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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실크로드에 무역소를 지으면 골드가 얼마일까.」
중국 당 제국이 서역을 통제하기 위해 세웠던 안서도호부는 옥룡 DLC가 나오기 전부터 많은 분들의 기대를 받았지만 아쉽게도 플레이 불가능이라 '아무도 못하는 도호부'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안서절도사 곽흔 : 나로 플레이하고 싶지? ㅋㅋㅋ」
769 샤를마뉴 시나리오의 안서절도사 곽흔은 꺼라위키 등으로 다들 아시겠지만 867 오래된 신들(올드갓)에선 이미 안서도호부가 멸망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동쪽 끝, 둔황과 주천(주취안)을 포함한 주천(주취안) 공작령을 다스리는 장의조(Zhang Yichao)라는 한족 공작이 남아있는데 이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 인물을 설명하려면 안서도호부를 얘기해야되고, 안서도호부를 간단하게 설명드리자면, 그 전에 앞서 모용부의 토욕혼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쓰다보니 겁나 길어졌습니다. orz.
1. -모용부의 유래-
「모용부가 시작된 요하 유역의 시라무렌 강」
하북과 요하 유역에서 거주했던 선비족은 처음엔 흉노에게 복속된 유목민 중 하나였지만 흉노는 너무 설치다 한무제나 후한 황제들에게 얻어 터지고 몰락합니다.
흉노가 몰락하자 선비족은 몽골 초원으로 세를 확장했습니다. 선비족의 집단으로 탁발부, 모용부, 우문부 등이 있었는데, 이 중 바로 모용부가 토욕혼의 선조가 되는 자들입니다.
흔히 모용선비라고 불리는 모용부의 시조 막호발은 238년 위 장군 사마의가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공손연 정권을 공격할 때 사마의를 따라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이 공적으로 그는 위에게 벼슬을 받고 모용부를 건국합니다.
막호발의 아들 모용목연은 '모용'이란 성씨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인데, 위 장군 관구검이 동천왕을 패배시키고 고구려를 박살낼 때 위군 소속으로 고구려를 공격한 인물입니다. 흠흠..;;
이 일로 위는 모용목연에게 더 높은 벼슬을 주었지만 모용부 역시 위에게 마냥 협조적인 것만은 아니어서 때때로 위의 변경을 약탈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중화통일을 이룬 사람 중 가장 금수저였을 사마염」
시간이 흘러 중국에선 위를 멸망시킨 진(서진)이 280년 오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뤘지만 주위 이민족들에겐 딱히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는데, 265년 서진을 개국한 사마염은 268년 총명했던 어머니 문명황후 왕원희가 죽자마자 사치에 빠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아직 개국 초라 유능한 인물들이 많아 본인은 크게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280년 오를 멸망시켰습니다만 벌써부터 북쪽의 이민족들은 중원을 노리기 시작했습니다.
모용부의 3대 대인이자 모용목연의 아들인 모용섭귀도 그러한 이들 중 하나로, 그의 아버지가 위에게 협조했던 것과 달리 그는 281년 서진의 창려군(요동군, 요서군 사이에 위치한 곳이며 두 군보다 북쪽에 위치해 모용선비의 근거지인 사르무렌 강 유역에 가까웠다.)을 약탈하는 등 서진을 적대합니다.
「모용섭귀 : 나는 나보다 약한 자의 명령은 듣지 않는다.」
하지만 옹주자사를 지내며 이민족 문제에 경험있던 엄순이 안북장군으로 임명되어 모용부를 토벌하러 왔고, 282년 창려군에서 모용부는 엄순에게 대패하여 큰 피해를 입습니다. 무려 일만명에 가까운 선비족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모용섭귀 본인도 283년 죽으면서 모용부는 한동안 골골대야 했습니다.
「모용섭귀 : 내가 잘못했다. 말로 하자.」
모용섭귀에겐 동생 모용내와 아들 모용토욕혼, 모용외, 모용운(북연의 황제와는 동명이인)이 있었습니다.
모용섭귀가 죽자 동생 모용내와 차남 모용외가 대인 자리를 두고 다툼을 벌였는데, 모용내가 승리하여 모용외는 도피 생활을 해야했지만 2년만인 285년 모용내가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면서 모용외는 대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모용외는 부여 왕을 사로잡아 죽이고 서진을 공격했으며 한족 망명인사들을 받아들여 한화 정책을 진행하는 등 모용부를 발전시켰지만 서진의 반격에 일단은 항복하고 서진에게 다시 복속되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팔왕이 난이 터지고 온갖 이민족들이 중원에 진출하기 시작하자 모용외 역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유연이 북한을 세우고 서진 수도 낙양을 함락시킨 후 한족 정권을 화남으로 쫓아내자 (영가의 난) 모용부 역시 중원으로 진출했습니다.
모용외의 후손들은 전연, 후연 등을 세웠고 부여, 고구려와 계속 싸우면서 서로에게 두고두고 씹어먹을 원수가 되었지만 이 부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모용토욕혼을 알아볼 시간입니다.
2. -토욕혼의 개국-
모용토욕혼은 다른 선비계 인물들과 달리 특이하게도 세글자 이름을 썼는데, 이는 사실 중국 사서들이 이민족 이름들을 축약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동생 모용외의 정확한 이름은 모용약락외인데 중국 사서에서 선비족 이름을 줄여쓰는 경우가 많아 본명이 정확히 기록된 인물은 소수에 불과하고 모용약락외 역시 대부분의 사서에서 모용외로 기록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용토욕혼은 자신의 이름을 딴 나라를 세우면서 선비계 인물로선 유일하다시피 풀네임이 잘 알려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용외의 이복형인 모용토욕혼은 첩의 자식이라 권력 기반이 약해서인지 모용섭귀가 죽은 후 모용내와 적자 모용외에 다툼에도 별 기록이 없던 처지였습니다. 끼지도 못했거나 간접적으로나마 모용외를 지원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모용섭귀가 살아있을 때 하남왕으로 임명되어 1700호의 인구를 봉분받은 모용토욕혼은 이복동생 모용외와 불편한 관계였는데, 모용외가 대인이 된 후 모용토욕혼의 부락이 모용외의 무리와 목초지 문제로 싸우는 사건이 발생햇습니다.
