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에 태어난 데츠카 오사무의 어린 시절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디즈니 애니메이션들이었다. 1940년대 일본은 세계대전의 패배로 뼈아픈 경제적 궁핍과 좌절감에 시달려야 했으며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정신적인 유대감마저 상실해 버렸다. 그 때 '젊은 작가' 데츠카 오사무는 일본의 미래라는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젊은 독자들 사이에서 군림하였고, '만화의 천황'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데츠카 오사무가 확고한 자신의 입지를 굳힌 것은 1950년 <만화소년>에 "밀림의 왕자 레오"를 연재하기 시작하면서였고, 후에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다. <밀림의 왕자 레오>는 밀림에서 살아가는 흰사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인간들의 천태만상을 동물세계에 빗대어 이야기한 내용이었다. <밀림의 왕자 레오>는 5년동안 연재가 계속되는 인기를 얻기도 했으며, 이 작품을 통해 데츠카 오사무는 애니메이션이 단순히 어린이들만을 위한 기호품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곧이어 그는 <철완 아톰>으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철학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아톰은 하나의 긍정적인 인간상으로 비춰지고, 일본 사회의 희망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으며, 일본 젊은이들은 꼬마로봇 아톰을 통해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 70년대에 접어들어 데츠카 오사무는 <블랙잭>과 <붓다>라는 연재물을 발표했고, <블랙잭>은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일본에서 히트하면서 애니메이션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놓았다.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점핑>, <숲의 전설>등으로 애니메이션계를 장식했으며, 1989년 위암으로 그가 죽던 날 일본 국민들은 천황이 죽었을 때와 같은 애도를 할만큼, 그가 가꾸고 만들어 놓은 일본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터전을 개척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데츠카 오사무는 생전에 디즈니랜드에 버금가는 테마파크의 조성을 꿈꾸었고, 그가 생전에 성취하지 못했던 계획은 후진들에 의해 계승되어졌다. 이제 <데츠카 오사무 월드>라는 테마파크가 2003년 일본의 간토지방에서 개관을 기다리고 있다.
1941년 도쿄에서 태어난 미야자키는 소년시절부터 만화를 보고 자라면서 애니메이션으로의꿈을 키워온 사람이었다. 특히 테즈카 오사무(대표작:철완 아톰)의 만화를 읽으면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는 본격적인 그림 연습을 사사받으면서 자신의 진로를 좀더 렸다고 한구체화하기 시작했고, 대학은 경영학과에 들어갔지만 그림은 꾸준히 그다. 미야자키의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활동은 1963년 토에이 동화에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줄곧 스탭으로만 활동했던 미야자키가 여태까지 쌓아온 자신의 노하우를 폭발시킨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수차례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미래소년 코난>(1978)이다. 미야자키의 작품의 내용적 스타일이라면 대개의 작품에서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겉으로만 보면 남자 주인공의 활약상이 두드러 질수도 있지만, 그것은 여자 주인공이 문제를 풀기 위한 동반자의 서포트 역할에 그칠 때가 많다. 그리고, 여성이 작품의 주인공일때 그 여성이 활약하는 곳은 바로 자연이다. 자연중에서도 푸른 숲과 파란 하늘은 미야자키가 주로 사용하는 창작 배경이다. 숲과 하늘로 가득찬 미야자키의 작품을 보면서 관객은 마음껏 달리고 날아가는 것이다. 또한 미야자키의 작품을 보면 <미래소년 코난>의 하이 하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바람계곡, <천공의 성 라퓨타>의 슬랙계곡, <원령공주>의 타타라 제철집단 등 집단 공동체 형태의 마을과 부락이 자주 그려지는데, 그것은 이 유토피아가 그가 가지고 있는 공산주의 사상에서 출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말할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스튜디오 지브리 이다. 타카하타 이사오와 양 감독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지브리는 1985년 설립되었고, 2,3년에 한 작품씩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오고 있다. 1988년 <이웃의 토토로>를 시작으로 1997년 <원령공주>까지 일련의 작품들이 일본 내에서 모두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지브리란 이름은 세상에 각인되었다. 애니메이션 역사에 한 획은 그은,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가 30년 이상 이룩해놓은 업적고가 후대에 미친 영향이 너무나도 크며, 또한 세계 애니메이션사 속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발전시켜 그 위상을 높이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일본에서는 그를 애니메이션의 대부로 칭하며 그의 존재에 대한 높은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야자키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행복해진다 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작품속에 펼쳐져 있는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 때문이다.
