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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 재앙(9)과 바로의 네 번째 제안
출 10:21-29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22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23 그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24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25 모세가 이르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제사와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26 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
27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 보내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28 바로가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29 모세가 이르되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
출 10:21-29 / [아홉 번째 재앙]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하늘을 향해 네 손을 내뻗어라. 애굽 온 땅이 손으로 만져도 느껴질 것같이 짙은 어둠에 휩싸이리라.' 22)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쳐들자 사흘동안 애굽 온 땅이 말할 수 없이 짙은 어둠에 휩싸였다. 23) 이 사흘 동안은 사람이 사람을 서로 알아볼 수 없었으며 자기가 살고 있는데서 움직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는 빛이 있었다. 24) 바로가 모세를 불러들여 말하였다. `어서 가서 여호와를 섬기거라. 하지만 너희의 소 떼와 양 떼만은 여기에다 그냥 두고 너희의 어린 것들만 데리고 나가거라.' 25) 모세가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임금께서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직접 마련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26) 우리는 가축을 한 마리도 여기에다 남기지 않고 몰고 가야 하겠습니다. 그 중에서 얼마를 골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바쳐야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목적지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을 골라 여호와께 바쳐야 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27) 여호와께서는 또 바로가 고집을 부리게 하셨다. 그래서 바로는 이번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보내지 않았다. 28) 바로가 모세에게 말하였다. `내 앞에서 썩 물러가거라. 이제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생각조차 하지 말아라. 내 얼굴을 다시 보는 날은 죽게 될 줄 알아라.' 29) 모세가 말하였다. `생각 잘하셨습니다. 내가 다시는 임금님이 계시는 이 왕궁에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태양 숭배는 고대인들의 종교 행위로서, 애굽 궁중에서도 매일 아침 솟아오르는 태양을 향하여 북을 치고 태양신을 경배했습니다.
흑암이 있게 하라(21-23) 하나님께서는 애굽 전역에 칠흑 같은 흑암으로 3일 동안 덮으심으로 그들의 태양신이 허구임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홀로 역사와 자연의 실질적인 주인이심을 극명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특히 각자의 자리에서 활동하지도 못하고 손으로 더듬어야 겨우 움직일 정도의 어둠은, 애굽인들로 하여금 답답함과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애굽 땅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사는 곳에는 어두움의 흔적조차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애굽의 흑암을 조소하듯이 찬란한 빛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24-26) 바로는 모세를 불러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고 합니다. 이는 양과 소를 귀중한 재산으로 여겼던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빈 손으로 떠나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더욱이 그의 말은 여호와께 드릴 희생 제물마저 가져갈 수 없다는 의미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목적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교묘함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제사와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25) 라고 반문하면서 “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26)라고 바로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27-29) 바로는 흑암 재앙이 직접 해를 가하는 재앙이 아니었기에 완악한 고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모세에게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28)고 협박까지 합니다. 이에 모세도 “내가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29)라고 선언하며 바로 앞을 떠나갑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악인이 멸망 받는 것은 회개할 기회가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꺾이지 않는 자기 옳음과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완악하고 패역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 가축들을 두고 떠나라고 하는 바로에게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가져가야한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롬 12:1-2; 고전 10:31)
강들이 모여 대화하고 있습니다. 큰 강들은 서로 자기가 최고라고 하며 자랑하기에 바빴습니다. 다뉴브 강이 말했습니다. "내가 매일 날라주는 모든 배를 보아라. 나는 이처럼 위대한 일을 한다." 나일 강도 질 수 없어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 어떤 강보다 세계에서 제일 긴 강이다." 다뉴브 강과 나일 강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갠지스 강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경배 대상이다." 곁에서 조용히 듣기만 하던 이름 없는 작은 강이 말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처럼 뽐낼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비가 오면 강이 흘러넘쳐 논밭에 생명을 불어넣어 사람들에게 양식을 줄 뿐입니다."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나 노력을 통해 재능을 가진 사람이나 겸손함이 더해진다면, 그 가치가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 설 교 >
세상에서 구별된 사람들
출 10:21-23 / 김영준 목사