모용외가 사신을 보내 자신을 꾸짖자 모용토욕혼은 아버지 모용섭귀가 목초지를 나눈 것을 이야기하면서 "어찌 서로 멀리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아 말들을 싸우게 했나"며 항변했습니다.
이는 분쟁이 발생한 목초지가 아버지가 자신에게 물려준 정당한 땅임을 강조하는 발언이거나, 모용외가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충돌을 일으킨 것 아니냐며 의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찌되었든 동생의 비난에 마음이 상하고 위협감도 느낀 모용토욕혼은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이주했습니다.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든 모용외는 형에게 사람을 보내 사과하고 돌아와달라고 했지만 모용토욕혼은 "내 두 아들은 강성해져 복이 후세까지 이를 것이며 나는 서자라 (너와) 나란히 자랄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서자임을 자조하면서도 자기 자식들의 세력이 커져 모용외의 후손들과 다툼을 벌일 것을 경계하는 말을 남긴 채 모용토욕혼은 떠났고 모용외는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형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아간가의 노래'(선비어로 '형의 노래')를 지었다고 합니다.
모용외 :형 미안해 돌아와줘..ㅠㅠ
의외로 모용외와 모용토욕혼은 사이가 좋았지만 두 사람이 출신성분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영가의 난이 일어났을 때 농산(황하 상류 지역)을 넘어간 모용토욕혼은 서진을 계속하여 토번(티베트)와 중원을 이어주는 곳이자 실크로드의 경유지 중 하나인 백난(백란)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이곳은 청해호(칭하이 호)에서 서량에 이르는 영역으로 추정됩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285년 이후부터 4세기 초로 추정되는 때에 모용토욕혼은 백개 이상의 부족으로 분열되었던 현지의 창족 원주민들을 복속시키고 백란에서 토욕혼을 건국했습니다.
「모용토욕혼 : 너무 멀리 온 것 같은데.」
317년 모용토욕혼은 서량(감주, 현 간쑤성)의 임하(린샤 혹은 허주, 허저우)에서 죽었고 아들인 하남왕 모용토연이 후계를 이었습니다.
토욕혼은 여러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모용토욕혼이 하남왕을 자칭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하남국'으로 기록했고, 토번에선 '아시'라고 불렀습니다. 토욕혼의 왕들이 나중엔 백란왕을 자칭했기에 '백란'이란 이름도 알려졌지만 가장 대중적으로 쓰였던 호칭은 역시 '토욕혼'이었습니다.
물론 유목민답게 토욕혼의 군주들 역시 가한(칸)이나 선우 등의 명칭을 쓰기도 했습니다.
「오른쪽 위 요하 유역에서 티베트까지 이동한 모용토욕혼」
3. -토욕혼의 성장과 위기-
토욕혼은 기본적으로 유목생활을 했지만 물이 풍부한 청해호에서 거주하면서 농사도 조금씩했고 (단 청해호 자체는 소금물이라 주위 지류에서 물을 끌어다 썼습니다.) 실크로드 근처라는 특성을 살려 상업도 발전시켰습니다.
청해부(영문위키에선 Qinghai Xianbei라고 써져있어 임의번역), 독발부, 걸복부, 하란부 등의 선비족들도 토욕혼에게 합류하면서 세가 불자 토욕혼인들은 청해호 서쪽에 새 수도 부사(Fuqi, Fusi)를 건설하고 수도를 이전했습니다.
전성기에 서쪽으로 계속 영토를 확장하던 토욕혼의 국경은 고창국(호탄 왕국), 카슈미르와 아프가니스탄까지 이르고 인구도 330만 호에 달했다고 합니다.
실크로드답게 승려들이 많이 이용하면서 전통 신앙을 믿던 토욕혼인들 사이에서 불교도가 증가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중원에서 친척들인 모용부를 비롯한 선비계 왕조들이 하나씩 고꾸라지면서 결국 다 망할 때 토욕혼은 꾸준히 성장해 7세기 후반까지 살아남았습니다.
「토욕혼 :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놈이 강한 거다!」
모용토욕혼은 죽을 때 60명의 아들을 남겼고 그들은 오호십육국의 왕조들인 서진(호진, 사마씨의 그 나라가 아님)과 북하 왕조를 물리치면서 영토를 확대했습니다.
4세기에 세워진 서진의 2대 대선우 걸복건귀는 대선우와 '하남왕' 호칭을 병용했는데, 서진이 토욕혼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줍니다.
서진이 토욕혼을 속국으로 삼았거나, 적어도 복속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5세기 초 북하 황제 혁련정이 북위에게 연패해 몰락하는 왕조를 살리기 위해 서진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토욕혼도 속국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북위와 일대 결전을 벌이려고 했지만 토욕혼이 북하를 배신하고 북위에게 넘어가 북하군을 공격, 혁련정을 사로잡아 북위에게 넘겨버리면서 북하를 멸망시켜버립니다.
6세기 후반 제15대 혹은 제18대 가한인 모용과여 대에 이르면 중원 국가들과 전쟁을 벌일 정도로 성장한 토욕혼은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토욕혼을 조져버려야 겠다고 생각한 황제가 나타났으니, 바로 수 양제입니다.
.....네, 고구려에 꼬라박았다가 X망한 '그 황제'.
「양제 : 지금 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 것이야?」
하지만 우습게 볼 것이 아닌 게, 고수전쟁의 실패로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양제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수는 사방을 다 패고 다니는 패권국가였습니다.
첫번째 상대는 570년대에 비잔티움 제국에서 고구려에 이르는 초원 지대를 모조리 장악한 돌궐 제국이었습니다.
돌궐은 오호십육국으로 난리 난 중원 국가들을 봉신국으로 삼다시피 하면서 전성기를 누렸고 수 문제 양견 역시 돌궐을 눈치를 보며 공물을 갖다 바치는 신세였습니다.
