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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시인의 침 뱉기
1. 해타로 남은 시
[詩시仙션은 어데 가고 咳해唾타만 나맛나니.] 한국 가사문학의 백미라고 일컫는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 나오는 구절로 해석하면 ‘시선은 어디가고 시선의 해타만 남았는가.’라는 뜻이다. 여기서 시선은 이백을, 해타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침이나 가래 등을 의미한다. 간신들이 판을 치는 당시 사회를 염려하고 백성들을 근심하던 송강 정철이 자신의 마음을 이백의 시구를 인용하여 비유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당나라의 이백은 임금 주변에서 임금으로 하여금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없게 하는 간신을 ‘녈구름’으로 비유하여 ‘아마도 녈구름 근처에 머물셰라’ 라는 시구를 남겼던 것으로 유명하다. 번역하면 ‘간신들이 임금의 총명이나 예지를 가릴까봐 근심스럽다’고 한탄한 이백의 직설화법은 칼보다 강하다는 펜의 위력을 보여줌으로써 시가 갖는 참여적 기능을 달성한다.
주목할 것은 ‘해타’즉 침이나 가래를 뱉는 행위이다. 불의에 항거하고 바른 소리를 거침없이 내 뱉는 침 뱉기가 당나라시인 이백에게 있었다면, 한국에서는 김수영에게서 그것을 만날 수 있다. 이미 알고 있겠으나, 한국 참여시의 대표시인 김수영이 강조하고 솔선했던 침 뱉기는 유명한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이미 온 몸으로 침을 뱉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의 시 <눈>을 통하여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고 ‘가래’라도 뱉자고 종용하고 있다.
눈은 살아 있다./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 다.//기침을 하자/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기침을 하자.//눈은 살아 있다./죽음을 잊 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을 바라보며/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마 음껏 뱉자.
- 김수영<눈>전문
김수영이 말하는 눈은 순수하고 순결한 생명력을 통해 얻어지는 ‘현실 인식’, ‘자기 인식’을 상징한다. 눈은 우리가 자주 잃어버리는 자아를 살아있게 하여 그의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말하는 침 뱉기를 가능하게 한다. 당시 김수영처럼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들이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음으로써 우리 사회는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소시민의 힘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이렇듯 기침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눈의 순수성과 능동성 때문이며 눈이 가지는 ‘현실인식’의 기능 때문이다. 살아있는 눈, 새벽이 지나도록, 밤을 새워 마당위에 떨어져 죽지 않은 눈의 정신은 순수한 세상을 추구하는 이들을 일으켜 세웠고 기꺼이 불의에 대항하도록 했다. 시인 김수영은 스스로가 ‘눈’이었던 것이다. ‘온 몸으로’ 온 힘을 다해 ‘눈’이 됨으로써 ‘젊은이’들에게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을 수 있는 생명력이 되어 주었고 용기가 되었다. 여기서 ‘눈’은 일상에 안주하려는 이들에게 불의에 저항하는 정신을 일깨우도록 한다. 눈이 ‘살아있’듯이 살아도 죽은 것 같았던 시민들의 영혼에 각성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기침’이나 ‘가래’또한 더러움이 아니다. 정의를 향한 순수한 열정이며 ‘죽음을 잊어버린’ 자들이 쏟아내는 치열한 사명의식이다. 그리고 해야 할 바른 말이다.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하고 아픈 이들을 감싸 안는 일에 동참하자고 권유하는 목소리가 시의 본질인 것이다.