병든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아버지에게 예수님이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 말씀을 듣고 그 아버지가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믿사오니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옵소서’ 이 말 속에 그의 모순이 담겨져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믿는다는 말입니까, 믿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믿으면 믿는 것이고 못 믿으면 못 믿는 것이지 내가 믿사오니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 구절을 통하여 우리의 모습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믿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습니다. 안 믿는다면 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가 깊다고 우리에게는 동시에 의구심 ․ 주저함 ․ 두려움 ․ 의심 같은 것이 동시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저에게 상담을 받으러 오시는 분들은 제 말을 곧이들으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제가 상담을 할 때는 매우 합리적으로 또 냉정하고 판단하고 또 상식적으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담을 마치고 기도할 때 그 때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곧이들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의 영감으로 하는 말이고 믿음의 고백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목사님의 말씀도 신뢰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까. 저에게도 모순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상반된 면모가 있지 않습니까. 길을 가다가 누군가 노방전도를 하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나 저사람 몰라요, 나 교회 안다녀요, 이런 민망한 면이 있지만 동시에 아, 나는 왜 저 사람처럼 담대하게 전도를 하지 못할까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어느 것이 진짜 우리의 반응입니까? 또 누가 눈물을 흘리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볼 때 한편으로는 저 사람 참 믿음이 좋다, 뜨겁게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꼭 저렇게 티를 내야 될까, 꼭 저렇게 기도해야만 잘하는 것일까 하는 흉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어느 것이 진짜 우리의 마음입니까? 신도시 같은 데 가서 한 상가건물에 교회가 여러 개 들어와 있는 것을 보면 민망하고 대한민국에는 교회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지만 동시에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열심히 나오지 않습니까. 어느 것이 진짜입니까? 정답은 둘 다라는 사실이에요.
우리는 늘 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삽니다. 사랑하려는 마음과 미움 사이에서 갈등하고 성령과 육신 사이에서 갈등하고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갈등하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는 이와 같은 갈등이 불가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땅에서 살면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힘든 것입니다. 몸을 입고 살면서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고 또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정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이 깊어지고 오래되면 우리를 영적으로 무기력화 시킵니다.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영적인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껍데기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6~8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기대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두 마음을 품는다고 했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아무것도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다시 말하면 그의 믿음의 능력이 없어지고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린다는 얘기입니다.
소위 세계화된 시대에 살면서 세상은 점점 좁아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는 것은 점점 더 많아집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눈치 봐야 될 일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손해를 보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남편들입니다. 남자들입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가정의 돈 지출에 대한 권한이 점점 남편으로부터 아내에게로 넘어간다고 했는데 이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닙니다마는 통계적으로 증명된 것입니다. 그만큼 남편의 권한이 줄어들어 간다는 얘기입니다. 남편들이 불쌍하지요. 남편뿐만 아니라 남자들이 다 그렇습니다. 요즘 남학생들이 남녀 공학을 피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도 여학생들에게 치여서. 남자의 입지가 점점 좁아진다는 것입니다. 또 누가 손해를 보는지 아십니까? 사회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옛날에는 지도자들의 권한을 존경하고 존중해 주었습니다. 우러러 볼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 없습니다. 이제는 초등학생도 대통령을 욕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초등학생이 무엇을 안다고. 그러나 이제는 높은 사람, 우러러 보는 사람, 어려운 사람이 없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물러가라, 물러가라고 요구하는데 정말로 물러가면 대책이 있느냐? 대책 없습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그냥 물러가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 무책임한 것입니다. 이건 국가의 절차와 제도와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자신의 불만, 자신의 감정, 이것이 어떠한 원칙보다, 제도보다도 어떠한 질서보다도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다음의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지금 당장 내 불만을 표시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것은 가정에서도 통하지 않는 것이고 직장에서도 통하지 않는 것이고 교회에서 통하지 않는 것이고 나라에서도 당연히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이 시절은 합리적인 시절이 아니고 감정이 다스리는 시절이 되어버렸습니다. 합리적인 것이 통하지 않고 목소리 큰 사람과 강한 정서가 다스리는 시대가 되다보니까 이제는 이것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그런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이 불쌍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불쌍합니다.