하지만 수 문제는 근검절약하며 왕조를 부흥시켰고 뛰어난 계락가 장손성은 이간책으로 돌궐은 내전 끝에 분열시켰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진공한 수나라 군대는 돌궐 상대로 사방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나마 수에게 대항하던 동돌궐 카간 타르두(달두 가한)는 세력 기반을 모두 잃고 603년 토욕혼으로 달아났으며 그뒤로 역사 기록에서 사라집니다.
불과 단 한 세대만에 중원 국가를 가지고 놀던, 몽골 제국 이전 가장 거대했던 유목 제국 돌궐이 거꾸로 수에게 굴복한 것입니다.
심지어 수에게 굴복한 동돌궐의 계민 카간(야미 카간)은 수 양제가 직접 돌궐로 순행할 때 장손성이 "천자가 행차하시는 곳에 왠 잡초가 이리 많음?"이라고 경고하자 겁에 질려서 자기 손으로 직접 제초를 할 정도로 비굴한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그런 수 양제에게 딱 걸린 토욕혼도 순식간에 뒤지게 얻어 터지고(...) 수에 입조해야만 했습니다.
「양제 : ㅋㅋㅋ 속이 다 시원하넼ㅋㅋㅋㅋㅋㅋ
장손성 : ㅎㅎㅎㅎ」
북쪽과 서쪽을 정리한 수 양제의 다음 목표는 동쪽의 고구려였습니다.
물론 결과는 다 아시다시피 X망했고 수 양제는 그대로 몰락합니다.
「양제 : 뭐야, 나 벌써 죽는 거야?」
돌궐과 토욕혼 역시 수 왕조에게서 벗어나지만 수에게 두들겨 맞은 피해는 상당했습니다.
거기다 수가 멸망하고 새로 생긴 당 제국은 수보다 훨씬 강하고 두려운 국가였습니다.
4. -당의 서역 진출-
「태종 : ㅅㅂ 천자한테 개겼던 놈들 다 각오하고 있어라.」
중국사에서 손에 꼽히는 명군 당 태종은 자신의 가장 뛰어난 장군 이정을 파견해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초원 세계를 평정했습니다.
당에게 완전히 압도당한 유목민들은 당 태종을 천가한(텡그리 카간)으로 추대했고 동돌궐 하에 있던 거란, 해, 습 등의 유목민족들은 당에게 항복했습니다.
당 태종의 그 다음 목적은 서역 진출이었습니다.
실크로드의 주요 무역로를 통제하면서 이득을 보던 토욕혼은 당 제국의 첫번째 목표로 겨냥되었습니다.
토욕혼은 당의 확장욕에 경계했지만 그들이 상대하기에 당은 너무 강력한 상대였습니다.
634년 후군집이 이끄는 당군은 토욕혼을 정벌했고 수의 공격에서 회복하지 못한 토욕혼은 결정적인 치명타를 입고 당에게 복속되었습니다.
「토욕혼 : 아 형 잠깐 나 뼈 맞았어.」
적당히 패고 속국화시킨 수와 달리 당군은 토욕혼의 중심지인 청해호 근방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우심퇴에서 토욕혼 가한 모용복윤을 패배시킵니다.
이후 이정과 설만철이 이끄는 당군은 서쪽 끝으로 도망친 모용복윤을 타림분지까지 추격합니다. ㄷㄷ
결국 절망한 모용복윤은 자살했지만 모용복윤의 아들 모용순(모용순광)이 저항을 계속하자 태종은 타협하여 모용순을 서평군왕으로 임명하고 속국으로 삼는데서 만족합니다.
모용순은 가까스로 당군을 회군시켰지만 토욕혼은 심각한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남쪽에서 공격을 당하고 재기불능에 빠져 당에게 끌려다닙니다.
첫번째로 토욕혼을 복속시킨 태종은 그 다음으로 고창국(가오창, 호탄 왕국) 원정을 시도했습니다.
고창국은 오호십육국 시기 북량의 잔존세력이자 흉노의 일파인 저거씨와 노수호가 화북지방을 통일한 북위를 피해 서쪽으로 도망쳐 투르판 분지의 차사국을 멸망시키고 세운 무역국가였습니다.
지배층은 한족, 피지배층은 돌궐족으로 불교가 융성했던 고창국은 실크로드의 주요 무역 거점이었습니다.
중국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돌궐에 더 가까웠던 고창국을 아니꼽게 여긴 당은 정복을 계획합니다.
640년, 서돌궐을 압박하고 서역에 진출하기 위해 태종은 소정방과 후군집을 파견해 고창국을 멸망시키고 투루판 지역에 새 행정구역 서주를 설치한 후 안서도호부를 세웁니다.
서역국가들에 대한 당 제국의 영향력을 증가시키고 실크로드 무역을 통제하기 위해 세워진 안서도호부는 실크로드 무역을 중요시하는 중앙아시아 세계에서 당 제국의 위엄을 보여주는 강력한 기관이었습니다.
첫번째 안서도호는 당 고조의 9녀, 여릉공주의 남편인 교사망이었고 643년 임명된 두번째 절도사 곽효각은 서역 정복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644년 언기국(카라샤르)를 점령했고 아극(중국어 '아커쑤", 위구르어 '악수')에 당의 수비군이 파견되었습니다.
648년엔 구자국(구차국)을 정복하고 도호부를 구차(쿠차)로 옮겼습니다.
「당군에게 줄줄이 털리는 타림 분지의 도시들」
당의 서역 진출과 타림 분지 정복에 긴장한 서돌궐은 당에게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안서도호부는 수천명의 병사들밖에 없는 상태였기에 후퇴하여 서주로 다시 도호부를 옮겼야 했습니다.
감히 서돌궐이 저항한단 소식을 들은 태종은 고구려를 정복한 다음 서돌궐을 노리려고 했지만 644년 시작한 고구려 원정을 실패하고 건강이 악화되면서 눈을 감아야했습니다.
「태종 : ......ㅅㅂ」
하지만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은 아버지의 의지를 충실히 이어받았습니다.
태종이 죽고 동돌궐의 잔존 세력이 서돌궐의 지원을 받아 재흥을 시도하자 고종은 650년 당에 저항하던 동돌궐의 우두머리 거비극한을 체포하고 그의 부족을 강제 이주, 관리하며 시간을 끈 다음 657년 소정방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진공 계획을 실시, 서돌궐의 십만대군을 격파, 추격 끝에 서돌궐의 마지막 칸, 사발라가한 아사나하로를 사로잡았습니다.