주요작품
1978<미래소년 코난> 1979<루팡 3세 카리오스트로 성> 1982<명탐정 홈즈>
1984<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986<천공의 성 라퓨타> 1988<이웃의 토토로>
1989<마녀의 특급배달> 1992<붉은 돼지> 1995<온 유어 마크> 1997<원령공주>
* 스튜디오 지브리
전체면적 1100평방미터(약 330평)
지하층: 채색부,CC(컴퓨터 그래픽부), 촬영부
1층 : 총무부, 경리부, 지브리바(BAR)
2층 : 제작 업무부, 편집부, 작화부, 회의실
3층 : 캐릭터 상품부, 미술 및 특수 효과부, 화실
옥상: 공중정원
지브리의 특징
‘작가중심’의 제작과 운영
:양보다 질을 중시하는 작가주의의 소산으로 재능있는 사람들을 채용
다양한 소재와 일반인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이야기
지브리의 성공요인
자국을 기반으로 한 제일주의
누적된 실적과 작품의 다양성
다각도로 펼쳐지는 대규모의 홍보전략
지브리의 위기
미야자키의 부재
가능성있는 애니메이터 발탁
95년 4월 ‘히가시 코가네이 손 쥬쿠’
신인 양성학원을 세워 인재발굴에 힘씀
지브리의 미래
1996년 7월 디즈니와의 배급 및 업무제휴
디즈니 배급망을 통해 작품을 알리게 됨
1997년 토쿠마 그룹의 자회사 합병
출판 위주에서 음반, 게임, 영상, 등 멀티 미디어 지향으로 사업방향을 바꾼다는 계획
(3) 다카하타 이사오
타카하타 이사오는 1935년 10월 29일, 미에현의 교육자 집안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교장인 아버지 밑에서 그는 지극히 평범한 성장기를 보냈다. 공부를 잘해 1954년 명문 도쿄대학에 입학하여, 자신이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영화연구모임에 들어가서 동인지를 창간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디즈니 애니메이션들의 낙관주의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던 타카하타는 그가 푹 빠져있었다고 하는 시인 자크 프레베르의 각본에 폴 그리모가 감독을 한 애니메이션 [사팔뜨기 폭군]을 보고난 후 애니메이션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 1959년, 대학을 졸업하고 우연한 기회로 토에이동화의 입사 시험에 합격한 그는 토에이동화에 입사하여 애니메이션 일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 참여한 작품은 1961년 극장용 장편인 [안주와 즈시오마루]에서 연출파트의 조수 일이었다. 그후 몇편의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거치면서 연출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철완 아톰]에 자극받아 1963년 토에이동화가 최초로 만들게 되는 TV 시리즈물 [늑대소년 켄]에서 최초로 연출을 맡게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와의 만남으로 그는 함께 회사를 옮기면서도 계속 콤비체계를 이루어 [루팡 3세], [팬더와 아기팬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 [미래 소년 코난] 등의 작품 활동을 펴 나가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결속력은 타카하타가 프로듀서를 맡았던 1984년 미야자키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제작 이후 설립되는 스튜디오 지브리까지 이르게 되어 일본 애니메이션에 있어서 새 역사를 쓰는 거대한 힘으로 자라게 된다. 80년대부터 일본으로 눈을 돌린 그는 [꼬마 치에], [첼로 연주자 고슈]를 만들면서 실감나는 사실감을 불러 일으키는 풍경묘사와 인정미 넘치는 캐릭터 형상화 등으로 이전의 명작 시리즈에서의 모습과는 다른 독특하고 새로운 작품세계를 구축한다.
1987년에는 미야자키와 함께 만든 어느 공무원이 오염된 강을 열성적인 노력으로 되살린다는 내용의 실사 다큐멘터리 영화 [야나가와의 운하 이야기]에서 각본과 감독을 맡았으며, 1988년, 다큐멘터리적 감각을 바탕으로 과거 전쟁을 경험했던 체험적인 관점이 사실주의적인 연출과 조화를 이루어 전쟁 직후 일본의 모습을 어린 남매의 시각으로 가식없이 담담하게 묘사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반딧불의 묘]를 탄생시킨다. 그리고, 계속해서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여러 에피소드로 엮으며 일본 60년대의 사회상과 농촌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여성적 색체가 강한 1991년 [추억은 방울 방울], 택지 개발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에 맞서 삶의 터전을 지키려고 싸우는 너구리들의 인간과의 전쟁을 다루며, 일본의 전통과 동화적 요소를 풍부하게 보여주는 1994년 [헤이세이 너구리 대전쟁]을 통해 타카하타식 리얼리즘을 보여주었다.
