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터의 指鹿爲馬지록위마 이야기
指鹿爲馬지록위마를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사슴을 가리켜 말(馬)이라고 하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의 출처인 사마천이 지은 거짓 역사서 『사기 』 중 「진시황본기」에서는 '謂鹿爲馬위록위마'라 표기되어 있다.
진나라 간신 환관 조고 가 어린 황제 호해 앞에서 鹿사슴을 가리켜 馬말이라고 말하고는, '馬말이 아니라 鹿사슴'이라고 바른 말을 하는 신하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몰래 다 숙청하여 황제보다 자신이 더 권력이 세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일화에서 비롯된 고사성어로, 즉, 얼토당토않은 것을 우겨서, 윗사람을 멋대로 주무르고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른다는 의미로 쓰이는 고사성어다.
이렇듯 사리분별이 명확할 때에야 사슴을 馬말이라고 하면 틀린 줄 알지만, 사리분별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세상이 혼란할 수밖에 없다.
활터에서 각궁 죽시를 잡고 쏘기만 하면 전통국궁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이 먹히고 있다. 그중에서 또 책 「조선의 궁술」을 들먹이며 온각지로 쏜다면 그 기세가 자못 높다. 과연 옳을까? 맞는 말일까? 각죽을 잡고 턱밑살대 게발각지로 쏘고 온각지로 쏘면서 전통국궁을 쏜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대판 활터의 “指鹿爲馬지록위마”다.
턱밑살대 게발각지는 양궁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1991년경 대한궁도협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자 자기들 나름대로 국궁교본을 만들면서 양궁식 활쏘기를 바탕으로 일본활 규도의 사법팔절을 빌어오고 책 「조선의 궁술」 용어를 덧칠해서 만들어진 엉터리활쏘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통활쏘기라고 주장하는 온각지 궁체 또한 1960년대 활을 쏘던 지방의 노사들에게서 채록한 내용을 바탕으로 창작한 궁체일뿐 우리의 전통 정통 활쏘기는 아니다. 명백한 증거로 책 「조선의 궁술」 서문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朝鮮의 弓術
序
余自弱冠學射於師口以授訣手以傳妙周盡心神非不精微師或不在則心虛且懼自疑違式似不如法師其在席前日生疑頓然自釋問諸同學心心如印同聲異之是何由也其非師在故質疑矯鼓之可能恃而心不虛懼者耶雖或然矣師非其人學止審固等法而已至于古人心定意逸揖讓威儀之講恐不可聞且老宿之師不可易得亦不世出則非人人所可親灸學問者也心常慊然一日問于師曰我東射藝上古以來博天下之譽至今猶有不泯者存焉上下四千餘載之間相傳之法只此口授而已無一文字之詔後學而可師者乎師曰唯唯余曰此何故也六藝中禮有記樂有譜御有圖書有帖數有宗統之文莫非古今傳習之指南至于射藝雖有鄕射之禮與射儀等若干篇是不過儀式而已求精造微之術無可考據豈非秘之之故乎師曰恐或然矣但世無有心人故不見其彙述者也君其謀之自受師命以來身入仕籍逢時多艱亦乏學術無暇及于此孤負師意心常懸懸遺悍不瘤何幸今者四界群賢有同此感創起朝鮮弓術硏究會托李君重華蒐輯古今人口授心傳之秘訣經傳篇什之記載博採不遺其編纂之功費周年之工夫而奏焉於是正心養德之美與夫弓矢之起源沿革應學藝術凡關於射者據證從實無微不著公諸于世命名曰朝鮮의弓術今以後學者人人存此一篇于左右常目寓焉其功非復前昔之仰賴師友口手然後可門可學之此也且於挽近東西學士留心體育之家奬勵射藝論調蔚興之日此書適成付梓刊行將與世界同好者其供公之收效豈可量哉以余曾留心於斯來囑弁言不敢以蔑學而辭竊幸與己見吻合略述前日從師問答之辭而書之歲己巳之秋八月弧齋申泰休序