물론 심미적 가치를 중시하는 관점에서는 시대와 사회를 향해 가래를 뱉는 행위를 아름다움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심미적 가치에서 미적 판단 기준은 언어의 아름다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갖는 비판의식과 저항 의식은 칼보다 강한 펜의 힘을 보여주어야 할 시인의 사명이며 이 또한 시가 갖는 가치임에 분명한 사실이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분단의 고통에 이어 독재와 산업화의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 시단은 천재적이며 훌륭한 시인들의 침 뱉기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의 목숨 건 ‘침 뱉기’는 혹독한 겨울뿐인 눈 쌓인 세상에서 해타(가래)가 되었다. 이육사, 윤동주를 시작으로 김수영, 기형도에 이르기까지 ‘녈구름’을 근심하는 시선들의 침 뱉기는 해를 가리려던 ‘녈구름’을 쫓아냈고 지금도 젊은 시인들의 육체를 빌려 손사래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2. 자기 인식으로써 ‘눈’이 되는 시
시는 자기 찾기에서 시작된다. 자기를 찾는 행위는 자기를 올바로 인식하는 행위이며 시대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행위이다. 결국 시는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정박한 곳은 내 컴퓨터 책상 위. 비린 갯내가 어쩌다 예까지 휩쓸려왔을까. 말 해봐, 어금니부터 앙다문 그녀 마음에 송곳 같은 의문 찔러놓고 다그쳤지요. 천만 발 혀 가졌을지언정 모른다, 묵비권 행하는 이에게 더 조사할 것 남았다는 고문기 술자처럼 그녀 아가리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더니, 먼저 두 손발 들 지경으로 그녀 는 끝끝내 거품만 물고 있더군요.
너희들 인간세상을 향해/보지도 열지도 않는 것은/내가 돌아가는 길 찾지 못해 출 항 포기 하는 일 아니라/당최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목숨 내린 것뿐이니/나의 주검에 함부로 닻 내리지 마라/나는 이 시대 포로가 아닌/진정 프로였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
- 박영민 <혀 깨물고 죽은 조개의 말>전문
박영민은 시 <혀 깨물고 죽은 조개의 말>에서 산문형태인 1연의 화자를 3인칭으로 객관화 시켜 시를 진술해 나간다. 그러나 운문형태의 2연에서는 화자가 직접 나서서 ‘너희들’에게 말한다. 박영민은 형식의 상이성과 화자의 이중성을 통해 독자들이 시에 집중하도록 하는 데 성공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러한 진술 형식을 선택한 의도가 사회 인식에 있다는 점이다.
박영민의 사회 인식은 백석의 시를 인용하여 ‘세상 같은 건 더러워’라고 말하는 데서 증명된다. ‘함부로 닻 내리지 마라’ 즉, 자신의 죽음을 쉽게 이해하려 하지 말라는 말 속에서 단호하고 냉철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게 된다. 산문 형식의 1연에서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물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조개의 의지를 ‘고문기술자’에게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끝내 ‘묵비권’을 행사한다고, ‘거품’을 물고 버틴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죽음을 잊어버린’자들의 당당한 태도라고 한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이렇게 당당한 태도는 더러운 세상에 저항하려는 ‘프로’적 정신을 낳는다. 