그리고 또 이러한 시대에 누가 손해를 보는지 아십니까. 절대적인 진리를 믿는 종교가 손해를 봅니다. 그게 바로 기독교입니다. 다른 종교는 적당히 포용이든 타협을 말할 수 있지만 기독교는 우리가 믿는 교리에 대해서 절대로 타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천년 전에도 그랬고 구약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왜 다니엘이 사자굴속에 던져졌는지 아십니까.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까. 우상에게 절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왜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까. 예수님 믿고 섬기는 것을 거부하기를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왜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했습니까. 일본 신사에 절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만 기독교가 타협을 할 수 없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고집스럽고 배타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믿음의 성격상 불가피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타협하게 된다면 믿음 자체를 타협하는 것이고 진리 자체를 타협하는 것이고 예수님 자체를 타협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타협하게 된다면 예수님을 그저 인간으로 보는 것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세상 죄를 담당하러 오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는다는 믿음을 부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고집스럽고 배타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의 믿는 믿음의 성격상 이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든 중세든 지금이든 우리의 믿음의 고백은 여전합니다. ‘천하에 사람이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느니라‘ 그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같이 일하고 같이 어울리고 같이 잘 수는 있지만 우리의 믿는 것을 타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대가 이러할수록 우리는 더 담대해 지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해야 되지만 동시에 강하고 담대해야지 강하고 담대하지 않으면서 온유하기만 하면 그 사람은 물러 터져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으로는 아무런 능력을 행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마귀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무력화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귀를 내쫓는 것이 영적인 능력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영적으로 무기력화 되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영화 엑소시스트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 그 영화는 제일 무서운 영화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보고 싶지 않은 영화입니다. 그 영화가 처음 개봉됐을 때 전기 소모량이 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불을 켜놓고 잠들었기 때문에.
그 영화를 보면 두 명의 신부님이 나오는데 젊은 신부는 귀신에 대해 무지하고 나이든 신부는 전문가입니다. 그 소녀 속에 들어온 귀신을 만나보고 쫓아본 적이 있는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젊은 신부가 자기의 이론을 이렇게 폅니다. ‘제 생각에는 적어도 이 소녀의 속에 세 인격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 나이든 신부가 지체 없이 대답합니다. ‘아니다, 단 한 인격체만 있을 뿐이다.’
마귀는 우리를 혼동 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무기력해져서 마귀를 내쫓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크리스챤의 아이덴티티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정확하게 구별하신다는 사실이에요. 구별하십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세상에 섞여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가 당신이 백성인지 정확하게 구별하십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구별이 가능합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 천국 가는 사람과 지옥 가는 사람이 정확하게 구별됩니다. 우리 눈에는 구별이 안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애굽 전역에 어두움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 자수하여 광명 찾자. 빛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구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구별하십니다. 내 백성, 내 자녀라고 세상에서 우리를 구별하십니다. 차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확하게 구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로 우리에게는 분명한 정체성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누구냐, 내가 어디에 속했느냐 나는 누구편이냐 라는 문제에 있어서 정확한 정체성이 있어야 됩니다. 아이덴티티가 분명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거기에 따라오는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하시고 우리에게 분명한 정체성이 있으면 거기에 따라오는 특권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특권입니다. 영적인 특권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었더니 애굽 전역에 어두움이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던 것처럼 이게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특권이에요. 온 세상이 어두워 깜깜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은 어두움이 다스리지 못합니다. 온 나라에 불황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에는 형통함이 가능한 것이고 온 세상이 병들고 우편에서 만인이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 재앙이 가까이 하지 못할 것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경제적으로든 건강이든 모든 면에 있어서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것을 아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권세와 특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게 바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니다. 무기력하지 않고 능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모습니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 이상하다. 오, 신비하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당연한 것입니다. 응답 안하시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 세상에 믿음을 보겠느냐’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했는데 믿음은 일하는 것이요 믿음은 살아있는 것이요 믿음은 능력이요 믿음은 적극적인 것이요 믿음은 유일하게 우리를 이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홉째 재앙 – 흑암
출 10:21-29 / 임덕순 목사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들을 내리실 때는 대부분 미리 예고하고 내리셨는데, 오늘은 바로에게 경고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들어 애굽 땅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하셨고, 다음절에서 모세가 즉시 그렇게 시행하여 애굽 땅이 사흘 동안 완전히 깜깜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금의 귀띰이나 여유도 주지 않고 갑자기 아홉 번째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에 관한 내용 중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는데, 열 번의 재앙 중에서 매 세 번째 재앙을 내리실 때 마다 아무 예고 없이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이 재앙과, 여섯 번째의 티끌재앙과 아홉 번째의 흑암재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아무런 예고가 없이 내리는 재앙은, 지금까지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는 완악한 사람에 대한 징계임과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심판이 그러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에서 불순종하는 것과, 이미 여러 차례 들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순종하지 않는 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늘 듣는 말씀이라’는 식으로 아무렇게나 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말씀을 들은 사람은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1. 빛을 제하신 하나님
아홉 번째 재앙은 사흘 동안 태양이 완벽하게 가려져서 빛을 전혀 볼 수 없게 되는 상황인데, 이것은 장차 그들에게 임할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예고 적 성격이 있습니다.
