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269
■ 1부 황하의 영웅 (269)
제4권 영웅의 길
제 33장 송양지인 (6)
이윽고 결전(決戰)의 날이 밝았다.양군은 전투 준비를 마쳤으나 강을 사이에 두고
싸울 수는 없었다.누군가 한쪽에서 강을 건너야 했다.하지만 그것은 매우 위험하다.
도하(渡河) 도중 습격을 받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초군(楚軍)은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싸움에는 자신이 있었다.
초군대장 성득신(成得臣)은 승리를 자신했다."송양공(宋襄公)은 싸움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우리 쪽에서 먼저 강을 건너 송군(宋軍)을 격파하리라!“이렇게 말하고는
전군에 도하(渡河)명령을 내렸다.초군(楚軍)은 배를 타고 홍수(泓水)를 건너기 시작했다.
송군 입장에서 보면 초군을 격파할 더할 나위 없는 호기였다.아니나 다를까,
목이(目夷)가 얼른 송양공에게 권했다."초(楚)나라는 군사가 많고 우리는 적습니다.
초군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우리가 공격하면 초군의 반을 꺾을 수 있습니다.
만일 초군이 강을 다 건너오면 대적하기가 어렵습니다.어서 공격 명령을 내리십시오."
그러자 송양공(宋襄公)이 손을 들어 큰 깃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는 저 인(仁), 의(義)라는 두 글자가 보이질 않는가?나는 정정당당히 초군과 대결하고 싶소.
비겁하게 적이 반쯤 건너왔을 때 공격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오.“
목이(目夷)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질 않았다.그러는 사이 초군은 모두 도하(渡河)를 완료했다.
그러나 이제 막 강변에 도착한 터라 아직 대열을 갖추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목이(目夷)가 다시 송양공에게 진언했다."초군이 아직 전열을 가다듬지 못했습니다.
이때를 이용하여 공격하면 적은 큰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런데 송양공(宋襄公)의 대답이 또 가관이었다.
"그대는 어찌 적을 치는 일시적인 이익만 알 뿐 만세의 인의(仁義)는 모른단 말이오?
인의로써 천하의 맹주를 구하려는 내가 어떻게 진을 치지도 않은 적을 공격할 수 있겠소?“
"아, 아깝고나! 내가 일전에 말한 화(禍)가 바로 이것이었도다."
초군은 완전히 대열을 갖추고 진세(陣勢)를 이루었다.이제는 초군 특유의 강맹함이
완전히 되살아났다.병력이 두 배가 넘는 초군은 홍수(泓水) 강변을 새까맣게 덮었다.
송양공(宋襄公)은 그제야 공격의 북을 울렸다.초군 진영에서도 북소리가 힘차게 울려퍼졌다.
양군은 정면으로 맞부딪쳤다.하지만 역시 초군(楚軍)이 강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한 시각도 채 지나지 않아 송군(宋軍)이 밀리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있던 송양공(宋襄公)은 친히 긴 창을 들고 문관(門官)들과 함께 초군을 향해 돌진했다.
문관이란 임금을 호위하는 경호부대. 모두가 용맹스럽고 충성스런 자들로만 구성되었다.
초군 대장 성득신(成得臣)은 송양공이 친히 친위부대를 거느리고 공격해오는 것을 보고는 외쳤다.
"진문을 활짝 열어라!“초군(楚軍)의 진영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송양공(宋襄公)은 신바람이 나서 초군 진영 한가운데를 향해 질풍처럼 내달았다.
"위험합니다!“사마 공손고(公孫固)가 이를 보고 송양공을 지키기 위해 급히 쫓아왔다.
그 앞을 한 장수가 가로막았다."어디를 가려고 하느냐?“초군 장수 투발(鬪勃)이었다.
두 장수는 한데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이 한창 칼과 창을 휘두르고 있을 때 송군 장수 약복이(藥僕伊)가 군사를 거느리고
그 곳에 당도했다.백중세이던 상황은 금방 공손고(公孫固)에게 유리해졌다.
투발(鬪勃)이 당황하여 몸을 빼려 하는데, 또 한 장수가 싸움에 끼여들었다.
이번에는 초군 장수 위여신(蔿呂臣) 이었다.네 장수가 한 덩어리가 되어 다시 혼전을 벌였다.
양군 장수들이 이렇듯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사이, 초군진영으로 들어간 송양공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는 성득신(成得臣)의 함정에 빠진 줄 모르고 너무 깊숙이 들어온 것이었다.
송양공을 지키던 친위부대인 문관(門官)들은 이미 거의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송양공은 눈앞이 아득했다.문득 뜨겁고 날카로운 아픔이 넓적다리에 와 닿았다.
내려다보니 화살 한 대가 사타구니 아래쪽에 꽂혀있었다.화살을 빼내자 피가 분수처럼 솟아났다.