기어이 서돌궐까지 멸망시키자 더 이상 초원과 서역에서 감히 당 제국에게 대항할 존재는 없었습니다.
「당 고종 : 내가 좋아하는 게 여자랑 전쟁임.ㅇㅇ」
658년 구차를 재정복한 당은 안서도호부를 다시 구차로 옮겼고 더 진격하여 659년 소그드와 페르가나에 도독부를 설치, 타림 분지를 장악하고 영토가 파미르 고원에 이르면서 당 역대 최대 강역에 도달합니다.
당고종의 가히 전쟁광 수준으로 사방에 전쟁을 걸었고 고구려, 백제, 돌궐을 멸망시키는 등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지만 나당전쟁에선 쓴맛을 보고 물러나야 했습니다.
물론 더 많은 군대를 파견했다면 나당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겠지만 고종이 아버지의 복수와 목적을 이루는 동안 당을 위협할 또 다른 제국이 성장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토번 제국이었습니다.
5. -토번의 발흥-
「토번 : 토번 와쪄염, 뿌우!」
6세기에 처음으로 기록이 시작된 토번 왕조는 약 570년 유능한 남리룬첸 캄포(왕)의 지휘로 급속도로 세를 불립니다.
619년 남리룬첸이 독살당하고 속국들이 독립하면서 잠깐 정체되지만 13살의 나이로 즉위한 명군 송첸캄포(송짼깜포)는 티베트로 진출한 유목민을 복속시키고 티베트를 통일, 라싸를 수도로 정하고 통일 토번 왕국을 건설합니다.
635년, 당의 황녀를 아들의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던 송첸캄포는 당에 사신을 보냈지만 당은 급속도로 성장한 토번을 경계하여 토번이 당의 속국인 토욕혼을 위협한다는 이유를 들어 송첸캄포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분노한 송첸캄포가 20만 대군을 동원해 토욕혼을 정복하자 깜짝 놀란 당 조정은 후군집을 파견해 격퇴하긴 했지만 토번의 국력이 생각 이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송첸캄포가 다시 한 번 결혼 제안을 하자 당은 허락하여 문성공주를 보내 결혼시켰습니다.
일단 혼인관계가 맺어진 뒤론 당과 토번도 싸움을 멈추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649년 당 태종이 죽고, 650년 송첸캄포가 죽자 토번의 태도는 변했습니다.
무엇보다 토욕혼에 대한 두 국가의 자세가 틀렸던 점이 영향을 미쳤는데, 토욕혼을 속국으로 삼아 유지하고 싶었던 당과 달리 토번은 토욕혼을 아예 흡수하고 싶었습니다.
티베트 고원 내에서 암도(amdo) 지역으로도 불렸던 토욕혼을 정복하여 티베트 고원의 유일한 세력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토번 : 우린 티베트 제국 클레임 있다고!」
그렇기에 송첸캄포가 죽고 토번의 실세로 떠오른 명재상 겸 장군 가르친링은 658년부터 토욕혼을 공격했는데, 토욕혼을 유지하고 싶었던 당은 소극적으로 토욕혼 편을 들면서 화해를 주선했습니다.
문제는 당시 황제였던 당 고종이 한반도 전쟁에 미쳐있었기 때문에 당의 군사력이 한반도로 쏟아지던 시기였고 이미 당에게 큰 피해를 입어 힘을 회복하지 못했던 토욕혼은 힘이 넘치던 토번의 공격을 자체적으로 방어하지 못하고 663년 멸망하고 맙니다.
토번의 성장세는 끝이 없었기에 당은 토번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지만 고종은 백제와 고구려(667년)를 드디어 멸망시키고 신라까지 흡수하려고 했기에 토번에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 토번은 토욕혼 흡수 후 서역 진출을 최우선 목표로 했고 이는 당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토욕혼의 마지막 왕으로 여겨지는 모용낙갈발은 자기 할아버지가 당의 토욕혼 원정 때 죽고, 아버지 모용순은 당에게 입은 피해를 복구하다가 신하에게 암살당했지만 토번의 공격에 도움을 요청할 때는 당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 역시 토욕혼을 복구하려는 의지가 있었기에 당 고종은 모용낙갈발에게 청해공의 직위를 하사했고 청해호와 돈황 사이에 있는 기련 산맥에 토욕혼인들이 임시로 정착하도록 했습니다.
670년 나당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당은 서돌궐을 멸망시킨 후 안서도호부를 방치하고 있었는데, 토번은 병력도 적고 정부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현상 유지만 하고 있던 안서도호부를 기습적으로 공격했습니다.
토번의 발빠른 공격에 안서도호부의 심장인 안서사진 구자(쿠차), 우전, 소륵(카슈가르), 언기(카라샤르)를 점령당합니다. 이는 당의 서역무역 자체를 폐쇄시키는 행위였고 경악한 당은 허겁지겁 설인귀를 파견했습니다.
경험많은 설인귀와 무려 30만에 이르는 대군이었고 거기다 현지 환경에 익숙했던 모용낙갈발의 토욕혼군까지 합세했지만 가르친링은 대비천 전투에서 당군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고 설인귀를 생포했습니다.
실패의 책임을 물어 설인귀는 모든 작위를 박탈당하고 서민으로 강등당하지만 나당전쟁이 일어나자 가까스로 복귀하여 한반도 전선에 참가했습니다.
당은 토욕혼을 청해 동쪽의 선주(해동, 현 하이둥)로 거처를 옮기게 했지만 이 지역도 토번에게 너무 가깝다고 느껴지자 다시 영주(현 간쑤성 닝샤)로 이주시켰습니다.
토욕혼을 배려하기 위해 새 행정구역 안락주를 설치하고 모용낙갈발을 안락주 태수로 임명했지만 토욕혼의 부활은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모용낙갈발 : 내 왕국령 클레임을 잊지마라 토번 놈들...」
한편 서쪽에선 토번, 동쪽에선 신라와 싸우느라 난감해진 당은 양면 전선에서 연패 당합니다.