주요작품
<반딧불의 묘>(1988) <추억은 방울방울>(1991) <헤이세이 너구리 대전쟁>(1994)
(4) 안노 히데야키
1995년 <신세기 에반겔리온>이라는 작품으로 일본은 물론 한국의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에게도 열광적인 호응을 불러 일으켰던 <안노 히데야키>는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세기말 젊은이들의 분위기를 잘 그려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고등학교 재학 당시 미술 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고등학교 졸업 후 1년간의 재수생활을 거쳐 오사카 예술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여기서 히데야키는 현 가이낙스의 대표이며 <왕립 우주군 - 오네아미스의 날개>를 감독하기도 했던 <야마가 히로유키>와 현재 가이낙스 통괄 본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다케다 야스히로>, 당시 오타쿠 문화의 저명 인사로 알려져 있던 <오카타 토시오> 등을 만나게 된다. <안노 히데야키>는 이들과 함께 SF 전시회인 '다이콘'을 준비하다 '다이콘 필름'을 설립해 다이콘 3의 오프닝 필름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TV 시리즈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에서 원화일을 하며 애니메이션계에 데뷔한다. 이후 대학을 그만 둔 히데야키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동화일을 하며 <미야자키 하야오>를 만나게 되는데 훗날 그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이타노 이치로> 와 함께 "애니메이션의 스승이다" 라고 회고하기도 한다. 이후 '다이콘 필름'은 반다이사의 후원으로 이름을 '가이낙스'로 바꾸어 새롭게 시작하게 되는데, 히데야키는 '가이낙스'의 주축 멤버로 활동하게 된다. <안노 히데야키>는 가이낙스의 야심작 <왕립우주군 - 오네아미스의 날개>에서 메카닉 감독으로 참가해 주목을 받지만 흥행에는 실패하고 만다. 1988년 <안노 히데야키>는 <건버스터 - 정상을 노려라>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한다. 이후 NHK 창립 50주년 기념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를 맡은 '가이낙스'는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호응에도 불구하고 적자를 기록한다. 이후 '가이낙스'는 <안노 히데야키>가 제작과 총감독을 맡은 애니메이션 대작 <신세기 에반겔리온> 제작을 시작한다. <신세기 에반겔리온>은 다양한 평가, 열광적인 호응, 오타쿠에 대한 <안노 히데야키>의 보완계획 등 풍성한 얘기 거리와 함께 관객들을 찾아왔다. TV 시리즈 초반에만 해도 눈에 띄는 시청률을 기록하지 못했던 <신세기 에반겔리온>은 회가 거듭될수록 인기를 상승시켜 나갔으며, 극장판 개봉 당시에는 20만장의 표가 사전 예매되는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히데야키는 <신세기 에반겔리온>에 대한 한 인터뷰에서 "에반겔리온의 작업은 라이브 감각적인 것이었다." 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많은 마니아들이 궁금해 했던 결말 부분도 최종회에 거의 가까워 져서야 콘티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즉흥성 이전에 마니아들을 열광시킬 만한 <안노 히데아키>의 치밀한 구성이 살아 있었음은 물론이다. 어쨌든 <신세기 에반겔리온>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신세기 에반겔리온>을 통해 그 한계를 드러내는 듯 하던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을 단숨에 새로운 지평으로 끌어올렸다. 안노 역시 일본 애니메이션의 오타쿠 출신으로서 자신이 그동안 보면서 자란 여러 작품들을 자신의 작품에 충분히 활용(?)을 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 한계를 뛰어 넘는 작품까지 만들어냈다.