나는 20세 무렵에 활쏘기를 배우기 시작하여 스승의 말씀을 통해 활쏘기의 비결을 가르침 받고, 몸으로는 묘법을 전수받아 몸과 마음을 다하여 익히니 활쏘기에 있어서 정밀하고 세심한 부분까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승이 혹 안 계시면 마음이 괜히 공허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는데, 활쏘기가 격식에 어긋나거나 법식에 맞지 않을까 걱정을 하였다. 그러다가도 스승이 활터에 나와 옆에 계시면 전날에 생긴 의심들이 홀연 자연스럽게 풀렸다. 여러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그러한 점이 이상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스승이 계시면 의문에 대답해 주시므로 의문이 바로 풀릴 것이라 믿고, 확신이 없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애당초 생기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혹 그렇게 스승이 의문을 풀어 준다고 하더라도 스승은 원래 그러한 역할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다. 배움을 완성하는 것은 배운 것을 곤고히 하고 법에 일치하도록 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옛사람들은 활쏘기를 통해서 마음을 정하고 뜻을 세우며 겸양하도록 하는 위엄 있는 가르침을 듣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훌륭한 스승은 쉽게 만날 수 없고 더욱이 불세출의 기인이 사람들을 친히 가르쳐주기는 힘들다.
이에 마음이 줄곧 흡족하지 않아 하루는 스승께“우리 동방의 射藝사예는 상고 이래 널리 천하의 영예를 얻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4천여 년 간 다만 입으로만 전할 뿐 한 문자의 가르침도 없어 후학들이 어떻게 이어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과연 그러하다.”라고 하셨다.
나는“이것이 무슨 연유입니까? 六藝육예 가운데 禮예는 『藝記예기』가 있고, 음악은 樂譜악보가 있고, 말타기에는 그림圖이 남아 있고, 글쓰기에는 書帖서첩이 있으며, 많은 宗統종통의 문장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해져 공부하는 지침이 없는 것이 없는데, 射藝사예에 있어서는 비록 鄕射禮향사례와 射儀사의 등이 몇 편 있을 뿐이나 의식에 관한 글뿐이어서 활쏘기를 정밀하고 상세하게 익히기 위한 법은 생각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비결로 감추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스승께서는“아마도 그런 점이 있을 것이다. 또한, 이는 기록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없어 자료를 모아 정리한 글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자네가 그것을 한번 해 봐라.”하셨다.
스승으로부터 그러한 명을 받았으나 몸은 관직에 있어 많은 어려운 일에 직면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학술적으로 부족함이 있으며 여가가 없으므로 홀로 스승의 뜻을 따름이 부담스럽고 항상 마음에 적지 않게 걸렸는데,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射界사계의 여러 현명한 분들이 이와 같은 뜻을 통감하고 조선궁술연구회를 창립하셨다.
李重華이중화 군에게 옛날부터 전해진 口授心傳구수심전의 비결들을 수집하고 경전 각 편들에 기재된 것들을 널리 찾아 빠뜨린 것이 없도록 하여 이를 편찬토록 부탁하였다. 편찬의 비용과 1년 넘게 걸린 노고를 여기에 밝힌다.
활쏘기를 통해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덕을 키우는 아름다움과 무릇 궁시의기원과 연역 그리고 활쏘기를 배우는 데 있어서 무릇 근거를 찾고, 실제적인 내용을 쫓아 미세한 부분까지 기록하지 않음이 없이 모든 것을 세상에 드러내니 이름하여 ‘조선의 궁술’이라 한다.
