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표(前 한국일보·일간스포츠 체육부장 및 논설위원, KBS 해설위원, 대한체육회 이사)씨 별세=5월 31일 오전 10시, 서울삼성의료원, 발인 2일 오전 8시, (02)3410-6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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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스포츠 기자’로 남길 원했던,
대한민국 제 1호 스포츠 기자·평론가 조동표 선생님
삼가 故人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대한민국 제 1호 스포츠 기자·평론가'
故 조동표 선생 약력
1925년 출생(서울) ~ 2012년 5월 31일(향년 87세)
보성전문(고려대 전신) 경상학과 43학번
1949 서울중앙방송(KBS 전신) 입사
1955 한국일보 기자
1965 한국일보 체육부장
1970 일간스포츠 부국장
1980 한국일보 주간국장
KBS 해설위원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
대한체육회 이사
대한농구협회 이사
고려대 고우체육회 상임이사
서울시 체육위원회 감사
한국체육기자연맹 회장
한국여자농구연맹 재정위원장
도쿄(64') 뮌헨(72') 바르셀로나(92') 시드니(00') 올림픽
자카르타(62') 방콕(70') 뉴델리(82') 북경(90') 히로시마(94') 방콕(98') 아시안게임
일본 세계탁구선수권(91') 일본 베츠다이 마라톤(92', 황영조 한국新 단독 보도) 스페인 세계육상선수권(99')
등 40여 년 간 국제대회 현지 취재
1992 아산체육상
2003 자랑스런 고대인상
2003 고대 언론인상
2004 IOC 스포츠미디어상
2011 소강체육대상 특별상
1987「함성을 뒤로하고 체육기자 30년」
1995「마라톤은 살아있다」
1997「극일의 횃불-연보전」
2005「한국여자농구발달사」
2006「96년만의 덩크슛」
그 외 각종 매체에 칼럼 및 기고, 평론
고려대 및 각종 체육관련 역사자료집 공저·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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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고려대에서 열렸던 '고대농구부 선후배 만남의 시간'에서 후배들에게 격려인사를 전하는 조동표 선생님.
SPORTS KU 카메라에 담긴 이 사진이 선생님의 공식석상 마지막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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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김진웅 명예교수와 함께 '자랑스런 고대인상'을 수상한 조동표 선생님(우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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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고려대 농구부 박한 감독의 취임 20주년을 맞이해 제자들이 마련한 축하연 모습.
왼쪽에서 세번째가 박한 감독, 그 오른쪽 옆이 조동표 선생님이다. ⓒ동아일보
[하단 기사는 2008년 3월, 60년 후배이자 SPORTS KU 창간인이었던 김 원(경제 03) 편집장이
인터뷰까지 마친 채 잡지에 싣지 못한 ‘조동표 선생님 생전 인터뷰’입니다.
고려대를 넘어 대한민국 스포츠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전설이셨던 조동표 선생님. 선생님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크나큰 발자취를 후배들이 조금이나마 뒤따를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뛰겠습니다.]
60년 스포츠 기자, 외길을 걸어온 조동표 선생님(2008년 생전 인터뷰)
정리=SPORTS KU 김 원 창간편집장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그 분야의 최고에겐 ‘장인(匠人)’ 또는 ‘대가(大家)’의 칭호가 붙는다.
그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능력과 사회적인 영향력을 두루 갖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그런 인물에게 우리는 존경과 찬사를 마다하지 않는다. 기업가 정주영, 정치인 김대중과 같이 스포츠 기자하면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 바로 조동표 선생이다.
1925년 출생인 조동표 선생은 우리나이로 올해 여든 셋이다. 지난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끝으로 일간스포츠에서 은퇴한 뒤에도 20년 가까이 스포츠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왕성한 집필과 방송 활동은 여든 셋의 나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열정적이다. 조동표 선생의 모교 사랑 또한 남다르다. 조동표 선생은 고려대 1회 졸업생 모임인 ‘고일회’(1943년 보성전문 입학 후 고려대생으로 첫 졸업) 멤버로 아직도 1주일에 한 번씩 고일회 멤버들과 점심식사를 같이하며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고려대 스포츠의 100년 역사를 집대성한 ‘고대 체육 100년史’ 집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조동표 선생이 스포츠 기자에 입문한 것은 서울중앙방송(현 KBS)에 입사하고부터다. 당시 방송과장 민재호 선생으로부터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하루 동안의 스포츠 소식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본격적인 스포츠 기자 생활이 시작됐다. 당시 6.25 전쟁으로 1년도 채 안되는 짧은 경험은 조동표 선생에게 우리나라 스포츠 방송기자 제 1호라는 자부심을 안겨준 동시에 한국일보 체육기자를 거쳐 일간스포츠를 창간하는데 주도적인 역할하게 된 힘이 됐다.