입을 다물고 시대를 침묵하는 자들의 침묵이 비겁하거나 ‘포로’적인 것이 아니라 ‘프로’적인 의지에서 나왔다고 보는 시인의 시선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는 따뜻한 눈이 되어’ 줄 테니 힘내라고 위로하는 ‘눈’의 시선과 다르지 않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묵비권’, ‘고문기술자’, ‘포로’등의 시어는 억압과 독재시대를 연상하게 한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있다는 말이다. ‘천 만 발의 혀를 가졌으나’ 말 하면 안 되는 사회, 말은 지만 말이 아닌 에서 시인은 프로답게 시라는 매개를 이용해 말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인식으로써 ‘눈’의 기능을 하는 시를 김박은경 시인의 시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안타까운 소문을 전해드립니다/위급한 먼지들은 아무리 잠가도 스며들었는데/죄송 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침대 머리맡 번개탄 구멍 들 아무리 많아도 숨 쉴 수 없다/짝짝이 눈들마다 뜬 채 버텨도 끝까지 내일이 보 이지 않는다/뭔가 비참한데, 원래 비참했으니.../서른세 살 다 큰 작은 딸 노트 속 습작 만화와 메모/TV는 일주일 동안 울고 웃고 미쳤다는데/송파구 석촌동 지하 1 층 밀봉이 찢길 때/무너지는 냄새 상해가는 봄 사라지는 빈틈/둥근 광장 온 데가 한데라 숨을 틈이 없어/생도 잊고 비참도 잊고 닦아 놓은 방바닥도 잊고/산 적 없는 식구들이 접어 둔 유서 한 장/꽃이었던 쓰레기들 비좁은 골목을 뒤덮고/ 죄 송한 거야 우리들의 버릇인거고/봄이야 희망들의 습관인 거고//
- 김박은경 <우리들의 버릇> 후반부
김박은경은 이 시대가 구체적으로 기침을 해야 하는 시대임을 말한다. 마당위에 내릴 대로 내린 눈 위에 목구멍까지 차오른 가래를 뱉어야 하는 때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녀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고 주목하여 보는 것은 현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짝짝이 눈’들의 불구성이다. ‘구멍들’이 ‘아무리 많아도 숨을 쉴 수 없’는 세상,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 없음이 구멍을 틀어막아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을 ‘산 적 없는’ 사람으로 숨통 조여 놓는 세상이다. 2014년의 한국 사회는 너무도 많은 일들이 사람들을 ‘짝짝이 눈’으로 만들었다. 인면수심의 모습에 저마다 혀를 내 두른 사건 중 세 모녀 자살사건은 황금만능주의가 낳은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임을 시인하게 했다. 월세를 내지 못해 살아갈 틈을 찾지 못한 일가족이 ‘죄송한’ 유서를 남기고 사라진 이 사건을 긴박한 호흡과 유창한 언변으로 지적한 시인은 이렇게 비참한 세상이 비단 사라진 일가족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녀는 가난한 시민의 죽음을 ‘일주일 동안 울고 웃고 미쳤다’가 이내 잊고 말아버리는 세상, 단지 며칠만 타인의 고통에 왈가왈부하다가 마는 사회가 오늘날의 현주소임을 시인한다. 감정은 많으나 깊이 관여하지 않는 사회, 슬픔은 있으나 몰두하지 않는 세상, 이웃의 아픔이 그저 ‘소문’이나 가십거리 일 뿐 진심으로 그들의 고통을 함께하려거나 돌아보려는 마음이 없어진 우리 사회는 ‘짝짝이 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죄송한’ 것이나 ‘봄’은 있지도 않은 허상의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두 번 다시는 이렇게 슬픈 죽음이 없도록 법을 개정하자는 습관적인 이야기를 소문처럼 토로하다가 말아버리는 사회를 ‘짝짝이 눈’으로 표현한다. 짝짝이 눈은 현실적 가치와 내면적 가치의 괴리에서 오는 분열된 자아 또는 현실의 장에서 밀려난 소시민적 자아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이제 잠깐의 애도와 들끓는 분노로 미칠 듯 아파하다가 이내 잊어버리거나 혹은 외면해 버리는 불구적 세상을 직시 하자고 권유하고 있다. 또한 세상이 이렇게 된 건 우리 모두의 책임임을 온 세상에 알리며 ‘눈’의 역할을 담당한다.
