌>>星湖僿說
매금(寐錦)
신라 상대의 왕호
신라 상대의 왕호.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지증왕 때 중국식 왕호를 처음으로 채택하기 이전에는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師今)·마립간(麻立干) 등의 토착용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주로 고구려 금석문 자료에는 신라왕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매금’이 보인다.
이 매금에 대해서는 이사금설과 마립간설의 두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 의미가 ‘군장(君長)’이라는 데는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매금이라는 용어가 주로 5세기 경우의 고구려 금석문 자료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당시 동북아시아의 강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한 고구려가 고구려에 의존적이던 신라왕을 낮추어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신라는 제도정비와 왕권강화에 따라 503년(지증왕 4) 정식으로 중국식 왕호를 채택하였으며, 그 과도기적 표현으로서 ‘매금왕(寐錦王)’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였다.
<<참고문헌>>三國史記
<<참고문헌>>日本書紀
<<참고문헌>>朝鮮金石總覽 上(1919)
<<참고문헌>>韓國金石遺文(黃壽永 編, 一志社, 1976)
<<참고문헌>>中原 高句麗碑에 대하여(李丙燾, 史學志 13, 1979)
<<참고문헌>>蔚珍鳳坪新羅碑와 法興王代 律令(朱甫暾, 韓國古代史硏究 2, 한국고대사연구회편, 1988)
<<참고문헌>>新羅王號攷·朝鮮國名攷(鮎貝房之進, 1972)
<<참고문헌>>朝鮮金石攷(葛城末治, 亞細亞文化社 影印, 1978)
매매한(買賣限)
전지(田地)·가사(家舍)·우마(牛馬) 등의 재산 매매 때의 계약기한 및 관인증서(官印證書)의 교부시한(交付時限) 등에 관한 규정이다. 경중(京中)의 조가기지(造家基地)·채전(菜田) 등 뿐 아니라 지방에서의 전지매매(田地買賣)까지 공식적으로 매매가 허용된 것은 세종(世宗) 6년(1460)이다. 이때 세계(稅契) 곧 일정한 세(稅)를 내고 관인(官印) 증서를 교부받지 아니하는 자, 과할(過割) 즉 토지 대장의 명의 변경을 하지 아니하는 자는『대명률(大明律)』에 따라 논죄한다고 하였다[『세종실록』권 23, 6년 3월 기해]. 『대명률(大明律)』호율전매전택조(戶律典賣田宅條)의 당해 규정은 전자의 경우 태오십(笞五十)에 가전(價錢)의 반을 몰관(沒官)하고, 후자는 1∼5무(畝)의 범위에서는 태사십(笞四十), 5무(畝)마다 1등씩을 더하여 장일백(杖一百)에 그친다고 하였다.
매매 계약의 기한은 세종(世宗)·문종(文宗) 양대(兩代)의 기록에 따르면 당초 10일이었으며[『세종실록』권 31, 8년 1월 갑인. 『문종실록』권 6, 1년 2월 신미], 15일은 성종대(成宗代) 기록에서 처음 보인다[『성종실록』권 130, 12년 6월 신해]. 한편 세종대(世宗代)에는 “유고(有故)로 타인전(他人田)을 대경(代耕)하는 자는 5년에 한하여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준다”[『세종실록』권 11, 3년 1월 임오]는 규정에 따라서인지 전지(田地)의 경우 5년 안에는 매매를 물릴 수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성종실록』권 130, 12년 6월 신해]
▶출처 : 역주 경국대전 -번역편-(한우근, 이성무, 민현구, 이태진, 권오영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매예(埋瘞)
시체를 땅에 매장함을 뜻하는데, 특히 풀 등을 덮어서 임시로 매장하는 것을 말한다[『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264].
▶출처 : 역주 경국대전 -번역편-(한우근, 이성무, 민현구, 이태진, 권오영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매장(每場)
제술시험(製述試驗)의 채점방법(採點方法)으로 상상(上上)을 9분(分), 상중(上中)을 8분(分), 상하(上下)를 7분(分), 중상(中上)을 6분(分), 중중(中中)을 5분(分), 중하(中下)를 4분(分), 하상(下上)을 3분(分), 하중(下中)을 2분(分), 하하(下下)를 1분(分)으로 하였다[예전(禮典) 제과(諸科)]. ☞ 주(註) 23 분수(分數) 참조
▶출처 : 역주 경국대전 -번역편-(한우근, 이성무, 민현구, 이태진, 권오영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매집장(每緝匠)
매듭을 만드는 장인이다. 매집(每緝)은 매듭을 표기한 것이다. 매듭은 끈목[多繪]을 끝에서 맺거나 어떤 물체에 달아 매거나 꿸 때, 혹은 묶을 때, 또 그러한 소용에서 장식이 필요할 때에 끈목으로 묶게 되는 일종의 장식공예이다. 그 종류는 매우 다양하며 어떠한 매듭이든 중심부에서 시작이 되어 끝맺음이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맹인재,『한국의 민속공예』교양국사총서 34,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36면, 1979]
▶출처 : 역주 경국대전 -번역편-(한우근, 이성무, 민현구, 이태진, 권오영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맹건부위(猛健副尉)
조선시대 서반 잡직계 정8품 위호
조선시대 서반(西班) 잡직계(雜職階) 정8품 위호(位號). 조선시대 정직(正職)과는 별도로 잡무 종사자를 위하여 설치하였던 잡직은 천인(賤人)이 임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고려 후기부터 공상천예(工商賤隸)들이 관직을 얻는 예가 많았고, 조선 건국초에도 이러한 경향이 계속되어 조정의 관료체제를 혼란시킨다는 점이 자주 지적되었다. 이 잡직이 받는 산계(散階)로 정6품 봉임교위(奉任校尉)에서 종9품 근력부위(勤力副尉)까지로 규정되어 있었다. →잡직계
<<참고문헌>>經國大典
<<참고문헌>>朝鮮初期兩班硏究(李成茂, 一潮閣, 1980)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반(西班) 잡직(雜職) 정8품(正八品)의 산계명(散階名)이다.