안서사진 점령으로 영토가 크게 늘어난 토번은 긴 국경을 수없이 습격하면서 당군을 정신없게 만들었지만 마땅한 방책이 없던 당은 계속 방어만 해야 했습니다.
또 신라가 당의 생각보다 잘 싸우면서 전쟁을 7년이나 끌었고, 전세가 어느쪽으로 기울지 않다가 매소성 전투가 신라군의 승리로 끝나고, 설인귀가 사력을 걸었던 기벌포 전투에서 당군이 궤멸당하자 도저히 나당전쟁을 더 이상 계속 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습니다.
이렇듯 토번과의 전쟁에서 지속적으로 손해를 보면서 당은 나당전쟁의 실패, 돌궐의 부흥, 거란의 반란, 발해의 건국을 용납해야 했습니다.
692년엔 당은 왕효걸의 반격으로 가까스로 안서사진을 회복하고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켜 당의 영토로 굳혔고 이 때문에 안서도호부에 대한 공격을 어려워진 토번은 장안과 돈황, 안서도호부를 잇는 하서회랑(하서주랑)을 주로 공격하게 됩니다.
이 지역을 뺐는다면 안서도호부와 당 조정간의 연결을 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티베트와 하서회랑을 잇는 청해호(토욕혼) 지역이 전쟁터가 되었고 토욕혼의 모용부는 토번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토욕혼을 부활시키기 위해 싸움을 계속 했습니다.
「하서회랑(X 지역)을 끊으려고 시도하는 가르친링의 토번군」
불과 4년 후 696년 가르친링은 소라한산 전투에서 다시 한 번 대승을 거두고 당에게 서돌궐 분할과 안서사진 영토를 토번에게 넘길 것을 제안하지만 당시 중원의 지배자였던 측천무후는 극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가르친링의 제안을 거부합니다.
가르 가문의 권력 독점에 토번 왕 치둑송첸과 다른 귀족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는 걸 눈치 챘기 때문이었습니다.
측천무후의 예상대로 699년 치둑송첸은 가르친링을 숙청했고 남은 가르 가문원들은 학살당하거나 당으로 망명하여 가르 가문의 위세는 끝이 납니다.
하지만 전쟁은 끝이 안 납니다. 사실 아직도 150년은 더 싸웁니다.(...)
하지만 이 글은 안서도호부와 토욕혼을 다루므로 이 부분은 대충 넘어갑시다! (??)
당-토번 전쟁사는 너무 복잡해요!
아, 그리고 치둑송첸이 가르니살 한명만은 외교에 특출나다고 총애했기 때문에 가르 가문이 싹 죽는 동안에도 가르니살은 살아남았습니다.
867 시나리오에서 티베트 동쪽으로 보면 데게(dege) 공작령이 있는데 여기 영주가 가르 가문원이고 계보도도 잘 되어 있어요~
6. -안서도호부의 절정과 추락-
「현종 : 삐리리 불어봐 양귀비」
토번과의 전쟁이 계속 되는 동안 예술가 황제 당 현종은 서역에서 당의 영향력을 높이는 데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안서도호부가 중요시되었는데, 721년 당은 고구려 출신의 번장 고사계의 공적을 인정해 그의 아들 고선지를 당나라 장교로 임명했습니다.
이런 이민족 등용 정책은 당 현종의 재상 이임보가 추진한 것이었습니다.
갈수록 전쟁이 증가하자 당의 기존 군사 제도였던 군진에 배치된 일만 병력으론 군사 활동이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현종 대에 이런 군진들을 모아 ‘번진’을 만들었는데, 이 번진의 사령관이 바로 ‘절도사’였습니다.
절도사들은 최소 몇만, 최대 몇십만에 달하는 군대를 거느렸고 특히 장성 내의 번진을 다스리는 절도사는 출세가 확정된 자리였습니다.
그렇기에 장성 밖의 절도사는 무관 출신, 장성 내의 절도사는 충성이 확고하다고 판단된 문관에게 맡기되 장기 임용은 피했고 임기가 끝나면 승진시켜주는 제도였습니다.
하지만 간신으로 유명한 재상 이임보는
“문인이 장군이 되면 화살과 돌에 맞는 것을 겁내므로 미천한 가문 출신자나 번인(蕃人 : 오랑캐)을 기용하는 것이 좋다. 번인은 전투를 잘하고 게다가 용기가 있다. 또 미천한 가문의 출신자는 당파가 없다”
라고 주장하였는데 본심은 문관이 절도사로 공을 쌓고 출세해 자신의 경쟁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만 현종 시기 외정이 점점 잦아지고 부병제가 파탄나자 어쩔 수 없이 취한 정책이기도 했습니다.
고사계와 아들 고선지는 함께 안서도호부로 배치되었는데, 고선지는 안서절도사 부몽영찰의 신뢰를 받아 발탁되었습니다.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천산 산맥 서쪽의 달해부를 정벌하여 안서부도호로 진급하였고 747년엔 토번과 동맹을 맺은 소발률국(파키스탄의 훈자족 왕국)을 정벌하기 위해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원정을 성공시켰고, 중앙아시아 72개 소국의 항복을 받아내 파미르 고원 서쪽에서 당의 지배를 확대시켰습니다.
「고선지 : 거기 터번두른 아죠씨들! 소발률국 가려면 어디로 가야되요?」
고선지는 이 원정으로 당 조정에서 명성이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서역 왕국들이 다시 당의 눈치를 보았고 현종은 기뻐하며 고선지를 좌금오대장군으로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당이 실크로드를 지배하던 소그드 상인들을 통제하려고하자 750년엔 트란스옥시아나에 위치하여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를 영유한 것으로 추측되는 소그드인 왕국 석국(사슈)이 아바스 제국과 동맹을 맺고 당에 대항하려고 하자 두 번째 원정을 떠났습니다.
석국은 패배했고 석국왕은 고선지에게 사로잡혀 장안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이 때가 고선지의 전성기이자 안서도호부의 짧은 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안으로 이송되었던 석국왕이 처형당하자 불만을 품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중앙아시아를 이슬람 세계에 편입시키고자 했던 아바스 왕조의 연합군이 편성되었습니다.