사흘 동안 햇빛을 볼 수 없게 되는 이 재앙은, 우박이나 메뚜기나 강물이 피가 되는 재앙보다 한결 가볍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흑암 재앙은 단순히 햇빛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동안 내리셨던 은혜를 거두어 가시는 표시입니다.
세상이 있어온 이후로 단 한 번도 태양이 비치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사흘이나 태양이 안 보이고 온 천지가 깜깜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두렵고 공포가 심했을까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태양을 ‘라’ 라고 불렀고, 가장 큰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리고 애굽 왕 바로는 그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사흘 동안 태양이 비취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믿는 최고의 태양신이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태양신이 죽었다면 바로도 국가도 끝장 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볼 수 없고 더듬어서 움직여야 했으며,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라 오늘은 해도 뜨지 않으니 실컷 잠이나 자자’ 하고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태양신이 죽어버린 세상이니 그들도 이제 곧 죽을 것이고, 살아야할 의미를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가 극심한 죽음의 공포 속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사흘 동안 햇빛을 주지 않으신 것은, 그들에게서 평안과 희망을 빼앗아버리신 것으로서, 참을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떨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흑암 재앙은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일까요? 평안과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의 장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고, 꿈을 접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숨어버리고 비정상적인 사람들, 극성스럽게 악한 사람들이 고개를 드는 세상이 왔습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상식을 뒤집는 사람을 정상이라고 인정하는 시대를 맞았으니, 우리는 미래에 대한 꿈을 접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 희망이 있습니까? 정치에 희망이 있습니까? 통일에 대한 바람이 있습니까? 과학 문명은 엄청나게 발전하여 살기는 참 편해졌지만 마음의 평안은 어디에 있습니까? 행복한 가정이 몇이나 됩니까? 요즈음에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교만한 애굽 왕에게 흑암재앙을 내리신 것처럼, 교만한 현대인들에게 어두움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빛과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은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가장 무서운 재앙은 심리적인 재앙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넓고 편한 집을 가지고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날마다 마음속에 불안이 엄습해 온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오늘날은 전기가 있어서 사람들이 밤에도 대낮같이 생활하고 있긴 하지만, 마음으로는 어둠 속을 더듬으면서 평안과 희망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진리의 빛을 우리 사회에서 거두신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 흑암 재앙을 내리셨을까요?
1) 반역하는 자들에게는 은혜를 거두시겠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내리시는 은혜 중에서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아무런 차별 없이 내리시는 은혜를 일반은혜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태양 빛은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비춰주시고, 맑은 공기도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으며, 비와 바람도 누구에게나 공급해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는 햇빛을 가리신 것은, 너희들에게는 더 이상 은혜를 주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주시던 은혜를 거두어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만드신 것이 빛입니다. 빛은 모든 은혜의 근원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은 그 빛 아래서 모든 동물과 식물이 살아가도록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빛이 없이는 어떤 동물도 식물도 살지 못합니다. 자연의 빛을 빼앗는 것도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빛을 잃으면 희망만 잃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잃습니다. 세상에 동물이고 식물이고 사람이고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빛은 생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에게 그 빛을 주시던 은혜를 잠시 거두셨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거부하고 교만한 사람들에게는 그동안 주시던 일반은혜 마저도 거두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거절하는 자에게는 자연의 빛만 거두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빛, 진리의 빛을 거두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거두시면 우리는 대책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반은총으로 주셨던 건강을 거두시면 우리가 건강을 만들 수 있나요? 하나님이 일반은총으로 주셨던 맑은 정신을 거두시면 우리가 정신을 차릴 수가 있나요? 우리는 사실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총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거부하고 섬기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일반은혜를 빼앗기며, 진리의 빛을 거두어 버리실 것입니다.