오늘 이후로 후학들은 모두가 이 책 한 권을 옆에 끼고 어느 때나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공로는 옛날에 스승이나 벗에 의지해 말과 몸으로 활쏘기를 배운 후에 물어보고 배울 수 있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또한 체육에 뜻을 둔 여러 학자들을 모아 활쏘기를 장려하고 활쏘기에 관한 논의가 성하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조판이 되어 간행됨으로써 장차 세상의 동호인들에게 더불어 끼칠 효과를 어찌 측량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것에 마음을 두고 있었는데 서문을 부탁 받고 감히 배운 것이 없음에도 거절하지 못하였다. 다행히 나와 뜻이 맞아서 옛날 스승을 따르면서 문답한 내용을 간략히 적는다.
기사년(1929) 가을 8월에 弧齋호재 辛泰休신태휴가 쓰다.”
책 「조선의 궁술」 서문을 쓴 호재 신태휴와 본문 내용을 정리한 이중화 선생은 당시 인터넷이 되지 않아서 웅천 이춘기공의 사예결해와 첨절제사 청교 장언식공의 정사론을 읽어보지 못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중화 선생이 사예결해와 정사론을 읽어봤다면 책 조선의 궁술 사법편은 전혀 다르게 쓰여 졌을 것이다. 이중화 선생이 사예결해와 정사론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撇絶별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 「조선의 궁술」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온각지문파에서 撇絶별절을 활병이라 棄市기시하게 된 연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중화 선생은 책 「조선의 궁술」 사법편 新射入門之堦신사입문지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남겨놓았다.
“줌손과 활장이 방사된 후에 필히 불거름으로 져야 하나니, 이것은 줌손등힘이 밀려야 되는 것인즉, 이러하여야 살이 줌뒤로 떠서 들어와서 맞게 되나니, 이것은 사법에 제일 좋은 법이 되나니라.”
따로이 撇絶별절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당시 구사들의 입에서 구전으로 撇絶별절로 쏜다는 것을 채록했고 그것을 新射入門之堦신사입문지계에 기록해 놓아서 우리의 전통 정통궁체가 撇絶별절이었음을 직접적으로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이 한 방향을 가르키며 甲갑은 東동쪽이라고 이야기 하고 乙을 포함한 다중은 西서쪽이라고 이야기 한다. 둘 중 하나는 분명히 틀린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을을 포함한 다중이 주장하는 이야기를 다수결에 의해서 옳은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진리의 세계는 엄정하고 명확해서 다중이 주장한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전통 정통궁술은 撇絶별절이라고 이야기 하는 갑은 한산이고, 나머지는 을과 다중에 해당한다. 과연 한산이 틀렸고 을과 다중이 옳은가? 하늘이 두쪽이 나더라도 우리의 전통 정통궁술은 撇絶별절이 맞고 나머지는 틀렸다.
指鹿爲馬지록위마. 鹿사슴을 馬말이라고 주장 한다고 하여 鹿사슴이 馬말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온 세상이 우리의 전통궁술이 온각지이고 턱밑살대 게발각지라 주장한다 해서 그것이 전통궁술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본의든 아니든 작금의 활터에는 指鹿爲馬지록위마. 鹿사슴을 馬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첫댓글 고관대작이었던 죽석관인 서영보공의 문집인 죽석관유집과 청교 장언식공의 개인문집인 정사론을, 평인이었던 이중화 선생이 얻어볼 기회가 전혀 없었던 1929년도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중화 선생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다.
한산이 우리의 전통 정통궁술이 撇絶별절이었음을 알아낸 사유가 인터넷이 되어서 자료를 얻어볼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고, 한산 개인적으로 사문종철을 오랫동안 공부했기 때문에 도성덕립에 대한 이해도가 있었고, 우리의 활쏘기가 도와 덕에 관한 학문이고 철학을 몸짓으로 발현하는 과정이 撇絶별절이었음을 이해했기 때문에, 우리의 전통정통 궁술이 撇絶별절이라는 것을 밝힐수가 있었다.
칼릴지브란이 예언자에서 “찰나 바람이 불면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노래했듯이 한산이 구지 별절을 찾아내지 않았더라도 또 다른 한산이 다음생에서 撇絶별절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생에서 撇絶별절을 찾아낸 것을 내 스스로가 대견하다.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