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결혼식 사회, 함진아비 역할을 했던 50년 친구가 있다.
얼마 전 아이 혼인 주례해 준 대가로 밥 한번 먹자고 하기에 그럼 아예 하루를 함께 놀자고 역제의를 했다.
그래서 부부 동반하여 넷이서 야외나들이를 하였다.
한강변을 따라 서북쪽을 향해 자유로를 달렸고 일산과 파주 경계에 위치한 출판단지에 이르렀다.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지역을 활성화하고자
파주시는 대규모의 LG 디스프레이공장 유치, 신세계 아울렛매장과 더불어
헤이리 문화예술마을, 동화경모공원 등을 조성하였다.
이에 자신을 얻은 파주시는 얼마 후에는
서울이 보다 가까운 곳에 출판단지와 롯데 아울렛매장도 함께 만들게 된 것이다.
서울 마포지역에 집중되어 있던 대부분의 출판사가 영세한지라 허름한 건물에 세 들어있던 게 일반적이었다.
지하철 2호선, 6호선, 공항철도, 경의선 등이 사통팔달로 연결된
홍대주변이나 공덕동지역의 임대료가 오르다 보니 이주를 고민하게 되었고,
마침 지역 개발을 도모하던 파주 자치단체장과 이해관계가 맞아
이곳에 수많은 출판사들과 물류창고가 함께 하는 단지를 조성한 것이다.
비올 때만 물이 흐르는 건천을 따라 4차선 도로를 만들고,
그 양쪽 옆으로 120여 개 출판사들과 관련 기업들이 널찍널찍하게 자리해 있다.
물론 출판사마다 공간 일부를 개방하여 만든 북 카페가 곳곳에 마련되고,
옆에 자리한 나지막한 심학산과 더불어 평소에는 억새 등 잡풀만 무성한 마른 하천도 하나의 풍경이었다.
출판단지 중에서도 압권은 중심부 아시아 출판문화센터 1층에 자리한 <지혜의 숲>이다.
서가의 길이만 3. 1km, 최대 높이가 8m에 이르는 공간에 장서 권수 50만권을 비치해 놓았기에,
처음 방문하는 이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를 세 공간으로 나눠 인문학 강좌며 각종 공연도 진행하고,
커피도 마시며 자유로이 책을 꺼내어 읽을 수 있다.
제목은 희미하지만 어떤 소설에 묘사되었듯이,
출판사라고 하면 흔히들 삐꺼덕거리는 계단을 올라 문을 열면 책더미와 원고뭉치가 가득한 사무실을 떠올린다.
아울러 머리 손질도 안한 여직원과 도수 높은 안경 쓴 문학지망생 청년,
팔꿈치까지 덮은 토시가 꾀죄죄한 주필이 연상되곤 한다.
박봉이면서 야근도 적지 않다는 점에서 예전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자연과 어우러진 싼 맛집과 분위기 좋은 찻집을 한껏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곳 파주 출판단지 사람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고 한다.
출판사 편집인들은 외국어에 능통하기도 하고 직접 글을 쓰기도 하며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기에,
어쭙잖은 교수들을 능가하는 당대의 지식인이다.
출판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지식사회를 선도하는 문화운동의 기수이련만 그 현실은 참으로 고단하기만 하다.
그러기에 한 권의 책이라도 펴내 본 저자들이라면 출판사와 편집자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우리들 젊은 날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던 창작과비평사도
『나의 문화 유적 답사기』 출판 이후 20년 만에 만성 적자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아는지…
그런 점에서 사회적 이슈가 있을 적마다 트위터에 입바른 소리 잘 올리는 누구는
출판사를 ‘장사치’라고 매도하던데,
배웠다는 사람이 실정을 뻔히 알만한 데도 고따위로 말하면 안 되는 거다.
친구와 나는 <지혜의 숲>에 머물기로 했고,
집사람과 친구 부인은 200m 거리에 위치한 대형 아울렛 매장으로 아이쇼핑을 갔다.
최근 들어 정다산에 푹 빠져 있다는 친구는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꺼내 읽고,
나는 인류학 전공자가 쓴 『키르키즈스탄에 위치한 탈라스』를 소개한 기행문을 보았다.
얼마 뒤 나타난 두 여인의 봉투는 다행스럽게도 그 부피가 크지 않았다.
쌀 떨어져서 가족을 굶긴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뭐 하나 폼 나게 해준 건 없는 좀생원 남편들과 함께 살아 준 게
참 고마웠고 문득 미안하기도 했다.
친구와 나는 서울 남동쪽에서 오랫동안 살아 왔지만
늘 마음은 서울 북서쪽, 또는 그 이상에 가 있었다.
파주 출판단지와 대형 아울렛 중간에는
30평대 타운 하우스로 단정하게 지어진 헤르만하우스라는 주택단지가 있다.
어차피 집사람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지라 친구 부인에게 넌지시 운을 떼 보았다.
“이곳으로 이사하여 앞․뒷집에 살면서 함께 심학산 산책하고는
우리들은 <지혜의 숲>으로, 부인들은 아울렛 매장으로 출근하면 어떨런지요?”
그랬더니 돌아 온 친구 부인의 대답은
“관광지와 거주지는 구별해야 한대요.”
나는 차마 입 밖으로는 말 못하고 그저 웅얼거리기만 했다.
“사람들이 붐비는 역세권이라는 점에서 현재 거주지가 더 관광지일 수도 있을텐데 ……”
하면서 말이다.
(2015. 11)
첫댓글 낯설지 않는 글이라 보기가 좋습니다. 저도 파주에 친구가 있어 소식을 가끔 듣는데 동감이 가네요.
많은걸 올려주셔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옛 서울시청 건물 서울 도서관,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이 파주 출판단지 <지혜의 숲>을 벤처마킹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전시용이라고 비난하더니, 어느새 슬쩍 흉내내었더군요.... 허허, 숟가락 하나 얹은 거지요.