2) 애굽의 신을 심판하신 증거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태양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개구리, 파리 등의 곤충을 신으로 섬겼고, 애굽을 관통하는 나일 강을 신으로 섬겼으나 태양신을 가장 높이 섬겼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자연 만물 중에 태양처럼 위대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태양을 자연스럽게 최고의 신으로 받들어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태양은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주신 자연 선물에 불과했습니다. 선물을 하나님으로 알고 섬기느라고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은 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으로 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건강이라는 선물, 직장이라는 선물, 자식이라는 선물, 자연이라는 선물들을 섬기느라고,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비웃으며 사는 현대인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 시대가 이렇게 깜깜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빛을 거두시고 계신 징조인지도 모릅니다.
2. 이스라엘에게는 빛을 주심.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땅에는 광명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아홉 번째 재앙을 내리셔서 모든 애굽 사람들은 흑암 속에서 공포에 떨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습니다. 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습니까? 진리의 태양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거기는 어두울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흑암이 없었더라." 고 하지 않고 ‘광명이 있었더라.’고 말씀합니다. 흑암이 없었다는 말은 소극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없었다는 말에 불과하지만, 광명이 있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전히 그들 가운데 머무르고 있었다는 적극적인 말입니다.
아무리 깜깜한 시대, 아무리 절망스럽고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결코 어둠이 없을 것을 예고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도, 아무 재산이 없어도, 오늘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이 내안에 비췬다면, 우리에게는 불안이 없으며 주님의 인도와 천국에 대한 밝은 확신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같은 땅인데도 어디에는 흑암이 지배하고 어디는 광명이 있었습니다. 같은 사람인데도 하나님께 복을 받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도, 한사람에게는 일이 되게 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길이 막히는 섭리가 있습니다. 똑같이 공부 했는데도 한사람은 그길로 성공하고, 한사람은 그 길에서 실패하는 사람을 우리는 늘 만납니다. 왜 그럴까요? 변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느냐, 하나님이 기뻐하셨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느냐, 이것이 성패를 가릅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입어서 그분의 은혜를 받을 사람으로 정해진 사람, 그래서 그분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순종할 마음과 헌신할 마음까지 얻은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에게는 은혜의 빛을 비취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며,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사람에게는 절대자 하나님을 아는 신령한 지혜와, 미래의 소망과 평안과 축복의 빛을 내리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헌신하는 성도는 복된 사람입니다. 그들의 장래는 든든합니다. 결코 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라고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감사합시다.
오늘 잠깐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 장해물은 도리어 훌륭한 기회가 되고 축복의 밑천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고, 현재 고난이 있거든 눈물로라도 찬양을 드리며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고, 그들 앞을 어둡게 하실 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사랑하며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흑암이 아니라 광명을 내려 주십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선택받은 자가 누리는 은혜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세상의 참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빛이실까요? 진리의 빛이고 구원의 빛이며 생명의 빛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깨우쳐 주셔야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며 진리를 알고 따를 수 있습니다. 빛이 없이는 아무것도 볼 수 없듯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도, 세상의 원리도, 인간이 가야할 길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쳐서 모든 것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바로 보려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계는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다. 신경안정제가 없으면 잠을 못 주무시는 분은 혹 없습니까?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며칠씩 뜬눈으로 지샌 적은 없습니까? 평안이 없고 소망이 없으면 마음이 깜깜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치료 받을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참 빛이요 구원이십니다. 그분에게로 마음을 열고 다가가야 합니다. 자기 고집이나 짐작으로 가지 말고 말씀이 비춰주는 대로 걸어가면 됩니다. 말씀이 하라는대로 하고 가라는 데까지만 가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시기 때문에 그분만 따르면 광명이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나 어느 가정이나 어느 사회라도, 참 빛이요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의 말씀을 받드는 곳에는 어두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재물이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이웃에게 그 빛을 전할 수 있도록 빛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고 동네의 등대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서 깜깜해질수록, 우리의 사명은 더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서 빛 가운데 살면서, 이렇게 살면 된다고 빛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소유는 어떻게 할 것인가?
흑암재앙을 견딜 수 없게 된 왕 바로가 모세를 불렀습니다.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가서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두고 너희 어린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여덟 번째 재앙을 당할 때는 어린것들도 데려갈 수 없다고 하더니(10,11) 이제는 어린것들은 데려가도 좋으나 다만, 짐승들은 놔두고 가라고 합니다. 너희가 여호와께 제사를 하러 가기는 가되, 가지고 있던 재산은 포기하고 사람만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단이 성도에게 하는 것과 같은 간교한 제안입니다.