주요작품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1990) <신세기 에반겔리온>(1995)
(5) 오시이 마모루
오시이 마모루는 60년대 초반부터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아니메 2세대 출신의 감독이다. 그는 1951년 8월 8일. 도쿄 태생으로 어렸을 적부터 지독한 영화광이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우주 수폭전>(1955년, UIP제작) 과 같은 SF 영화와 <울트라맨><고지라>등의 일본 특수 쵤영물에 푹 빠져있었고, 고등학교 시절부터는 고전영화 전문 상영관을 드나들며 예술영화에 심취해 있었다. 대학 재학시절부터는 영화 연구회 활동을 하면서 16m 독립 영화를 찍었고, 그의 이런 경험들은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넘나드는 그의 연출력을 가능하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은 자신의 영화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준 작품으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를 꼽는다. 이 작품을 보고 오시이 감독은 비슷한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갖지만, 미국에 비해 너무나 열악한 일본 영화계의 제작 환경과 기술 문제를 고려,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매체로 애니메이션을 택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오시이 감독은 타츠노코 프로덕션에서 만든 <독수리 5형제>를 보고 ‘저 정도의 애니메이션이라면 만들어 볼 만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27세의 늦은 나이에 애니메이션계에 입문하게 된다. 타츠노코 프로덕션에서 그는 <잇빠츠 칸타군> (1977) <과학닌자대 캇차맨> 등의 작업에 참여하면서 실력을 키워간다. 오시이 마모루는 그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토리유미 히사유키 와 함께 '스튜디오 삐에로'로 옮겨 우리 나라에서도 방영된 바 있는 <닐스의 신기한 여행>의 연출을 맡음으로써 실질적인 데뷔를 하게 된다. 그 뒤 오시이 마모루는 처음으로 TV 방송용 <우르세이 야츠라 (시끄러운 녀석들)>(1981년)의 감독을 맡는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한 해동안 방송된 최고의 TV애니메이션을 선정, 시상하는 '일본 아니메 대상 아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린다. 1983년 오시이 마모루는 ‘우르세이 야츠라’의 첫번째 극장판 <우르세이 야츠라 Only You >로 극장용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데뷔한다. 이 작품은
흥행에도 성공하였으나 오시이는 관객이나 원작자의 영향을 받지않고 자신만의 독특함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우르세이 야츠라의 극장판 시리즈 두번째 작품인 < Beautiful Dreammer >(1984)는 그 전 작품보다 훨씬 대담하고 실험적인 영상으로 오시이 마모루적인 편집과 각색을 드러내놓게 된다. 오시이 마모루는 <뷰티블 드리머>의 흥행성공에 힘입어 자신이 만들고 싶어했던 사이버 펑크 장르의 영화, 일본 최초의 OVA 시리즈 <달로스(Dallos)>(1983)를 내놓는다. 이 작품은 지구인과 달 이주민 사이의 정체성의 대립을 그렸는데 흥행에는 실패한다. 오시이 감독에게 흥행과 명성을 동시에 안겨다 준 작품은 <기동경찰 패트레이버>(1988)이다.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 OVA 시리즈>는 오시이 감독를 위시한 이토 카즈노리(각본), 다카다 아케미(캐릭터 디자인), 이츠부치 유타카(메타닉 디자인) 등 일본 내 최고 애니메이션 엘리트 집단인 '헤드기어(Head Gear)'가 주축이 되어 만들었다. 오시이 마모루 최대의 문제작은 바로 1985년 개봉된 <천사의 알>이다. 이 작품은 천사의 화석, 노아의 방주 등이 등장하여 성서적 역사관과 배경을 가지고 진행되는 아주 난해한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비평가들 사이에서 그 결론이 나지 않고 있는 문제작이다. 1987년 오시이 마모루는 첫번 째 실사 영화 <붉은 안경>을 만들었으며, 1991년에 후속작인 <케르베로스 지옥의 파수견>이라는 작품을 내놓는다. 이 작품에서 오시이 마모루는 만화 영화에서 사용하는 영상 표현 방법과 각종 제작 기법을 실사 영화 제작에 시도하게 된다. 그 후,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 극장판>(1989) <기동경팔 패트레이버 2>(1989)를 통해 오시이 마모루식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1995년 오시이 마모루는 그를 일본 재패니메이션의 대표주자로 전세계에 알린 <공각기동대>를 만든다. <공각기동대>는 시로 마사무네의 원작을 바탕으로 오시이 마모루 특유의 연출이 돋보이는
사이버 펑크물의 대표작으로 일본은 물론 전세계에서 사랑 받았다. 또한, 그의 창작활동은 애니메이션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사영화, 소설, 만화원작, 게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폭 넓게 활약하고 있다. <인랑>(2000, 오키우라 히로유키 감독)에서는 원작과 극본을 담당하고 <Blood the last vampire>(2000)에서는 기획 협력을 맺는 등 후진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현재, 그는 극장용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2> 를 제작중이다.
주요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