"빨리 피하십시오.“공자 탕(蕩)이 송양공 주변으로 몰려드는 초군을 헤치며 외쳤다.
"빠져나갈 수가 없구나.“송양공(宋襄公)은 넓적다리 외에도 여러 군데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병차에 제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아, 아, 내 생(生)이 여기서 끝나는구나."
송양공(宋襄公)이 절망감에 사로잡혀 이렇게 탄식하고 있는데, 저편에서 공손고(公孫固)가
일지군마를 거느리고 달려왔다.그는 겨우 초군(楚軍) 장수 투발을 따돌리고 송양공의 뒤를
쫓아온 것이었다."저를 따르십시오.“공손고(公孫固)가 외치며 송양공(宋襄公)을 호위했다.
칼을 이리 휘두르고 저리 휘두르며 포위망을 뚫기 시작했다.얼마를 그렇게 싸웠을까?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송양공만 겨우 그 뒤에 붙어 있을 뿐 공자 탕(蕩)을 비롯한
여러 친위병들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송양공을 살리려다가 모두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아직 죽지 않은 약복이(藥僕伊), 화수로(華秀老) 등 송군(宋軍) 장수들은 송양공이
포위망을 빠져나온 것을 보고서야 일제히 전속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승기를 잡은 성득신(成得臣)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망치는 송군을 추격했다.
송나라 군대는 철저하게 두들겨 맞고 대패했다.수많은 병장기, 병차 등을 고스란히
초군에게 빼앗겼다.이것이 그 유명한 송양공과 성득신의 '홍수전투(泓水戰鬪)' 전말이다.
이 전투로 인해 성득신(成得臣)은 초나라에서 일약 인기 제일의 장수가 되었고,
초성왕의 신임을 더욱 한몸에 받게 되었다.
반면, 송양공(宋襄公)은 송나라 대부들과 백성들로부터 무수한 책망과 질타를 듣지 않으면 안 되었다.
- 공자 목이(目夷)의 말을 듣지 않아 패했다.- 어째서 목이의 말을 듣지 않았는가?
가족을 잃은 통곡 소리와 재산을 잃은 원망 소리가 연일 궁중의 병상에 누워 있는
송양공의 귀를 때려댔다.그런데 이에 대한 송양공(宋襄公)의 반응 또한 걸작이었다.<춘추좌씨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송(宋)나라 사람들이 한결같이 송양공을 비난하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군자는 두 번 다치지 않게 하고, 이모(二毛)를 포로로 하지 않는 법이다.
옛 성인들의 싸움 방식을 보면, 적이 험지에 들었을 때 괴롭히지 않았다.
내가 비록 망국의 후손이라고는 하나, 어찌 대열을 갖추지 않은 적에 대해
진격의 북을 울릴 수 있을 것인가."
두 번 다치지 않게 한다 함은 부상자를 다시 상처입히지 않는다는 뜻으도 다친 사람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그리고 이모(二毛)란 흰털과 검은 털을 가리키는 말로, 머리가 희끗희긋한
반백의 사람을 뜻한다.즉 노병(老兵)은 포로로 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는 것이다.
옛 성인들은 이러한 도리를 지켜 적이 좁은 골짜기나 하천에 머물러 있을 때는 몰아붙이지 않았으니,
비록 내가 망한 은(殷)나라의 후예이긴 하지만 어찌 비겁하게 대열을 갖추지 않은 적을
공격할 수 있겠는가.이는 결코 군자의 인의(仁義)가 아니다,
라고 송양공(宋襄公)은 당당히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궤변인가, 아니면 군자로서 지켜야 할 인의론인가.그것도 아니라면 송양공 특유의 미의식(美意識)인가.
이에 대해 수차례 송양공을 간언한 바 있던 공자 목이(目夷)는 다음과 같이 송양공의 인의론을 반박했다.
모든 군대가 싸우는 목적은 이기기 위해서 이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어차피 나라를 위해 군사를 쓸 바에는 적이 좋지 못할 때에 치는 것이 옳다.
한마디로, '전쟁은 이겨야 한다'는 것이 목이(目夷)의 주장이다.
<춘추좌씨전>의 저자 좌구명(左丘明)은 공자 목이의 이러한 반론을 세밀히 기록함으로써
송양공의 괴상망측한 인의론을 비판했다.
대부분의 후세 사람들도 이에 동조하여 '홍수(泓水)전투'를 다음과 같이 비꼬고 있다.
송양공(宋襄公)은 인의를 지키려다가 싸움에서 패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잃었다.
목숨까지 잃었다고 함은 송양공이 홍수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그 다음해 여름에 숨을
거둔 것을 말함이다.이때부터 세상 사람들은 송양공의 괴상한 인의론(仁義論)을 가리켜
-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고 비웃었다.
지금도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데,
지나치게 명분에 얽매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얻지 못하는 사람,
혹은 그러한 행동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270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