출애굽기는 옛날이야기 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현실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와 억압의 땅 애굽에서 탈출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신행동, 불신사상, 불신습관에서 탈출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스라엘을 그렇게 놓지 않으려고 했던 것처럼 오늘 사단도 우리를 세상에 묶어 두고 호락호락 놔주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가기는 가되 물질은 가져가지 말고 네 마음만 가라’고 속삭입니다. 교회에서 헌금에 관하여 설교하면 매우 기분 나빠 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제 물질은 간섭하지 마세요. 오직 마음만 바칠께요.” 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반쪽 신앙도 못됩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면 소유를 내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쓰게 되며, 그렇게 쓰는 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의를 이루지도 못하며 도리어 악을 행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은 절대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짐승은 놓고 가라는 바로의 제안에 모세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모세가 가로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이며,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지 일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들이 가진 것도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가진 물질 중에서 제물을 받으셨으며, 십일조를 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느 것을 제물로 바치라 하실지 모릅니다. 그래서 모세는 양 한 마리도 놓고 갈수가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더러 제물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사실 바로는 그동안 이스라엘을 부려먹은 품삯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역시 하나님께 생명을 받아 살았으니 제물을 드려야 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주신 물질도 함께 가지고 가야 한다는 원칙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우리에게 제물이 없다면 왕이라도 우리가 여호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주셔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것 가지고 간다는데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우리의 생축은 우리들과 함께 가야하며, 한 마리도 남기고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기에 이르기 까지는 거기서 어떤 것으로 섬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분이 언제든지 요구하시면 그분께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께 드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나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요 내 시간, 내가 가진 재능, 자식, 재물 등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분께서 무엇을 요구하신다면 나는 그 무엇이라도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것을 세상에 소속 시킬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내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렵니다. 그런 말입니다. 그렇게 선언하고 그렇게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로가 모세를 향하여 막말을 했습니다.
"당장 꺼져라. 네가 내 얼굴을 다시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이제 더 이상 타협하지 않겠으며, 절대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말이었습니다.
모세도 맞받았습니다. “옳습니다. 나도 다시는 왕의 얼굴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왕이 우리의 제사할 짐승을 내라고 요청하고 있고, 이제는 나도 더 이상 왕을 보지 않을 것이요’ 라고 막말을 하고 나왔습니다.
바로는 여전히 강퍅했지만, 모세는 점점 담대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강경함의 근원은 다릅니다. 바로의 막말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고, 모세의 담대함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한 담대함입니다. 누가 승리할까요?
바로가 얼굴을 붉히면서 ‘너 다시 한 번만 내 앞에 나타나면 죽을 줄 알라’고 소리치며 모세를 쫓아내고 있습니다. 상대는 애굽의 절대군주 바로입니다. 이쯤 되었으면 ‘아, 우리가 해방되기는 글렀구나.’ 하고 절망하기 쉽습니다. 앞도 뒤도 옆도 다 막힌 것 같은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전혀 기죽지 않고 도리어 훨씬 더 강해졌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깜깜한 바로는 무지 때문에 막말을 하고, 모세는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과 장차 하실 일을 알기 때문에 담대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하여 막말을 할지라도 우리에게 길이 막힌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하나님은 진리요, 진리를 따르는 사람의 편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철저하게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을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모세처럼 진리의 빛 아래서 그분을 바로 아는 지식에 근거하여 담대하게 세상에 진리를 선포하며 살아갑시다.
여러분은 힘들고 어려움에 닥칠 때, 무엇에 마음을 기대어 살고 있습니까? 바로처럼 무식한 고집으로 밀고 나갑니까?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못합니까? 도대체 모르겠으니까 점쟁이한테 한번 가서 물어봅니까? 아니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말씀을 따라서 가십니까?
결국은 한 사람은 망하고 한 사람은 승리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하여 말하고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넘어질 리가 없으며 약해지지도 않습니다. 어두워가는 세상에서도 세상의 빛 되신 주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서 세상에 빛을 비추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아홉 번째 재앙-흑암 재앙
출애굽기 10:21-29 / 손재호 목사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 재앙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은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 재앙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애굽인들의 가장 큰 신은 태양신입니다. 그들은 태양을 ‘라(Ra)’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태양의 아들이 바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그들에게 흑암의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오늘 본문 21-23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들어서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만한 흑암이리라.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매 캄캄한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그 동안은 사람 사람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어서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자 캄캄한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임하였습니다. 이 삼일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이에 애굽 사람들은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었습니다. 애굽의 온 땅에 임한 어두움은 손을 더듬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하는 곳에는 어둠의 재앙이 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온 땅은 어두움이 임하여 칡흑 같은 어두움에 싸여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이 거하는 고센 땅에는 광명이 있었습니다.