3. 각성을 요구하는 ‘기침’, 반성의 ‘침 뱉기’
그들은 둘러앉아 잡담을 했다/담배를 피울 때나 뒤통수를 긁을 때도 그들은 시적 이었고/박수를 칠 때도 박자를 맞췄다/수상작에 대한 논란을 애초부터 없었고/술 자리에서 사고 치지 않았으며/요절한 시인들을 따라가지 않는 이유들이 분명했다/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연애 사건도 벌어지지 않았다/나는 죽어버릴 테다/이 문장 을 애용하던 그는 외국으로 나다니더니/여행책자를 출간해 한턱 쏘았다 난 안 취 할 만큼 마셨다 중요한 건 그 자리에 빠진 이들/그 시인들은 제 밥그릇 앞에서 기 도를 하고 있는지/신촌의 작업실에서 애들이 기어 다니는 방구석에서/날이 밝아올 때까지 하찮아지고 있는지/뭔가 놀라운 한 줄이 흘러나오고 손끝에서/줄기와 꽃봉 오리가 환해지는지/중요한 건 그런 게 없다는 것/아무도 안 죽고 난 애도의 시도 쓸 수 없고/수술을 받으며 우리들은 오래 살 것이다/연애는 없고 사랑만 있다/중 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조용히 그리고 매우 빠르게/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 게 했다.//
-김이듬 <죽지 않는 시인들의 사회> 전문
시인 김이듬은 본격적으로 기침을 한다. 그의 기침은 시인들의 오늘을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현대의 문학들이 ‘수상작에 대해 논란거리’가 많다, 요절한 시인들의 사인을 논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시인들은 그러한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죽음을 각오한 척 하던 이들도 ‘여행책자를 출간해 한턱’쏘며, 아무 사건도 일으키지도 직시하지도 않고 박자에 맞춰 박수를 치며 사회의 부조리를 슬쩍 눈감아 주며 사회적 부에 편승한다. 그리고 그들이 쏘는 한턱을 함께 마시며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졌다고 합리화 시켜버린다고 지적한다. ‘하찮아지고 있’다는 표현은 바로 시인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침 뱉기’의 행위인 것이다. 이렇게 부끄러운 시인들의 오늘날을 타인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 말 할 수밖에 없는 세상, 요절할 시인이 없으므로 애도의 시를 쓸 필요도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일제에 저항하던 저항시인이나 참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참여 시인들의 요절을 문학사를 통해 수없이 보고 들어왔다. 그러나 시인은 현대의 시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하는 장식용이 되었음을 시인한다. 단지 비판으로서의 是認이 아니라 반성이며 각성으로서의 是認을 통해 시인의 죽어가는 영혼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시작한다. 시인들이 죽음을 각오하지 않는 사회는 결코 바른 소리를 내는 사회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목숨을 사회를 위해 내놓을 의향이 없게 되었다. 또한 제 밥그릇을 위해 사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으며 죽지 않으려고 운동을 하고 보약을 먹으며 정기검진을 하고 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된 사람들을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이미 그들은 그러한 세상에서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있으며 누구나 똑같다는 사실에서 한없이 연민스러운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에 대한 반성은 심보선 시인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다/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 난다/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길들여 사방에서 휘고 있다/...중략.../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떨어진다 미래 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중략.../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나는 길 가운 데 우두커니 서 있다/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후략
-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시인의 시 역시 이러다가는 우리 모두 ‘아파트 난간 아래로/떨어진다/는’ 사실을 경고한다. 그가 말하는 ‘태양’은 희망 또는 조국으로까지 확대하여 볼 수 있다. 또한 ‘낮달’은 희망 또는 자유를 상징한다. 뿐만 아니라 달은 분리와 합일, 충만함과 이지러짐, 비움과 채움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 면에서 희망이나 자유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낮달이 뜬다는 것은, 그리고 태양이 어쩔 줄 모르고 있다는 것은 분명 뭔가 잘못 되어 있다는 것을 그것도 크게 잘못 되어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에 나타나는 행동이다. 그러나 그 원인에 대해서 항의하지 않는 현대인들을 ‘치욕’으로 표현하면서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지 오래되었다고 지적한다. 즉 불의에 대항하지 못하고 외면해 버리는 우리들은 이미 멸망했다고 보는 것이다.
길들이 휘어져 버린 세대에서 길이 되어야 할 지식인들은 스스로부터 휘어져 잠시만 언성을 높이고 형식적으로 안타까워하다가 때가되면 입을 다물어 버린다. 결국 그것은 변명만 늘어놓는 것이 된다는 의미에서 지극히 자기 반성적인 어조인 것이다. 계속 뒷걸음만 계속하다가 결국 예전보다 못한 사회로 돌아가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시인은 한 가지 사실을 더 경고한다.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십오 초 만이라도 슬픔 없이 지내보고 싶은 사람들, 초단위로 늙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생을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미래는 없다. 자가용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남자도 미래가 없기에 휘어진 길을 가면서 울고 만다. 또한 시인들 역시 갈 곳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아니 갈 곳을 이미 알고 있기에 갈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억울하다고 항변해도 소용없고, 수동적으로 고분고분 살아가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시인은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이더라도 죽을 땐 죽더라도 온 몸을 다해 시대에 침을 뱉는 길을 택한다.