고선지 역시 동맹군을 끌어 모아 7만을 동원했고 이슬람 제국과 중화 제국의 싸움은 탈라스 전투에서 결말이 났습니다.
당의 동맹이었던 카를루크족의 배반으로 당군은 패했고 고선지는 씁쓸하게 돌아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당시엔 이 전투에 대해 아바스 왕조와 당은 중요시여기지 않았는데, 사실 규모만 컸을뿐 지방 총독들간의 싸움이었기에 양쪽 중앙정부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고선지 역시 크게 처벌받지 않고 장군으로 계속 활동합니다.
「의외로 당대엔 별 영향도 없고 관심도 못받았던 탈라스 전투」
탈라스 전투 이후로 당은 소그드인 상인들을 통제하는 건 포기했지만 여전히 서역에서 영향력 있는 존재였고 당과 무역을 하는 것으로 먹고 살던 실크로드 상인들은 알아서 눈치를 봐야했습니다.
하지만 탈라스 전투의 패전 이후 당은 서진을 멈췄고 이후 중앙아시아에 퍼져 있던 중국 문화와 불교는 아랍 문화와 이슬람교로 천천히 대체되어 갔습니다. 탈라스 전투의 결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중요해졌습니다.
한동안 유지되던 안서도호부에 피해를 입힌 것은 서쪽의 이슬람 세력이 아니라 당의 반란이었습니다.
755년 일어난 안사의 난은 당에 중상을 입혔고 고선지 등의 유능한 장수들을 당 스스로 제거했으며 토번은 장안을 약탈, 그 후엔 절도사 복고회은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착실하게 국가 망테크를 탑니다.
불세출의 명장 곽자의가 나타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았으면 농담 아니라 이 때 당은 망했습니다.ㄷㄷㄷ
중원이 난장판이 됐는데 당연히 안서도호부에도 영향이 갔겠지요?
아닌 게 아니라 안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안서사진의 병력 등 약 20만 명이 중원으로 차출되자 아직도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는 토번과 새롭게 발흥한 위구르 제국이 안서도호부를 사정없이 공격하면서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위구르 : ㅋㅋㅋㅋ여긴 병사들도 없네 개꿀~
그나마 위구르 제국은 군사 활동을 거듭하긴 했지만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당과 때때로 협조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만 토번은 몰락기에 들어간 당에게 얄짤 없는 적이었습니다.
763년 토번군이 장안을 함락하여 약탈하던 해 서쪽의 토번군은 안서사진 중 하나인 언기(카라샤르)를 점령했습니다.
764년엔 토번이 하서주랑의 도시 무위(현 우웨이)를 정복해 당 본국과 안서도호부의 연결을 차단했습니다.
토번 : 좋은 중국인은 죽은 중국인 뿐.
그러나 안서도호부와 북정도호부(안서도호부의 북쪽에 설치되었던 도호부)은 장군 곽흔과 이원종이 계속 지켜냈고 다른 경로를 통해 장안과 어느 정도의 연락은 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당 본국은 안서도호부에게 아무 도움도 못줬습니다. 본국부터가 상태가 메롱인데 전성기 시절에도 관리가 힘들었던 안서도호부를 도울 여력은 없었습니다.
그저 계속 싸우는 군인들에게 허울뿐인 관직이라도 주면서 응원하는 게 끝이었을 뿐.
「당의 서역 영토 유지와 진출을 위해선 필수적인 땅 하서회랑의 도시들.」
「장안(시안)부터 돈황(둔황)까지의 연결이 잘 나타나 있는 하서회랑 지도」
780년이 되어서야 두 장군은 장안으로 밀서를 보내 공식적인 절도사로 임명받았지만 바로 다음해인 781년 안서도호부와 장안 사이의 가장 중요한 도시 돈황이 토번에게 점령당하고 장안과 안서도호부의 사이가 완전히 차단되면서 안서도호부와 북정도호부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그나마 당과 협력하던 위구르 제국을 통해 안서도호부와 당은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위구르 제국 자신들도 슬금슬금 안서도호부의 영토를 점령하는 중이었습니다.
787년 결국 안서도호부가 위치한 구자(쿠차)가 토번에게 점령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곽흔은 도주하여 끝까지 저항했고 어느 정도 소득이 있었는지 중앙아시아를 여행했던 승려 오공은 789년 소륵, 우전, 구자, 언기, 아극 등에 배치된 한족 장군들을 목격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일 년만인 790년 정주(베쉬발리크)의 북정도호부가 토번에게 함락되었고 아마 이원종도 이 때 죽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792년엔 우전이 토번에게 넘어갔는데, 아마 790년 북정도호부가 끝장날 때나 우전이 함락될 때 안서도호부 역시 멸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영문위키에도 곽흔의 사망일자가 789?로 되어있더군요.
바이두에는 곽흔이 808년까지 살아남아 안서도호부를 다스렸다고 되어있는데, 믿기 힘든 기록이라고 봅니다.
「안서절도사 곽흔 : 아직도 나로 플레이하고 싶니? ㅠㅠ」
「북정절도사 이원종 : 난 플레이 가능인데 나라도 할래? ㅠㅠ」
그렇습니다. 게임 내에서 중국이 짱짱으로 나오는 769년 샤를마뉴 시나리오의 안서도호부는 사실 마지막 절도사 곽흔과 이원종의 지휘 아래에서 더 이상 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토번, 위구르, 카를루크족 등의 주위를 둘러싼 이민족들과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벌이고 신뢰못할 현지인들을 다스리며 최후의 순간을 각오하는 중이었습니다.
안서도호부는 원래 플레이 불가지만 안서도호부의 봉신으로 처리된 북정절도사 이원종은 그나마 플레이 가능이네요.
「한 때는 이랬던 안서도호부와 북정도호부는...」
「위구르 제국와 토번 제국 사이에 낑겨 죽음만을 기다릴뿐 현실은 중국 침공 둠스택 십만」
792년 이렇게 안서도호부는 확실히 끝났고 토욕혼은 멸망했습니다. 이제 중국이 다시 서역에 손을 뻗는 일은 두번 다시...