어린 시절 조동표 선생은 몸이 약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스포츠에 대한 관심은 누구보다 높았다. 심상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 5년 때 어머니를 졸라 구경한 일본 프로야구 팀의 내한경기에서부터 서울, 평양, 함흥 삼지역 축구 대항전까지 억척스럽게 다닌 스포츠 현장은 후에 60년 스포츠 기자 생활에 큰 자산이 됐다. 특히 1938년부터 40년까지 보성전문 농구부가 전일본 농구대회에서 3연패를 차지한 당시, 라디오 중계 방송을 들으며, 농구에 큰 관심을 갖게 됐다.
60년 동안 스포츠 현장을 누비며 기억에 남는 일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한 가지만 소개해 달라는 기자의 요구에 이야기 보따리를 쉴새 없이 풀어놓는다.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농구 결승이었지. 결승에서 중공하고 만났어. 중공은 아시아 최강 팀이었어. 우리도 멤버는 화려했지. 이충희, 임정명, 박수교… 그 누구지 여기(고려대) 코치했던 (기자:이민현이요) 응 그래. 이민현. 결국 우리가 이겼어. 우승이 확정되는 부저가 울리고 이민현이 공을 천장을 향해 높게 던질 때, 그 때의 감동과 함성이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돌아”
황영조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우승비화도 눈길을 끈다. 92년 2월 오이타-벳푸 마라톤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한 황영조 선수. 2시간 8분 47초라는 한국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현장을 지켰던 조동표 선생은 일간스포츠에 전화를 걸어 감격적인 우승사실을 알렸다. 국내 육상계는 황영조라는 신데렐라 탄생을 반겼고, 하루 아침에 황영조는 올림픽 메달 후보가 됐다. 하지만 마라톤 올림픽 예선은 3월에 열릴 예정이었다. 조동표 선생은 일본 마라톤 전문가로부터 황영조가 올림픽 예선에 출전할 경우 본선에서의 활약을 장담할 수 없다는 충고를 듣고, 대한육상연맹 회장에게 달려갔다. 황영조의 올림픽 출전권을 보장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자리에서 연맹 회장은 흔쾌히 승낙했지만, 이사회를 설득하는 일이 문제였다.
“당시 연맹 임원 중에 이창훈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56년 멜버른 올림픽 마라톤 4위를 기록하며 이름이 널리 알려진 선수였지. 이 사람이 황영조가 예선 통과 없이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는데 반대를 심하게 했어. 근데 이창훈이란 사람도 60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할 때 예선을 거치지 않았단 말이지. 내가 그걸 기억해 내서 회의 도중 큰 소리로 외쳤어. 당신도 예선 없이 올림픽 나가지 않았냐고. 회의장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고, 그렇게 해서 황영조가 올림픽에 나가게 된 거야. 어떻게 보면 나 때문에 황영조가 우승한 거라고도 볼 수 있어.”
대학을 떠난 지 60년이 훌쩍 넘은 조동표 선생은 아직도 대학 스포츠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대학 스포츠도 사회 변화에 흐름에 맞춰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엘리트 스포츠에 초점이 맞춰진 대학 스포츠가 대학생들의 심신 단련과 건강 유지를 위한 하나의 도구로 발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평생을 스포츠에 바친 인생이지만, 아직도 그 열정을 놓지 않은 조동표 선생은 현재 스포츠 기자 60년 동안의 생생한 기억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 자서전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타자를 칠 줄 몰라서 아직도 원고지에 글을 써”
많은 후배 기자들에게 목표가 되고 희망이 되는 조동표 선생은 우리나라 스포츠 100년사에 길이 남을 대가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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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한국여자농구 100년史를 담은 책 '96년만의 덩크슛'을 집필한 조동표 선생님. ⓒ점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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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마지막 저서가 된 '96년만의 덩크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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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가 대선배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