4. 대 놓고 침 뱉기, 가래 뱉기
용산4가 철거민 참사 현장/점거해 들어온 빈집 구석에서 시를 쓴다/생각해보니 작년엔 가리봉동 기륭전자 앞/노상 컨테이너에서 무단으로 살았다/구로역 CC카메 라탑을 점거하고/광장에서 불법 텐트 생활을 하기도 했다/국회의사당을 두 번이나 점거해/퇴거 불응으로 끌려나오기도 했다/전에 대추리 빈집을 털어 살기도 했지 //허가받을 수 없는 인생//그런 내 삶처럼/내 시도 영영 무허가였으면 좋겠다/누 구나 들어와 살 수 있는/이 세상 전체가/무허가였으면 좋겠다//
- 송경동 <무허가>전문
송경동의 시 <무허가>는 다른 시들 보다도 더 미적 아름다움에서 멀어져 있다. 언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심지어 읽는 이들을 긴장하게까지 한다. 그것은 그의 시 곳곳에 ‘해타(가래)’ 와 ‘침’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가 가져오는 긴장감과 공포는 우리 사회가 지닌 상처를 고스란히 내놓는다. 그리고 독자의 내면을 향해 이것이 옳은가라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결국 그의 시에 나타나는 긴장감과 공포는 저항과 정의의 공포인 것이다.
송경동 시인은 전쟁의 현장에서 펜을 휘두른다. 용산상가, 가리봉동 기륭전자, 구로역, 국회의사당, 대추리 등 현대 한국사회의 전쟁터에서 가장 아픈 이들과 함께 가장 부당한 이들과의 싸움에 동참하여 칼보다 강한 펜을 휘두른다. 삶의 주인은 누구이며 시민의 인생을 허가 내 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라는 직설을 쏘아댄다. 그런 면에서 ‘허가’라는 절차가 인간세상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시인 역시 규칙과 질서가 잘 지켜지는 사회 즉, 법 없어도 사는 사회를 소망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법의 사각지대를 이용해 교묘하게 불법을 자행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 이들이 훼손하는 사회인 것이다. 그는 바로 그런 자들을 향해 펜을 휘두르는 것이다. 휘두르다 끌려 나가고 잡혀 나가고 구속 되지만 쉬지 않는다. 내 것 이라고 이름표를 붙여대는 허가제일주의 세상에서 그는 쓰러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타협하지도 않는다. 목숨을 걸겠다고 작정하고 약자들의 고통에 참여한다. 그 스스로 그들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절망하며 그 분노와 절망을 견인차로 극복의 힘을 얻는다.
‘엑소에 열광하던 아이들이’로 시작하는 고영서 시인의 시는 목구멍까지 차 오른 가래가 더 이상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엑소에 열광하던 아이들이/소녀시대 카라 미쓰에이 빅뱅이 /온 것도 아닌데 /5 월 17일 금남로에 섰다 //34년 전 그날, /세월호로 가슴 아픈 오늘을 /잊지 않 겠어요 /손 피켓을 들고 /촛불을 들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중략... //전 야제는 추모제 //주인공이 사라져버린 무대에 /삼백 네 송이 꽃들 //그래도 한 번 안아드리고 싶어서요 /꼭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 고영서 <세월호 꽃영정>
고영서 시인은 5.18민주화 운동 이래 가장 참혹한 참사라 할 수 있는 ‘세월호’참사를 비판한다. 착한 아이들이 믿었던 어른들, 믿었던 국가가 그 아이들을 죽음의 바다 속으로 몰아넣은 비극에 그대로 있을 수 없던 시인들은 곳곳에서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반성한 후 새로운 세상을 향해 거침없는 저항을 시작한 것이다. 고영서 시인을 비롯한 2,000년대 몇몇 젊은 시인들의 시는 현실인식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찾는 ‘눈’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이미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고 있다. 살아있는 ‘눈’위에 마음 놓고 후련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직설한다.