없지 않아!!!
7. -최후의 흔적들-
드디어 마지막 부분에 도착했고 장의조와 모용부 최후의 후예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위의 길고 긴 내용들이 이 단락 하나 설명하려고 쓴 겁니다. 내가 왜 그랬지.
안서도호부가 멸망하고 위구르와 토번이 당의 서역 영토를 나눠먹었지만 위구르는 애초에 당의 경제 원조에 의지하는 상태에 권력 다툼이 극심한 나라였고 토번은 한술 더 떠서 8세기 말에 국력이 절정을 찍고 790년부터 851년까지 내전을 반복하며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토번 : 하, 내가 내전스핀만 아니었어도.」
토번은 일단은 타림 분지 남부와 하서회랑을 영유했고 사주(돈황)과 과주(주천)을 60년 넘게 지배하고 있었지만 사주와 과주는 한족 인구가 상당했던 지역이었습니다.
이 때 사주 지역(돈황)에 장의조라는 한족이 있었습니다.
한족이라는 것 빼곤 그의 출신은 불명확하지만 지방 호족 출신인 것 같습니다.
848년 장의조는 사주의 다른 한족과 유구족(위구르족), 토욕혼인과 창족을 협력해 돈황을 당나라의 땅, 사주로 되돌리자고 계획했습니다.
장의조가 반란을 일으켜 병사들을 이끌고 도시로 진입하자 성내의 한족 모두가 호응했고 토번인들은 도시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장의조는 스스로 사주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당 황제 선종에게 충성과 복종의 서신을 보냈습니다. 선종은 기꺼이 장의조를 사주 방어사로 임명했습니다.
(방어사 : 안사의 난으로 충격받은 당 조정이 절도사를 보다 작은 규모로 쪼개서 만들어 본 작위. 물론 절도사들의 권세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장의조 :서역이 당 땅인 건 당근빳다죠쉬바!」
사주(돈황)을 손에 넣은 장의조는 빠르게 움직여 그해 말 주위 10개 현을 공격했습니다.
과주(주천, 주취안), 의주(합밀, 하미), 서주(고창, 가오창), 감주(장액, 장예), 숙주(주천의 일부), 난주(란저우), 선주(해동, 하이둥), 하주(임하, 린샤), 민주(정서, 딩시), 곽주(해동의 일부).
이렇듯 장의조는 순식간에 고창-둔황-감주(서량)에 이르는 영역을 장악했습니다.
851년 고창까지 점령한 후 당 조정에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장의조는 장악한 11개 현의 지도를 준비한 뒤 형 장의택을 장안으로 보내 황제를 뵙도록 했습니다.
선종은 11개 현을 묶어 귀의군(歸義軍 : 바르게 돌아온 군대)으로 명명했고 장의조를 귀의군 절도사로, 장의조의 부하 조의금을 부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당나라가 포기하다시피 했던 서역 영토가 장의조 한명 덕분에 회복된 것이었습니다.
「당 : 으따 마 장의조 상이라도 드려야 쓰겟구마」
물론 절도사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당 조정은 의심을 완전히 거두진 않고 장의조의 형인 장의택을 장안에 머무르도록 하면서 사실상의 볼모로 삼았습니다.
863년 장의조는 한족과 비한족으로 이뤄진 7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양주(무위, 우웨이)까지 탈환하면서 하서회랑을 다시 당의 영토로 만들었습니다.
3년 후인 866년 장의조는 위구르 족장 고준이 토번 제국으로부터 서주(고창, 가오창), 정주(창길, 창지, 베쉬발리크, 북정도호부의 수도), 윤대(우루무치), 청전(아직 발견 못함)을 탈환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는데, 고준이 장의조의 명령을 받아 군사 활동을 벌였음을 은유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더구나 장의조 본인이 토번의 장군 바엔호람 바르네를 무찌르고 고창과 정주를 회복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위구르와 협력한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위구르 제국이 내전과 질병, 키르기스족의 공격으로 수도 카라 발가순이 파괴되고 멸망하자 위구르 잔당들이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운 나쁘게도 북쪽에서 내려온 위구르족에게 장의조는 패했고 북정도호부의 수도가 있던 정주(베쉬발리크)와 고창을 넘겨줘야 했습니다.
어쩌면 위에 나온 고준이 배신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자세한 기록이 없으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장의조 : 위구르 둠스택 사기 아니냐?」
고창을 장악한 위구르족은 장차 고창회골(회골=위구르)을 세우지만 아직은 부족들끼리 이합집산하며 뚜렷한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음해인 867년, 형 장의택이 죽자 장의조는 천자를 뵙기 위해 직접 장안으로 갔는데, 장의조를 만난 당 의종은 장의조의 조카 장회심을 귀의군 절도사로 임명하고 장의조는 장안에 머무르도록 했습니다.
장의조는 황실 친위대(아마도 신책군)의 장교로 임명했지만 신책군의 지휘권을 환관들이 독점하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장의택이 죽자 장의조를 새 볼모로 삼은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의종이 환관에게 옹립되어 충신들이 간언을 해도 무시하거나 귀양 보내고 술판을 벌이는 등 제대로 망국의 암군스러운 인간이라 장의조도 이런 놈에게 딱 걸려서 고생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장의조 본인도 이를 알고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용히 지내다 아마도 872년에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해는 의종이 죽고 희종이 즉위했는데, 희종도 무능한 황제였지만 즉위 3년 뒤 황소의 난이 일어나면서 당나라가 사실상 끝장나는 걸 생각하면 장의조는 지옥같은 시대가 오기 전 아슬아슬하게 이승을 하직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장의조 :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가...?」
한편 토욕혼의 마지막 왕 모용낙갈발이 죽고 그의 아들 모용충이 안락주 태수의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안락주는 토욕혼인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안락주 태수는 토욕혼의 군주가 물려받았지만 당이 약해지면서 토욕혼의 부활 가능성도 낮아졌고, 청해에 남아있던 토욕혼인들은 토번과 위구르의 억압에 혼혈화되거나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이제 사실상 모든 가능성이 사라졌고 모용충은 아들 모용선조에게, 모용선조는 모용희호에게, 모용희호는 모용조에게 안락주 태수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모용조는 798년생인 모용복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모용복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면서 안락주 태수 작위는 없어졌고 안락주는 해체되었습니다.