이 재앙이 바로와 애굽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과 공포였겠습니까? 애굽 사람들은 태양신을 신들 중의 우두머리로 숭배했습니다. 그리고 바로는 그 태양신의 아들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온 땅에 삼일 동안이나 어두움이 임하여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고센 땅에는 광명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흑암 재앙은 이스라엘이 거하는 고센 땅에는 임하지 않고 애굽 사람들이 거하는 애굽 땅에만 임한 재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재앙은 태양신을 섬겼던 바로와 애굽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섬기는 최고의 신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재앙은 여호와와 바로의 대결에 종지부를 찍을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 재앙에 대한 바로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24절에 보면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찌니라”고 했습니다. 어두움의 재앙이 내리자 바로가 모세를 불러 말하기를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가라”고 했습니다. 바로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스라엘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가라고 했습니다. 애굽 사람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고대 사람들에게 흑암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두움이 자아내는 공포감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어두움이 지배하는 밤은 죽음과 온갖 귀신들과 도둑들이 장악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사람들은 밤에 외출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심리적 두려움 속에서 삼일을 보내며 죽음을 의식한 바로는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광야로 가서 여호와께 예배드리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짐승은 남겨 두고 가라는 것입니다. 바로가 이런 조건을 제시한 것은 짐승을 잡아 둠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올 것을 보장 받고자 한 것입니다.
이런 바로의 제안에 대해 모세는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25-26절을 보면 “모세가 가로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자신이 마음에 둔 조건이 충족될 때 떠나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 준 것입니다.
이에 바로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7-2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보내기를 즐겨 아니하고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바로는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모세에게 협박을 하였습니다.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이런 바로에게 모세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29절에 보면 “모세가 가로되 왕의 말씀이 옳으니이다. 내가 다시는 왕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고 했습니다. 바로가 모세를 다시 만나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지만 모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왕의 말이 옳다고 하며 다시는 왕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겠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이 둘이 다시 만날 때에는 모세가 죽는 것이 아니라 바로의 맏아들이 죽게 됩니다(출 11:4-7).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이 부드러워질 수 있도록 여러 차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출애굽기 저자는 하나님의 주권과 바로의 불순종이 결코 상반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습니다. 재앙으로 인해 어려움이 닥치면 말씀에 순종하는 척 하다가 재앙에서 벗어나면 또 그 마음이 강퍅하여 졌습니다. 그리고 적당히 타협하고자 하였습니다. 흑암의 재앙 가운데서도 이스라엘로 광야로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허용하면서 짐승을 남겨 두고 가라고 했습니다. 바로가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제안한 경우가 여러번 있었습니다. 8:25절에 보면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8:28절에서는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마라”고 했습니다. 10:11절에서는 “…너희 남정만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10:24절에서는 “너희 모든 사람은 가되 소와 양은 남겨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로의 거절과 타협에서 우리의 신앙의 방해와 타협을 보게 됩니다. 사단은 우리로 늘 타협하게 유혹합니다.
첫째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러 가는데 꼭 멀리 삼일 길이나 광야로 가서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곳 애굽에서 제사를 드리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꼭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서 예배해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름이면 피서 가서 해수욕장에서 간단히 예배드리면 되지 않느냐. 겨울이면 스키장에 가서 근처에서 예배드리면 되지 않느냐. 지금이 무슨 구약시대냐. 특정 장소와 시간에 메일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자기가 우선인 것입니다. 성도가 함께 모여 주를 찬양함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과연 신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배보다 다른 일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면 아직 애굽 안에서 예배하라는 말에 타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일 길을 가야만 합니다. 왜 그곳이어야 합니까? 애굽을 떠나서 시내산까지 나아가는 거리가 삼일 길입니다. 왜 이렇게 떠나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애굽에서 완전히 분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을 우리는 세상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분리가 일어나야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2:15-16절을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이유입니다. 애굽의 사상과 정신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소위와 사상에서 완전히 분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멀리 가면 갔다가 돌아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과 구별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늘 세상 속으로 돌아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 할려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도원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자세와 가치관이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면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면 세상적인 재미도 없고, 하나님을 섬기는 재미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세상과 양다리를 걸치고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후서 2:20-21절을 보면 “만일 저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 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 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죄를 회개 해야 합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고자 할 때 너무 깊이 빠지지 말라는 유혹이 늘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어서 세상 더러움을 피해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고자 하는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거룩한 명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셋째는, 어린이들과 여자들은 남겨두고 남자 어른들만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반의 떠남입니다. 처자식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제대로 된 떠남이 되겠습니까?