고영서 시인은 광주의 아픔이 세월호의 아픔으로 그대로 이어졌음을 통렬한 심정으로 내뱉는다. 하필이면 5.18을 추모하는 전날, ‘전야제는 추모제’가 되어버린 참사를 아파하는 시인은 기성세대와 정부와 친애하는 현실이 침몰시킨 비극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국가의 상징인 ‘무궁화 꽃’을 소재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말한 후 사라진 삼백 네 송이의 꽃들을 언급하는 것은 슬픔을 극대화시킨 비아냥인 것이다.
김이듬 시인이 반어적으로 역설했던 아무도 안 죽어 쓸 수 없었던 애도의 시를 고영서 시인은 불행하게도 써 버리고 말았다. 물론 김이듬 시인의 ‘아무도’는 불의에 저항하다 죽는 시인을 비롯한 현대 사회의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겠으나, 어쨌든 현실은 시인으로 하여금 수동적으로 살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너무 많은 꽃들을 바다에 수장시킨 현실은 34년 전 광주의 그것처럼 ‘젊은 시인’들로 하여금 기침하게 했고 세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가래를 뱉도록 했다.
5. 그리하여 해타로 남을 시
마르셀 푸르스트는 생트뵈브 반박론에서 예술가의 정의를 ‘세상에 무심해지게 만드는 그 베일을 걷어 내 주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이것을 보라, 이것을 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시인의 의무 - 장 미셸 몰푸아(프랑스 시인), 번역: 박성창/서울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예술가(본 평론에서는 ‘시인’으로 한정했지만.)라면 현실을 떠날 수 없으며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때로는 저항하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데 앞장서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들에서는 이러한 비판과 저항의식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현대의 시가 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하려 하기보다 입술을 다물고, 유행에 맞춰 시를 성형하고, 현대가 요구하는 형식으로 맞춤형 시를 생산하고 있다고 걱정한다. 자성하지 않는 시, 자기의식이 없는 시, 심지어 자신이 지금 무슨 시를 쓰고 있는 지도 모른 체 시 맞추기 놀이를 하고 있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있으며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모든 시가 현실에 참여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시는 의도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문학의 미적가치로써 ‘아름다움’과 같은 계보에 있는 ‘연민’과 ‘성찰’로서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하여 현실을 배제하거나 혹은 회피하려한다면 그것은 성형미인이 되려고 목숨 걸고 많은 돈을 쏟아 붓는 행위와 다름없을 것이다.
시인이 시를 망친다고 이구동성 질책하는 사회, 시인들이 현실을 외면한다고 비판받는 사회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의 ‘눈’이 되는 시를, ‘기침’을 하는 시인을, 더 나아가 ‘가래’ 뱉기를 온몸으로 실천하는 시인들을 다수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 시대의 ‘시’가 절망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증거라고 위안 하고 싶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고 그 어떠한 위협과 압력에도 견뎌내야 비로소 시가 할 일을 다 한 것이 된다고 말하면 시인들에게 가혹한 책임의식을 짐 지우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시인들의 숙명이며, 시인들로 하여금 시를 놓지 못하게 하는 고집이며, 세상을 감싸 안는 길이 될 것이다. 그들의 ‘침 뱉기’가 이 그동안 그래왔듯 시인 개인을 고통 속에 몰아넣지 않기를 바란다.
평론 심사평
김선주 / 문학평론가
김옥전의 ‘2000년대 시인의 침 뱉기’는 현학의 프레임을 벗어던진 글로 쉽게 읽히면서도 사회에 대한 시의 기능을 잘 분석하고 있다. 그는 시인이 황사 가득한 가래를 소리죽여 꿀꺽 삼켜야 하는 현실에 용기를 북돋아 주고 행위의 존재 가치를 확인해주는 시도에 긍정한다. 평론가의 직관은 오성과 사유의 통로를 거쳐 객관화하는데 그것은 식견과 폭넓은 독서가 선행될 때 가능하다.