그렇게 모용씨와 토욕혼 선비족은 역사의 흐름 속에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크킹에선 얘기가 다르지요.ㅎㅎ.
장의조의 반란에 토욕혼이 동참했다는 점과 토욕혼의 안락주가 위치해있던 양주가 장의조 세력에 들어갔다는 점에 역설사가 아이디어를 떠올렸는지 토욕혼의 마지막 모용씨, 모용복이 장의조의 부하로 있기 때문입니다.
기록상으론 8세기 말에 태어났다고 하지만 확실한 건 아니거나 아님 오래 써먹으라는 것인지 모용복은 22살밖에 안됩니다. 안락주는 맵 주천 동쪽에 위치해 안 나왔지만 대신 토욕혼의 후계자라는 걸 기억해준 것인지 모용복은 암도 왕국(서하, 청해 왕국)의 클레임을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 주취안(주천) 공작령 바로 아래쪽의 미냑(minyak) 공작령을 보면 토욕혼의 수도였던 부사(Fuqi)가 있으며 모용복의 문화(거란)으로 암도 왕국을 세우면 나라 이름이 토욕혼(tuyuhon)으로 생성됩니다.
역설사가 센스있네요.
「모용복 : 모용씨는 아직 살아있다! 니기미토번놈들아!」
모용 가문의 가계도도 은근 잘 정리되어있어서 비록 중원왕조를 창건한 모용외 계통은 삭제되었지만 모용섭귀와 모용토욕혼까지 구현되어있습니다.
게다가 장의조의 귀의군도 당에게 볼모만 보냈을 뿐 사실상 독립영토라는 걸 감안해서 시작시 안서도호부가 아닌 안서도호부의 봉신국일 뿐, 플레이가 가능합니다!
이 시나리오는 안서도호부의 영토가 없어요.
찾아보니 이런 흥미로운 인물들일 줄은 몰랐네요.
추가로 김용 소설 천룡팔부에 나오는 모용복이 위에 설명한 모용부 최후의 후예인 실존인물 모용복에서 모티브를 따왔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려.
천룡팔부에 나오는 모용세가도 모용씨의 부활을 노리는 세력이니.
응? 장의조 후손들은 어떻게 되었냐고요?
위구르가 남진해오자 귀의군 자체만의 힘으론 힘들어졌지만 당 조정은 역시나 아무 것도 안해 주었고 고창의 위구르족은 고창회골을, 하서회랑 일대로 내려온 위구르족은 하서회골(감주회골)을 세워 또 당과 귀의군의 연결을 끊어버립니다.
장회심은 두 차례에 걸친 고창회골의 공격을 막아내지만 결국 고창회골은 의주를 점령합니다.
881년, 882년엔 하서회랑으로 내려온 위구르족이 감주와 양주를 정복, 하서회골을 세우면서 장안으로의 길이 막혀버립니다.
양주의 남쪽인 실랑푸 지역에선 906년 티베트인들의 왕국이 세워집니다.
황소의 난으로 개막장이 된 당은 신경도 안 썼고 쓸 형편도 안되었지만 장의조의 후손들은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갑니다.
장회심은 암살당하고 장의조의 아들 장회정이 절도사가 되었는데, 장의조의 사위였던 색훈(색중승)가 장회심을 죽이고 장회정을 절도사로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실일 가능성이 있는 게, 장회정은 죽을 때 색훈에게 아들을 맡겼지만, 장회정이 죽자마자 색훈은 스스로 귀의절도사라고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894년 색훈 역시 이명진과 장의조의 딸에게 죽었고, 이명진의 자식들은 귀의군을 통치하게 됩니다.
896년 이명진의 자식들까지 추방하고 나서야 장의조의 손자인 장승봉이 절도사가 됩니다.
...뭔가 겁나 콩가루 집안이 되버렸는데?
이러는 사이 양쪽의 위구르 국가는 겁나게 커집니다.
「고창회골, 하서회골 : 엌ㅋㅋ 저 놈들도 내전 스핀이넼ㅋㅋ」
910년 당 왕조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알게된 장승봉은 스스로를 천자로 선포하고 귀의군의 이름을 서한금산국으로 변경한 뒤 백의 황제(백의제)를 자칭합니다.
그런 후 위구르족을 정복하려고 시도하지만 장승봉이 황제를 자칭하던가 말거나 하서회골은 금산국을 패고 봉신국으로 삼았습니다.
금산국의 재상과 귀족들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아래 내용과 같은 조약을 체결해야했습니다.
“...칸은 아버지고 천자는 아들이다...”
「장의조 출행도 - 돈황 막고굴 제 156굴」
장의조 : 저, 저런 새X들을 후손이라고...
이런 개망신 끝에 열받은 장군 조의진(위에 나온 조의금의 후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은 반란을 일으켜 왕국을 강탈하고 다시 귀의군으로 개명하면서 귀의군의 장씨 가문은 끝이 나고 조씨의 통치가 시작됩니다.
이후로도 귀의군의 역사는 계속 되고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살아남지만 결국 1036년 탕구트족에게 두들겨맞고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에 흡수됩니다.
이렇게 보니 시조빼고 쓰레기들만 넘쳐났...흠흠.
뒷이야기를 자세히 알고 싶으면 영어 위키를 보세욧.
https://en.wikipedia.org/wiki/Guiyi_Circuit
이글은 한국, 영문 위키백과, 네이버 캐스트 ‘실크로드 개척사’, 네이버 부흥 카페의 Evan Janus Kim님의 글을 참조했습니다.
텡그리 -> 천(한자)
위구르 -> 회골(한자)
무함마드 -> 메흐메트(투르크어)
모세 -> 무사(투르크어)
마르칸다(산스크리트어)=마라칸다(그리스어)=세미즈켄드(투르크어)=살말건, 실만근, 심사간(한자)=사마르칸트
음차의 세계란 재밌습니다.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