넷째는, 짐승은 남겨두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독종과 우박으로 많은 짐승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노예들의 노동력은 일부 잃는다고 하여도 그들의 재산은 붙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이러한 제안들이 결국 세상의 제안이라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의 요구들이 성도들에게 오늘날도 동일하게 붙들고 늘어지는 문제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 제안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꼭 재물이 있어야 하는가, 그러니 짐승은 다 두고 가서 제사만 드리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돈 없이, 값없이 생명수를 받는 것입니다.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면 우리의 소유도 사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소유는 또다시 나의 것으로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루터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는데도 우리는 예수 믿는 것 따로, 내 재산 챙기는 것 따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소유가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직도 우리는 네 번째의 제안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일리 있는 해석이라고 봅니다.
두번째로, 삼일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은 애굽에서 제사의 자리로 나가는 것이 삼일 길이 필요한 것은 그 자리에 가보아야 하나님께서 무엇을 제물로 요구하실지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굽에서 꼭 삼일 길을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도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면 선택하는 것이지, 우리가 임의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제사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죽으심이 어떤 제물로 드려졌는가를 이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님의 그 영을 받아서 세상과 완전한 분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미 삼일 길을 떠나서 제사에 참여가 된 것입니다. 소나 양의 피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단번에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를 드린 일에 우리가 참여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우리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세상이 성도에게는 무엇으로 보여야 합니까? 어두움으로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안에 들어온 성도의 시각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 기대를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바른 신앙 양심을 가지고서는 하루도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살지 않고 세상의 방법으로 살려고 하니 세상이 어두움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자꾸만 세상이 밝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오늘도 무어라고 합니까? 비록 어려운 문제들이 있지만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 풀지 못하는 것은 없다라는 것을 끊임없이 세뇌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 많다고 하여도 그러나 착한 사람이 더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라면 이 세상이 어두움으로 캄캄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곳에서 살 수도 없고, 취할 것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로 나누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이 우리에게 어떻게 실제적인 결과를 가지고 온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6:14절을 보면 “그러나 내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믿는 자의 죄를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믿는 자와 세상과의 관계도 영원히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믿는 자는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볼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믿는 자와 세상과 함께 서 있는 것입니다. 신자에 대하여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에 대하여 믿는 자가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실질적이고도 고귀한 지위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에 대한 심판은 세상이 고의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던져준 입장에서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즉 세상은 살인자와 그리스도 중 누구를 살리겠느냐는 선택에 당면해서, 살인자는 석방시켜주되, 그리스도는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도록 버렸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어두움에 속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어두움이라고 보지 않고 자기들이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어두움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없는 것이 캄캄함이요, 어두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없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일들로 사람들이 환호하고 좋아하는 것들이 십자가로 보면 어두움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이라는 거대한 나라,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 위대한 왕과 지혜로운 관리자들에 의하여 움직여지기 때문에 나라들마다 애굽을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어둠의 나라였음을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니 여지없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을 ‘어두움이다. 빛이다’라는 구분은 착한 사람이 많은가 적은가 하는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그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라면 그 영이 우리에게 나타나는데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매일 그가 행하고 경험하는 가운데서 그 사실을 실현해 내도록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십자가가 신자와 세상과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갈라내는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의 보내심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묶게 되는 것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심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심판하여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을 성령이 오시면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에서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그러나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어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활로 그러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들어 올리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주의 자리에 등극하셔서 자기의 백성을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스림이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등지고 세상을 볼 때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신자는 십자가에서 세상을 보니 세상은 어두움이요, 죽은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쪽에서 십자가를 보면 십자가에 있는 자들이 죽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간격은 얼마나 큰지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세상과 통하는 길은 주님을 부인하는 경우에 통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한 세상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누가 예수님을 믿는지 안믿는지 구별이 안됩니다. 어두움과 빛이 섞일 수가 없는데 지금은 함께 혼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라면 이렇게 계속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두움과 빛의 분리가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이러한 분리가 더욱 선명하여지도록 영안을 밝혀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좇아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