▶출처 : 역주 경국대전 -번역편-(한우근, 이성무, 민현구, 이태진, 권오영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맹선(猛船)
조선 전기 전투와 조운을 겸할 수 있게 만든 군선
조선 전기 전투와 조운(漕運)을 겸할 수 있게 만든 군선.≪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 왜구를 토벌하기 위하여 대선(大船)·중대선(中大船)·중선(中船)·쾌선(快船)·맹선(孟船)·별선(別船)·추왜별맹선(追倭別孟船)·추왜별선(追倭別船) 등 여러 종류의 군선들이 증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군선이 일정한 규격 없이 건조되어 군선으로서 쓸모가 없었으므로 1461년(세조 7) 10월 신숙주(申叔舟)가 각지의 군선을 개량하여 군용과 조운에 겸용할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1465년에 병조선(兵漕船)이 개발된 것이 맹선의 전신이 되었다.
병조선은 세조대에 개발되어 ≪경국대전≫ 반포를 계기로 하여 대·중·소 맹선으로 개명되어 그 뒤 1세기 동안 조운과 전공(戰攻)에 겸하여 사용되었다. 왜구가 완전 진압된 평화시에는 군선을 평화적으로 이용하여 병조선은 맹선제도로 발전하였다.
≪경국대전≫에서 맹선에 대한 제반 규제는 수군(水軍)의 군비감축이라는 뚜렷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세종실록≫ 지리지와 ≪경국대전≫의 군선 및 선군(船軍)의 수를 비교해 보면, 군선이 829척에서 739척으로 줄었고, 선군이 5만 177인에서 4만 8800인으로 감축되었다.
더욱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조선 829척 중 무군선(無軍船)이 57척뿐인데 ≪경국대전≫에는 737척의 군선 중 249척의 무군선이 기록되어 있어 세조 때 오히려 군용선척의 감축이 있고 조운의 사용이 많았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맹선은 제작 후 군용보다는 조운에 보다 많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맹선은 군선으로서는 너무 둔중하여 쓸모가 없다는 논란이 성종 때에 거론되었고, 중종과 명종 때에 계속적으로 발생한 삼포왜란·사량왜변·을묘왜변 등의 변란에서 맹선은 군선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555년(명종 10)에 대형군선인 판옥선(板屋船)이 개발되고, 이어 종형군선인 방패선(防牌船)이 등장한 이후 맹선은 군선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또한 임진왜란과 그 뒤의 시기에도 군사적 활동을 찾아볼 수 없고 간혹 기록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구실은 비군사적인 것이었다. 이렇듯 맹선은 중종 때에 군선으로서의 명맥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그 종류의 배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맹선이라는 군선 이름이 없어졌을 뿐, 그 구조와 선체의 모양은 일반 조운선으로 계승되어 조선 말기까지 남아 있게 되고, 명종 때에 개발된 혁신적인 군선인 판옥선이나 이순신(李舜臣)의 거북선〔龜船〕도 그 하체구조는 맹선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맹선은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한선구조(韓船構造)의 배로 고려시대의 조운선인 초마선(哨馬船) 및 조선 후기의 조선(漕船)과 동일한 계통의 배이다. 그리고 그 구조와 선형은 우리 나라 재래의 전통적인 평저구조(平底構造)를 보이고 있다.
즉, 넓고 평탄한 저판(底板)을 밑에 놓고, 그 좌우 현측(舷側)에 외판(外板)을 세워 붙였으며, 선수(船首)에는 ‘비우’라고 하는 평면선수재(平面船首材), 선미(船尾)에는 평면으로 된 선미재(船尾材)를 세워서 선체를 꾸며 놓았다.
그리고 맹선이 군용으로 쓰여질 때에는 노역(櫓役)을 한 것으로서 양현에 적당한 수의 노(櫓)가 설치되고, 병사들이 타고 전투에 임할 갑판(甲板)을 깔아놓은 비교적 단순한 구조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군선에는 대맹선·중맹선·소맹선의 세 종류가 있어 전국 수군기지에 배치되었음을 볼 수 있다〔표〕. 대맹선의 규모는 군사 80인이 탑승할 수 있을 정도였고, 조운선으로 이용될 경우에는 800석의 곡물을 운반할 수 있는 정도였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 전기 전국의 진포(鎭浦)에 배치된 대맹선의 수는 80척이었으며, 각종 맹선 중에서 대맹선은 애당초 세곡(稅穀)을 운반하는 조운에 겸용하기 위하여 개발된 겸용선이어서 갑판 위의 상장(上粧)을 되도록 간편하게 꾸며 놓았다.
중맹선의 규모는 군사 60인 정원으로 전국 진포에 배치된 수는 192척이고, 소맹선의 규모는 군사 30인 정원으로 전국 진포에 배치된 수는 216척이다. 대맹선이 주로 조운 겸용의 병조선이라서 성종 때부터 판옥선이 등장한 명종 때까지 주로 조운선으로 사용된 데 비하여, 소맹선이 오히려 군선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였다.
<<참고문헌>>世宗實錄
<<참고문헌>>經國大典
<<참고문헌>>東國文獻備考
<<참고문헌>>萬機要覽
<<참고문헌>>朝鮮王朝軍船 硏究(金在瑾, 서울大學校 出版部, 1976)
<<참고문헌>>韓國船舶史 硏究(金在瑾, 서울大學校 出版部,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