이 글은 줄곧 시인은 어디 있는가, 무엇을 보고 듣고 무엇을 직언하고자 하는가? 라는 시인의 정체성을 묻는 호소문 같다. “녈구름”을 근심하는 시선들의 침 뱉기로 이육사, 윤동주, 김수영, 기형도 까지 언급한다. 그러나 그에 관한 구체적인 제시가 빠진 건 너무 잘 알려진 대상들 때문일까? 물론 김수영의 시와 에세이는 국내 학자나 평론가에게 있어 자주 오르내린다. 이는 산업자본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여 개발과 발전이라는 깃발 아래 사회가 병들고 인간이 죽어갈 때, 권력과 부패를 향해서 던진 ‘가래침’과도 같은 쓴 소리를 담아냈기 때문이다.
몇몇 철학자나 사회학자도 시인 혹은 평론가 못지않게 21세기의 시민, 지식인의 역할 및 정체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해왔다. 평론도 문학텍스트를 도구로 문제의 범위 안에서 사회, 인간 영혼의 상처를 싸매어주는 처방전과도 같은 대안을 발견해내는 노력을 해야 한다. 김옥전의 글 속에서도 ‘용산참사’,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세월호 참사’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을 언급한다. “그리하여 해타로 남을 시”에는 마르셀 푸르스트의 생트뵈브 반박론까지 언급한다. 다만 또 다른 이야기를 열거하기보다는 이미 제시한 시에 대해 좀 더 집요하게 매달리는 힘을 곁들인다면 이 신인의 진정성은 더욱 빛날 것이다.
김옥전은 사회의 부조리 현상 앞에서 뭇 시인이 벌여온 흔적을 그들의 작품을 통하여 말 걸기를 시도하는데 제법 신선하다. 이런 가능성이 텍스트 분석에 공을 들일 때 그는 이 시단에 폭넓은 이정표를 제시하리라 확신한다.
당선소감
김옥전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를 향해 가슴을 태우고 애 닳아 하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내 시가 당선 되었을 때 썼던 말이다. 그 후 십 년이 지나는 동안 시에 대한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나에 대한 시의 냉랭함은 나를 잠 못 들게 했다.
시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어 가까이 갈수록 시는 천차만별 각양각색으로 모습을 바꿨고 그때마다 시의 본질을 다 알아볼 수 없는 나는 이리 저리 헤매곤 했다. 내가 쳐 놓은 언어와 편견의 바리케이트를 벗어나지 못한 채 참담함과 절망감에 괴로워하던 때, 내 등을 토닥이고 손 내밀어 준 것이 바로 '평론'이었다. 평론은 시와 시인을, 그리고 세상과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평론은 시에 대한 나의 잘못된 집착을 호되게 꾸짖었고, 세상을 보는 눈을 확장시켰다. 또한 말에 대한 예의를 가르쳤다. 할 말과 하면 안 되는 말을 구분하게 했다. 언어와 사물 사이에 존재하던 모호한 경계를 허물고 진심으로 그들을 끌어안는 방법을 가르쳤다.
한 편의 평론이 한 편의 시와 만나 아름다운(슬픔을 비롯한 모든 감정들의 종국은 아름다움이기에)세상으로 재창조된다는 점에서 평론은 언어의 또 다른 매력이었다. 그리고 나는 감히, 그리고 무작정 평론의 세상으로 빠져들고 있다.
김수영 시인께서 말씀 하신 것처럼 나는 '시를 논할 때에도 시를 쓰듯 하고 싶다' 시를 쓸 때도 평론을 쓸 때도 같은 마음으로, 가능한 모든 감각과 지혜와 정신을 담아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무엇'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괴롭지만 버릴 수 없는 글쓰기라는 어깨 위에 맷돌을 하나 더 올려 주신 '시와 미학'과 김선주 평론가님, 강인한 시인님께 감사를 드린다. 예리하고 깊은 언어의 촉수를 세워 보답할 것을 약속드린다. 함께 기뻐해 주신 시시(詩詩)의 동인들께도 부끄럽지만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재미없는 내 평론을 기꺼이 평해 주는, 나만의 비평가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당선의 영광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